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관계와 관계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혼자서는 잘할 수 있고 잘 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여도 사람과 사람이 서로
공유할 수 없다면 그것은 무용지물입니다.
하지만 작은 것이라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기쁨을 배가 되고 슬픔을 작아짐을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경험하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는 불행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은 바로 이 부자의 모습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회개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에서 이 부자의 탐욕스러운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는 사람에게는
오늘의 복음 말씀이 한낱 남의 이야기로만 여겨질 것이므로 삶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말 이 부자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먼저 복음에서 말하는
이 부자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를 제대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부자는 복음서 자체로 볼 때 악한 행동이나 범죄를 일삼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부자가 잘못한 일이 있다면, 재산을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만 사용한 것과,
집 앞에 있는 불쌍한 라자로에게 전혀 관심을 쏟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구체적으로 범하는 것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사랑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게으름과 무관심입니다.
형식적인 마음은 오래 가지 못하고 빛을 잃어버립니다.
사랑한다고 수백번 수만번 외치는 것이 무슨 소용있습니까?.
한마디의 사랑과 진심이 담긴 말과 관심은 사람을 공동체를 성장시킵니다
교회의 사랑
-허찬란 신부-
라자로’란 이름 자체가 가난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의미입니다.
‘우리농촌살리기’ 운동을 할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번거로움과 병충해
처리문제, 가격 등을 이유로 관행대로 농사를 지었지만 라자로 형제님은 교회의
뜻을 따랐습니다. 빚도 많았고 몸도 안 좋았습니다. 하지만 라자로 형제님은
교회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결국 농토는 우리농촌살리기를 위한 기준을 채웠고
농산물도 잘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판로를 개척하기 위해 전국 생협과
우리농뿐만아니라 도시본당 직거래를 실시하였고 인기도 높았습니다. 우리는
목포로 배를 타고 건너와서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새벽 2시경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강남대로를 한 바퀴 돌다가 잠잘 곳이 없어 결국은
일원터널 위나 양재로의 어느 대형 마트 주차장에서 잠을 잤습니다.
나와 라자로 형제, 곧 불쌍한 농사꾼을 받아주는 강남의 여관은 없었습니다.
복음의 부자, 아니 세상의 사람들이 갈 곳 없는 라자로, 상처가 박힌
라자로를 외면했듯이 라자로 형제와 저는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은 새벽까지 술에 흥청망청이었고, 잘 곳을 찾다 도로에서 시간을
다 보내고 기껏 두세 시간 자다 보면 청소차가 와서 잠을 깨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우리의 농산물을 받아주는 교회의 사랑에 깊이 감사했고
어디를 가든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첫댓글 가슴이 찡해집니다. 우리는 누구나 라자로가 될 수 있고 라자로처럼 이웃을 외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