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經典會上
법화경일일법문 안락행품제14: 문수사리여! 무엇을 가지고 보살마하살의
문수사리여! 무엇을 가지고 보살마하살의 행처(行處)라 말하는가! 만약 보살마하살이 인욕지(忍辱地-인욕바라밀의 경지)에 머물러, 유.화.선.순(柔-마음이 부드러움. 和-마음이 온화함. 善-마음이 선량함. 順-마음이 순리를 따름)하야 졸.폭(卒-마음이 옹졸함. 暴-마음이 난폭함)하지 않고 마음 또한 놀라지 않으며, 또 다시 온갖 법에 흔들리지 않고, 제법(諸法-모든 현상)을 관찰하되 실상(實相-진실한 모습 그대로)과 같이 하고, 또 흔들리지 않고 분별하지 않으면 이를 보살마하살의 행처(行處)라 말하느니라.14-3
문수사리 운하명보살마하살행처 약보살마하살 주인욕지 유화선순
文殊師利 云何名菩薩摩訶薩行處 若菩薩摩訶薩 住忍辱地 柔和善順
이불족폭 심역불경 우부어법무소행 이관제법여실상 역불행불분별
而不卒暴 心亦不驚 又復於法無所行 而觀諸法如實相 亦不行不分別
시명보살마하살행처
是名菩薩摩訶薩行處
文殊師利여 云何名菩薩摩訶薩行處인가 若菩薩摩訶薩이 住忍辱地하야 柔和善順하야 而不卒暴하고 心亦不驚하며 又復於法無所行하고 而觀諸法如實相하고 亦不行不分別하면 是名菩薩摩訶薩行處라하나니라
1-이 글은 모두 65글자로 이루어져있다. 법화문구에서 이 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였다.
어떤 이는 말했다.
「내범(內凡-외범(外凡)의 대(對). 깨달음 안에 있는 범부. 소승에서는 사선근위(四善根位)를 내범이라 하고, 대승에서는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의 삼현위(三賢位)를 내범이라 한다.)의 초행(初行-처음의 수행. 초보적 수행.)을 행처(行處)라 하고, 만약 구습순숙(久習純熟-오랜 수행에 의해 순수하게 성숙되는 것.)하여 점차 진리에 접근하면 근처(近天)라 이르니, 전품(前品-법사품을 가리킨다.)의 근과(近果)의 행(行-원문은 「近果之行」. 과(果)는 깨달음. 법화경을 듣고 이해해 수지하는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깝다고, 법사품에서 말씀한 것을 가리킨다.)을 끌어 예로 삼을 수 있다.」
어떤 이는 말했다.
「행처(行處)는 인(因)에 대해 말함이요(원문은 「約因」. 인(因)은 깨달음에 이르는 원인이니, 곧 수행.) 근처(近處)는 과(果)에 대해 말함(원문은 「約果」. 과(果)는 수행에 의해 얻어지는 깨달음.)이니, 행처는 지(智-지경(智境)의 「지」니, 능관(能觀)의 마음. 곧 주관.)를 밝히고 근처는 경(境-지경(智境)의 「경」이니, 소관(所觀)의 이(理). 곧 대승으로서의 진리.)을 밝힌 것이다.」
요사(瑤師-송대(宋代)사람. 법화경·대품반야경·열반경·승만경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고승전(高僧傳) 7에 전기가 나온다.)는 말했다.
「칠주(七住) 이상이(원문은 「七住已上」. 십주(十住)는 칠주(七住)를 경계로 하여 크게 양상이 바뀌니, 칠주 이상은 불퇴전의 단계요 칠주 이하는 퇴전의 단계다.) 마음으로 진리를 이해함을 행처라 하니, 이미 분단(分段-분단생사(分段生死)를 이른 것. 한정된 육체와 수명을 지니고 윤회하는 것. 범부들의 한계가 있는 생사.)을 지나간 경지다. 이 이하의(원문은 「自此已還」. 직역하면 「이로부터 이하」. 이환(已還)은 이하(以下). 칠주(七住) 이하의 뜻.) 사람으로 무생(無生-원문은 「無生」. 모든 사물을 생멸(生滅)을 떠난 것으로 보는 지혜.)의 지혜가 아직 나타나지 못하고, 차츰 진리에 접근함을 근처라 이르니, 똑같이 분단의 경지다. 이 둘은 수행의 처음의 단계이기에 공통적으로 하나의 안락행으로 치는 것이다.」
或云 內凡初行名行處.若久習純熟.漸能近理名近處.引前品近果之行爲例也.或云 行處約因 近處約果.行處明智 近處明境.瑤師云.七住已上 心體於理爲行處.已過分段也.自此已還 無生未能現前.漸近於理爲近處.同是分段.此二是行始.通爲一安樂行也.
나의 개인적 견해를(원문은 「私謂」. 장안대사의 견해다.) 피력하겠다. 처음 사람은 행처(行處)를 얕다고 했다. 그러나 대경(大經)에서는 이르되,
「십지(十地)의 보살은 그 행(行)으로 하여 보는 것이 분명치 못하다.」
고 했으니, 마땅히 행이 얕은 것만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뒷사람은 친근처(親近處)를 얕은 경지라 했는데, 정명(淨名)에서는 이르되,
「무등등(無等等)의 부처님의 자재한 지혜에 가깝다.」
고 했으니, 이는 친근(親近)이 다시 깊은 경지가 됨을 보이는 말씀이다. 만일 두 행(行)이 함께 깊은 것이라면 전품(前品)에 보인 보살들의 홍경(弘經)의 행을 성취함이 되어 초심(初心)의 방법과는 무관한 것이 될 것이며, 만일 두 행이 함께 얕은 단계의 것이라면 칠방편인(七方便人)의 소행일 것이니, 어떻게 원행(圓行)의 방법과 관련되랴.
그러기에 일방적으로 심천(深淺)에 의거해 해석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다가 행(行)은 진취(進趣)를 이름이요 친근(親近)은 친습(親習)을 이름이니, 친습 때문에 진취하며 진취 때문에 친습이 이루어지는 바에, 다시 무슨 심천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 행과 친근은 위에 보인 홍경의 방법이니, 행처는 여래의 옷이요 친근처는 여래의 자리다.
이런 자리와 옷에는 얕고 깊음이 없거니, 행처와 친근처에 어찌 유열(優劣)이 있을 수 있겠는가. 또 인욕은 반드시 안으로 무상(無上)의 진리를 품고 연을 만나 상황을 견디어냄이니 이를 일러 행이라 하며, 공좌(空座)는 반드시 외연(外緣)에 통달하여 진실의 경지에 사니 이를 일러 친근이라 한다.
대개 사리(事理)가 호현(互現)함이니, 다시 무슨 천심(淺深)이 있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왜 행과 친근을 구분하는 것인가. 이(理)에 나아가 간략히 설함을 행처라 하며, 사(事)에 붙여 자세히 설함을 친근처라 부르는 것뿐이니, 설함에 자세함과 간략한 차이는 있다 해도 도리에 있어서는 얕고 깊음이 없는 것이다.
私謂 初家以行爲淺.若大經云.十地菩薩 以行故見不了了.當知行則不淺.後家以近爲淺.若淨名云.近無等等佛自在慧.此則近更成深.若兩行俱深.則成前品菩薩弘經之行.不關初心方法.若兩行俱淺.卽七方便人所行.何關圓行 故不可偏據深淺.然行名進趣.近名親習.親習故進趣.進趣故親習.復何淺深.又行近是上方法.行處是如來衣.近處是如來座.座衣旣不淺深.行近何得優劣.又忍辱必內懷至理 歷緣耐事.目之爲行.空座必體達外緣 棲息眞境.目之爲近.蓋事理互現.復何淺深.若爾何故分行近.詣理略說名行處.附事廣說名近處.說有廣略 理無淺深.
이제 세 가지 법에 입각해 행처(行處)를 밝히겠다. 첫째는 바로 일제(一諦)를 아는 일이다.
今約三法明行處.一直緣一諦.
일제(一諦)는 온갖 것의 돌아가는 바가 되며, 온갖 것의 근본이 되나, 두루 분별이 없다.
一諦爲一切所歸.爲一切作本.而 無分別.
「온갖 것의 돌아가는 바」라 함은 곧 인욕(忍辱)의 경지다. 경지는 곧 중도는 모든 사물이 이로 돌아가므로 경지라 이르고, 여러 작용이 그치므로 인욕이라 한다.
一切所歸者.卽忍辱地也.地卽中道 諸法歸之.故名爲地.衆行休息 故名忍辱.
이는 곧 작용하면서도 작용하지 않는 마음의 작용이다.
此卽行不行之行也.
「온갖 것의 근본이 된다」함은, 만물이 땅을 얻어서 생겨나는 것과 같이 여러 마음의 작용은 진리를 엊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 함이다. 만약 진리라는 근본을 얻는다면 굳센 것에 있되 능히 부드러우며, 거슬리는 것에 있되 능히 따르며, 사나운 것에 있되 능히 다스리며, 놀라운 것에 있되 능히 편안할 수 있다. 이런 무량한 공덕이 중도의 따(경지)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니, 따는 낳는 바 없이 공덕을 낳는 것이다.
爲一切作本者.如萬物得地而生.衆行得理而成.若得理本.在剛能柔.在逆能順.在暴能治 在驚能安.無量功德 從中道地生.地無所生 而生功德.
이는 곧 작용하지 않으면서 작용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卽不行行之行.
「두루 분별이 없다」함은 마음의 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일과 작용과의 차별상(差別相)을 분별치 않음이니, 그러므로 「또 다시 그것에도 집착 않고 분별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無分別者.則不分別不行與行差別之相.故云又復不行不分別等也.
이는 곧 마음의 작용도 아니요 작용 아님도 아니다.
卽是非行非不行.
세 행(行)이 없으면서 세 행이 있으므로 행(行)이라 이르고, 동일한 실제(實諦)이므로 처(處)라 한 것이다.
無三行而三行 故名爲行.同一實諦 故名爲處.
이 같은 행처(行處)로 위의 경문(經文)을 합(合)하면, 여러 마음의 작용을 그치는 것은 여래의(如來衣)를 합함이요, 따라서 공덕을 일으키는 것은 여래실(如來室)을 합함이요, 두루 분별하지 않는 것은 여래좌(如來座)를 합함이 된다.
如此行處 合上經文.休息衆行 合如來衣.隨生功德 合如來室. 無分別 合如來座.
이를 한 법에서 행처를 해석함이라 이르니, 경을 펴는 방법이다.
是名一法釋行處.是弘經方軌也.[참고]
둘째로 두 법(法)에 입각하면, 곧 생법(生法)의 이인(二忍)이다.
二約二法.卽生法二忍.
이 이인(二忍)은 곧 생법이공(生法二空)이다.
二忍卽生法二空.
이 이공(二空)은 이승(二乘)의 견해와 다르다.
二空異二乘.
왜 그런가. 인법이공은 진속가실(眞俗假實-진제(眞諦)와 속제(俗諦)가 진속인데, 속제는 실재하지 않으나 편의상 설정되었으므로 「가」라 하고, 진제는 진실한 도리이므로 「실」이라 한 것. 진제는 공제(空諦)요 속제는 가제(假諦)인 바, 다만 삼관(三觀)의 가제는 공에서 한 걸음 높은 차원으로 들어선 것이 되나, 여기서는 대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에 입각해 이공(二空) 이인(二忍)을 밝혀 온통 중도(中道)를 보니, 그러므로 이승(二乘)과 같지 않은 것이다.
何者.人法二空 約眞俗假實.明二空二忍.悉見中道 故不同二乘.
만약 다시 분개(分開)한다면 사인(四忍-① 복인(伏忍). 지전(地前)의 삼현(三賢)의 위계에 있는 사람이 비록 무루의 깨달음은 얻지 못했어도 지혜가 있는 까닭에 번뇌를 억제하여 작용하지 못하게 하는 일.
② 순인(順忍). 사지(四地) 오지(五地) 육지(六地)의 보살이, 가르침에 순종하여 무생(無生)의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일.
③ 무생인(無生忍). 번뇌가 다하여 모든 사물의 불생불멸(不生不滅)함을 깨닫는 것. 칠지(七地) 팔지(八地) 구지(九地)의 보살의 지혜다.
④ 적멸인(寂滅忍). 온갖 번뇌가 완전히 끊어져서 절대적 열반에 안주하는 지혜. 이는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지혜다.
그런데 이런 분개가 왜 이루어졌느냐 하면, 「인욕의 경지에 능히 머물어 부드럽고 겸손하여」라는 말씀에서, 「부드럽다」의 원문 유화(柔華)는 복인(伏忍)이요, 「겸손하다」의 원문 선순(善順)은 순인(順忍)이요, 「다시 대상에 집착 없으며」는 무생인(無生忍)이요, 「집착 않고 분별 않으면」은 적멸인(寂滅忍)이라 본 것이다.)이 될 것이다. 만약 오인(五忍)으로 한다면 선(善)이라는 글자를 가리켜 신인(信忍)이라 함이며, 만약 육인(六忍)으로 한다면 화(和)라는 글자를 가리켜 화종인(和從忍)으로 삼음이다. 그리고 만약에 보살의 수행의 경지에 배당시키면 곧 사십이인(四十二忍-원문은 「卽開四十二忍」. 인욕을 마흔 둘로 나눌 수도 있다는 것. 이는 사십이위(四十二位)의 차별이 수행에 있는 바에는, 위계··· 따라 인욕의 정도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으로 분개할 수 있겠는데, 한 경지에도 사십일지(四十一地-원문은 「一地尙有四十一地功德」. 가령 십주(十住)의 초주(初住)에 있는 보살이라 할 때, 그는 등각·묘각에 이르는 다른 단계에 있는 공덕을 갖춘 것이 된다. 다만 그것이 실현되지 못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만일 다른 경지의 공덕이 지금의 위계 속에 없다면 다른 경지로 옮아갈 수 없을 것이니, 이는 씨에 싹이 터서 열매가 열리는 능력이 구비되지 못했을 때는, 싹이 트고 열매맺을 수가 없는 것과 같다. 또 묘각(부처님)에는 초주에서 등각에 이르는 온갖 위계가 포함된다. 묘각도 사십일위(四十一位)의 발전된 단계일 뿐, 그것들과 아무 관계없이 성립한 것이 아닌 까닭이다.)의 공덕이 있는 바에는 한 인(忍)에 어찌 사십일인(四十一忍)이 없겠는가.
若更開者 卽四忍.若作五忍 指善字爲信忍.若作六忍 指和字爲和從忍.若對地 卽開四十二忍.一地尙有四十一地功德.一忍寧無四十一忍法耶.
이제 잠시 사인(四忍)에 입각해 글을 해석하겠다.
今且約四忍消文.
사인이란 복인(伏忍) 순인(順忍) 무생인(無生忍) 적멸인(寂滅忍)이다.
謂伏順無生寂滅忍也.
이 사인(四忍)은 별교(別敎)와 다르다. 저들의 견해에 의하면 앞의 두 인(忍)은 생인(生忍)이어서 위계(位階)가 얕고, 뒤의 두 인은 법인(法忍)이어서 위계가 깊다.
此四忍與別敎異. 彼前二忍是生忍. 位則淺. 後二忍是法忍. 位則淺.[참고]
이제 원교(圓敎)에서는 생공(生空)· 법공(法空)이 다 통하며 사인(四忍)도 서로 통한다. 왜냐하면 이공(二空)의 도리는 곧 중도(中道)인 때문이니, 그러기에 초주(初住)에서도 사인을 닦는 것에 의해 중도에 들어가 이공의 도리를 보며, 내지는 후심(後心)도 또한 이공의 도리를 다하게 되는 것이다.
今圓生法悉通 四忍亦通.何者 二空理卽是中道.初住修四忍入中 見二空理.乃至後心亦窮二空理.
대경(大經)에서 말했다.
「발심(發心)과 필경(畢竟)의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大經云.發心畢竟二不別.
만약 얕고 깊은 차별이 없다는 원교에 입각해 사인(四忍)을 판단한다면, 초발심(初發心)에서 원융(圓融)하게 오주혹(五住惑-원문은 「五住」. 오주지혹(五住地惑)의 준말. 중생을 삼계(三界)에 묶어두는 다섯 가지 번뇌다. ①삼계의 견혹(見惑)인 견일처주지혹(見一處住地惑). ②욕계의 사혹(思惑)인 욕애주지혹(欲愛住地惑). ③색계의 사혹인 색애주지혹(色愛住地惑). ④무색계의 사혹인 유애주지혹(有愛住地惑). ⑤삼계의 무명인 무명주지혹(無明住地혹).)을 억제함으로서 금강정(金剛頂)에 이르기까지를 다 복인(伏忍)이라 이르고, 초심(初心) 후심(後心)이 다 실상(實相)에 위배되지 않음을 순인(順忍)이라 이르고, 초심 후심이 다 이변(二邊)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을 무생인(無生忍)이라 이르고, 초심 후심이 다 여러 행(行)을 그침을 적멸인(寂滅忍)이라 함이 된다.
若約無淺深判四忍者.初從發心圓伏五住.至金剛頂 皆名伏忍.初後悉不違實相名順忍.初後悉不起二邊心.名無生忍.初後悉休息衆行.名寂滅忍.
생사에 대해 들었다 하여 조급히 고(苦)를 두려워하지도 아니하며, 열반에 대해 들었다 하여 조급히 낙(樂)을 증득(證得)하려고도 아니하고, 부처님의 상(常)· 무상(無常)과 이승(二乘)의 작불(作佛)· 부작불(不作佛)을 듣거나, 생사 열반의 다르고 다르지 않음을 듣거나 불도(佛道)의 장단(長短)· 난이(難易)와 비장비단(非長非短) 비난비이(非難非易)등을 듣는다 해도 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聞生死不忽卒畏苦.聞涅槃不忽卒證樂.聞佛常與無常二乘作不作佛.聞生死涅槃異與不異.聞佛道長短難易非長非短非難非易等 皆不驚怖.
이 행(行)을 행하는 자는 처음으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이공(二空)의 도리를 가지고 제법(諸法)을 참으니 곧 여래의 옷을 걸침이요, 이공의 도리에 안주(安住)함은 곧 여래의 자리에 앉음이요,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김은 곧 여래의 방에 드는 일이다.
行此行者.從始至終 以二空理忍諸法.卽著如來衣.安住二空理.卽坐如來座.愍諸衆生.卽入如來室.
이공(二空) 사인(四忍)을 행(行)이라 하니, 그 도리가 곧 처(處)다. 이를 두 가지 법에 입각해 행처(行處)를 밝혀서 홍경(弘經)의 방법으로 삼는 일이라 부른다.
二空四忍名爲行.理卽是處.是名約二法明行處 爲弘經方軌也.
셋째로 세 가지 법에 입각해 해석한다.
三約三法.
세 가지 법이란 곧 부사의(不思議)의 삼제(三諦)다.
三法卽不思議三諦也.
「인욕의 경지〔地〕에 머문다」함은 일반적으로 삼제(三諦)를 논한 것이니, 땅이라는 의거할 데가 있는 것과 같기에 능히 인욕할 수 있음이다. 「부드러이 잘 따라서」라 함은 잘 진제(眞諦)를 따르는 것에 의해 거짓된 견애(見愛) 한열(寒熱) 등을 참으니, 그러므로 「잘 따른다」고 말한 것이다.
「조급치 아니하며 마음 또한 놀라지 않는다」함은, 속제(俗諦)에 안주하여 여러 근연(根緣)을 참아 기의(機宜)에 들어맞으니 그러므로 「조급치 아니하다」하고, 위종(違從)을 달관해서 참으므로 마음이 놀라지 않는 것이다. 「대상에 집착 않는다」 따위는 곧 중제(中諦)에 안주해 이변(二邊)을 참으니 그러므로
「집착 않는다」하며, 바로 중도(中道)에 머물으니 그러므로 「실상을 관(觀)한다」하며, 중도라는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분별 않는다」고 한 것이다.
住忍辱地 總論三諦.如有地可據.方能忍辱也.柔和善順者.善順眞諦 能忍虛妄見愛寒熱等.故言善順也.而不卒暴心不驚者.安於俗諦 忍衆根緣 稱適機宜.故云不卒暴.體忍違從 故心不驚也.於法無所行等者.卽安中諦 能忍二邊.故云無所行.正住中道 故云觀實相.亦不得中實 故云不分別.
이는 삼제(三諦)의 경지에 의거함을 처(處)라 하고, 오주(五住)의 욕(辱)을 참음을 행(行)이라 한 것이다.
此則據三諦之地名處.忍五住之辱名行.
행(行)도 셋으로 할 수 있다. 지행(止行)은 행불행(行不行)이요, 관행(觀行)은 비행비불행(非行非不行)이요, 자비행(慈悲行)은 곧 불행행(不行行)임을 이르니, 위의 의좌사(衣座舍)등을 합(合)했다고 볼 수 있다.
行亦爲三.謂止行卽行不行.觀行卽非行非不行.慈悲行卽不行行.合上衣座舍等.
이를 세 가지 법에 입각해 행처(行處)를 밝혀 홍경(弘經)의 방법을 말한 것이라 한다.
是爲約三法明行處.辯弘經方軌也.
용사(龍師)는 말했다.
「〈인욕의 경지에 머문다〉함은 일반적으로 생법이인(生法二忍)을 든 것이고, 아래에서는 구별하여 이인(二忍)을 밝혔다. 〈부드럽고 잘 따른다〉함은 신업(身業)을 밝힘이며, 〈조급치 아니하다〉는 구업(口業)이며, 〈마음 또한 놀라지 않는다〉함은 의업(意業)이니, 이는 삼업(三業)에 입각해서 생인(生忍)을 닦는 일에 대해 밝힌 것이요, 〈대상에 집착 않는다〉함은 유상(有相)을 행하지 않음이며, 〈여실(如實)의 상(相)을 관한다〉함은 공(空)의 평등을 행함이며, 〈집착 않고 분별 않는다〉함은 무상(無相)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어서, 유무(有無)를 함께 없애서 중도(中道) 속에 지양함이니, 이 삼구(三句)는 법인(法忍) 닦음을 밝힌 내용이다. 이 이인(二忍) 얻음을 맺어 행처(行處)라 하는 것이다.」
龍師云.住忍辱地 總擧生法二忍.下別明二忍.柔和善順 明身業也.而不卒暴 是口業.心亦不驚 是意業.此就三業 明修生忍.於諸法無所行.不行有相也.而觀如實相.行空平等也.亦不行不分別.不行無相也.有無兩亡 會於中道.此三句明修法忍.得是二忍 結爲行處.
저는 이인(二忍)을 밝히기는 했어도 무엇에 입각해야 할 것인지를 몰랐다. 만약 그것이 삼교(三敎)의 이인이라면 전적으로 법화경의 도리는 아닌 것이 되며, 만약 원교(圓敎)에 입각한다면 응당 서로 별개의 것이어서 융회(融會)하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彼明二忍 未知約何.若三敎二忍.全非法華之義.若約圓敎 不應隔別不融(云云).
「무엇이 친근처(親近處)인가」의 아래는 둘째의 친근처다. 글이 셋으로 나뉜다.
云何名近下.第二近處 文爲三.
「열 가지 뇌란(惱亂) 시키는 것을 멀리한다」함은 먼 것에 상즉(相卽)하기에 친근처(親近處)임을 논한 것이니, 또한 계문(戒門)에 의지해 관행(觀行)을 돕는 일이기도 하다. 「그 마음을 닦아 거둔다」함은 가까운 것에 상즉하기에 친근처를 논한 것이니, 또한 정문(定門)에 의지해 관행을 돕는 일이기도 하다. 「온갖 사물의 공함을 관(觀)한다」함은 멀지도 않으며 가깝지도 않은 것에 상즉해 친근처를 논한 것이니, 또한 혜문(慧門)에 의지해 관행을 돕는 일이기도 하다.
遠十惱亂.卽遠故論近.亦是附戒門助觀.修攝其心 卽近故論近.亦是附定門助觀也 觀一切法空.卽非遠非近論近.亦是附慧門助觀.
위에서는 바로 진리를 관(觀)해서 인욕의 경지에 머물었거니와, 지금의 계문(戒門)에서는 널리 여러 모욕의 연(緣)을 내보였으니, 응당 원리(遠離)함을 닦아야 할 것이다. 무기를 들고 막는 것도 아니며 또한 포기하는 것도 아닌 중에서 다만 바른 지혜를 가지고 이를 원리함이니, 「멀리함이 친근처」라 함은 위의 행소불행(行所不行)을 자세히 해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 위에서는 바로 조급치 아니하고 놀라지 아니함을 밝혔거니와, 지금의 정문(定門)에서는 널리 수정(修定)의 마음· 수정하는 곳· 수정의 요문(要門)을 내보였으니, 선정의 힘 탓에 조급한 속에서도 마음을 다스리며, 놀라야 할 처지에서도 편안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가까움에 상즉해 친근처를 논함은, 위의 불행행(不行行)을 자세히 해설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위에서는 바로 집착 없음을 밝혔거니와 지금은 널리 일체공(一切空)을 관(觀)해 고루 온갖 대상을 대함이 무량무변하며 무장무애(無障無 )하니, 멀지도 않으며 가까움도 아닌 것에 상즉해 친근처를 논함은 위의 비행비불행(非行非不行)을 자세히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上直緣理住忍辱地.今戒門廣出衆辱之緣 應修遠離.非持刀杖 亦不棄捨.但以正慧而遠離之.當知遠近 廣上行所不行也.上直明不暴驚.今定門廣出修定心修定處修定要門.以定力故.在暴而治.在驚而安.當知卽近論近.廣上不行行也.上直明無所行.今廣觀一切空 具歷諸境.無量無邊 無 無障.當知非遠非近.廣上非行非不行.
처음 것에 대해 말하건대 열 가지 응당 멀리해야 할 것이 있으니, 첫째는 큰 권세요, 둘째는 그릇된 사람의 법이요, 셋째는 흉한 놀이요, 넷째는 전다라( 陀羅)요, 다섯째는 이승(二乘)의 무리요, 여섯째는 욕상(欲想)을 멀리함이요, 일곱째는 중성(中性)을 멀리함이요, 여덟째는 위해(危害)를 멀리함이요, 아홉째는 혐오(嫌惡)할 일을 멀리함이요, 열째는 축양(畜養)을 멀리하는 일이다.
노가야타를 이곳 중국말로는 악론(惡論)이라 하며, 또한 파론(破論)이라 하고, 역로가야타란 군부(君父)를 거슬리는 논(論)이다. 또 노가야타를 선론(善論)이라 하며, 또한 사파제자(師破弟子)라 하고, 역로가야타는 악론(惡論)이라 하며, 또한 제자파사(弟子破師)라 이른다는 해석도 있다.이원섭보살 번역
就初有十種應遠者.一豪勢.二邪人法.三兇險戱.四 陀羅.五二乘衆.六遠欲想.七遠不男.八遠危害.九遠譏嫌.十遠畜養等.
文殊師利 云何名 菩薩摩訶薩行處 若菩薩摩訶薩 住忍辱地 柔和善順 而不卒暴 心亦不驚 又復於法無所行 而觀諸法如實相 亦不行不分別 是名菩薩摩訶薩行處
-偈頌-
-寶雲地湧 忍辱合掌-
一乘妙法蓮華經 一切諸佛神通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