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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봉산 진위향교 스케치.
하얗게 눈꽃이 핀 세상. 그러나 감상과 현실은 모순이요, 역설이다. 설경은 그림 소재로서 한지의 담백한 여운을 그대로 살릴 수 있어 좋고, 잠시나마 고요한 세상을 엿볼 수 있어 나그네는 각별히 화첩을 챙긴다.
그러나 현실의 무게는 또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인가. 연일 뉴스는 남부지역의 폭설로 농가 비닐하우스가 모두 내려앉았다고 난리다. 따라서 풍광의 의미는 지역마다 틀리고 현장에 따라 감회가 다르다.
서울역에서 열차를 이용, 평택역에 내리자 잠시 차창에 비꼈던 은빛 풍광과는 낯설게 역 광장 앞의 구호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강제 토지 소유 즉각 중단’, ‘고(故) 전용철 농민의 명복을 빕니다.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평택청년회).
마을을 그리러 온 나그네가 잠시 현실의 멀미를 느끼고 있을 즈음 승용차 한 대가 다가온다. 박성복 선생 GBC-KCN 뉴스 보도국장)과 김기완 사무국장(평택문화원)이 마중나온 것이다.
▲ 만기사의 겨울(193×135cm). 평택 무봉산 진위 봉남마을 ▲ 무봉산천문대 스케치. 현재 봉남리는 진위면사무소와 보건소가 자리 하고 있으며, 진위면의 행정중심지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체국, 진위소방서, 농업협동조합이 위치하고 있으며, 또한 향교가 있어 교육의 중심지로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동네이다. 진위천에는 유원지 시설을 설치하여 여름철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해 주민들과 이웃이 즐기고 있다고 한다.
이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인 장씨가 마련해준 저녁을 먹고 부부를 그린다. 마침 이웃의 안병국 선생도 마실 오신 김에 화첩에 들어와 앉았다. 잠시 후 유아원 직장에서 돌아온 딸아이를 만나 조기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하룻밤 신세를 지려니 부인이 아픈 관계로 숙소는 무봉산 청소년수련원으로 옮겼다. 웬 산간에 3동이나 되는 거대한 건물인가 싶은데, 평택지역 보다는 외부에서 빌려쓰는 시설로 운영된다고 한다.▲ 만기사에서 바라본 설경.
이튿날 아침 길을 나서자 수련원 길목은 여전히 눈꽃이 핀 세계. 무봉산 천문대 앞에서 한들한들 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니 눈송이가 마치 별꽃처럼 나부낀다. 그렇다면 한낮에 지상으로 쏟아지는 은하수(?).
그 새 하얀 숫눈길을 걸어 언덕 위의 만기사(萬奇寺)로 오른다. 만기사는 무봉산 중턱에 자리 잡은 용주사의 말사로, 태조 25년(942년)에 창건된 사찰이다. 현재 보물 제567호로 지정된 고려철불(철조여래좌상)이 대웅전에 모셔져 있다.▲ 무봉산 진위향교. 봄날의 정취를 상상한 그림(193×135cm).
당우의 주련이 특색 있기로 ‘우주는 한 가정, 중생은 한 가족’, ‘원수 갚지 말고 은혜는 갚아라’는 글귀가 한눈에 들어온다. 또 대웅전의 철불과 함께 고부조(高浮彫)로 된 탱화 목조각이 각별한 인상이다. 한편 중국에서 들여온 청동으로 된 불단 위의 18제자상은 아직 포장에 싸여있고, 문밖의 거대한 포대화상, 천수천안관세음보살상은 시야를 압도한다. 그런데 명부전을 살피자 지장보살상이 또 거대하기로 마치 건물을 뚫고 나갈 듯하다. 이것이 모두 절집이름처럼 ‘만 가지 기이한 것’들이 모인 셈인가.
▲ 평택 진위면 봉남 마을 전경(화첩·99×24.5cm). 명부전 옆 솔밭 아래 납골당을 조성한 것 또한 다른 절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공간인데, 각 기마다 둥근 좌대 위에 모두 부처상을 조성했다. 극락을 염원하는 만불상의 장엄이다.
▲ 만기사의 고려철불. 그런데 돌조각에 사진을 박은 여인은 이곳 사찰주지 원경(圓鏡) 스님의 어머니 정은녀(鄭隱女)로 그녀의 혼백을 모신 납골당이다. 스님은 남쪽에서는 ‘빨갱이’, 북쪽에서는 ‘미제의 앞잡이’로 몰렸던 ‘실패한 혁명가’ 박헌영의 아들이다. 태생부터 기구한 운명을 지녀야했던 스님은 훗날 모든 것들과 화해하고 <박헌영전집>을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 이복누이(박비비안)를 만났고, 망명객 박길룡으로부터 “아버지는 1955년 12월15일 사형된 것이 아니라 이듬해 평양 근교의 한 야산에서 처형됐다”는 증언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박헌영의 첫 부인 주세죽, 셋째 부인 윤례나의 위패도 절에 모시기로 했다니 세상과의 화해요, 화쟁(華爭)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원수 갚지 말고 은혜는 갚아라’는 절집 주련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스님은 출타 중이었고 눈 내린 뜰을 진돗개 보리(어미)와 덕순이(딸)가 휘젓고 다닌다. 날이 추워 종무소로 들어서자 개들도 따라 들어와 난로 옆 방석에 웅크리고 앉아 나그네를 쳐다보니 개띠 해에 주인공마냥 당당하다. 그런데 모녀 개는 오랜 절집 식구로 아예 방에서 함께 자고 생활한다고 한다.▲ 진위초등학교의 고목(33×24.5cm). 화첩에 만기사의 인연을 담기 위해 대웅전 뒤 산길을 올라 내려보니 무봉산 골짜기에 둥지를 튼 가람의 운치가 설경의 풍광으로 그윽하다. 건너편 산 아래의 들판이 눈밭으로 마치 흰 바다 같고, 가람의 언덕 양맥의 솔숲의 위용이 우뚝하다. 수행터전의 가람은 역시 설경의 운치에서 빛을 발한다. 아득한 피안의 풍경이 현세 속에 드러난다. 방향을 바꾸어 이제는 산길 입구의 범종루로 내려가 무봉산 자락을 쳐다보며 가람의 진경을 담는다. 일일이 가람배치를 확인하고 솔숲에 둘린 전경을 그린 후 붓을 뗐다.
▲ 삼봉 정도전의 문헌사(文憲祠)(60×100cm). ▲ 만기사의 겨울 스케치. 차 속에서 나를 기다리던 김 국장은 날이 어둡기 전에 꼭 그려야 할 곳이 있다며 서둘러 가잔다. 목적지는 여말선초의 거유이자 정치가이며 혁명가였던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의 사당인 문헌사(文憲祠)다. 1912년 봉화정씨 문중에서 진위면 은산리 287번지에 500여 평의 부지를 마련했고, 그 뒤(1930년) 현재의 종가터로 옮겼다(은산리 202번지). 1979년에 증개축하여 사당 5칸, 외삼문 3칸, 홍살문 3칸으로 맞배지붕의 한식 골기와를 얹은 사당으로 조성했다. 사우명칭은 그의 시호를 따서 문헌사(文憲祠)라 하였고, 유교의 종조요, 나랏일에 으뜸 공을 세웠다는 뜻에서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는 현판을 사당에 달았고, 위패와 영정을 모셨는데, 권오창 화백이 영정을 그렸다. 이곳에서 매년 봄가을로 제향을 올린다.
붓을 떼고 기념관에 들어서자 도올 김용옥 선생이 쓴 휘호가 한눈에 들어온다. 삼봉이 누구였던가. 민본 중심의 조선왕조를 설계한 이, 도덕정치의 이상과 현실을 접목시키려 했던 혁명가가 아니었던가.
관리실로 들어가자 마침 진위향교의 전교(典校)이신 전종봉(鄭鍾奉·74) 선생이 반가이 맞아준다. 잠긴 사당의 문을 하나하나 열어주며 사당의 구조를 살펴주신다. 내가 이곳의 도면이 있으면 좋겠다고 청하자 그 길로 종손(정병무)댁으로 가 건축도면을 가져다주었다. 덕분에 지형 숙지와 건물 방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 만기사의 개(보리와 덕순이). 조국의 멸망을 차마 못 본 체 할 수 없어
충의의 심장이 찢어지고
대궐문 손수 밀고 들어가
임금 앞에서 언성 높여 간했더라오
예부터 한번 죽음 뉘나 있으니
구차한 삶을 처할 바 아니지 않는가
-<삼봉집> ‘감흥(感興)’▲ 오병국 선생, 김학봉 이장, 이장부인 장경수씨
다만 오랜 뿌리를 지닌 기념수로서 백리향과 두 고목이 서로 엉켜 자라는 나무를 보게 되었다. 참으로 기이하기로 한 나무가 옆 나무 등걸에 팔을 뻗고 의지하여 수백 년 생존한 흔적이 살펴진다. 다른 나무의 기생을 뿌리치지 않는 저 나무의 너그러움. 아니 묵묵히 다 받아주는 덕목 속에 생명의 외경을 느낀다.
이제는 오던 길을 되돌아나와 진위천 다리를 건너간다. 마을 전경을 무봉산을 배경으로 담기 위해서다. 스산한 냉기에 손끝이 저리고 곱아서 붓을 제대로 가눌 수 없다. 그래도 이동시점으로 담장을 타고 또 옥상에 올라 바람 속에 화첩을 펼친다. 성근 붓길이 눈 덮인 강길을 따라간다. 다소 아수선한 건물들이 들쭉날쭉한데 역시 진위초등학교가 가장 중심이 되는 현장이다
평택은 요즈음 해양기지의 발돋움(평택항)과 미군기지 확장이라는 양면의 빛과 그림자로 술렁이고 있다. 지역상 산지보다는 평지가 거반인 이곳의 산마을을 찾아간다. 진위면(振威面) 무봉산(舞鳳山·209m)으로 가는 길이다.
▲ 만기사 스케치.
진위는 경기도 남부에 위치한 평택시에서 가장 북쪽으로 오산, 화성, 용인, 안성에 둘러싸여 있고, 경부고속국도와 진위천이 가로지르는 곳에 위치한다. 진위면은 구한말까지 군청소재지였는데, 그 중심지인 봉남리 마을을 찾기로 했다. 무봉산 자락에서 뻗어나간 산줄기와 골에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진위천과 오산천에 의해 충적지가 형성되어 넓은 농경지를 이루는 곳이 진위의 터전이다.
차를 멈춘 곳은 진위향교. 은빛 세상에 눈발이 조금씩 날리는 도로의 비각 앞에서 일행과 헤어져 홍살문을 오른다. 향교는 1398년(태조 7)에 창건되었고, 병자호란 때 소실된 것을 중건했으며, 그 후 전반적으로 개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이른바 풍수지리상 국내에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국이 가장 뛰어난 곳으로 알려진 평택의 문화유산이다. 무봉산 줄기에서 삼태기처럼 폭 싸인 곳에 향교가 둥지를 틀었고, 들녘 앞 세월교 아래로 진위천이 흐른다.
▲ 진위향교 스케치. 시점을 이동하여 그려본 것.
대성전에 올라 참배하고 명륜당에서 돌아보니 설경이어서인가. 향교를 둘러싼 양 산자락 앞으로 넓은 벌판이 눈보라 속에 치달린다. 이 눈밭에 화첩을 펴고 붓질하는 감흥이 저절로 솟구친다.
또 명륜당 앞 느티나무의 위용은 눈 속에 뿌리를 내린 기운으로 더욱 당당하고 고목의 기상은 하늘을 찌르며 솟아있다. 그런데 태극문 뜰의 목련은 벌써 몽우리를 틔우고 있으니 이를 어쩌랴. 어느 한 곳의 경계를 말하기 어려운 세상일처럼 단정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과 운행의 변조!
▲ 진위향교 정종봉 전교.
날이 어두워옴으로 배낭을 챙겨 진위면사무소를 찾아간다. 봉남리 이장을 만나고 싶어하자 정승채씨(총무담당)가 김학봉(55) 이장댁으로 안내한다. 부인 장경수씨(50)와 벼농사를 지으며 남매를 둔 부부는 매우 순박한 인상이다. 손님맞이를 어려워하는 표정에서는 이장이라는 직함이 낯설다.
봉남리는 진위군 군내면의 지역으로서 진위읍내가 되므로 진위읍내, 읍내, 진위라 하였다.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혁한 결과 주막리, 서문리, 옥거리, 아곡, 신당리, 교촌리, 만촌 일부를 병합하여 무봉산의 남쪽이 되므로 봉남리라고 했다. 그 중 봉남1리는 동부, 옥거리, 옛날관청이 있던 곳으로 구한말 진위군청 소재지였다. 지금의 진위초등학교가 자리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