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자본, 정보, 기술 등이 끊임없이 그리고 쉽게 국경을 넘나들고 있지만 국가를 형성하는 시민들 대다수는 국경 안에서 빈부로 갈려 남아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도 하다. 경제의 세계화는 불가피하다지만 큰 문제는 국경 안에 가쳐있는 가난한 다수 시민들을 새로운 세계경제질서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킬 수 있는가가 될 것이다.. Robert Reich, The Work of Nations, New York, Knopf, 1991. p. 3
지난 세기말부터 이 물음은 많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신흥공업국가들이 안고 있는 난제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며 또한 이 물음을 둘러 싼 보수주의와 진보주의 진영간의 갈등은 그치지 않고 오히려 꼬리를 물고 이어나가고 있는 셈이다.
근래에는 글로벌 자본주의가 반자본주의 운동의 공격대상이 되면서 세계도처에서는 격렬한 항의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국면에 비추어 볼 때 <역사 종언론>의 허구성이 드러나고 이데올로기 논쟁이 재연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념적 사유는 많은 경우에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관계를 합리화하는 인간의 삶의 형식이기에 사회가 존속하는 한 그리고 개개인들간에 이해의 대립이 있는 한 이데올로기 논쟁, 더 나아가서 때로는 폭력적 갈등이 다시 살아난다. 50년대 말 일군의 사회과학자들에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선언되었지만 60년대는 기존질서가 <신 좌파>의 도전을 겪어야 했고 90년대 초 사회주의 권의 붕괴로 자본주의에 의한 역사의 완성이란 낙관론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글로벌 경제체제를 정당화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도전이 곳곳에서 일고 있다.
과학과 기술이 인간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준다는 21세기 초반부터 세계는 이전과 다름없이 진영으로 나뉘어 이념논쟁을 벌리고 있다. 최근에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제3의 길의 기치를 내걸고 사회통합을 도모하기도 하나 이 세력에 대한 불신도 만만치 않은 사정이다.
97년 아시아의 신흥공업국가들이 경제 위기에 직면했을 때 자유시장론 자들이 내놓은 처방은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해 글로벌 경제에서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경제정책 이였다.
이들 자유시장론 자들의 사상을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일컫는 데 이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실은 이 철학에 입각한 정치와 경제의 실질적인 운영에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선진이나 신흥 관계없이 모든 국가는 글로벌 경제 질서 안에 이미 편입되었거나 편입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살아남는 길은 국경 안에 있는 모든 지적, 물적 자원을 발견하고 개발하여 고도의 생산성의 달성을 위해 이용하는 일이다. 이 일이 진행되면서 거품이 빠지고 군살이 줄어든다. 이것이 구조조정이다. 이것은 곧 생산의 합리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거품이 빠지고 군살이 줄면서 인적 희생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안정 망이 잘 구축되어있는 사회에서는 희생은 일시적이고 회생의 가능성은 높다. 그러나 사회복지가 열악한 신흥시장에서의 구조조종은 많은 문제를 수반한다. 기회균등이 보장되지 않은 여건에서 도입되는 경쟁원리는 약육강식을 결과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래서 <신자유주의라>던 가 <글로벌 경제>가 제3세계에서는 가장 혐오스러운 표현들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며, 생산구조의 합리화를 설교하는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 반자본주의 행동파의 공격대상이 되고 여기서 이념논쟁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 논쟁이 가열되어 가고 있으며 60년대와 같은 기존질서 대 반체제간의 치열한 반목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렇다면 화해의 전망은 크지 않다는 걸까. 신자유주의 자들의 처방들이 제3세계 국가들에는 무리한 것들인가.
2. 합리주의와 그 한계
사회학자 퓨시(Michael Pusey)는 신자유주의를 경제적 합리주의(economic rationalism)로 특징 지운다.. Michael Pusey, Economic Rationalism in Canberra: A Nation-Building State Changes its Mind, Cambridge, 1991
이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경제적 합리주의의 합리성뿐만 아니라 이 합리주의가 얼마나 큰 비합리성을 안고 있는 가도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퓨시도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 이 용어를 썼던 것이다. 베버의 예견을 새삼 언급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분명한 것은 세계가 부단한 합리화 과정으로 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베버도 합리화에 내재하는 비이성적인 것들을 염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진보와 이에 힘입은 생산력의 발달은 자본주의의 합리성 원리를 더욱 더 확고하게 하며 사회주의 체제도 과거에 이 원리에 따라 자본주의와 경쟁했던 것이다. 20세기 문명비판가들은 합리성 원리가 베버가 지적했듯 인간적 삶의 탈 인간화를 초래했다고 했지만 이 지구상의 수십억 인구의 생존과 복지는 모든 지적, 물적 자원의 합리적 개발과 이용을 요구하며 자본주의는 이에 부응하는 하나의 생산양식일 따름이다.
공업화로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사회에서 합리화가 사회성원들을 미몽과 주술에서 해방시키는 사회변동의 과정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탈 전통은 탈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신구 가치체계는 충돌하기 마련이다. 생산장치는 비록 합리화되더라도 경영이 이에 상응하지 못하는 데서 족벌중심, 정경유착에 의한 특혜와 금융의 투명성 결여 등의 비합리적 요소들이 경제의 합리적 운영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이는 사회 전반의 근대화를 가로막는다.
더욱이나 재래의 권위주의적 정치문화는 정치를 집권층의 일방적 의사결정으로 한정시킴으로써 시장경제의 필요조건인 민주적 정치과정의 존립을 어렵게 한다. 이 때문에 경제적 합리주의의 처방은 탈 전통의 신흥국가에게는 큰 효험이 있는 근대화의 발전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좋은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자연을 관리하는 능력을 일반적으로 도구적 이성이라고 한다. 이것은 자연을 관찰하는 데 필요한 측정하고 계산하는 능력이 된다. 그리고 측정과 계산으로 목적설정과 수단선택을 적절하게 조정하는 일을 합리화라고 한다. 글로벌 경제시대에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도모하는 목적에서 우리의 지적, 물적 자원을 개발하여 고도의 생산성을 올리는 방법을 계량화하여 이를 이용하는 일은 신흥공업국에게는 무엇보다도 바람직한 합리화일 것이다. 그런데 97년부터 일기 시작한 경제위기는 이 합리화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되었다. 대부분의 신흥시장에서는 아직도 탈피 못한 전근대적 경제운영이 위기를 몰고 왔던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은 합리주의적 구조조정계획을 경제회생의 처방으로 제시했다.. Arthur MacEwan, Neo-Liberalism or Democracy?, London, Zed Books, 1999, p. 145f
합리화는 객관성과 보편성 두 원칙을 축으로 움직인다. 인적 자원의 이용은 혈연과 학연 그리고 지연 등이 충원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출신배경과는 무관하게 당사자의 능력에대한 객관적 평가가 기준이 된다.
자연관리를 위한 과학적 방법이 근거하는 객관성과 보편성이 시장경제의 운영원칙이 된다는 것이다. 인적 자원의 합리적 동원은 유능한 개인들에게 기회균등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합리화의 이와 같은 원칙들이 정치, 사법, 경제 등의 사회영역에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근대성으로의 이행에 대한 저항이 거세게 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환기에 흔히 있는 갈등이기도 하겠지만 전통주의자들과 이들을 이용하여 기득권을 정당화하는 재벌과 권력집단이 근대화의 저지세력이 되고 있다.
특히 유교윤리가 경제발전의 이념적 요인이었다는 학설이 이들 전통주의자들의 발전전략으로 각광을 받기도 하는 데 군사정권의 개발독재는 군신간의 충성을 덕목으로 하는 유교윤리가 얼마큼 도움이 됐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상하의 유계질서를 절대시하는 공자사상은 오히려 시민문화의 형성을 더디게 하는 데 기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교윤리는 어디까지나 전통사회의 지배질서를 정당화할 수 있었지만 횡적인 인간관계를 전제로 하는 시장경제의 경쟁원리에는 배치될 뿐이기에 글로벌 경제는 합리주의 원칙의 도입과 그 실행을 강요하기 마련이다. 합리화는 결코 서양 고유의 사고방식이나 행위양식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조상들은 돌을 깎아 창칼을 만들어 산양을 했고 철광을 녹여 쟁기를 만들어 밭을 갈아 왔으며 수증기에서 동력을 끌어낼 줄은 몰랐지만 황소의 힘으로 황무지를 일구는 법을 터득했다. 그들은 자연관리를 위한 도구사용의 능력을 소지했었는 데 이 능력은 다름 아닌 도구적 이성이다. 다만 이 능력이 과학의 발달로 이어지지 않았던 것은 물활론적 토속신앙의 강력한 영향으로 인하여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자연변형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사람들 사이에 자리잡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의 산업화를 통해서 왼 만한 제조업에 필요한 높은 과학기술 수준에 이르러 우리 나라는 중진공업국가라는 대외적 명성을 누리게 됐었으나 몇 해전에 맞게된 경제위기는 한국사회가 마침내 근대화의 한계에 부디 쳤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고도의 합리적 경영방식이 요구되는 글로벌 경제체제에서 정경유착으로 인한 기업운영과 금융거래의 불투명성 등으로 얼룩진 한국경제가 파국에 이르게 된 것은 사필귀정이 아닐 수 없었다. 자본주의에 모순되는 비합리적 요인은 분명했다. 그것은 사람들의 일상적 사고와 행위의 방향을 규정하는 가치체계가 무속신앙이라는 물활론에 근거하는 무속신앙이다. 무속은 현대사회 어느 곳에서도 조금씩은 남아 있는 원시신앙이기는 하지만 한국사회에서처럼 널리 그리고 깊이 뿌리내려 있는 곳도 흔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에 내재하는 잡신들에게 세속적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비는 이른바 기복제화의 신앙이 기성종교에도 스며들어 그 본래의 모습들을 일그러 놓은 마당에 사람들의 정치행위와 경제행위가 합리성을 결여할 수밖에 없었다.
기복제화의 무속신앙은 잡신에게 시주만 잘 들면 스스로의 노력 없이도 재화를 모을 수 있다는 믿음인데 이는 계산으로 인과관계를 따져가며 목적달성을 위한 수단선택을 결정하는 목적 합리적 행위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그런데 이들 양자간의 모순에도 불구하고 생산력의 합리성과 무속의 비합리성이 병존해 왔으나 경제규모가 글로벌 화하면서 그 모순관계가 첨예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고 이것의 극복을 위해 경제적 합리주의라는 발전이론이 신자유주의 자들에 의해 처방으로 내려진 것이다.
이 발전이론은 무엇보다도 생산과 경영에 참여하는 자들에 의한 합리성 원칙의 내면화를 요구한다. 생산과 경영 그리고 금융 등의 구조조정은 합목적 합리성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은 어렵게 된다는 것이다. 경제적 합리주의 는 사회의 근대화를 위한 처방으로서 긍정적 요소를 다분히 지니면서도 구조조정에 따르는 인적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앞에서도 지적된 바와 같이 세계 도처에서 거부되고 있다. 물론 레건과 대처와 같은 신자유주의 자들은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의 경제적 합리주의는 시민들의 안녕을 보장해 주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부인될 수 없다. 그러나 같은 처방이 경제위기를 맞은 신흥공업국가와 여타 제3세계 국가들에서도 마찬가지로 효험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생산과 경영 합리화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별문제가 없지만 자유시장경제에 길들려 있지 않고 개개 시민들의 주체의식이 서 있지 않은 여건에서 경쟁적 개인주의 원칙에 따라 부를 추구 한다는 신자유주의는 발전이론으로서 신생사회서는 그 한계를 들어낼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해방과 더불어 민주주의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부과되었듯이 경제위기로 경쟁적 개인주의가 밖으로부터 강요된 것이다. 자본주의는 곧 경쟁적 개인주의라는 등식을 글로벌 경제의 개조로 여기는 것은 자본주의의 철학적 기반인 자유주의 역사를 살펴보면 옳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자유주의는 하나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그 접두어가 가리키는 것처럼 또 하나의 자유주의일 따름이다. 이 철학이 과연 한국사회의 발전전략을 위한 적합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고 우리는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전통 사회에서 벗어나 있지 못한 단계에 놓여 있는 이 사회의 정치, 사법 그리고 경제의 영역에서 이 근대화의 전략이론이 효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고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지향하는 작은 정부는 시장의 자율성을 의미하지만 현실에서는 기득권 층의 방종을 부추기고 부익부 빈익빈을 결과하여 이 사회가 한때 가진 자와 없는 자로 분열됐던 지난 80년대가 디시 돌아오고 있는 판국이다.
노조는 다시금 사회정의의 기치를 들고 불공정한 부의 분배를 쟁점으로 삼아 가두투쟁에 나섰으며 기업은 경영투명성 확립을 외면한 채 자기 몫 챙기기에만 급급할 뿔 국제통화기금 관리초기에 기대했던 경제의 합리화는 그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됐다.
바로 이래서 경제전문가들은 제2의 경제위기가 임박했다는 경고마저 서슴지 않는다. 이 악순환의 가능성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자본주의 경제행위자들에 합리적 사고를 요구한다. 그런데 이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상황에서 집단이기주의로 말미암아 노사관계는 늑대와 늑대의 싸움으로 이어지고 정경유착은 공적자금 투입을 밑없는 독 물 붓기로 만들면서 경제 살리기의 유일한 처방이라는 구조조정계획은 인적 희생만 강요하는 가운데 사회불안은 고조되고 안정된 경제성장은 날로 요요해져만 가는 것이 한국경제의 실정이다.
자유주의의 궁극적 목표는 사회성원 개개 모두가 개인적 자유와 권리를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정치, 사법, 경제, 교육 등 의 제도를 확립하는 데 있으나 주어진 사회 문화적 여건에 따라 그 운용에서 차이를 갖기 마련이다. 시민문화가 성숙해 있지 않은 사회서, 경기규칙을 공정하게 지키지 않는 정당정치에서 자유시장경제를 부르짖고 이를 지켜한다는 신자유주의의 적합성의 도는 매우 낮다.
구조조정이 새로운 기회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회풍토에서는 퇴출이란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되는 직업관이 팽배하는 한 경쟁적 개인주의는 설 땅을 찾지 못한다.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개인들이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사회적 행위자로 성장할 때까지 시민들을 계몽하고 이들이 스스로를 다스릴 줄 아는 개체의식을 갖도록 정부가 도와주어야 한다는 이른바 <혁신 자유주의>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시민들을 무지와 빈곤으로부터 벗어나 제 각기 자아를 실할 수 있도록 풍요한 여건을 마련하는 <해방의 대행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혁신 자유주의가 한국사회의 근대화 전략이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발전이론으로서의 혁신 자유주의
자유주의라는 <liberalism>의 표현은 “남에게 구속을 받지 않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일”을 뜻을 지닌 <자유>라는 낱말 때문에 권위주의와 집단주의에 젖은 문화권에서는 크게 잘못 인식되어 온 개념들 가운데 하나다. 물론 시장기능의 자유방임을 주장하는 자유주의가 있었지만 30년대의 경제공항으로 그 타당성을 상실한지 오래다. 실은 <liberal>이란 형용사는 <진보적>이란 뜻으로서 <개방성>과 <관용>의 뜻도 포함하고 있다.
왕과 귀족들과의 부단한 투쟁을 통한 부르주아 계급의 권리쟁취는 역사의 발전과 사회질서가 보다 자유로워지고 개방적이고 관용스러워 젔음을 가리켰던 것이며 그래서 이 평민출신 집단이 주로 내세웠던 자유주의는 진보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전개과정에서 시장의 방임이 자유주의 본래이며 이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보수주의라는 이름으로 통한다. 시장원리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도 이런 맥락에서 신보수주의라고 일컬어진다.
20세기 초반 영국에서 자유주의가 보수화해 가면서 사회주의가 사회기층민의 지지기반을 넓혀 갈 때 자유주의의 혁신을 목표로 등장한 정치, 사회철학이 <새로운 자유주의>(New Liberalism)이다.
자유주의가 진보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개인적 자유와 권리를 누리는 사회성원들의 폭을 부단히 넓혀 간다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때 자유주의의 보수화는 사회구성원들의 경쟁에서의 도태를 당연시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자기혁신을 통해 그 진보성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다. 이 진보주의 즉 이 <새로운 자유주의>의 이론가는 철학자 호브하우스(L. T. Hobhouse)이다. 한편으로 30년대의 공황이 미국에서도 활발한 사회주의 운동의 출현을 촉발했을 때 듀이(John Dewey)가 호브하우스처럼 경쟁적 개인주의를 거부하고 개인과 사회를 조화하는 방향으로 자유주의를 혁신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는 데 이들은 이른바 <제3의 길>를 앞서 일찍이 제창한 사회철학자들로 간주되기도 한다.. Alan Ryan, “The Third Way" Dissent, vol. 46, no. 2, New York, Dissent Corporation, 1999
호브하우스와 듀이는 자유주의자로서 개인의 성장과 발전에 따르는 자아실현을 사회의 궁극목표라고 믿지만 개인과 다른 개인간의 상호관련성에 근거해서 그들의 이론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들은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개인주의 대 공동체주의 논쟁에 비추어 본다면 어느 쪽에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개인과 사회의 변증법적 관계에 관심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경쟁적 개인주의 사회주의도 배격했고 오히려 <사회적 자유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을 견지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사회가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개인들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개인들은 독립된 인격이지만 상호작용 하면서 사회적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양식은 개체적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이라는 것이다.
루지에로(Guido de Ruggiero)가 20세기 영국의 새로운 자유주의 가장 잘 정리했다고 평한. Guido de Ruggiero, The History of European Liberalism, Boston, Beacon Press, 1959(1927), p. 155f
1911년에 나온 저서 ꡔ자유주의론ꡕ. L. T. Hobhouse, Liberalism, New York, Oxford, 1964(1911)
에서 호브하우스는 그의 시대의 다양한 철학적 방향들에 대해서 통일된 관점을 제시했다. 그는 헤겔의 권위주의적 국가개념을 용납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사회적 연관성을 긍정했으며 국가폐지론을 주창한 마르크스주의의 도전을 국가간섭을 통한 개인적 자유의 실현이란 그린(T. H. Green)의 국가론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그는 국가주의나 자유방임주의의 반국가론도 전적으로 배격했었다. 개인과 국가와의 관계에서 국가의 기능을 명시한다. 국가가 개개 시민을 먹이고 재우며 옷입혀 주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역할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획득할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해 주는 데 있다는 것이다.. 윗책 p. 83
여기서 호브하우스는 이전의 자유주의자들과는 달리 적극적 국가개념을 편다. 국가가 개인적 자유라는 참원칙과 대립하기보다는 그것이 효율적으로 실현되는 데 필요하다는 것이다.. 같은책 p. 71
그러나 국가의 간여는 어디까지나 시민들의 요구에 대응하는 것이어야 한다. 호브하우스는 시민들의 그들의 이해관계를 명시해서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참여 민주주의를 그의 새로운 자유주의에 도입한다.. 같은 책 p. 119
호브하우스는 자신의 사회관을 유기체론이라고 일컫는다.. 같은 책 p. 67
이 표현은 전체주의 이론가들에 의해서 오용되고 남용되었기에 오해를 자주 불러일으키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는 이점을 지적한다. 그의 유기체론에 따르면 개인과 사회가운데 어느 한편이 우위를 점하는 것은 아니다, 사화의 생명은 상호작용 하는 관계에 있는 개이들의 삶에 지나지 않으며 개인의 삶도 그가 사회로부터 분리되는 경우 전혀 별개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같은 곳
개인은 그가 남들과 함께 살면서 배운 언어로 생각하며 또 남들에게서 배운 규범에 따라 행동하면서 그를 둘러쌓고 있는 사회 안으로 흡수된다. 그는 의무와 권리 그리고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가 중요함을 배운다. 또한 그는 자신의 판단이 공동선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같은 책 p. 68
호브하우스가 이와 같이 인간의 사회성을 합리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자유주의 전통인 합리적 존재로서의 인간본성론에 그 바탕을 둔다.. 같은 책 pp.66, 68
합리적 인간은 합리적 방법에 따라 사회적 필요로서의 개인의 자기통제가 가해지고 사회는 질서를 갖게 된다. 여기서 <합리적>이라는 <rational>이라는 표현은 설정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치밀한 계산을 거처 선택하는 경우를 포함한다. 합리적 방법에 따르면 개인의 자기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고 사회의 발전은 창의적 자아실현을 위해서 개인적 자유를 허용하는 사회체제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개인적 자유는 사회성원 모두가 합리적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의 규칙은 합리적 방법의 적용일 뿐이라고 호브하우스는 천명하며 또한 그는 합리성의 원칙에 의거할 때 사회의 진보가 보장된다고 한다.. 같은 책 p. 67
과학과 철학의 기반이 되는 합리성은 이렇게 해서 개인의 자아실현과 사회성립의 원리가 되기도 한다.. 같은 책 p. 69
호브하우스는 개인과 사회간의 대립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렇다고 전자가 후자에 종속된다고도 보지 않는다. 그는 개체론 자도 아니며 공동체론 자도 아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개체성과 사회성 이 양자는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기 때문에 그는 자유주의 개념으로부터 방임적 개인주의 요소를 배제하고 사회적 조화를 강조함으로써 국가가 자유의 평등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믿었다. 새로운 자유주의는 경쟁적 개인주의에서 벗어 나와 개인적 자유를 남들과의 협동을 통해 추구할 것을 도모한다. 사실 호브하우스에 따르면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아이디어를 주고 받아 왔던 것이다.. 같은 책 pp. 54, 115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그가 <사회적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 또는 <자유주의적 사회주의>(Liberal Socialism)를 추구했다는 평을 받았으며 오늘날에 와서는 듀이와 함께 <제3의 길>을 처음 열었던 이론가로 여기게 되었다.
듀이 역시 재래의 개인주의에 도전하면서 자유주의의 혁신화를 위한 이론을 세웠다. 그는 경쟁적 개인주의가 사회내 불평등을 야기하먼서 진정한 개체성을 잠식한다고 보았다. 방임주의 시장론은 개인과 사화간의 대립은 극복될 수 없다고 전제하다. 그러나 진정한 개체로서의 인간의 자기실현을 위해서 이 전제가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듀이는 ꡔ낡은 개인주의와 새로운 개인주의ꡕ. John Dewey, Old and New Individualism, New York, Capricorn, 1962(1930)
에서 대공황이 <낡은 개인주의>의 파산을 초래했다고 해서 이것이 곧 사호주의로의 이행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사회적 관리를 통해서 개인적 자발성과 창의성을 보장하는 <새로운 개인주의>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의 책 (Dewey, The Philosophy of John Dewey, ed. by J. J. McDermott,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3), pp. 611-612
듀이도 호브하우스와 같이 사회를 개인들의 상호작용의 관계로 본다.. 같은 책 p. 614
사회라는 조직체는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방대한 수의 세포의 교감과 같은 것으로서 듀이도 유기체론을 도입한다.. 같은 곳
재래의 경쟁적 개인주의는 금전상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경제질서의 유지를 위해서 사람들의 창조적인 개체성을 억제함으로써 소수에게는 물질적 번영을 안겨다 줄 수 있더라도 국가의 부는 창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같은 곳
개인의 자발성과 창의성과 동일시되는 개인주의가 사적인 경제적 이득과 결부될 때 개인의 자율과 독립은 타율과 예속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듀이는 그의 시대의 자본주의가 매몰해버린 개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경제적 개인주의를 제거하는 이론정립을 시도했던 것이다.. 같은 책 p. 606
따라서 듀이는 진정한 개체성의 실현이 허용되는 삶을 구상한다. 경쟁적 개인주의는 개체성의 발휘가 아니라 오히려 그 성장을 저지하기 때문에 그 발달에 알맞은 사회적 관계의 구축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듀이는 여기서 공동체론을 제시한다
듀이는 인간의 개체성이 남들과의 사회적 삶에서 형성된다고 믿기 때문에 개인들이 이 사회적 삶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하며 그 대안은 참여 민주주의다. 그런데 현존의 경쟁적 자본주의는 소수를 위해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는 소극적 자유를 신장시켰던 반면에 다수가 자아실현을 가능케 할 그들의 삶의 형태를 규정하는 적극적 자유를 억압함으로써 개인은 상실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같은 책 p. 599
듀이는 자유주의의 목표가 자아실현이 삶의 법칙이 되도록 개인들을 해방시키는 데 있다고 보고 사회의 재조직화가 모든 시민들의 마음과 영혼이 성장할 수 있도록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도록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유주의가 거듭나기(Renascent Liberalism)를 기대한다.. Dewey, Liberalism and Social Action, New York, Capricon, 1963(1935), in Dewey, The Philosophy of John Dewey, p.642
자유방임주의가 대공황을 맞기 이전까지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서 그 구실을 했었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이념은 더 이상 반자본주의를 정당화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재 와서 그것은 보수주의가 되고만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을 특권층의 자의적 권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이바지했던 자유주의 이념이 부와 권력을 가진 새로운 계급으로 인해 생긴 불균형의 사회질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했기에 자유주의는 그 본래의 모습을 다시 찾는 것이다. 듀이는 자유주의의 근본화를 제창한다.. 윗책 p. 647
이 근본화가 혁신을 의미한다. 자유주의가 더 이상 소수 기득권 계층의 보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체성이 사회적 관계에서 발달한다는 것은 자아가 남들과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형성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Dewey, The Theory of the Moral Life, New York, Irvington, 1980 p. 163
듀이는 순수한 유아론적 자아개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아의 능력은 사유이고 이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의미체계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자아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아는 초월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독립해 잇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Dewey, Democracy and Education, New York, The Free Press, 1966, pp.295-297
듀이는 자아생성의 사회적 연관성을 놓고 이상적인 공동체의 성격을 밝힌다. 궁극적으로 개인의 인성은 그가 속하고 있는 사회의 성격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듀이는 참여 민주주의가 운용되는 공동체 안에서 진정한 자아형성이 기대될 수 있다고 믿는다.. Dewey, The Public and its Problems, Athens, Ohio, Swallow Press, 1954, p. 145f
그는 공동체적 삶의 이념으로서 참여 민주주의밖에는 없다고 단언하면서. 윗책 p.148
이 공동체적 삶을 떠나서는 박애, 자유, 평등은 희망 없는 추상일 따름이라고 한다.. 같은 책 p. 149
공동체의 운용형태는 물론 참여 민주주의다. 개인들은 그들이 속하는 집단의 활동에 참여하며 이를 이끈다. 그리고 이 집단은 그 구성원들의 잠재능력을 다른 개인들의 이해관계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발휘케 한다. 여기서 듀이는 호브하우스와 같이 정부의 역할은 공동체 구성원인 개인들이 자유롭게 자아를 실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데 있다고 한다.. 윗책 pp. 145-147
모든 개인들에게 각자가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개발하고 자아를 실현함으로써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할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하는 해방의 대행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부가 그 도덕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공동체 구성원들의 의사결정 과정에로의 적극적 참여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로 서로 다른 공동체가 있다. 듀이가 구상하는 집단은 그 구성원들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운영되는 경우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민주주의 이념을 실천하는 장이다. 개인들은 이 민주적 공동체 안에서 자기성장을 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듀이는 인간이 본래 사회적임으로 집단적 삶이 그에게는 중요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어떤 형태의 집단도 다 된다는 것은 아니며 개인이 올바로 성장할 수 있는 생활의 터는 그가 그 안에서 몫을 차지하는 민주적 공동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듀이는 정치형태에 관한 한 분명하게 자유주의의 전통에 서 있다.
한편 듀이는 구성원들의 경제운영에로의 참여를 민주적 공동체의 성립요건으로 삼는다. 공동체는 정부를 통해서 공동선을 이룩한다. 정부가 자유와 평등의 조화로운 신장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바는 듀이가 사회적 과실의 분배보다는 경제의 협동관리에 관심을 둔다. 근로자는 임금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일하는 기업의 운영에서도 채임을 나누어 갖도록 산업의 민주화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Dewey, "Freedom of Thought and Work," Dewey, The Middle Works, vol. 12, Carbondale, Sou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1982, p. 9
듀의는 노사의 협력과 정부의 조정기능을 통한 경제적 민주주의가 참공동체적 삶의 필요조건으로 삼는다. 그러나 듀이의 산업민주주의가 경영의 평등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전문경영인과 직접생산자를 구별한다. 이들 양자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은 공익 추구다. 그들은 소비자의 이익, 나아가서 사회의 이익에 이바지하는 기업활동 방향을 결정하는 데 동참한다.. James Campbell, Understanding John Dewey, Chicago, Open Court, 1995, p. 182
듀이는 부의 단순한 평등주의적 배분을 의미하는 산업민주주의를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산업민주주의는 노사가 산업의 경영과정에서 도덕적 책임을 다 같이 진다는 것을 가리킨다.
듀이는 자신의 사상을 과학적 방법에 입각하여 체계화했으며 그의 공동체론 이나 혁신 자유주의 철학도 협동적 탐구라는 자연과학의 연구절차를 바탕으로 한다. 개개 과학자들이 홀로서는 편견에 빠져 있을지라도 과학자 공동체 안에서 참여자 모두가 대등한 표현의 자유를 통해 오류를 밝혀가며 진리에 접근해 가듯이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자유로운 토론으로 여론형성에 참여함으로써 공동이익을 성취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듀이에게는 협동적 탐구로서의 과학적 방법이 곧 민주주의 운영방법이 된다는 것이다.. Dewey, Reconstruction in Philosophy (1920), Dewey, The Middle Works, vol. 12, p.100
양자는 자유롭고 서로 대등한 개인들의 집단적 노력을 통해서 합의에 도달하는 절차를 밟는다는 데서 동일하다.
4. 한국사회와 혁신 자유주의
위에서 논의된 사회철학은 시민사회의 발전단계를 이미 거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참혹한 현실과 자유주의 이념간의 모순의 해소를 위해서 등장한 자유주의 전통의 재구성이다. 이 혁신사상이 오늘날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신흥공업국가들의 근대화 전략의 대안이 될 수 있겠는가 라는 물음이 다음으로 제기될 것이다.
글로벌 경제는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이제 세계는 얼마동안 이 경제질서로 나갈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도전은 내외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혁신 자유주의는 바로 그 도전에 대한 대응이다. 그렇다면 자유주의 전통을 결여한 신흥시장사회들은 급변하는 경제질서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발전 이데올로기에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등 물음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앞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한국에서 혁신 자유주의가 근대화 이데올로기로서 그 적합성이 검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사회구성원 대부분이 근대성의 증표가 되는 성숙한 개체의식을 지니지 않은 상황에서 혈연, 지연 그리고 학연 등의 연고주의가 결사의 절대적 원칙이 되어 있는 발전단계에서 생산력의 발달은 이에 상응하는 사회적 의식의 합리적 변화를 수반하지 못했기에 계몽된 사회내 집단들의 적극적 정치 및 사회참여로 변화가 기대될 수도 있으며 어떤 면에서는 이 집단들의 연합정치를 통해서만 근대성으로의 이행이 가능할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 이념과 한국사회의 현실간의 불균형을 바로 잡을 수 있는 힘은 바로 그 연합정치에서 솟아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업화와 도시화로 사회구조의 분화는 진행하고 개체로서의 사회구성원들의 자각이 뒤따르기 마련이지만 정치와 경제의 역근대적 운영은 이들을 자기보존에 급급하는 개인과 집단이기주의자들로 만든다. 듀이는 자율과 자발의 덕목을 배우면서 성장하는 인간은 자신과 사회의 관계를 대등한 상호의존관계로 정립하면서 개체의식을 갖게된다고 설명하면서 학교교육의 역할을 강조했었는 데 개혁을 주도하는 시민단체들의 우선 과제들 가운데 하나가 시민의 개체의식 심화를 위한 교육확립에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기 위해서도 이들의 사회철학이 그 방향으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개혁세력은 민주사회의 건설에 분명한 목표를 두고 있지만 그 달성을 뒷받침하는 사회이론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다. 개혁이 사회운동으로 지속되려면 이데올로기가 필요로 하며 그것은 작금의 세계화에 슬기롭게 대응하면서 사회발전을 기하는 전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의 세계화하는 오래 전부터 시작했지만 지난 세기말에 이르러서는 엄청난 질적 변화를 가져 왔다. 상이한 경제체제들을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 경제체제로 묶는, 그것도 자본주의 체제로 묶는 전지구적 경제통합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생산은 수익과 임금노동을 바탕으로 조직된다. 자본주의에 의한 글로벌경제의 지배는 경쟁의 격화를 불가피하게 한다. 자본과 정보, 기술과 상품은 국경을 넘어 쉽게 옮겨가지만 노동자들은 국경 안에 남아 서서 다른 나라의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자국내의 노동자들과도 서로 경쟁해야 한다.. MacEwan, 같은 책 pp. 27-28
자본주의는 더 이상 서구 공업국가의 경제체제가 아니다. 또 그 운용에 요구되는 합리성 원리가 더 이상 서구적인 것도 아니다. 시장경제가 전지구화하고 한국경제도 그 궤도에 들어선 마당에 동서양의 가치관을 구별해서 전통주의를 고집하기보다는 합리적인 것을 찾아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하도록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노력하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합리성을 계몽의 원리로 삼는다.
도구적 이성은 서구적 이성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 이성이다. 우리는 자연을 이성이라는 사유능력으로 짐승을 잡는 도구와 황무지를 일구어 밭을 갈고 씨를 뿌려 곡식을 걷어들이는 법을 터득해 왔기에 시장경제가 요구하는 합리성도 원리의 내면화가 정치와 사법 그리고 기업과 금융의 운용에 왜 필요한가도 안다. 생존을 위한 자연지배는 홀로가 아니라 그것은 집단적 노력으로만 가능하다. 거기에는 협력이 있어야 한다. 여러 개인들의 힘이 모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가 집단활동을 규제하는 도리를 터득한다. 이 터득하는 능력을 도구적 이성에 병치해서 실천적 이성이라고 하는 데 이것도 실은 도구적 이성과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들은 자기보존을 위해서 공동체를 이루어 자연을 관리하는 데 도구적 그리고 실천적 이성을 길러 왔으며 이 것들은 동전의 양면일 따름이다. 이래서 듀이는 인간의 생존과 잠재력의 계발과 실현을 위해서도 공동체척 협력은 필수적이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의 사회구성원들은 합리성에 관한 이와 같은 사실을 내면화하고 이를 실행에서 효과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론과 행동이 결합해야 한다.
구조조정이 신자유주의 처방이기에 부도덕하다고 매도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관계없이 생산조직의 합리화는 기본적인 요건이며 이에는 희생이 따른다. 중요한 것은 그 희생이 강요되는 것보다는 생산공동체의 자율적인 선택이 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지도록 공동체 성원들이 협의하는 것이다. 사회안정망이 미비한 여건에서 그 합의도달은 어려울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길은 있다. 투명한 경영으로 노사간의 신뢰가 싸이면은 임금삭감으로 인적 희생을 막거나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듀이가 의도하는 산업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의다. 한편으로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희생되어야 할 개인들에 생활비 보조로 자선을 배 푸는 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다른 자격으로 생산에 가담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혁신 자유주의가 강조하는 기회균등과 자유의 평등화다.
글로벌 경제가 빈곤국가들의 경제발전을 저지한다고 외치는 걸로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다. 우선은 발전을 저해한 요인들을 안에서 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권위주의적 통치, 관료부패, 연고 중심적 기업경영 등의 비합리적 요소들을 시민단체들의 압력정치로 추방하는 일이다. 재벌기업의 구조조정이 97년이래 경제위기의 가장 기본적인 극복 방안이었음에도 최근의 정부보고에 따르면. 한겨례 2001년 7월 25일자 판 기사
30대 재벌의 계열사 수가 80개나 늘어나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 형태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이 계열사 증가가 고용증대를 가져 왔다고 하겠지만 경영부실의 청산 없는 확창이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경유착의 고리가 아직도 끊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노사의 합의로 필요한 구조조정을 감행하며 여기서 정부는 불가피하게 희생되는 인적 자원이 재활용될 수 있는 길을 강구하고 종국에 가서 모두가 사회안에서의 자기 몫을 공정하게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또한 정부의 몫이 된다.
구조조정에서 정부에 대해 끊임없이 그 책임의 소재를 일깨워 주는 역할은 시민 압력단체들의 몫이다. 그렇다면 과연 참여 민주주의를 올바르게 이끌 수 있는 도덕적 자질과 실행력을 갖추고 있는 시민단체들이 사회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가? 사회의 전반적 의식이 아직도 탈전통의 단계에 멈을고 있는 마당에 이들 집단들이 나머지 시민들을 정치에 참여하도록 교육을 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학교교육을 통해서 대부분의 시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었지만 그것에 대한 그들의 신념과 도덕적 책무감은 이 사회의 일천한 민주주의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크게 기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기성 정치인들의 반민주적 행태가 이를 잘 설명해 주는 바와 같이 학교교육만으로 인습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민주적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 안에 민주주의 이념의 담지집단들이 있어야하며 이들이 연합해서 사회적 세력으로 커 나갈 수 있도록 꾸준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아마도 이것이 유일한 희망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