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어, 자못 어떤 중생이 이와 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실다운
신심을 낼 수 있겠사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부처님이 가신 뒤 후 오백세에 계를 받아 지니고
복을 닦는 수행자가 있어서 이 같은 말과 글귀에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
하게 여기리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이나 셋·
넷·다섯 부처님에게만 착한 마음의 바탕을 튼튼히 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량 없는 천 만 부처님 계신 곳에서 착한 마음의 바탕을 튼튼히 한 사람
이니,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거룩한 믿음을 내느니라.
[티베트본]
이렇게 말씀하시자 長老 쑤부띠는 世尊께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世尊이시여, 미래의 마지막 五百年에 착한 法이 무너지게 되면, 누군가 뭇
삶들이 이와 같은 經典의 설해진 句節들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世尊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와 같이 '미래에 마지막 오백 년에 착한 법이 무너지게 되면, 누군가
뭇 삶들이 이와 같은 경전의 설해진 구절들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지 마라.
쑤부띠여 미래의 때에 마지막 오백 년에 착한 법이 무너지면 계율을 갖추고
功德을 갖추고 智慧를 갖춘 菩薩摩訶薩들이 나타날 것이다.
쑤부띠여, 이들 菩薩摩訶薩들은 단 한 분의 깨달은 이에게 예배드리지
않으며, 단 한 분의 깨달은 이에게 功德의 뿌리를 심는 것이 아니라, 쑤부띠여,
수십만의 깨달은 이에게 예배를 드리며 수십만의 깨달은 이에게 功德의 뿌리를 심는
菩薩摩訶薩들이 나타날 것이다. 쑤부띠여, 이와 같이 경전의 설해진 구절들에서 하나의 정명의 마음을 발견한 자들은 如來로부터 인정받고, 쑤부띠여, 그들은 如來로부터 菩薩핌을 받는다.
여기서 수보리는 불법이 멸하는 마지막 500년의 중생들에 대하여 물어 보게됩니다. 이것은 인도사람들의 그당시 생각방식을 대변하는 것이라 합니다. 즉, 부처님이 입멸하고 처음 500년은 상법시대라하여 불법이 잘 보전되고, 그다음 500년은 중법시대라 하며 혼란이 오며, 마지막 500년은 말법시대라 하여 삿된 교리들이 마치 정법인 것 처럼 등장한다고 합니다. 금강경 제6분에서는 수보리는 말법중생들은 어떻게 깨우치겠는가 하고 부처님께 여쭈어 보고 있습니다. 현장역본이나 티벳트본에는 분명하게 수보리가 말법 500년의 중생들은 어떨까하고 물어봅니다.
구마라집 역본에서는 수보리가 그냥 '미래 중생'이라 하였는데 난데 없이 부처님께서 '말법시대는'.. 하고 답변이 나오는데, 이것은 논리상 맞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이 구절에 대해, 김욕옥씨의 해설에 의하면, 이것은 수보리가 미래중생을 불쌍히 여겨서 물어보는 자비심에서 우러나오는 질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부분에 대해서는 라즈니쉬의 해석이 더 낫다고 봅니다. 즉, 부처님 당시 제자들은 부처와 함께 있다는 일종의 자부심 같은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입적한후 말법시대에는 사람들이 깨우치기 힘들지 않겠느냐하는 미묘한 특권의식 같은 것이 마음속에서 생겨났으리라 보는 것이지요. 이런 현상은 물론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종교나 종파가 더 훌륭하다고 보는 것이 바로 그 예라고 하겠습니다.
부처님은 이런 수보리의 마음을 읽으시고, 절대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수보리에게는 자신도 모르고 있던 일종의 자부심이 도사리고 있었고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간파하시고 미래세계에도 일심으로 깨달은 보살들이 수천 수만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러니 심지어 말법시대라는 말도 옳은 말이 아니라고 부처님께서는 은연중에 말씀하시며 수보리의 미묘한 마음의 흐름에 일침을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의 이부분에 논리의 비약이 있었던 것이지요. 사실 부처님 당시에도 깨달은 사람보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 입니다. 시대라는 것과 깨달음이라는 것은 별개인 것입니다.
이런 미묘한 에고(ego)의 작용은 성경에서도 볼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더 위대합니까?'라고 물으니까
예수님이 대답하길, "진정으로 아이들 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갈수 없다.
누구든 아이들처럼 겸손하면 천국에서 가장 위대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의 이 구절에 대해, 저는 수보리의 질문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우둔한 질문이 아닐수 없습니다. 천국이란 상하의 구분이 없이 평등하고 행복이 넘치는 곳인데 어떻게 더 위대한사람이 있을수 있겠으며 더 비천한 사람이 있을수 있겠습니다. 이말은 그당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핍박 받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천국에서만큼은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더 윗자리에 오르지 않을까하는 일종의 욕망 또는 자부심이 작용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는 멋지게 그 질문을 받아 넘깁니다. 그 답은 어린아이 처럼 겸손해져라 입니다. 위대한것에 대한 정 반대의 표현인 셈입니다. 보다 겸손하고, 마음을 열고, 순수하게 받아드리는 사람들이 바로 천국으로 가는 사람들이란 말이 됩니다. 그래서 부자가 천국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자이면서 겸손하기는 무척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행이도 요즘 교회에서는 이런 표현은 돈 많은 굵은 신도들의 심기를 건드리기 때문에 삼가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논어에는 부자와 가난에 대해 성경에서 나오는 것보다 더 적극적 행동을 요구합니다. 한번은 자공이 공자에게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자이면서도 교만하지 않다면 어떻습니까?' 라고 말을 하자 공자는 '괜찮지, 하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길줄 알고, 부자이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같지 못하지.' 라고 말을 합니다. 도(道)라는 것을 소극적인 삶의 자세를 취하는데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삶을 모습을 찾는데 있다고 공자님께서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중용의 도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면 재산이 많고 적음은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재산이 많고 적음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면, 교만하거나 비굴하거나할 근거가 없기 때문이지요.
결론적으로 말법시대라 하더라도 도는 항상 있는 것이니 누구든 노력하면 성취할수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첫댓글저도 직장에서 한 때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셨다는 분과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부처님 경전의 말씀이 사뭇 다르지 않음을 많이 느꼈었는데, 오늘 미소님의 마태복음 18장 해석을 보니 '도는 한 길로 통한다' 는 것을 새삼 보게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길게 정성들여 쓰신글 잘보았습니다. 수보리의 질문과 석가의 대답에 대한 평을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미소님의 시각이 상당히 따뜻한 시각이라는 것을 세삼느꼈습니다. 마태복음의 인용과 "어린아이"의 비유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군요. 저도 님이 제시한 "어린애 같아야 천국으로 갈수 있다"는 말을 사실 오래전에
깊이있게 생각해본적이 있습니다. 님께서 보신것 처럼 "겸손과 순수"를 강조한 것 같지만 또다른 것을 전해주고자 함이 있지 않았나싶습니다. 저는 어린아이들이 분별심을 갖지 않고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즉 무위의 삶을 무위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사는 모습을 두고 한 말씀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봤던
뱅기 타고 14시간 밤낮을 하늘에 날아봐도 그기 하나님도 없고 천당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주선을 타고 더멀리 갔다온 사람도 천당봤다는 소리 못들었 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 천당 그 곳이 어디멘지......암튼 순수하지 않으면..무애와 무위가 아니면.. 갈수없는 곳을, 내 스스로 가리고 가로막고 있습니다._()_
나는 여기를 떠난적이 없었다네. 마음이 물들어 온갖 번뇌와 망상이 들끓어도 여기를 떠난적이 없었다네. 몇겁의 세월을 몸바꿔 욕망을 뒤쫒아 살았어도 여기를 떠난적이 없었다네. 그러나 여기는 저기 없는 여기라네. 기필코 한점도 아니어서 없이 있는 곳이라네. 이곳은 오직 나 하나만 있는 곳이네,
장최선님,부처님의 뜻을 알면 성인과 내가 동시에 존재하고,그렇지 않고 그 뜻을 모르면 같이 있어도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경전의 역사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뜻입니다.그렇다면 법화경이나 화엄경은 천상에서 이루어졌는데,인간들이 그걸 어떻게 증명하겠습니까?그 뜻을 자기것으로 만드십시요.
첫댓글 저도 직장에서 한 때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하셨다는 분과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부처님 경전의 말씀이 사뭇 다르지 않음을 많이 느꼈었는데, 오늘 미소님의 마태복음 18장 해석을 보니 '도는 한 길로 통한다' 는 것을 새삼 보게 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길게 정성들여 쓰신글 잘보았습니다. 수보리의 질문과 석가의 대답에 대한 평을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미소님의 시각이 상당히 따뜻한 시각이라는 것을 세삼느꼈습니다. 마태복음의 인용과 "어린아이"의 비유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군요. 저도 님이 제시한 "어린애 같아야 천국으로 갈수 있다"는 말을 사실 오래전에
깊이있게 생각해본적이 있습니다. 님께서 보신것 처럼 "겸손과 순수"를 강조한 것 같지만 또다른 것을 전해주고자 함이 있지 않았나싶습니다. 저는 어린아이들이 분별심을 갖지 않고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즉 무위의 삶을 무위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사는 모습을 두고 한 말씀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봤던
기억이 납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순수"에 포함되는 내용일 수도 있겠지요.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마음이라면 "순수"라는 용어로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본래 마음이니까요. 감사합니다. ()()()
뱅기 타고 14시간 밤낮을 하늘에 날아봐도 그기 하나님도 없고 천당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주선을 타고 더멀리 갔다온 사람도 천당봤다는 소리 못들었 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 천당 그 곳이 어디멘지......암튼 순수하지 않으면..무애와 무위가 아니면.. 갈수없는 곳을, 내 스스로 가리고 가로막고 있습니다._()_
윗분 님!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영원한 말법시대가 아닌적이 없었지요.?
우공님! 너무 기막힌 표현입니다. 우공님 말씀처럼 언제든 내가 깨달으면 정법시대요, 내가 못깨달으면 부처시대도 말법시대 겠지요. 감사합니다.
긴 글을 저도 대강 읽어보았는데요.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금강경의 성립시기 입니다. 이것은 부처님 당시에 실제 사건이 아닙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반열반 후 오백년 정도 흐른 뒤에 성립된 대승 초기 경전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지않으면 안됩니다.
나는 여기를 떠난적이 없었다네. 마음이 물들어 온갖 번뇌와 망상이 들끓어도 여기를 떠난적이 없었다네. 몇겁의 세월을 몸바꿔 욕망을 뒤쫒아 살았어도 여기를 떠난적이 없었다네. 그러나 여기는 저기 없는 여기라네. 기필코 한점도 아니어서 없이 있는 곳이라네. 이곳은 오직 나 하나만 있는 곳이네,
그래서 늘 하나인 하늘 집(天堂)이라 한다네. ( 이시를 인동초님께 드립니다.)
네, 有無가 同時에 함께 돌아가는 님의 법문 잘 알아 듣겠 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
모두들 좋은 말씀만 해주시니 면목 없습니다.요즘 너무 참선위주로 게시판이 흘러가는 것같아 경전공부하면서 탁마를 해볼까하고 올렸는데,토론이 잘 이끌어 지지가 않았습니다.다음엔 좀더 도발적인 글을 올려야 겠습니다. 법우님들 모두 감사 드립니다.
장최선님,부처님의 뜻을 알면 성인과 내가 동시에 존재하고,그렇지 않고 그 뜻을 모르면 같이 있어도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경전의 역사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뜻입니다.그렇다면 법화경이나 화엄경은 천상에서 이루어졌는데,인간들이 그걸 어떻게 증명하겠습니까?그 뜻을 자기것으로 만드십시요.
맞아요~우공은 경을 볼때는 석가불님이 직접읽어주고 조사경을 보면 그분들이 직접 읽어주는데요...하나경은 하나, 인동초경은 인동초,헤공제일경은 ....장최선경은 ...이 직접 설해주거덩요....미소짓는이(너무 길어요)님의 도발과 분발을 바라며 우공경은 이만..모두모두()()()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영원한 말법시대가 아님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신 우공님...정말 우공이십니다...
불경과 성경이 다르다 함은 사랑에 대한 편견이 있기때문이요, 같다함은 사랑에 대한 정견과 실천인것 같군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과, 일체 중생이 실유불성이니 자비심이 곧 불심이니라 ...정견이 정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