강인한의 「율리, 율리」감상 / 최형심
율리, 율리
강인한
어두워진 겨울의 차창에서
불빛은 섬처럼 떠오르고 있었어.
스물다섯 살 아무렇게나 깊어진
내 청년의 골짜기
빨간 루비의 꽃들은 흰 눈 속에
얼굴을 묻고 있었어, 율리.
야간 버스의 흐려진 유리창에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썼어.
내 손끝에는 웬일로
당신의 은백의 슬픔이 묻어나고
긴 눈이 내리는 밤
더운 차를 홀로 마실 적엔
추녀 끝에 매달린 날카로운 고드름의 촉
방울방울 맺히는 당신의 불면을
나는 가만히 엿들었어.
겨울 산에서 함께 돌아오던 날
내 몸 속의 잔신경들이 풀어져
흐르는 것을 보기도 하였지만
눈 속엔 더욱 차고 말간
환상의 꽃잎들이 흐르고 있었어.
품어볼 어떤 야망도 없는 시대
세상의 구석진 어느 곳에서는
힘차게 힘차게 평화만이 무너지고 있는 때
율리, 당신은 까만 외투 깃을 세우고
찬바람 속에 웃으며
겨울을 나야 하는 작은 새처럼 쓸쓸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말하여지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음악보다 낮게 당신은 글썽거렸어.
문 닫힌 겨울 찻집 앞에서
길길이 얼어붙은 분수를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나는 깊어져버리고
율리, 율리, 내 가슴 속으로는
끝없는 눈다발이 펑펑 쏟아져내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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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노인이 된 시인의 스물다섯 젊은 시절 뜨겁고 순수한 연애감정이 담겨있는 시입니다. 거의 반세기 전에 발표된 이 시에는 1960년대의 낭만과 우울이 감상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녀를 만나고 오던 반세기 전의 그날도 오늘처럼 찬바람이 불고 사람들은 외투 깃을 세운 채 얼어붙은 분수 곁을 지나쳤나 봅니다. 음악보다 낮게 글썽이던 그녀도 할머니가 되어 어딘가에서 청춘의 그날들을 돌아보겠지요? 흐려진 유리창에 대고 손끝으로 시리게 쓸 이름 하나를 가진 이들은 그래도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최형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