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잘 보앗습니다.
진솔한 글이기에 저의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저는 살아오면서 왜 내가 출가하게 되엇나 ? 하는 물음을 자주 던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왜 세상을 버리고....등등 의 질문을 하며 별난취급을 할때면 ...
나는 왜 이렇게 살게 되었을까? 하고
약간은 특이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적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특별 하지 않은 사람은 없지요.
그러므로 나 또한 사실은 조금도 별난 것이 못된다는 것이지요.
18살때...누구나 그러하듯 그냥 죽음을 생각해 보다가...
죽지 않는 길이 있을까?
하는 기대감 (그때는 간절함 이었겠죠)으로 여기저기 방황하다가 ...
교회도 가보고 동양철학, 서양철학 ,성경등의 서적도 읽어보고 그러다가 불경을 접했는데 느낌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더 알어볼려고 어느 절에 갔는데 ...
거기서 내가 만난 노스님과 젊은 스님은
....그런 질문은 하지마라...
....믿으라
는 등등의 이야기는 하지 않고 이틀 밤을 새워가며 황당한 나의 질문에 해답을 주려고 하였죠.
그래서 그때 나의 생각에
여기는 지금 이해 되지 않더라도
"뭔가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며칠더 있겠다고 말했고
그 며칠이 점점 늘어나서 20년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애초에 "도를 구한다". "깨달음을 구한다". 는등의 거창한 목표가 없이 덜렁덜렁 절에 살게된 내가
이상한게 아니라 , 특별한게 아니라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연 스럽게 사람의 운명은 결정 된다는 것을 ,
이상하게 생각되고 특별하게 생각되는 사람들이 사실은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입니다.
기독교인도 불교인도 무슬림도 무종교인도 모두 특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두 그냥 우리 부모요, 형제요, 동네친구요, 형님,동생이라는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번 곰곰히 그 이유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뭐가 특별한지?
........
그리고 설명해야 합니다.
이해 시킬수 없는 특별함은 독단이 될것이고
스스로 이 사회에서는 소외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 특별함에 인간이 끌려 다니고 있지요.)
믿음이 없는 사람은 몰라!
우리의 종교 밖에 구원은 없어.라는
사람은 스스로를 특별하게 만듭니다.
깨닫지 않은 사람은 몰라
나는 깨달았으니 나를 믿고 따르라.
라고 말하는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됩니다.
이곳에서 [이해의 길]을 강조하는 것은
평범한이야기,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것입니다.
특별해지지 말자는 것입니다.
인간이 언어를 만들었지만 그언어들에 의해서 인간이 구속당하고 있습니다.
[언어의 감옥]을 벗어나 보자고 [불립문자]를 외치기도 했지만
그 말마저 문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상식적인 사람은 그런 언어의 가치와 결함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언어에 속지 않고 그언어가 둘러싸고 있는
사상에 속지 않습니다.
이해의 길을 가는 사람은
상식이 통하는 말을 하고
그는 상식을 존중합니다.
과격해지지 않고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나를 따르라 말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종교교육은 먼저 상식적인 입장에서 일반적인 언어로 시작 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이런 결론이나온단다"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보면 다른 결론이 나오기도 하지"
라는 자연스러움으로 ....
우리나라는 종교도 배타적이고 편협하고
교육도 획일적인 편입니다.
그러다보니 다양성은 없고
옳지 않으면 틀리고 구원 아니면 지옥이 됩니다.
영남아니면 호남이고 남한 아니면 북한 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 국민은 종교의 희생자요, 자본의 희생자요, 이데오르기의 희생자들 입니다.
우리가 편협해지지않고 획일적이지 않고 상식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이러한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사회를 위해, 그런 형님과 아우가 되기 위해 ....
우리는 평범해 져야 합니다.
....()
[덧붙임]
약간의 글을 덧붙입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글을 올리신 분의 의견에 충실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간것 같습니다.
저도 텔레반에 잡혀있는 분들의 무사 귀환을 바랍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곳에 가게 된 사연이 순수한 봉사정신과 인류애를 이유로 한 것이 아니라
봉사라는 이름의 공격적인 선교 활동에서 라고 보는 입장에서 이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내게 좋은 것이니 남에게도 좋겠지....
라는 아만과 어리석음을 버릴때
비로서 그들이 말하는 봉사와 사랑이 살아날 것입니다.
첫댓글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수 있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쉽게 내비치는 모습으로 될까봐 다소 은폐하듯 글을 쓰기가 다반사인 인터넷에서 이렇게 마음을 열고 답글 주셔서 또한 감사합니다.평범한 모습을 강조하심에 동의하며 노력해야겠다는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이기적이지않은 그 적당한 흐름에 몸을 맏기고 살기가 쉽지않군요. 이해될때까지 기다려야만 될까요? 고단한 삶의 여정에 기대고싶은게 종교만은 아니겠지요. 또다른 생각에 며칠 들어앉아야 될까 싶습니다. 건강하세요.
Our life is not completed yet! But, it is under construction! 자연스러움! 폭풍이쳐 스나미로 싹쓰리하는 것도 자연스러움입니다. 아직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참으로 자애롭고 인자한 형이었는데, 한번 죽음을 넘나든 경험이 있는 형을 보면서 그 분은 이해주의자에서 완젼히 믿음의 종교로 급선회한 경우를 보았습니다. 무어라 설명하여야 될지 참 쉽지는 않지만 각자에게 맞는 위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그것이 불교이던 기독교이던 동이인의 신교이던 무교이던 그것은 독자의 몫입니다. 그리고 각 종파는 자기들 나름의 독특한 선교와 봉사문화가 있는 것 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상식의 기준은 무엇일까요...?..한 말씀 듣고 싶습니다....요즘은 그 상식이란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의 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쭙습니다...()
상식도 어떤 문화의 틀에 영향을 받는 보편적인 원리의 하나라고나 할까요? 우리에게 젓가락이 상식이라면 서양인에게는 포크가 상식이며 이슬람에게는 손이 상식입니다^^그래서 충돌은 피할 수없으나 최소화함도 중요하겠지요^^
^^ 답글 감사 드립니다...후박나무님의 말씀도 듣고 싶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가게 된 사연이 순수한 봉사정신과 인류애를 이유로 한 것이 아니라 봉사라는 이름의 공격적인 선교 활동에서 라고 보는 입장에서 이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동의하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어떤 공격적인 선교는 없습니다. 그들이 총을 들고 선교를 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과 의료봉사! 또렷이 명상하여 보시길!!! 그들은 젊은 날에 예수의 십자가 정신을 가슴에 품고 순수한 열정으로 아프간에 갔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선교와 봉사를 위하여 아프간에간 그들을 폄하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다른 방법도 많은데 ...아무 보호 조치도 없이 많은 여자분들까지..그렇게 모험을 감행할 필요가 있었을까요...인간적으로 안타깝고 이해도 가지만,방법적인 접근이 무리한 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하지만,일단 무사히 돌아와야 되고, 잘잘못은 그 다음이 아닐까 합니다..()
아란도님 옛전에 일본에서 일어난 일입니다..._()_ 신실한 기독교인들에게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있었습니다. 예수의 초상화를 발아래에 두고 발고 지나가는자에게 생명을! 피해가는자에게 죽음의길을! 두고 기독교인들을 가려내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많은 신실한 천주인!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예수님의 초상화를 밟지않고 둘러가가다 모두 몰살 당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선택입니다^^
목숨을 걸고 선교(생명의길)와 봉사(사랑)을 실천하고자하는 그들에게는 총이 필요가 없었고 오직 아프간 사람들에게 필요한 의료구급품과 노력봉사 그리고 선교(예수님의 십자자정신)을 전하고자 자신의 생명을 건 행동을 하게된 것입니다.
^^비유하기는 그렇지만...이 분들은 그때 당시 일본 상황은 아니지요...그렇게 되면 소슬님은 아프칸에 가신분들을 선구자(순교자가 더 어울릴것 같네요..상황상으로..)로 만들려고 하고 계시다는 느낌을 갖게 되니까요..그것이 순수한것은 아니지요...이슬람 입장에서는..그리고 순수한 봉사라는 것은 성립이 안되어 버리지요...그들은 선구자가 되지 않아야 살아서 이땅에 돌아올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중국에서 일어나는일: 30대 지하교회 기독교지도자가 20년넘게한일 10대초반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전도하고 감방가고 다시 전도하고 감방가고 오직 이일만한 그!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이해의 길을 이분들에게 갖다드리되어 하나의 잦대로 판단하고 재단할 수없습니다. 한여인의 깨침으로 위그루 신강지역 무슬림지역에 큰 변화가 일어났으니깐요. 현재 중국에 약 8천만명의 기독교인이 지하에서 예배보고있습니다. 중국공산당 3-4세대 지도자들도 다음의 정신적 흐름은 중국기독교인들이 주도할거라는 이야기를 공식적으로한답니다. 그 이유는 옜날 적이었던 예수교개종이 현재 기독교 한명 생기면 애국자 한명이 늘어난다고 보고있습니다.
아란도님 예수의 십자가 정신때문에 죽어야 된다면 많은 크리스쳔 중에 죽을 각오를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현재 아프간 정부가 한국민간 봉사단체에게 가한 인질사건이 아니며 탈레반의 무슬림 정신에 위배되는 인질이라는 극단적 행위가 바르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일본과 시대는 달라도 공히 그들에게는 종교적 자유를 허락치 않습니다. 오로지 무슬림! 오로지 신또! 그만한 이유도 설명이됩니다만! 비무장 봉사단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뒤에서 총부리를 겨누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공격적 선교가 아니라 선교와 여행이 목적입니다.
크리스쳔 중에 죽을 각오를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 선교갔으면 그기서 순교하면 크리스천은 더 열광하고 천국에 빨리가니 고마워 해야되는것 아닌가?
종교는 도그마를 인정합니다^^이것이 상식입니다...._()()()_
그 도그마는 누가 정한 것이고 확립한 것인가요...그리고 그것이 상식이 된다는 것은 어디로부터 기인 한 것인지요...()
어쩔수없으니깐(inevitable) 도그마다! 어떴타 하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각자의 신념은 다르며 존중되어야된다고 봅니다. 이신념이 종교라는 틀 속에 넣으면 도그마가 아닐까요. 소슬이 하나님을 인정하듯이! 고타마 싯달타의 제자들은 무신론 즉 아트만을 극력 불인정하듯이! 인도 2000년 철학사에 기니긴 논쟁! 무아와 진아의 결투! 우리는 이러한 현실 속에 어찌하여야 될까요? 저는 이렇습니다. 자비와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는 길!.._()__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만세! 예수인도 불교인도 종교전쟁없는 우리나라만세! 우리 모두 다함께 뭉쳐 남과북이 손잡고 3-4만불 국민소득 이룩하여 선의의 전도와 접법의 깃발을 향하여 모두 다함께 차한잔하시길...차한잔올립니다^^
구출해 오면 반드시 비용을 인질들에게 물어야 정의가 바로선다
선교와 순교를 말씀하시는 분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는 억류되어 있는 그 사람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철저히 느끼고 있는가? 과연 나는 억류되어 있는 그 사람들의 가족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철저히 느끼고 있는가? 과연 나는 억류되어 있는 그 사람들을 억류하고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나의 심정처럼 철저히 느끼고 있는가?
지도리님은 느낍니까?.느낀다면 거짓말이라고 봅니다.우리 하루에도 수없는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일상은 웃음으로 넘칩니다.나와 관계가 없기 때문에..꼭 같은 상황을 당하지 않고는 모르기 때문이기도하다.
불교에서는 한마음이라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창조하였다고 합니다. 그말은 즉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동일성 내지는 공통성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억류되어 있는 분들조차 저마다 동일한 심정과 서로 다른 심정을 함께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모두가 다 같을 수는 없고 또한 모두다 다를 수도 없습니다. 비록 그들과 동일한 상황이나 동일한 심정은 아닐지라도 사람들은 각자의 경험을 미루어 타인의 심정을 어느정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 가늠으로 느끼는 것이 모두 같다고 할 수도 없겠지만 전혀 다르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참말이 될 수 없고 느낀다고 해서 거짓말이 될 수없습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그 가족들의 아픔을 느낍니다. 저자신도 주위사람들의 불행으로 인하여 탈레반 같은 x을 죽이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요. 그럴 수 없으니 무력감에 빠지고 절망에 이른 적도 있었습니다. 저만의 괴로움과는 또 다른 색깔의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 모두가 스스로 짊어진 짐이라 할지라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들은 있기 마련인가 봅니다. 물론 지금은 많이 벗어났습니다. 아마도 완전히 벗어난다면 저도 성불하겠지요 ^^
좀더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들의 삶이나 억류되어 있는 상황에서의 그분들의 삶이 그렇게 다른 것도 아닙니다. 모습이 다를 뿐, 그분들의 현재 상황은 우리들의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축소판입니다. 제 말뜻을 잘 생각해 본신다면 분명히 스스로 알아지게 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철저히 느끼는지 자문해 보라고 말하는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스스로의 삶에 대하여 혹은 타인의 삶에 대하여 허상을 버리고, 관념을 버리고 진실과 순수에 대하여 자각하고 그 자각을 바탕으로 용기있게 선택하자는 취지입니다. 그러한 자각과 용기가 있다면 거짓이 아니고 참됨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허상과 헛된 생각들에 휘둘린다면 언젠가는 닥치게 될 뼈저린 고통을 감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선교 혹은 순교와 무모한 모험과의 차이점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함에 있어서도 위 와같이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을 뼈저리거 못 되니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것입니다.
뼈저리게 못된다고 생각할 필요없습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고도 생각할 필요없습니다. 위에서 후박나무님께서 너무도 친절하게 그 이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특별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스스로 몰두해가다보면 반드시 좋은 소식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차별성과 공통성을 아는 것이 상식이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차인]으로서 공통성을 가졌지만 녹차,중국차 등 각자 선호하는 것이 다르지요. 그래서 어떤 것을 보아도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보면 흑백논리를 벗어나게 될것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