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해방 후 미군정의 신탁통치가 시작되면서 상해 대한민국정부는 임시정부로 전락한다.
따라서 광복군은 해체되어 민간인으로 입국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민족을 버리고 친일부역을 자행한 박정희 같은 일본군 장교들은 미군정과 이승만에 의해 등용되어 국군의 중추가 된다. 반면 독립군 출신들은 중용되지 못하고 한직에 머물거나 이북으로 쫓겨 갔다.(독립군 중 국군장성은 없다.)
미군정이 매국노들을 중용한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조국을 배신한 매국노들만이 미군정에 충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애국지사들은 식민통치를 원하는 미군정의 잠재적인 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김구, 여운형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조국통일을 부르짖다 암살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매국노들은 반드시 부패하는 법. 이승만과 미군정에 의해 등용된 매국노들은 끊임 없는 부정과 비리로 배를 불렸다. 6.25참변 때는 군 보급품까지 착취해 10만에 달하는 국민군(예비군)이 굶거나 얼어 죽는 어처구니없는 참변까지 일어났다.
결국,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고 민주정부가 들어서자 이승만과 미군정에 의해 중단되었던 친일매국노 숙청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참모총장 등 요직을 점거하고 있던 일본군 장교들은 서서히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당시 정국은 이승만 부패정권이 몰락하고 힘겹게 쓰러져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는 고난의 시기였다. 따라서 사회 여기저기서 개혁의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충돌이 잦았다. 이는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가는 과도기로서 당연히 거쳐야 하는 단기간의 혼란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등 군권을 잡고 있던 일본군 장교들은 그 짧은 혼란의 틈을 타 군사반란을 일으켜 주권을 찬탈한다. 그리고 1대 육군참모총장에서 1980년대 중반인 21대 까지 일본군장교들이 육군참모총장을 모두 차지하며 군권을 장악한다.
즉은 해방직후 인 1945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 매국정권과 군사독재정권을 두루 거치면서 매국노들은 이 땅의 모든 권력과 부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가권력을 독점하게 된 것이다.
또한 박정희 매국독재정권은 일제와 다를 바 없이 민족정신(국혼)을 말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그중 하나가 한일협정이었다. 이에 대한의 청년들은 조국통일과 매국노 숙청을 외치며 다시 들고 일어선다. 그 중심지는 바로 독립애국지사들이 세우신 국학대, 국민대, 단국대였다.
이에 놀란 박정희독재매국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리고 세 학교를 폐교 조치한다. 바로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일제의 만행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그 후, 국민대와 단국대는 재정난 속에서도 어렵게 재기에 성공했으나 민족혼의 중추였던 국학대학은 1966년 우석대에 병합 되었고 결국엔 1971년 친일매국노 김성수가 설립한 고려대에 병합당하는 치욕을 당하며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대한민국의 국혼이 일본군 장교들에 의해 말살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민족의 애국지사들이 세운 대학들이 탄압당하는 반면 미군정이 세운 서울대, 친일매국노가 세운 고려대, 신사참배를 행한 연세대(숭실대는 신사참배거부로 폐교)는 지금까지 매국정권들의 비호로 이른바 명문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것이 완전한 자주독립을 이루지 못한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결국, 박정희등의 일본장교들 즉, 친일매국노들에 의한 반란으로 민족혼은 말살 되었고 정치, 경제, 군사 등 국가의 모든 권력이 현재에도 친일매국노들의 수중에 들어 있다. 그들은 여전히 언론(조선일보(설립자가 매국노)와 동아일보(사주의 부가 매국노))과 방송을 장악하고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며 대한민국 백성을 노예화 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5.16이 박정희등 일본군장교들이 살아남기 위해 일으킨 역적행위임을 바로 알고 이 역사적 사실을 온 국민에게 널리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이는 우리가 국권을 매국노들로부터 하루바삐 재탈환할 수 는 유일한 방법이다.
<<국학대는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에 있던 보명의숙(普明義塾)을 정봉현이 인수하여 1933년 화산보통학교(화산학원)를 설립한 것이 그 시초이다. 해방후 정봉현의 손자들이 상속재산을 기부하여 민족정기를 앙양하고 국학의 이념을 선양하고자 1946년 국학전문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47년 11월에 국학대학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총장은 국학자 정인보였으며, 국학대학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최현배, 이극로, 양주동 등이 강단에 서기도 했다. >>
<<국민대는 신익희 선생께서 1946년 9월 2일 창설했다.(김구, 조소앙,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원들이 고문으로 참여 즉 임시정부가 세운 사실상 국립대학이었다.). 미군정은 같은 날 서울대학교(식민대학)을 개교하여 교묘히 국민대를 방해했다. 그러나 뜻있는 애국 청년들은 서울대를 자퇴하고 국민대에 입학하여 민족자존을 드높였다.
이후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고, 김규식과 조소앙은 납북되고, 신익희 선생은 의문의 암살을 당한다. 그 후 국민대는 이승만 매국정권과 박정희 매국정권의 탄압을 받아 거의 폐교로 내몰렸다가 뜻 있는 지사들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한다.>>
<<단국대학교는 1947년 범정(梵亭) 장형(張炯) 선생과 혜당(惠堂) 조희재(趙喜在) 여사께서 설립하셨다. 장형 선생은 보성전문학교에 재학 중 조선총독부 설치에 민족적 울분을 느끼고 학업을 중단한 뒤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셨다. 조희재 여사는 근검절약과 자립정신으로 가산을 일구는 주부로서 모범을 보이셨다. 부군이신 박기홍 선생은 장훈학교를 운영하시며 윤치호 선생 등을 도와 육영사업을 펼치셨다.>>
<<군 출신별 인원- 일본육사출신(일본군장교) 85명, 만주군(일본군장교) 120명. 학도지원병출신이 4358명, 육군특별지원병출신이 17664명, 해군특별지원병출신이 3000명, 육군징병출신이 186980명, 해군징병출신이 22290명, 광복군출신 800명이었고 일본군 장교들이 군 수뇌부를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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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4/01 [12:32] 최종편집: ⓒ 서울의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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