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박근형 연출로 LG아트센타 무대에 선보인 [필로우 맨]은 이야기 구조가 탄탄한 연극이었다. 험악한 취조실을 배경으로 잔혹한 살인사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내용이지만, 슬프면서도 이상하게 웃음보가 터지는 코미디였으며, 허무한 삶의 정서가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최민식 최정우 이대연 등 국내 최고 수준의 연기진들이 뛰어난 연기의 향연을 보여준 이 작품의 원작자는 90년대 이후 영국과 미국 연극계의 떠오르는 별, 마틴 맥도나이다. [작가의 유일한 의무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는 마틴 맥도나는 영화감독으로 변신해서 단편영화 [6연발 권총]으로 2006년 아카데미 단편영화상을 수상한 뒤 드디어 첫번째 장편영화를 내놓았다.
[킬러들의 도시](원제 In BRUGES]는 각본의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올해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올랐으며 영국 아카데미와 영국 독립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고 골든글로브에서 남우주연상(콜린 패럴)한 이 작품에서, 마틴 맥도나는 연극 무대에서 보여준 놀라운 입담을 과시하고 있다. 진정한 코미디란 상황의 언밸런스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킬러들의 도시]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의 엇갈림이 수없이 발생한다. 그래서 비극적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웃음을 유발시킨다. 배우들은 진지하게 고뇌하고 연기하지만 관객들은 머리가 아찔할 정도의 현기증을 느끼며 자지러진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웃음을 터트리며 본 영화는 최근에 없었다.
1300년전의 중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고풍스러운 벨기에의 관광도시 브리주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 작품은, 조직의 명령으로 대주교를 살해하고 은신처를 찾아 숨어든 두 명의 킬러를 소재로 하고 있다. 레이(콜린 파랠)와 켄(브렌든 글리슨)은 여러가지로 대조되는 캐릭터이다. 조직의 넘버2 킬러인 켄은 나이가 많고 살이 쪘으며 조용한 성격이다. 그는 브리주가 너무나 마음에 든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운하, 안개가 자욱히 깔린 조용한 도시의 풍광이나 거대한 종이 있는 중세의 종탑과 성곽들을 그는 좋아한다. 하지만 젊고 괄괄하며 성질 급한 막내 킬러 레이는 이 도시가 답답하기만 하다. 시간이 정지된 듯 느릿하게 움직이는 도시는 감옥처럼 느껴져서 그는 하루 빨리 대도시로 나가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킬러들의 도시]가 캐릭터가 다른 두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버디 무비는 아니다. 후반부에 조직의 보스인 또 한 명의 킬러 해리(랄프 파인즈)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끌고 간다.
킬러들의 후일담은 타린티노의 [저수지의 개들] 이후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지만, [킬러들의 도시]는 재치있는 입담과 예기치 못한 상황 전개로 웃음을 발생시킨다. 타란티노의 영향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마틴 맥도나만의 독특한 상황 설정과 재치있는 대사가 놀라운 흡인력을 발휘하고 있다. 은신처를 찾아 브리주의 작은 호텔에 도착했을 때부터 레이와 켄의 의견은 엇갈린다. 레이는 이 낡고 좁은 호텔에서, 더구나 한 방에서, 켄과 침대를 나란히 하고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다고 불평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조직에서 별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그들은 이 호텔에서 적어도 2주간 머물러야 한다. 켄은 느긋한 마음으로 도시를 산책하며 동화 속에 등장하는 것같은 고풍스러은 도시의 멋스러움을 만끽한다. 하지만 레이는 다르다. 그는 밤이 되면 술집에 나가 맥주를 마시고 예쁜 여자를 유혹하고 싶어 한다.
레이와 켄은 밤에 산책을 나갔다가 브리주를 배경으로 영화를 촬영하는 현장을 목격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키 작은 난장이였다. 레이는 촬영 현장에서 클로이(클레멘스 포시)라는 여자를 만난다. 레이는 뒷태까지 끝내주는 신비로운 매력의 그녀와 다음 날 데이트 약속을 한다. 하지만 그날 밤 호텔 프론트에는 내일 호텔에서 전화를 기다리라는 보스의 메시지가 접수되어 있었다. 레이는 켄을 설득해서 다음날 데이트를 위해 밖으로 나가고, 켄은 보스의 전화를 받으면서 레이가 화장실에 있는 것처럼 꾸민다. 하지만 보스인 해리는 오히려 레이를 밖으로 내보내라고 말하고 켄에게 은밀한 지시를 내린다.
[킬러들의 도시]는 관객의 예상을 항상 뒤엎는 상황의 반전이 연속적으로 전개된다. 거대도시가 아니라 시간이 정지된 듯한 중세의 고풍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는 관광도시 브리주와 킬러라는 배경도 통념을 깨는 언밸런스다. 불평도 많고 말도 많고 성질 급한 레이와 느긋하고 조용하며 내성적인 성격의 켄. 두 킬러의 대립되는 캐릭터 충돌도 작은 재미를 주지만,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뜻밖의 상황으로 끌고 가는 내러티브 전개는 마치 수비수의 넋을 빼놓으며 현란하게 드리볼을 하고 상대 문전으로 돌진하는 공격수의 화려한 발놀림을 연상시킨다. 레이와 켄이 브리주에서 목격한 영화 촬영 현장은 화려함이라기보다는 난장이가 주인공인 엉뚱함과 놀라움을 준다.
자신의 부재중 조직으로부터 켄에게 비밀스러운 지령이 내렸다는 것을 모르는 레이는 클로이와 데이트를 하고 그녀의 집으로 간다. 침대 위에서 그녀를 애무를 하던 중 클로이의 남자 친구가 나타나 레이를 총으로 위협한다. 그들은 관광객들의 호주머니를 터는 2인조 꽃뱀이었다. 하지만, 레이는 순식간에 건달을 제압하고 공포탄이 들어 있는 총을 빼앗아 그의 눈을 향해 총을 쏜다. 그 건달 남자 친구는 레이에게 복수를 하려고 벼르지만 클로이는 레이의 남성적 매력에 반해서 계속 만나고 싶어 한다. 영화가 전체의 2/3쯤 진행된 후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내는 조직의 보스 해리는, 이야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켄이 자신의 명령을 어기자 해리는 직접 브리주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명령을 어긴 켄과, 도망친 레이를 찾아 직접 살해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조직의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 규칙이란 살인은 해도 절대 어린아이를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레이는 대주교를 살해할 당시 실수로 어린 소년을 살해했다. 레이는 그것 때문에 킬러라는 직업에 회의를 느끼고 고통스러워한다. 보스인 해리는 아무리 실수였고 우발적이었다고 해도 절대 있을 수 없는 소년 살해의 책임을 물어 레이를 살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관객들의 시선으로 보면 이런 상황 전체가 언밸런스다. 잔혹한 킬러들이지만 임무 수행중이라고 해도 실수로 어린아이를 살해하며 그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는 법칙이 조금 이상하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킬러들의 조직을 생각하면 너무 인도적이고 도덕적이다.
마틴 맥도나의 대본은 이처럼 예상을 뒤엎는 독특한 상황설정과 서로 충돌하는 재미있는 대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상황의 놀라운 전개와 상식을 뒤엎는 반전 때문에 관객들은 작가가 깔아 놓은 이야기 구조에서 일방적으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기분 좋은 이끌림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나 [알렉산더]의 귀공자 스타일에서 벗어나 짜증을 내고 말도 많고 불평도 많은 레이라는 캐릭터를 콜린 파렐은 멋지게 소화해서 글돈글로브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마치 맞춰 입은 옷처럼 유유자적하고 느긋면서도 킬러로서의 빈틈없는 자세롤 보여준 켄 역의 브렌단 글리슨은 칸느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제너럴] 이후 가장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후반부를 화룡점정하는 해리 역의 랄프 파인즈도 [잉글리쉬 페이션트] 이후 해리 포터 시리즈의 메이저 영화와는 다른 개성적 매력을 선보인다.
하지만 [킬러들의 도시]는 마틴 맥도나의 영화이다. 뛰어난 각본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에 우선한다. 연극 무대와는 다른 영화적 연출력이 뒷받침된다면 그는 분명히 새로운 시대의 기대주로 떠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