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순교자들의 묘와 한국 천주교의 큰 핵으로 자리잡고 있는 성지
천호 성지에는 1866년 병인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이명서(일명 재덕, 1821~1866, 베드로), 손선지(1820~1866, 베드로), 정문호(일명 계식,1801~1866, 바르톨로메오), 한재권(일명 원서, 1836~1866, 요셉/베드로)과 1866년 8월 28일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1806~1866,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열 명의 순교자가 묻혀 있으며, 이들과 함께 수많은 순교자들이 천호산에 종적을 알리지 않은 채 묻혀 있다. 천호 성지는 성인들의 묘와 순교자들의 묘뿐만이 아닌 한국 천주교의 큰 핵으로 자리 잡고 있는 성지다.
천호 성지에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성인이 묻힌 것은 1867년이었다. 세 성인이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에서 함께 거주하다가 체포되었고, 같은 날 한 장소에서 처형되었다. 생전에 친분도 두터웠는데, 그들 가족이 천호 마을로 피신해 살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이명서는 세 성인들과 한 날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였지만 다른 곳(진안 어은동)에 묻혀 있다가 1988년 이곳에 안장되었다.
관아에서는 여산 순교자들을 처형한 후 미나리꽝에다가 집어 던졌다. 그래서 신도들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야음을 틈타 목숨을 걸고 건져 내었다. 순교자들의 시체를 거둔 신도들은 이들을 묻을 장소로 천호산을 택했다. 어떤 순교자들은 야음에 천호산으로 짊어지고 와서 묻었지만 어떤 순교자들은 다급한 나머지 적당한 곳에 가매장했다가 훗날 전주의 순교자들 곁에 묻었다. 천호 성지 성인들 묘소 아래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를 볼 수 있다. 그 순교자들 모두가 이곳 여산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천호 성지는 150여 년의 전통을 가진 교우촌 천호 공소의 천호산 기슭에 있다. 천호 마을이 형성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였는데 주로 충청도 신도들이 목숨을 보존하고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이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비롯되었다.
신도들이 처음 마을을 이룬 곳은 성인들의 묘지 맞은편 골짜기인 무능골이었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후 골짜기 밑으로 마을을 이루었다가 다시 서서히 아래쪽으로 내려와 현재의 마을터를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호 성지 지역에는 박해 시대에 다리실 공소를 포함한 총 7개의 공소가 있었다. 이 공소가 구성된 각 지역은 《택리지》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산세가 험해 사람이 살 수가 없는 곳이라 말할 정도로 첩첩산중에 묻혀 있었다. 이런 곳으로 숨어 들어와 밭을 일구고 기도 생활을 하던 교우들의 피와 땀이 지금의 한국 천주교를 일구었다.
전주교구는 1984년부터 천호성지를 개발하여 1985년 11월 30일 자치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선포일에 맞추어 성지를 축성하였고, 50주년 기념의 해인 1987년에는 전주 교구민들이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이어받기 위한 신앙의 수련장으로 피정의 집을 세웠다. 이곳은 천호산 기슭에 형성되었던 박해시대 교우촌의 옛 터와 주변 환경이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 되어 있어서 그 시대 교우촌의 입지적 특성을 보여 주는 교육장으로서도 가치가 있다.
◆ 천호 공소(다리실·용추네)
천호 공소는 다리실 또는 용추네라는 다른 지명을 갖고 있는데, 박해시대에는 다리실 또는 용추네라고 불렀다. 다리실은 월곡(月谷)이라고도 썼으며, 용추네는 본래 용이 등천한 내(川)가 있다 해서 용천내라고 했는데 용추네는 용천내가 변한 이름이다. 천호라는 행정명은 후대에 교우 마을이 형성되면서 용천내가 천호로 바뀐 듯하다.
천호 마을이 형성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였는데 주로 충청도 신자들이 목숨을 보존하고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이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비롯되었다. 신자들이 처음 마을을 이룬 곳은 성인들의 묘지 맞은편 골짜기인 무능골이었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후 골짜기 밑으로 마을을 이루었다가 다시 서서히 아래쪽으로 내려와 현재의 마을터를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호 성지에 묻힌 순교 성인 중, 손선지 베드로와 한재권 요셉은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피신하여 유랑 생활을 하던 중 다리실에 잠시 살았던 적이 있으며,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로 옮겨 그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1866년 12월 13일 손선지 성인이 처형된 후 그의 아들 손순화(요한)는 70여세 된 할머니 임 세실리아와 어머니 루시아와 동생들을 데리고 천호 마을로 다시 피신해 왔다. 이 때 성 한재권과 성 정문호의 가족들은 무능골과 인접한 시목동으로 피신해 왔다.
◆ 다리실 신앙공동체가 겪은 박해
1868년(고종 5년, 무진년)에는 다리실에도 박해의 손길이 뻗혔다. 그래서 6월 9일 문회장, 이요한, 김치선, 김영문(요셉), 장윤경(야고버) 회장 등 천호 신도들이 여산으로 끌려갔는데, 그 중 장윤경 회장은 1868년 10월 1일(양력 11월 14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 때 손선지 성인의 아들 마태오가 사망했는데, 그 사연은 이러하다.
다리실 신도들이 체포되던 날이었다. 손선지 성인의 아들 마태오는 병으로 앓아 누운지 스무날이나 되어 피신하지 못하고 집에 있다가 포교 일행에게 발각되었다. 그들은 마태오를 욱지르며 신도들이 도망간 곳을 대라고 하다가는 체포한 신도들의 압수한 재산을 가지고 여산 관아로 갔다. 그날 밤 마태오의 큰형 요한은 환자가 걱정이 되어 집에 왔다가 환자로부터 포졸들이 남기고 간 말을 듣고는 환자인 마태오를 데리고 산 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그런데 마침 장마철이어서 찬비를 맞으며 3, 4일을 지내고 나니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포졸들이 찾아 올 것이 두려워 자기 집으로는 가지 못하고 남의 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마태오는 불안해서 산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 뿐 다른 생각이 없었다. 요한은 환자가 무엇이든 먹어야 살 것 같아 음식을 주었지만 먹지를 못하더니 마침내 풍증(風症)으로 1868년 6월 12일 1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입전으로는 이런 말이 전해 져 오고 있다. 환자가 몹시 앓고 있는데 포졸들이 다시 마을에 와서 집을 뒤지고 다니다가 환자와 요한이 숨어 있는 집 울안에까지 왔다. 환자는 고열의 고통을 못 이겨 신음하고 있던 터였다. 형 요한은 발각되는 날에는 숨은 곳이 발각되어 떼죽음을 당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환자의 신음소리가 새 나가지 않도록 이불을 덮어 씌워 누르고 있다가 포졸들이 떠난 후에 이불을 걷어 보니 질식해 숨져 있더라는 것이다.
박해시대에 천호산 기슭에는 다리실(용추네=천호), 산수골, 으럼골, 낙수골, 불당골, 성채골, 시목동 등 7개의 공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리실, 성채골, 그리고 후대에 터를 옮겨 새로이 시작한 산수골 공소만이 남아 있는데 이들 공소 중 다리실 공소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공소이다. 1877년 한국천주교회에는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밖에 없었는데, 블랑 신부는 1877년 으럼골을 사목활동의 거점지로 하여 정착한 후, 리우빌 신부와 라푸르카드 신부 등 3명의 선교사가 10여년 동안 이곳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이들 선교사들이 주로 머문 곳은 천호 공소였다. 오늘의 천호 공소는 150여년의 전통을 지닌 교우촌 답게 주민 전체가 신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 초라한 나의 목숨에도 (천호산에서) <김영수> ▒
아늑히 하늘 담은 항아리 천호산(天壺山)
하늘 부르며 떠났다는 천호산(天呼山)
골짜기엔 씻은 불빛 가득합니다
나는 침묵의 난로 지피며
사랑하는 법 물어봅니다
죽는 법 알아봅니다
초라한 나의 목숨에도
죽음의 작은 무지개 하나 휘어진다면
그 눈물 청결한 곳에서는
나의 사랑도 깨어날 것입니다
바람들 불어와도 지쳐 쌓여도
곧 기도가 되는 골짜기
나는 여기 향기 속에서
기적 꿈꾸지 않고
다만 벌거벗은 기도 하나로
이곳 천호산에 오래 머물고 싶습니다
■ 순교자
◆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1801∼1866)
‘계식’으로도 불렸던 정문호는 충청도 임천 출신으로, 고향에서 교리를 배우고 입교하여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박해를 피해 여러 지역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 무렵에는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정착하였는데, 품행이 단정하고 성품이 강직하여 교우들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평판이 좋았다. 1866년 12월 초 사람을 시켜 전주 감영의 동태를 살피게 하였지만, 미처 소식이 돌아오기도 전에 손선지, 한재권 등과 함께 체포된 뒤 12월 13일에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되어 6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그는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오늘 우리는 천국으로 과거 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 하며 진심으로 순교를 기뻐하였다고 한다.
◆ 성 손선지 베드로 (1820∼1866)
‘승운’이라고도 불렸던 손선지는 충청도 임천의 ‘괴인돌’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성품이 온순하고 착해 16세 때 정(샤스탕) 신부에게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순교할 때까지 회장직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병인박해 때 그는 전주 지역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에 살면서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12월 5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정문호, 한재권 등과 함께 전주 감영 후면옥에 갇혔다. 신문을 받다가 회장 신분이 탄로나, 관장에게 공소를 거쳐 간 서양 신부들의 이름과 교회 서적의 출처를 대라고 강요당하며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손선지는 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함께 체포된 교우들을 위로하고 권면하다가,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숲정이에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47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았다.
◆ 성 한재권 요셉 (1836∼1866)
한때 ‘원서’라고도 알려졌던 한재권은 충청도 진잠의 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를 본받아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진잠 지역 회장이 되었다. 박해를 피해 전주 대성동으로 이사한 다음에는 직책 없이 교회 일을 하였다. 1866년 12월 5일 손선지, 정문호 등과 함께 체포되자 그의 아버지는 친구를 통해 아들이 석방되도록 교섭하는 한편 감옥을 찾아와 배교하라고 간청하였지만, 한재권은 끝내 아버지의 간청을 거절하고 12월 13일 숲정이에서 31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 성 이명서 베드로 (1821∼1866)
‘재덕’으로도 불렸던 이명서는 충청도 출신으로,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유랑하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몇 해 전부터 전주 성지동에 정착하였다. 1866년 12월 5일 포졸들이 성지동을 습격하자 이명서는 조화서의 피신 권유를 뿌리치고 병든 몸으로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관장은 병자인 이명서를 배교시키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여 가장 먼저 신문하고 혹형과 고문으로 강요하였지만, 그는 배교를 거부하고 함께 체포된 교우들과 열심히 기도하며 순교를 준비하였다. 12월 13일 5명의 교우와 함께 숲정이에서 46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 성 이명서 베드로, 성 손선지 베드로,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성 한재권 요셉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이명서 베드로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의 참 고향이 천국임을 항상 깨닫고 살아갈 수 있도록 빌어 주소서.
○ 성 손선지 베드로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빌어 주소서.
○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나라의 모든 관리들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한재권 요셉과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사회에 참된 정의가 구현되도록 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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