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黃帝)가 사용 했던 북(鼓)
북(鼓)는 돌과 나무로 만들어 기둥이나 계단에서 보여주고 있다. 종묘에서도 정전과 영녕전의 기둥, 신문, 동문, 계단에서 여러 종류의 북을 볼 수 있다.(아래 그림) 원구단에는 석고(石鼓)을 별도의 공간에 배치하기도 한다. 북은 크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떤 상징성을 갖고 있다.
정전 신문

정전 상웓대

정전 태계

동문에서 하월대에 오르는 계단

정전 동문

동양사상의 한 맥을 이루고 있는 동양의 신화로 그 상징성을 유추해 본다.
동양의 신화에서 황제(黃帝)와 치우(蚩尤)가 싸워(참고1) 황제가 용감무쌍한 치우(참고2)를 물)리치고 승리할 때 사용했던 것이 북(鼓)이다. 이 북은 전쟁의 신으로부터 국가의 안전을 지켜주었다.
이것으로 북의 상징성은 국가적 측면에서 보면 적으로부터 방위적인 개념과 함께 천자(天子)가 나라를 잘 다스려 태평성대를 이룰 것이다.(참고3)
또 대규모든 소규묘 이든 어떤 집단에서는 어떤 사악한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는 것과 그집단의 안녕을 비는 것이 아닐까 한다.
참고1 황제와 치우의 전투
신들의 세계라고 해서 평화롭고 안락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힘을 지닌 강한 신들은 패권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고 지배적인 신에 대해서는 젊고 패기 있는 신들의 도전이 계속되기 마련이다.
중국의 황제(黃帝) 역시 중앙의 신으로 군림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신들과 전투를 겪어야만 했다. 황제가 점차 세력을 키워가고 있을 무렵 신들의 세계는 이미 황제의 선배격인 염제(炎帝) 신농(神農)이 지배하고 있었다. 신들의 세계에서 신농과 황제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대립적인 권능의 소유자들이었다. 즉 신농은 태양신으로서 불을 통해 능력을 발휘함에 반해 황제는 뇌우(뇌우)의 신으로 물로 세상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마침내 황제는 군사를 일으켜 신농에게 도전하였고, 지금의 허베이(河北)성에 위치한 판천(阪泉)의 들에서 격돌하여 호랑이 표범, 곰 등을 길들여서 선종으로 삼고 독수리 솔개 매 등릉 깃발처럼 날려 신농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신농의 용맹한 신하 치우(蚩尤)가 등장하여 신농의 패배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전군을 동원하여 황제의 영역인 탁록을 진격하였다. 탁록은 지난번 신농이 싸웠던 판천 근처의 땅이다.
일설에는 황제가 치우와 아홉번의 전우투에서 모두 패했다고 한다.
계속 밀리던 황제는 응룡(應龍)을을 시켜 천상에서 엄청난 물을 모아 두었다가 치우군에게 퍼부을 계회을 하였으나 치우군은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에게 요청하여 그 물을 황제군에게 쏟아 붓도록 하였다. 이때 황제는 가뭄의 신인 딸인 발(魃)을 불러 폭풍우를 재웠고, 항제군은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치우군이 도깨비 군단을 동원하여 신음하는 듯한 이상한 소리를 내어 황제군을 어지럽게 했다. 황제는 이에 호각을 크게 불어 용의 울음소리를 내게 하였드니 도깨비 군단이 놀라 달아났다.
황제는 호각 외에도 외다리에 천둥소리를 내는 기(蘷)라는 괴물을 잡아 그 가죽으로 북을 만들고 뇌택(雷澤)이라는 호수가에 살던 뇌수(雷獸)의 뼈를 뽑아 북채를 만들었다.


그리고 북을 두들겼더니 그 소리가 어찌나 우렁찼던지 오백리 밖에서도 들렸다고 한다. 여러번의 싸움에서 손실을 본 치우는 이번에 큰 안개를 일으켜 황제군으로 하여금 갈피를 못 잡게 하였다. 이에 황제는 신하 풍우(風雨)로 하여금 북두칠성을 본 따 지남거(指南車)라는 수레를 만들어 방향을 정확히 파악하여 치우군을 격파한다. 용감했던 치우 형제들은 하나, 줄 전사하고 치우만이 혼자 싸우다가 결국 힘이 딸려 응룡에게 사로잡히거 말았다.
참고2 치우(蚩尤)
치우는 휼륭한 무기 제작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일족은 갈로산과 옹호산이라는 곳에서 구리를 캐서 칼과 창 등의 무기를 많이 만들었고, 무장한 군사력으로 신농 신족 내에서 가장 유력한 집단이 된다.
황제는 치우를 사로잡아을 때 움직이지도 못하게 손과 발에 수갑과 족쇄를 꼭 채웠다. 그리고 치우의 목을 자르고 난후 피 묻은 수갑과 족쇄를 풀어 내버렸는데 그것이 나무로 변해 버렸다. 그 나무의 잎새는 핏빛처럼 붉어서 치우의 처참한 죽음을 말해 주는 듯 하였다.
치우가 처형당한 땅에서도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다, 치우의 목이 잘린 지역은 몸이 분해되었다고 해서 해현(解懸)이라고 부르는데 이 해현에 있는 해지(解地)라는 호수는 물 빛깔이 붉다. 그것은 치우가 목이 잘릴 때 흘린 피 때문이라 한다.
치우의 잘린 목과 몸체는 그의 본거지였던 산둥 땅의 수장현과 거야현 두 지역에 따로 묻었다. 머리가 매장된 수장현의 주민들은 해마다 10월이 되면 이 용맹한 신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다.
드 때마다 붉은 안개 같은 것이 무덤으로부터 피워 올라 하늘까지 치솟아 마치 깃발이 너울거리는 것 같아 그것을 치우기(蚩尤旗)라고 불렀다. 이 붉은 안개 같은 기운은 붉은단, 붉은 호수와 마찬가지로 치우가 죽을 때 흘린 피의 변형된 모습이 남 이러한 모습들은 죽어서도 굴복하지 않은 치우의 기개와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치우는 고향인 산둥에서 병주(兵主)로 숭배된다. 병주는 곧 전쟁의 신이다.
치우는 또한 은(殷)나라 때의 도철(饕餮)아라는 무서운 괴물의 모습으로 청동기에 새겨져 귀신이나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치우의 이러한 역할은 신라 시대의 도깨비 모습을 새긴 귀면와(鬼面瓦)에까지 이러진다. - 이상 동양의 신화에세 발췌
참고3 극악무도함의 대명사로 폄하된 치우
역사는 승리자의 편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황제를 위협하여 죽음에 몰았던 치우는 역사상 극악무도함의 대명사로 불리었다. 중국 최초의 역사서인 『상서(尙書)』「주서(周書)」「여형편(呂刑篇)」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 모두 치우를 제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킨 인물로 잔악하고 탐욕스러우며 싸우기를 잘하고 성을 잘 내는 인물로 묘사하였다. 반면 황제는 “천지사시(天地四時)의 운행의 법칙에 순응하여 음양의 변화를 예측하였고, 산 자를 양육하고 죽은 자를 장송하는 제도를 연구하고, 국가 존망의 이치를 고찰하였으며, 때에 맞추어 곡식과 초목을 심어 덕화(德化)가 금수와 초목에까지 미쳤으며, 백성을 두루 이롭게 하여” 제후들이 다투어 그를 천자(天子)로 받들어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 김종미 경희대학교 호텔관광대학 교수
첫댓글 감사합니다 ^ ^ 그런데 중화 사상 이랄까 뭐 그래서 우리쪽 치우가 사악하게 그려진 것이지요. 신농씨와 치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