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수요일
잘했다. 너는 착한 종이로구나.
네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으니
나는 너에게 열 고을을 다스리게 하겠다. (루가 19,1-28)
Well done, good servant! You have been faithful in this very small matter; take charge of ten cities.’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이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임금의 종교적 박해를 받던 시기에 일곱 아들을 둔 한 어머니는 아들들이 단 하루에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는다. 그는 아들들에게 박해자를 두려워하기보다 하느님을 경외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서 ‘미나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귀족이 열 명의 종에게 각각 한 미나씩 나누어 주며 벌이를 하라고 명하지만, 그것으로 벌어들인 돈은 다르다. 귀족은 벌이의 성과에 따라 고을을 통치할 권한을 종들에게 나누어 준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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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비유는 주인의 처지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인은 자신이 머지않아 임금이 될 것이지만, 백성이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임금이 된 뒤 어떤 신하를 둘 것인지, 어떤 사람에게 각각의 고을을 맡겨야 할 것인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그가 자기 종들에게 각각의 고을을 다스리는 중책을 맡긴 것은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당시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고을을 다스리기에는 종의 신분이 너무나 미천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인은 종들에게 고을을 다스릴 권한을 주고자 열 미나를 각각 나누어 주며 그것으로 벌이를 하라고 합니다. 한 미나가 백 일 동안의 품삯임을 감안하면 상당한 금액입니다. 이처럼 주인은 종들에게 큰돈을 맡기며 그들의 성실한 태도와 능력에 따라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까지 줄 정도로 종들을 신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주인을 믿지 못하는 종이 있었습니다. 그가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사실 주인은 냉혹한 사람이 아니라 종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종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백성이 그 주인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을 신뢰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믿은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요한 1서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4,18).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두려운 분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신뢰하시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고, 그 선물을 통하여 더 큰 것을 주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신뢰하시는 하느님을 우리 또한 굳게 믿고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위대한 어머니
-양승국신부-
우리나라 부모님들처럼 성장기 자녀들을 위해 그야말로 ‘올인’하는 분들도 없는 것 같습니다. 정말이지 자녀를 위해서라면 ‘저돌적’입니다. 자녀를 위해 이 한 목숨 희생까지도 할 태세입니다. 그러다보니 그 ‘자녀사랑’이 너무 지나쳐 집착이 되고 ‘아이 어른’을 만들기도 합니다. 나이 서른 마흔이 되어 겉모습은 멀쩡한 어른인데 대화를 해보면 아직 아이인 어른 말입니다.
알고 지내는 교수님들, 기업체 임원들로부터 가끔씩 듣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우스갯소리로 그러는가 여겼는데 진짜랍니다. 교수님 한분은 한 학생의 극성 어머니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랍니다. 수업태도나 답안지가 영 아니어서 성적을 낮게 매겼더니 어머니가 전화해서 대판 항의를 하더랍니다. 기업체 임원께서는 한 신입직원의 부모로부터 항의전화를 받고 뒤로 넘어지는 줄 알았답니다. 항의의 요지는 ‘왜 자기 아들을 그렇게 늦게 퇴근시키는가? 왜 그렇게 어려운 파트로 보냈느냐?’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자녀 사랑이 지나쳐 과잉보호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식이 원하는 것이라면 전국산천을 다 뒤져서라도 사다주고, 자녀가 직접 할 수 있는 일들조차 사사건건 대행해주다보니 나이 들어서도 난감한 일을 부모가 대신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자녀들은 스스로를 쳐다보며 ‘내가 혹시 전생의 왕자인가?’ 착각하면서 귀공자처럼 살아갑니다. 배려나 자기 성찰, 책임감은 찾아볼 수 없고 편리주의, 특권의식, 극단적 자기중심주의만 남아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바라보면서 우리 부모들께서 자녀들에게 물려줄 것 중에 가장 큰 유산이라면 어떤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자녀 한 명당 한 100평되는 아파트 하나 물려주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자녀 한명 당 20억 정도씩 통장에 남겨주면 좋아들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모들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하며 안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큰 오산입니다. 재산이란 것, 있다가도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이 재산입니다. 대단해 보이는 부동산도 사라지려고 하면 순식간입니다. 결국 자녀들에게 물려주면 좋을 가장 좋은 유산은 신앙입니다. 그냥 신앙이 아니라 제대로 된 신앙, 참된 신앙, 살아있는 신앙 말입니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다보면 갖은 역경 앞에 서게 됩니다. 갖은 우여곡절을 겪는 거지요. 일이 잘 풀려나가다가도 한 순간에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쳐지기도 합니다. 그 순간 좌절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다시금 일어설 줄 아는 낙관적인 인생관, 긍정적인 삶의 가치관을 지니게 해주는 것, 그것보다 더 큰 유산은 없습니다. 그 역할을 해주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바로 종교입니다. 신앙생활입니다.
살면서 고통이 다가올 때, 시련이 찾아올 때도,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신앙, 어떤 역경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낙관적인 삶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처럼 좋은 선물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제1독서인 마카베오기에 등장하는 일곱 형제의 어머니는 정말 위대한 어머니, 모든 신앙인들의 모델이 되어야 할 모범적인 어머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현실적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때 그녀처럼 기구한 어머니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녀는 적대자 안티오쿠스 앞에서 이미 6명의 자녀를 잃었습니다. 끝까지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은 그녀의 여섯 아들을 폭군은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학살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아들은 오직 한명, 막내였습니다. 아무리 신앙심이 대단한 어머니였지만 막내만큼은 살려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폭군도 은근슬쩍 타협을 제안합니다. 막내만 배교하도록 설득하면 막내뿐만 아니라 어머니까지 살려줄 것이며 벗으로 삼고 물 좋은 자리까지 제공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끝까지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녀는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가는 것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끝까지 주님께만 희망을 둡니다. 그녀는 조상들의 언어로 아들 하나하나를 격려하며 먼저 하느님께로 떠나보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막내아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들아,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어떤 분으로부터 우표 한 장을 사기 위해 적금을 붓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우선 그렇게 비싼 우표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또한 이렇게 비싼 우표 한 장을 구하기 위해 적금까지 부을 정도의 정성을 쏟는 이 분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꿔서 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저 역시 제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투자를 하려고 하니까요.
저는 자전거 타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또 많이 탑니다. 그러다보니 조금 더 좋은 자전거를 타고 싶어 하고, 그래서 비싸더라도 구입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자전거에 대해서 관심 없는 사람은 저의 이런 모습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 사치를 부리고 있다면서 비판하시지 않을까요?
아마 자신이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가격이 문제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는 가격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가장 중요한 나의 구원을 위해서는 얼마나 큰 노력을 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신의 취미 활동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까지 모든 정성과 투자를 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곳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나의 노력과 투자는 어떠했을까요? 혹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하느님께 불평불만만 늘어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미나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화폐의 단위가 바뀌었을 뿐, 지난 주일의 탈렌트 비유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 볼 때 조금 다른 가르침을 우리들에게 전달해 줍니다. 우선 1탈렌트는 노동자가 6,0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입니다. 상당히 큰 액수입니다. 그런데 미나는 탈렌트의 1/60에 해당하는, 즉 노동자가 100일 동안 일해서 벌어들이는 액수에 해당합니다. 탈렌트에 비해서 적은 액수라고 말할 수 있지요. 이렇게 루카 복음은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은 엄청나게 큰 보상을 받는다는데 역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충성스럽지 못한 종은 벌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똑같이 1미나 씩을 줍니다. 이에 대해 3부류의 종이 있었나 봅니다. 1미나를 10미나로 만들만큼 재능을 많이 발휘한 사람, 또 1미나를 5미나로 만들었던 조금 덜 재능을 발휘한 사람, 마지막으로는 1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하는 전혀 재능을 발휘하지 않고 딴전을 부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재능을 발휘하지 않은 이 사람은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하지 못했는데도 자신의 잘못을 주인에게 돌리지요. 주인을 무자비한 폭군으로,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이기주의자로, 돈만 아는 수전노로 몰아붙입니다.
우리도 이 마지막 사람과 같이 불충한 모습을 간직하곤 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다 하려면서 정작 주님의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오히려 불평불만만을 던지면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합니다.
이제 주님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내 구원을 위한 가장 훌륭한 준비이니까요.
거장은 기술이 아닌 열정 때문에 위대하다(마사 그래햄).
우리 안에 있는 자캐오의 상황
-안승태신부-
세관장이고 부자였던 자캐오는 외로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식민지 상황에서 세금을 거두어 로마 총독에게 바치는 세리, 세관장은 유다인들에게는 죄인처럼 여겨졌고, 세리들 중에는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착복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합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특별히 소외받는 죄인들과 병자들에게 베푸셨던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소문을 자캐오가 들었을 테니까요. 예수님께서도 자캐오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이름, 그가 누구이며 부자이지만 행복하지는 않은 그의 상황을.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 정성을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 에 머물러야 하겠다.” 우리의 삶도 자캐오와 비슷합니다. 무언가 채우려고 열 심히 노력하지만,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갖게 되는 시점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자캐오의 상황’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을 예수님께서 채워 주러 오십니다. 군중이 많고 키가 작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자캐오처럼 우리도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으로 우리 주변에 심어 주신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야 하겠습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미나의 비유 이야기인데 비슷한 내용이 마태오복음 25장에서는 탈렌트의 비유로 나와 있습니다. 이 복음처럼 비유가 나올 때는 묵상을 통해 그 깊은 의미를 알아들으려고 애쓰는 것이 도움이 되겠습니다.
비유의 전체적인 의미 파악에 힘을 쏟아야 하겠지만 몇 가지 점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먼저 이 비유의 배경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이와 관련해서 미나의 비유 전체 맥락을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셨고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가 곧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 비유를 들고 계신 것입니다. 또 백성은 그를 미워해 그 사람이 자기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점도 비유 전체의 맥락을 짚는 데 참고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열 미나를 번 사람과 다섯 미나를 번 사람을 어떻게 대접하는지 살펴보면서 영신적 유익함을 길어 올릴 수 있겠습니다.
이어서 한 미나를 그대로 수건에 싸 보관해 뒀다가 가져온 사람에 대해 생각을 깊게 해봐야 하겠습니다. 열 미나나 다섯 미나를 번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특히 주인에 대한 그의 언급과 관련하여 열 미나, 다섯 미나를 번 사람들의 주인에 대한 태도 또는 관점과 비교해 볼 일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주인이 한 미나를 그대로 가져온 이를 향해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고 한 말을 제대로 알아듣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이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말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끝으로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는 말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도 숙고해 보고 영적 유익을 길어 올려야 하겠습니다.
능력은 다르게 사랑은 똑같이
-김찬선신부-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루카복음의 오늘 비유는 마태오복음과 다릅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가 주어집니다. 이에 비해 루카복음에서는 똑 같이 열 미나가 주어집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각기 달리 주어졌기에 달란트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달리 주신 재능, 능력으로 이해됩니다. 인간의 능력을 보면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똑 같이 주어진 열 미나는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사랑과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우리가 가진 것 중에서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개성과 능력은 각기 다르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개성과 능력을 달리 주셨다고 해서 사랑과 은총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각 사람에게 각기 다른 은총, 은사가 주어졌지만 그 은총이 누구에게 더 많이, 누구에게 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누구는 하느님께서 더 사랑해서 이런 사랑이 주어지고, 누구는 덜 사랑해서 저런 은총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선인이나 악인이나 똑 같이 비를 내려주시고 햇빛을 내려주시니 분이시니 인간을 차별하실 리 없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차별하신다니 말이 됩니까? 당신이 창조하지 않으신 것이 있다면 친 자식과 의붓자식을 차별하시겠지만 당신이 다 창조하셨는데, 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존재들인데, 누구에게 은총을 더 주시고 누구에게 은총을 덜 주실 것이며, 누구를 더 사랑하고 누구를 덜 사랑하신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똑 같이 사랑을 주시고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은총이 결실을 이루는 것은 우리 하기 나름입니다. 오늘 비유에서처럼 어떤 사람은 열 미나로 열 미나를 만듭니다. 어떤 사람은 그보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같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수많은 생명을 낳고 살리기도 하고 같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한 생명도 낳지도 건지지도 못할 수 있습니다.
같은 하느님의 사랑인데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이고, 똑 같이 사랑을 주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다른 은총을 작은 은총으로 오해하거나 다른 사랑을 적은 사랑으로 오해하면 은총과 사랑의 열매가 적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이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악한 종처럼 하느님을 좋으신 분이 아니라 나쁜 분으로 이해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선이 아니라 악으로 이해하면 적은 열매가 아니라 아예 나쁜 열매를 맺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걱정을 버리고
- 김수만 신부 -
우리는 고난과 시련이 닥쳐왔을 때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겁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고난과 시련은 자신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고, 더욱더 굳건하게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저에게만’, ‘왜 이런 일에만’, ‘왜 하필 지금’이라고 말합니다. 왜 우리는 걱정과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것일까요? 왜 감사한 마음으로 항구한 노력을 하는 삶을 살기가 쉽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미나의 비유’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미나의 비유’에서 중요한 점은 불어난 ‘미나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점은 바로 그것을 성실히 활용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양은 달라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쓸 수 있도록 충분한 은총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주시는 ‘하루라는 한 미나’를 일상 속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하느님 뜻에 맞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혹시 우리는 걱정부터 앞서는 것은 아닙니까?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나만의 방식으로 삶을 재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 걱정은 책상 위에 쌓이는 먼지와 같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먼지는 책상을 뒤덮어 버릴 만큼 쌓이게 되지만, 마음먹고 깨끗하게 청소하고 털어내면 먼지는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한번 털어냈다고 먼지가 쌓이지 않는 것이 아니듯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잘 살펴보고 마음의 청소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우리 마음 밭의 먼지를 훌훌 털어버리고 깨끗하게 청소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종처럼 하느님이 주신 은총으로 가득한 ‘하루라는 한 미나’를 땅속에 묻어두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제1독서의 일곱 형제의 어머니처럼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그 마음과 그 사랑을 느끼면서, 자랑스럽고 떳떳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하루를 삽시다!
충실한 관리
-안문기 신부-
강조하거나 다급하게 경고할 때, 비유를 드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서 돈 관리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당장 올 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선 중요한 것이 하느님을 맞는 자세라는 것을 강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느님 나라는 은총이고 선물이지만 그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의 뜻은 간단합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그동안 종들이 관리를 잘했는지 셈을 하게 되는데 그때 자기 일에 충실한 종은 상을 받고, 불충실한 종은 벌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자기 책임을 다하라는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충실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를 권고하십니다.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성실히 일하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주인이신 주님께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떠십니까?
-김찬선신부-
주님은 오늘 복음의 비유를 통해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일까?
오늘 비유는 우선, 하느님 재산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가르치려하심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왜 당신 재산을 우리에게 맡기실까? 당신이 직접 관리하시지 않고 왜 우리에게 맡기실까? 하느님께서 당신 재산을 우리에게 맡기심은 당신을 위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를 위한 것일까? 그리고 이것 말고도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재산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비유에서 말하는 미나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오늘 비유를 액면 그대로 이해하면 주님은 한 미나를 주시고 우리에게 돈을 벌라고 요구하시는 분이고 그 결과를 나중에 따지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정말 당신의 재산을 증식하기 위해 우리 인간에게 돈을 빌려주시는 분이실까? 오늘 비유의 세 번째 사람은 하느님을 이런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우리를 상대로 악착같이 돈벌이를 하시는 분. 능력은 조금 주시면서 많은 성과를 요구하시는 지독한 분. 은총은 베풀지 않고 우리의 봉사와 희생만 요구하시는 분.
그러나 이 세 번째 사람을 주님께서 나무라시는 것으로 보아 하느님은 이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왜 우리에게 당신의 미나를 맡기시고, 미나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생각에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미나를 맡기시는데, 미나는 다른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는 분이고, 그러므로 그 은총은 우리에 대한 사랑의 표시이며 사랑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주신 사랑은 우리를 흡족케 할 뿐 아니라 마치 유산균이 저절로 증식하듯 커지고 불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은총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을 할 경우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랑이 은총이 아니라 원하지도 않는데 맡겨진 짐이라면 하느님의 사랑은 그 풍요와 활력과 찬란함을 잃고 나의 가장 음침한 뒷방에 처리 곤란한 짐짝처럼 잠들어 있을 것입니다. 유산균으로 치면 그 균이 다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다. 사랑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사랑이 얼마나 좋은지 맛보지 않으시렵니까? 사랑이 없는 것보다 사랑이 있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미워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훨씬 좋지 않습니까? 사랑할 수 없는 사람보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아주 단순하고 유쾌하고 쉽습니다. 그런데 왜 사랑을 그렇게 짐스럽게 생각하고, 왜 그렇게 사랑하기 어려워하고 힘들어합니까?
나를 더 사랑하기 때문일까요? 사랑보다 더 좋은 것이 있기 때문일까요? 한 번도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요? 사랑 받았지만 진정한 사랑은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인간인 내가 그럴 수 있고 인간인 나의 부모와 형제와 친구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떠십니까?
사랑, 삶의 힘!
-전삼용신부-
로사리아라고 하는 저의 왕팬 할머니에게 가끔 전화가 옵니다. 그 할머니는 저의 사진을 보면서 매일 기도하고 사진 속의 저와 이야기를 하실 정도로 저를 좋아하십니다.
전에 세례 받으신 지가 얼마 안 되시는지라 저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물으셔서 저는 성체 앞에 시간을 정해 놓고 매일 앉아서 예수님 만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리가 좋지 않아 매일 성당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성경을 필사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제가 유학 나올 때 2년 만에 들어오라고 하시면서 그 동안 당신은 성경필사를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2년 만에 끝내고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약속대로 1년 8개월 만에 신구약 성경을 모두 필사하여 상을 받았습니다.
다리가 아프셔서 제대로 걷지도 오래 앉아있지도 못하시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쓰셨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본당 신부님도 건강 생각하셔서 그만 쓰실 것을 권유하였지만 그 할머니는 끝까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쓰신 것입니다. 저도 성경 필사를 조금 해 보아서 젊은 사람에게도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압니다. 그런데 갓 세례 받으신 팔순이 다 되시고 건강도 안 좋으신 분이 일 년 반 만에 신구약을 완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은 그렇게 빨리 쓸 수 있었던 이유가 저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 분이 성경필사를 하도록 권유한 것 밖에는 해 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저 때문에 쓸 수 있었다고 하시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다른 사람들 칭찬 다 받았으니까 이제 신부님도 칭찬해 주세요!”
할머니는 저에게 칭찬 한 번 들으려고 그렇게 쓰신 것입니다. 저는 참 대단하시다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합니다.
‘사랑이 곧 힘이구나!’
오늘 복음에서 주인은 종들에게 한 미나씩을 맡기고 떠납니다. 다른 종들은 열심히 일을 하여 좋은 결과를 내었는데 한 종만이 그것을 묻어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 종은 그것을 이용해 돈을 벌려 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이렇게 변명합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종은 주인을 냉혹하고 무서운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주인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좋아하지도 않는 주인을 위해 자신이 고생하며 재산을 늘려 줄 이유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니 무기력하고 게을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일 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로사리아 할머니가 저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 성경필사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 노력의 결과는 다 자신이 갖는 것입니다. 저는 그저 저를 사랑하는 힘으로 그 일을 이루어 낸 것만을 보면서 기뻐합니다. 제가 무엇을 받아서 기쁜 것이 아니라 그만큼 저로부터 힘을 얻어서 큰일을 이루어 낸 것을 보는 것만으로 기쁜 것입니다. 주님과 저를 사랑했다는 증거는 그만큼 부지런하게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무엇을 얻으려고 우리를 창조하시고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좋은 열매들을 맺으면서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가 그 분을 사랑한다면 부지런히 그 분을 위해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왜 이렇게 고생하며 살아야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내 ‘그 분이 원하시니까.’라고 대답하며 다시 일을 시작합니다. 살아가는 힘은 갖고 싶다고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을 사랑함으로써 저절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기력을 없애고 활기차게 사는 방법은 그 분을 더 사랑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면 저절로 힘이 날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산다면 우울증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구원을 주신 하느님을 위해서 산다면 기쁨과 힘이 넘칠 것이고 힘든 일도 거뜬히 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믿는 사람은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들은 주인을 사랑하는 만큼 열매를 맺었고 주인은 마지막 날에 그 사랑의 정도에 따라 보상을 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도 똑 같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매일매일 주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 외에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노력해야 생명을 보존한다
-조명연신부-
포기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하지요. 그래서 이런 속담도 있습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두 개의 우유통을 두었는데, 그 두 통에 각각 개구리가 한 마리씩 빠지고 말았습니다. 아침에 주인이 나가 보니, 개구리가 각 통에 한 마리씩 있는데, 한 통의 개구리는 살아 있고 다른 한 통의 개구리는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그는 그 원인을 찾기 시작합니다. '한 놈은 수명을 다해서 죽은 것인가, 원래 헤엄을 치지 못하는 개구리인가?' 그런데 그 원인을 쉽게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즉, 한 개구리는 살겠다고 끝까지 다리를 움직이고 헤엄을 쳐서 우유가 굳지 않아 살았고, 다른 개구리는 처음엔 버둥거려 보았으나 나중에는 포기하여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우유가 굳어져서 죽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처럼 끝까지 노력하는 길이 생명을 보존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어떤 귀족이 종 열 사람을 불러 금화 한 잎씩을 줍니다. 그리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이 돈을 가지고 장사를 해 보아라"하고 말합니다. 그 귀족이 돌아온 뒤, 금화 한 개를 투자해서 열 배, 또는 다섯 배로 불린 사람을 칭찬합니다. 하지만 주인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냥 자기 합리화로 얼버무리려는 종의 금화는 빼앗아서 열 개의 금화를 가진 사람에게 주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언뜻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투자나 부자 재벌을 칭찬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을 칭찬하는 예수님일 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보다는 이런 뜻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들, 예를 들면 우리의 생명,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재능들을 열심히 사용해서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금화 한 개씩을 똑같이 나누어주시듯이,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똑같은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떠합니까? '왜 저 사람만을 더 사랑하실까?'라면서 주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나는 능력이 없어서요'라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외면하고 게을리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원망만 하고, 자기 합리화를 시키려고 노력한다면, 앞서 그 개구리처럼 결국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생명을 잃고 말 것입니다. 마치 게으른 종에서 그나마 받은 한 닢의 금화마저 빼앗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선물을 뺐을 것입니다.
하늘에 기대어 요행만을 바라고, 하늘만 원망하는 신앙인이 되기보다는 사랑의 실천을 게을리 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금화 1개를 다섯 개, 열 개로 늘리게 되어, 우리에게 주어질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10cm 밖에 안되는 팔다리로
-양승국신부-
오토다케 히로타다의 <오체불만족>(五體不滿足)이란 책이 요즘 다시 한번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일부가 새로 개편된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오토다케는 자신만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휠체어를 타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팔다리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선천성 사지절단 장애를 가진 그의 다 자란 팔다리라야 고작 10cm도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토다케는 자신의 신체로 인해 주눅이 들거나 위축되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신체장애에 대해서 "초개성적"이라고 자랑합니다. 한번은 오토다케가 길을 가는데 누군가가 이런 말로 그를 놀렸습니다. "이 팔다리 없는 놈아!" 저 같았으면, 그 순간 너무나 기분이 나쁘거나 마음이 아파 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토다케는 즉시 상대방의 말을 되받아 쳤습니다. "뭐라구? 야, 이 팔다리 있는 놈아!"
이렇게 당당히 살아가는 오토다케가 있기까지는 부모의 노고가 참으로 컸습니다. 오토다케의 부모는 이 특별한 아이를 아주 평범한 아이로 키우고자 노력했습니다. 보통 부모라면 이런 아이가 태어난 것에 대해 굉장히 속상해하고 또 부끄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토다케의 부모는 아이의 탄생을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아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결코 특별한 아이가 아닌 개성 있는 아이로 키웠습니다. 학교도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보냈었고, 모든 학업 뿐 아니라 체육수업, 소풍까지도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경험하게 했습니다.
요즘 오토다케는 10㎝밖에 안 되는 팔다리로 일반인 못지 않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양쪽 어깨로 농구공을 드리블하고, 겨드랑이로 철봉을 껴앉고 턱걸이를 합니다. 글을 쓸 때는 뺨과 어깨 사이에 연필을 끼워 글을 씁니다. 가위 한쪽 끝을 입에 물고 다른 쪽을 어깨로 누른 채, 얼굴을 돌려가며 종이를 자릅니다. 옷 갈아입는 것과 화장실 가는 것만 빼고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결합니다. 오히려 술에 취한 친구를 자신의 휠체어에 태워 지하철역까지 태워 줄 정도였습니다.
오토다케는 일본의 유수한 대학을 졸업하여 유능한 방송리포터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토다케는 끊임없이 도전하는 삶을 통해 세상의 숱한 장애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 있습니다. 또한 왕성한 저작활동을 통해 세상사람들의 기쁨과 희망이 되고 있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머리와 몸통밖에 없는 처지의 오토다케가 건장한 젊은이 100명 이상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선천성 사지절단 장애인인 오토다케를 바라보면서 저는 너무도 많은 것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토다케가 하나도 가지지 않은 팔을 저는 두 개나 가지고 있습니다. 오토다케가 하나도 가지지 않은 다리를 저는 두 개나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유자재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가고 싶은 곳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습니다. 오토다케를 바라보면서 제게 주어진 이 건강한 몸 하나만으로도 저는 참으로 많은 은총을 넘치도록 받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우리 같이 한번 반성해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많은 은총을 넘치도록 받고 또 받았는데, 그 은총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받은 건강, 지식과 재능,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과연 어떻게 활용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참으로 다양한 은총의 선물을 산더미처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처지를 비관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오토다케처럼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닌 이 육신은 머지않아 우리가 낡고 더러워진 옷을 벗어버리듯이 벗어 던져야 할 육신입니다. 우리가 지닌 재물은 머지 않아 우리의 손에서 모두 새어나갈 재물들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이 재능은 머지 않아 그 수명을 다할 이 육신과 함께 땅에 묻힐 재능입니다
"아들아, 너희에게 목숨을 주어 살게 한 것은 내가 아니며, 또 너희들의 신체의 각 부분을 제 자리에 붙여준 것도 내가 아니다."( 마카베오 하권 7장 1절, 20-31)
-양승국신부-
<자나깨나 자식 걱정>
주변을 가만히 둘러보면 많은 사람들이 "걱정", "근심", "조바심"같은 심리상태의 지속으로 삶의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또 자신을 스스로 괴롭힌다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어떤 할머니는 하루 거의 모든 시간을, 아마 결혼 후 삶의 절반 이상을 영감님에 대한 원망과 걱정으로 보내지 않았을까 추측될 정도로 자신의 삶은 뒷전이고 오로지 영감님의 일거수일투족에만 관심이 집중됩니다.
"할머니! 영감님이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셨는데, 걱정하신다고 영감님 습관이 고쳐지나요? 그러든지 말든지 이제 그만 포기하시고, 할머니 여행도 좀 다니시고 계모임도 가입하시면서 재미있게 지내세요. 세상 뜨실 날도 그리 멀지 않았는데, 이제 그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세요" 라고 말씀드리면 "생각해보니 정말 그러네" 하면서도 그 다음에 또 영감님 때문에 잔뜩 속상해 계십니다.
지내고 나서 돌아보면 우리네 삶이란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요. 속절없이 빠르기만 합니다. 서로 위로하고 서로 사랑하며 지내기에도 빠듯한 인생입니다. 기뻐하며 행복해하며 보내야할 소중한 시간들이 걱정과 근심으로 퇴색되고 있음을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모님들이 갖는 걱정, 특히 어머님들이 갖는 걱정 중에 가장 큰 걱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래도 자식걱정이겠지요. 유난히 자식걱정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입니다. 자나깨나 자식걱정에 하루해가 짧습니다. 하루 단 한순간도 자식걱정이란 끈을 놓지 못하십니다.
이런 지나친 자식걱정, 참으로 인간적이고 부모다운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여야지 지나치게 되면 꼴불견이 되고 맙니다. 자식을 향한 사랑이나 관심, 잘되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을 넘어 거의 병적인 집착증세를 보이는 부모님들이 많습니다.
몇 가지 걱정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충분히 납득이 가는 것이지만 자제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갓난아기의 혀를 수술합니다. 영어발음이 좋아지게 하려고 말입니다. 남편의 봉급으로는 부족해서 어머니들까지 아르바이트를 나갑니다. 오로지 자식들 고액 과외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자녀들 이류대학 들어간 것 때문에, 자녀들 떨어지는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셔서 신경정신과에 다니시는 어머니들도 계십니다.
물론 부모로써 자식들을 위한 어떠한 희생도 감수한다는 마음, 어떻게든 우리 자식 남보다 잘 되야 한다는 마음, 참으로 소박하고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여야지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합니다. 자식의 인생은 자식의 인생이고 내 인생은 내 인생입니다. 자식 때문에 내 인생이 채 꽃피기도 전에 시들해질 이유가 없습니다.
자녀들에 대한 지나친 극성 그 이면에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이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자식에 대한 지나친 집착 그 이면에는 자식을 내 소유물로 여기는 그릇된 마음이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부모님들! 자식들에 대한 지나친 욕심과 기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자녀들 낳아서 기르고, 고등학교까지 졸업시킨 것 만해도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있어 가장 좋은 교육이자 투자는 뭐니뭐니 해도 신앙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 두려워할 줄 알게 하는 교육, 지독하게도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지 않게 하는 자녀교육이 필요합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곱 형제의 어머니처럼 고통이 다가오더라고 낙담하지 않고 더욱 꿋꿋이 직면케 하는 자식 교육이 필요합니다.
단 하루에 일곱 아들이 이교인들의 손에 죽어나가는 상황 앞에서도 어머니는 주님께 희망을 걸고 있었기에 모든 고통을 용감하게 견뎌나갔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막내아들에게 들려준 어머니의 당부는 참된 어머니가 어떤 어머니여야 하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들아, 너희에게 목숨을 주어 살게 한 것은 내가 아니며, 또 너희들의 신체의 각 부분을 제 자리에 붙여준 것도 내가 아니다. 이 도살자들을 무서워하지 말고 네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태도로 죽음을 달게 받아라. 그러면 하느님의 자리로 내가 너를 너의 형들과 함께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
십자가가 다가올 때 쫀쫀하게 피하지 않고 기쁘게 지고 가게 하는 자녀 교육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사악한 세상에서 하늘의 별들처럼 빛나는 자녀로 성장시키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공경하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참된 신앙인을 형성시키는 자녀 교육이 필요합니다.
[독서]부활을 희망하며 하느님께 충실한 순교자들 -경규봉 신부 -
안티오코스 왕은 유대교를 없애기 위하여 율법서를 불태우고, 거리마다 우상을 세우며,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율법을 어기도록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어기고 우상을 숭배하였다. 이 때 일곱 형제와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들은 체포되어 왕 앞에서 율법을 어기고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당하며 고문당하게 되었다. 형제들은 모두가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증거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
이제 마지막 아들이 죽임을 당하기 직전에 왕은 어머니로 하여금 자식을 설득하여 목숨을 살리도록 권고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의 율법을 소중히 생각하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도록 자식을 격려한다. 하느님께서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므로 용기를 잃지 말도록 격려한다.
일곱 형제와 어머니는 하나같이 박해자들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었다. 그들은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박해를 받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결코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들에게는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이들은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다시 살리시어 새로운 생명을 주실 것을 굳게 믿었다. 비록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고 죽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임을 믿었다. 영생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그들로 하여금 현세의 고통을 이겨내도록 힘과 용기를 주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삶에 대해 온전히 갚아주실 것임을 믿었다. 그들이 당한 고통에 대해 하느님께서 보상해주실 것이며, 악한 이들은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임을 굳게 믿었다. 따라서 그들의 고통이 클수록 그들이 받을 위로가 클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박해자들로부터 당하는 고문을 이겨내며 극심한 고통을 견뎌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죽음은 모든 것을 앗아가는 허무이다.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살아있는 것만이 전부이다. 그들은 삶에 얽매이며,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현세에서 고통 없이 살고, 쾌락을 누리며 살기만을 바란다.
그러나 죽음이 모든 것이 끝나는 허무라면 삶도 역시 허무일 수밖에 없다. 일찍 죽으나 늦게 죽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잘사는 것과 잘못 사는 것, 착하게 사는 것과 악하게 사는 것,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삶이 허무가 아니기 위해서는 죽음이 허무여서는 안 된다.
믿는 사람은 믿음으로 죽음 너머의 세계를 본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한 사도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믿음을 통하여 죽음 너머의 세계를 본다. 사도 바울로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1고린 13,12)라고 말했다. 지상에서는 믿음으로 보기 때문에 희미하게 보고 불완전하게 알 따름이지만, 하느님을 만날 때에는 얼굴을 맞대고 보고, 완전히 알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익히 아시는 하느님 앞에 떳떳이 서서 심판받을 수 있도록 살자. 때로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갚아주실 것임을 믿고 살아가자..............
어느 부부가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내가 생활비 이야기를 꺼냅니다.
“생활비가 지난달보다 두 배 가까이 나온 것 같아.”
이 말에 남편은 찡그리면서 푸념의 말을 합니다.
“버는 돈은 그대로인데 물가는 오르고 정말 큰일이야.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이야.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라고 정치를 그따위로 하는지. 생각해보면 국회의원들이 더 문제야... 어쩌구저쩌구, 주저리주저리...”
이렇게 남편의 이야기는 생활비를 넘어서 정부를 한바탕 작살내고 국회를 난자하는 수준까지 도달해버렸지요. 이렇게 이야기를 하던 중 아내가 이렇게 한 마디를 했다고 합니다.
“여보, 다 살아있으니까 내는 거야. 죽으면 내고 싶어도 낼 수 없잖아.”
그렇지요. 살아 있으니까 세금도 내고 생활비도 오르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살아 있으니까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고, 나도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요?
“살아있으니까 겪는 갈등이야. 살아있으니까 오해도 생기는 거지. 살아있으니까 짜증도 나는 거야.”
인생이 고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인생은 고통으로 돌려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생이 살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으로 돌려주는 것이 세상의 원칙이라고 하네요. 그렇다면 지금 내가 가져야 할 생각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부정적인 생각일까요? 긍정적인 생각일까요? 당연히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희망을 간직하며 지금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미국의 억만장자였던 폴 마이어가 젊었을 때 월세집에서 쫓겨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나는 부자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 모두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아니 행복합니다. 더군다나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데 왜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 살라고 오늘 미나의 비유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미나는 바로 주님께 받은 선물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똑같은 선물을 받았으나 그 선물을 열 배, 다섯 배로 늘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는 사람을 비유해서 말씀해주십니다. 즉, 지금 주님께서 주신 선물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함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충실한 종의 모습이며, 영원한 행복이라는 보상이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나는 주님께 받은 선물을 과연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요? 혹시 불평과 불만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아무것도 행하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긍정적인 생각을 합시다.
받지 못한 것도 은총
-김종섭 신부-
사실 저는 남들처럼 노래를 잘 하지 못한답니다. 동생 신부도 노래를 잘 못하죠. 둘만 있을 때 우리는 그래도 자신이 더 낫다고 서로 우깁니다. 우리 본당에는 자신이 제일 예쁘다고 하는 자매님이 한 분 계십니다. 본인이 그토록 주장하니 주변사람들이 그냥 웃으며 그렇다고 인정해주고 있지만 내가 받지 못한 것, 내가 잘하지 못하는 것, 못생긴 것도 은총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잘하진 못하는 것을 통해 주님께 더 의지할 수만 있다면 보다 겸손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받는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똑같은 재능을 가졌다면 세상은 얼마나 따분할까요? 모양과 색깔과 맛이 다 다르니 재미있는 세상입니다. 같은 장소에만 낚시를 가고 갈 때마다 매번 같은 크기의 같은 어종과 같은 수가 낚인다면 무슨 재미가 있어 또 가겠습니까? 똑같지 않다는 사실, 서로가 다르다는 것에 대해 오히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타인이 받은 탈렌트가 나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누군가가 만든 잘 짜여진 영화 한 편, 감미로운 노래 한 곡, 뛰어난 영감, 재치 있는 유머, 모두 나에게 기쁨과 감동, 웃음을 주니 말입니다.
도끼를 갈 시간이 없어요?
- 임영인 신부-
어떤 사람이 숲으로 나갔습니다. 한참을 가다보니 나무꾼이 도끼로 나무를 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척 힘들게 나무를 자르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도끼날이 무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던 사람이 나무꾼에게 조언했습니다. “도끼를 갈고 나무를 자르면 수월하지 않겠어요?” 나무꾼은 옆도 돌아보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도끼질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지금 나무를 자르느라 바빠서 도끼 갈 시간이 없습니다.” 나무꾼이 도끼날 갤 시간이 없다면 어떻게 무뎌진 도끼로 나무를 벨 수 있겠습니까? 우리 신앙인에겐 맡겨진 본분이 있습니다. 그 본분을 잘 수행하기 위해 먼저 ‘어떤 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더욱 가치 있는 일이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이웃과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삶이자 성찰하는 삶입니다. 나무꾼이 도끼를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일에 소홀합니다. 할 일이 많고 일을 감당하기도 벅차다고 생각해 주변을 살피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저 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리는 모습도 자주 보입니다. 그것은 주인이 맡긴 돈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둔 채 살아가는 사람과 같습니다. 혹시 내 삶이 벅차고 감당하기 버겁다는 생각이 든다면 ‘도끼를 갈지 않고 나무를 자르는 나무꾼’의 모습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겠습니다. 나무꾼만이 아니라 신앙인한테도 필요한 것이 도끼를 가는 일입니다. 영혼의 눈을 맑게 키우는 성찰의 자세입니다.
하느님 바로보기
-장재봉신부-
오늘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비유는 해석이 어렵습니다.
평소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메시지들과는
사뭇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는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이윤을 남긴 일에만 집착하는 분이실까요?
빌려 주면 이자를 꼭 챙기고 따지시는 분이실까요?
이는 결코 주님께서 일러주셨던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사랑과 자비의 때가 지나면
정의의 심판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직시하라는 이르심이라고
생각을 물러보아도
백번 그릇됩니다.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을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라고 호소하며
두려워 떠는
세 번째 종의 증언을 들으니 더욱 그렇습니다.
때문에 비유에 나오는 임금이나 주인은
흔히 생각하듯,
두렵고 무서운 하느님의 이야기로 듣지 않기를 권해 드립니다.
+++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어떤 귀족’은
고약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만 매달리는 사람입니다.
상대의 형편이나 처지는 안중에도 없는 인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의 비위를 건드릴 수 없고
이윤의 창출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온 힘을 쏟으며 살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주님의 행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계실 때에
하느님의 아들이심에도
하느님의 성전에 출입하기 위한 ‘성전세’를 내셨습니다.
그날 주님께서는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마태 17,27참조)라고
말씀하셨지요.
주님의 뜻을 살아내되 세상의 법을 지키는 일에도
뱀처럼 슬기롭기를 권하신 일을 헤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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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재리에 밝지 못한 사람에게 냉혹합니다.
때문에 뒤처지고 약빠르지 못한 사람들은 죄책감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 죄책감은
‘복을 받지 못했다’는 인식으로부터 비롯되는 일이 허다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가난한 것이
다른 사람의 능력에 미치지 못하는 일이
하느님께 벌을 받은 결과로 여기고
자신이 하느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야말로 하느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하느님의 계명에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기복신앙의 폐해입니다.
대가를 바라고 신앙하는 일은 철저한 율법주의일 뿐입니다.
율법주의는
‘가진 것이 없는 자’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더 갖는다면
그것을 곧 복이라고 말합니다.
살핌과 더불어 살아갈 일 따위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의 요구보다
훨씬 중요한 하느님의 요구가 있습니다.
사랑이 아니면
정의가 아니면
포기하라는 하느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지닌 품위는
자격이나 힘,
능력이나 이익을 남기는 일로 보상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비유의 임금처럼 쫀쫀하지도 괴팍하지도 않으십니다.
때문에 빼앗아 버리는 분이 아니시며
뺏어 가지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포자기하는 마음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마음이
스스로 파멸할 뿐입니다. 아멘
긍정의 힘
-김찬선신부-
오래 전부터 해오던 것 중의 하나가 신문 훑어 읽기입니다. 제목을 훑어 읽다가 더 읽을 필요가 있다 싶으면 더 읽고 대부분은 제목만으로 무슨 얘기를 하는지 짐작합니다. 훑어 읽는 것 중에는 책 광고를 보는 것도 포함됩니다. 얼마 전에 본 책 광고 중에 “긍정의 힘”이라는 광고를 봤습니다. 안 읽어봤지만 짐작컨대 긍정이나 부정이나 어떤 힘이 있는데 긍정은 긍정하는 대로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오늘의 루카 복음은 마태오 복음과 달리 돈 주인이 열 사람에게 똑 같이 한 미나씩을 주고 떠납니다. 똑 같이 한 미나를 받았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열 미나를 벌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이 비유를 해석할 수 있겠지만 저는 자기 생각대로 되돌려진다는 뜻풀이를 합니다. Positive Thinking을 하는 사람에게는 생각하는 그대로 그리고 그 만큼 좋은 결과가, Negative Thinking을 하는 사람에게는 생각하는 그대로 그리고 그 만큼 나쁜 결과가 되돌려질 것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삶의 태도 중의 하나가 해 보지도 않고 안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 시작도 안 할 것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될 것이다 안 될 것이다를 먼저 생각하지 말고 의미 있는지 없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의미 있으면 하는 것이고 없으면 아니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얼마만큼 이루어지는지는 긍정적인 생각과 적극적인 노력과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양승국신부-
<불꽃처럼 살아가야겠습니다.>
서해바다 한적한 곳에 저희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캠프장이 하나 있습니다. 오래 전, 캠프장에서 일하던 때가 떠오릅니다.
캠프가 끝나면 참새처럼 재잘대던 아이들이 떠나갑니다. 피정이 끝나면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한적한 바닷가에 남는 것이라곤 끝도 없는 적막함입니다. 그 적막함과 함께 저녁노을이 찾아듭니다. 붉게 물든 서녁 하늘을 넋 잃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일몰’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일출광경은 감탄을 자아내게 하지만 일몰장면은 어쩐지 슬픕니다. 쓸쓸합니다. 그러나 장엄합니다. 찬란합니다. 마치도 달릴 곳을 다 달린 한 영혼이 이제 막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임종의 순간처럼 아름답습니다.
돈보스코 성인의 임종이 그랬습니다. 그의 얼굴은 수많은 일과 고뇌와 누적된 피로로 인해 초췌했지만, 그의 신체는 모든 에너지가 완전히 빠져나간 나머지 왜소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의 영혼은 활활 불타오르는 석양과도 같았습니다.
수많은 어린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 이제 모든 것을 다 이루었기에,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그의 영혼은 더 없이 당당했습니다.
돈보스코의 시신을 검안했던 의사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런 시신은 정말 보기 드물었습니다. 마치도 모든 것이 다 타고 이제 겨우 재만 남은 것과도 같은 그런 시신이었습니다. 영혼이 빠져나간 그의 시신에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신에는 에너지가 모두 고갈되어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며, 누적된 과로와 스트레스로 인해 완전히 시든 꽃과 같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금화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각자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잘 사용해서 하느님께는 영광을 드리고 이웃들에게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돈보스코의 임종을 묵상하면서 달란트를 잘 사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우리의 손과 발은, 우리의 삶은 그저 살결 매끄럽게, 주름살 없게 잘 가꾸었다가, 고운 모습을 간직한 채 이 세상 하직하라고 주신 선물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한 몸 잘 먹고 잘 살라고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라고 보내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세상에 보탬이 되라고, 보다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데 기여하라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일하라고 우리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우리 존재 자체로 이웃들에게 기쁨이 되고 선물이 되라고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을 것입니다.
하루하루를 허송세월하지 말고 불꽃처럼 살아가야겠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리라 확신합니다.
언젠가 다가올 우리의 마지막 날, 더 노력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이웃들에게 더 친절하게 대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지 않도록, 더 기쁘게 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도록, 오늘 우리 자신의 삶을 늘 돌아봐야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산에 노루를 방목하면서 키우는데 자꾸 이리떼가 와서 잡아먹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에 따른 손실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이리떼를 보이는 족족 잡아 죽이기 시작해서, 이리를 거의 찾기가 힘들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이리가 없으니 노루가 더 많아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리떼에 잡혀서 죽는 경우는 줄었지만, 점점 비실비실하여 병사하는 노루들이 많더랍니다. 즉, 병에 걸려서 죽고, 약해서 죽고 그렇게 죽는 숫자가 이리떼에 잡혀 죽는 수보다 훨씬 더 많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시 이리떼를 풀어 넣었습니다. 그러자 노루들이 긴장을 하면서 도망 다니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더욱 더 강해지더라는 것입니다.
싱싱한 횟감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물고기 안에 천적인 물고기 한 마리를 넣으면 잡혀먹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도망 다니기 때문에 운동량이 많아지고 그래서 횟감이 더욱 더 연해지고 맛있다고 하지요.
이렇게 아무런 사냥꾼 없이 풀어놓으면 삶에 대한 의지가 약해질 수밖에 없답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은 우리 인간들에게도 해당된다고 하네요. 그래서 사람 역시 약간의 스트레스를 통해서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고난과 시련이 왔을 때, 겁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고난과 시련은 내가 더욱 더 힘차게 살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평과 불만 속에 살기 보다는 매 순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러한 마음을 갖기란 쉽지가 않네요. 감사하면서 살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지 못하면서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의 복음에서 미나의 비유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으러 먼 고장으로 떠나지요. 그런데 이에 앞서 종에게 한 미나씩을 나누어주고는 벌이를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왕권을 받아가지고 오자, 그 종들이 벌어들인 양만큼 고을을 다스리게 합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인 종인 열 고을을, 다섯 미나를 벌어들인 종은 다섯 마을 맡깁니다. 그런데 어떤 종은 이를 수건에 싸서 보관해두어 그대로 가지고 오지요. 이에 주인은 그 한 미나 마저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주게 합니다.
이 비유의 말씀처럼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똑같은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차원에서만 그 능력의 크기를 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내가 얼마나 많은 능력을 주님으로부터 받았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며, 그래서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우리들이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그 능력의 크기가 얼마나 대단치 않게 보일까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똑같은 능력이 주어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모습을 스스로 살펴보십시오. 혹시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성장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움켜만 쥐고 있는 어리석은 종의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받은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세요.
빠다킹신부
사랑의 기회
-서현승 신부-
딱지를 떼이지 않기 위해 교통법규를 지키려고 하는 태도와 조화로운 질서를 위해 교통법규를 지키려 하는 태도는 겉으로 보기엔 비슷한 것 같지만 삶의 질적인 내용과 그 결과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내적인 삶의 방향이 틀린 것입니다. 딱지를 떼이지 않기 위해서 운전하는 이에게는 사방팔방이 딱지의 위협이 아닌 곳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서로 양보하고 양보 받는 질서를 맛본 이는 교통법규가 사실 얼마나 운전을 편하고 안전하게끔 해주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 모든 관심이 있다면 ‘죄’가 아닌 것이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고해성사’감이지 않을까요? 수도자가 하는 세 가지 서원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 동안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살기’ 위해 있는 것이죠. 서원을 어기지 않기 위해 바둥거리는 것보단 차라리 즐기며 살 때 그 가치를 온전히 알 수 있겠죠.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은 그 자유의 결실에 대해 많고 적음을 물으시는 분이 아니라 얼마만큼 자유롭게 각자의 삶을 잘 살았는지를 물으시는 분이라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계시해주십니다. 하느님은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특별한 능력, 즉 당신을 닮은 사랑의 능력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던 것이죠. 사랑하기를 두려워하며 주어진 삶을 노심초사하느라 몽땅 소진하는 사람은 사랑의 결과에 실패하더라도 사랑했다면 사랑 그자체가 이미 주어진 보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기회가 영영 없을 것입니다.
수건에 싸서
-정애경 수녀-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면서 열 사람의 종을 불러 똑같이 한 미나씩을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라.’고 일렀다. 왕권을 받고 돌아온 귀족은 종들을 불러 그가 맡긴 돈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셈을 했다. 한 미나를 가지고 열 미나 또는 다섯 미나를 더 벌어들인 종들은 칭찬과 상급을 받는다. 그러나 다른 종은 귀족을 냉혹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그가 맡겼던 한 미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만 했기에 벌을 받는다. 이 말씀은 주님께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능력을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들린다.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재능은 보잘것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자신은 주님께 받은 것이 없다며 주님을 원망하거나 차별한다고 따진다. 귀족이 종들에게 한 미나씩 나누어 주었듯이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똑같은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시는데, 우리 스스로가 능력이 없다고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 ‘혹시 장사를 하다가 주인의 돈을 다 날려서 쫓겨나게 되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받은 능력을 수건에 싸서 보관만 하고 있지는 않은가? 부정적인 사람은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옳지 않은 방향으로 생각한다. 천성이나 선천적인 영향은 나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조건을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한 미나를 가지고 벌이도 해보기 전에 포기하거나,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부정적인 마음에서 벗어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을 믿고 고백할 수 있을 때 한 미나를 다섯 미나 또는 열 미나로 늘릴 수 있을 것이다.
보화는 이웃을 위한 것임을 깨달아야... -손덕만 신부-
오늘 복음의 제일 첫 구절에 보면 군중은 '이 말씀'을 들었다고 하셨는데 무슨 말씀입니까? 그 말씀은 "사람의 아들은 앓는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하늘 나라가 당장 이루어지리라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금화(미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금화 한 개를 종 열 사람에게 똑같이 나누어주고 왕위를 받으려고 먼길을 떠났다가 왕이 되어 오셨을 때 한 사람은 금화 한 개로 열 개를, 또 한 사람은 한 개로 다섯 개를, 또 한 사람은 한 개 그대로 수건에 싸두었습니다. 열 개, 다섯 개 벌이 한 사람은 "충직한 종아, 참 잘했다." 라고 하시며 열 고을을, 다섯 고을을 다스릴 상금을 주셨고, 한 개 그대로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는 "이 몹쓸 종아, 너가 말한 그대로 벌을 내리겠다" 고 하십니다. 그리고 왕이 되어 오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여기 끌어 내다가 내 앞에서 죽여라" 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의 세 그룹의 사람들의 비유를 통해 종말론적 셈 바침을 가르치며 최후 심판 때 나타날 상선벌악, 삶과 공로에 대한 직무를 묻는 것입니다. 앞의 두 사람은 한 개의 금화를 받고 벌이하여 노력하며 선행을 한, 즉 직무에 성실한 사람이요, 한 개 그대로 갖고 있다가 한 개를 바친 사람은 노력하지 않은 탓으로 야단을 맞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구원은 하느님의 선물이기는 하나 하느님이 주신 은총, 능력으로 공로를 세워야함을 느끼게 되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종에게는 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됩니다. 신앙에는 무풍지대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반대하는 사람은 "죽임을 당하는" 엄한 벌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하느님께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활동하고 잘 사용했는지 항상 반성해야 합니다. 인간의 삶의 방식을 보게 되면 네 가지 형태를 봅니다.
첫 번째, 남이 나에게 빚진 것처럼 당연히 남으로부터 빚을 받아야 되는 것처럼 사는 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는 당연히 나를 도와주어야 하고 나는 그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지사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그는 그요, 나는 나로 사는 사람입니다. 아무런 관계없이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순 이기적이고 베풂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라는 개인주의적인 삶입니다.
세 번째 유형의 사람은 받은 만큼 주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 준 만큼만 내가 그에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철저한 실용주의자적인 삶입니다.
네 번째 사람은 남에게 빚을 진 사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생명과 자연을 받았고, 이웃으로부터 수많은 도움을 받고 사는 만큼 빚을 갚는 자세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이웃을, 가족을 사랑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삶입니다.
"미소한 형제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 준 것이다" 하신 최후심판의 판결문을 보듯이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었느냐? 안주었는냐? 에 따라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를 준비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고 못하는 심판을 생각합니다.
주님, 당신이 주신 달란트를 잘 쓰도록 도와주시고 받은 능력, 보화가 이웃을 위한 것임을 깨닫게 해주소서. 아멘...........◆
소유하는 것보다 나누는 것이 훨씬 더 큰 행복
-최금자 -
종종 각종 행사에 참석하면 기념품이나 상품을, 생일이나 기념일에는 선물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그 물품들이 당장 필요하지 않으면 집에 두지 못하고 ‘이 물건은 아무개에게, 저 물건은 아무개에게 필요하겠다’ 싶어 해당되는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갖다 주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나중에 그 물건이 필요해서 아쉬운 경우가 간혹 있지만 필요한 물건을 받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볼 때 참 행복합니다.
남편과 나는 옷을 거의 사 입지 않습니다. 남들이 입다가 싫증이 나서, 또는 작아서 못 입는 옷들이 있으면 얻어 입기 때문입니다. 주위에서 이를 알고 가져와 새 옷도 종종 얻어 입는데 그 재미가 쏠쏠합니다. 옷뿐만 아니라 가구도 얻어 쓸 때가 있습니다. 지구의 자원은 한정적이기 때문에 이미 있는 자원을 재활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자원을 우리 세대가 몽땅 써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가진 것이 영원히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맡아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미련 없이 내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많이 가졌다고 나태하지 않으며, 적게 가졌다고 원망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중요한 것은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어떠한 조건에서든지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고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눌 줄 아는 마음 자세입니다. 이미 많이 가지고 있더라도 소유한 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이웃과 나눌 때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더 커집니다. 나눠준 사람은 물론 나눠 받은 사람도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소유하는 것보다 나누는 것이 훨씬 더 큰 행복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녀와 종의 차이
-최영균 신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하던 외국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성실한 사람이었고 주인도 그에게 신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이 해외 여행을 가게 되면서 가게를 그 학생에게 맡겼습니다. 극구 사양하는데도 불구하고 지금처럼만 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2주간의 여행을 떠난 것입니다. 그 학생은 주인이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봉사하고 손님들을 더 친절히 대했으며 틈나는 대로 청소를 하면서 가게를 깨끗하게 했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주인이 없음에도 더 열심인 이 외국인 학생을 눈여겨보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의 성실함에 대해서 주인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이 학생을 불러 “너는 이제 더 이상 이 가게의 점원이 아니다. 너는 우리 집 식구다. 나는 이제 너를 내 아들처럼 대해 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학생이 이렇게 일한 것은 의무감을 뛰어넘는 어떤 것, 즉 주인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한 사랑과 신뢰 때문에 어떤 일을 행한다면 우리는 주님과 종의 관계에서 벗어나 벗의 관계로 도약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 맺게 되는 참된 우정은 매일의 충실성 안에서 드러나는 사랑과 신뢰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의 충실성으로 이 선물을 받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전영준 신부-
언젠가 반 모임을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반에서 이 복음을 가지고 복음 나누기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반장님께서 자신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반원들을 불리지도 못하고 있다면서 하느님께 죄송스런 마음뿐이라는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는 달란트의 비유가 반을 활성화시키지 못한 반장님을 질책하는 소리처럼 들리셨나 봅니다. 아닌게 아니라 반모임에 참석하신 분은 총 다섯분, 집주인 내외와 반장님, 그리고 어제 처음으로 나오신 분을 제외하면 단 한 분이 남았습니다. 물론 숫자가 적다고 대충대충 넘어간 것이 아니라 진솔한 나누기는 하셨지만 참석율이 너무 저조해서 요즘 신자분들이 바쁘게 살아가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금화를 우리의 힘으로 불려나가기를 원하십니다. 많이 불린 사람은 그에 따라 상도 주시고 반대로 불리지 못한 사람은 심한 질책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영적인 금화를 불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성서를 접하는 것입니다.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꺼먼 성서를 난데없이 읽기 시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빽빽한 글씨가 수북이 박힌 성서를 보면 보는 것만으로도 질려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굳은 결심을 하고 창세기부터 읽어나가면 처음에는 이야기 형식이라서 조금은 읽을 만 하지만 출애굽기를 읽고 레위기로 넘어가면 적지 않은 분들이 포기를 해버립니다. 그렇다면 성서를 쉽게 접할 수 있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저는 반모임에 나갈 것을 강력하게 권해드립니다. 집에서 혼자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다소 힘들게 느껴지지만 반모임에서 아는 얼굴들끼리 마주 앉아서 성서를 접하게 된다면 보다 쉽게 성서를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일 미사 때 흘려 들었던 복음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금 복음말씀을 곱씹어 본다면 성서 읽는 재미에 빠져들 수 있을 것입니다. 반모임을 통해 성서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다소 완화되었다면 그제야 비로소 성서 공부도 하면서 성서를 보다 쉽게 접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성서를 읽는 방법에는 왕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욕심내지 않고 한발 한발 나아간다면 우리 모두가 성서를 생활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의 생활화를 통해서만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를 가장 손쉽게 키워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는 그 동안 집안에 먼지만 수북이 앉아 있는 성서책을 끄집어내어 읽는 첫발을 디뎌 봅시다.
“있는 힘을 다해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때 축복은 거듭 이어집니다”
-홍성만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된 관념을 고쳐 주시기 위해서 "미나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비유의 내용은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종 열 사람을 불러 한 미나씩을 나누어주며 자기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라고 이릅니다. 첫 번째 종은 열 미나를 법니다. 주인은 칭찬과 함께 그에게 열 고을을 다스릴 권한을 줍니다. 둘째 종은 다섯 미나를 법니다. 주인은 그에게도 칭찬을 하시며 다섯 고을을 다스릴 권한을 줍니다.
그런데 다른 한 종은 와서 한 미나를 내밀면서 말합니다. 주인님은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는 냉혹한 분이어서 두려운 나머지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다가 가져왔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사람을 악한 종이라고 부르면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명하십니다. "저 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저 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있는 힘을 다해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때 축복은 거듭 이어집니다. 그러나 불성실하고 나태할 때는 있는 것마저 잃게 됩니다.
말씀은 계속 이어집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각 주님으로부터 한 미나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있는 힘을 다해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 때, 한 미나는 다섯 미나 열 미나로 불어납니다. 이는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이 증명을 합니다.
주어진 삶을 마음과 몸을 다해 삽시다. 거듭된 축복이 보장됩니다.
오늘도 축복에 축복을 더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말이 씨가 됩니다
-장재봉 신부-
저는 오늘 복음을 펼치면서 “아, 이 말씀”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습니다. 우리가 자주 접하게 되는 예수님 말씀이었으니까요. 이렇게 널리 알려진 말씀에는 좋은 해석도 많고 남다른 강론도 많기 마련이기에 솔직히 부담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며 연거푸 복음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지막에 나오는 종의 처지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맡긴 한 미나를 없애버린 것도 아니고, 떼어 먹은 것도 아닌데 ‘악한 종’이라는 극단적인 꾸지람을 듣다니요? 역시 그 주인은 백성이 싫어할 만한 위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그 종이 주인에게 뱉은 말은 곁에서 듣기에 상당히 언짢았습니다. 주인을 대하는 종의 어투가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냉혹한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은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신다”니요? 그런 말을 면전에서 듣게 되면 누군들 속상하고 기분 나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오늘 주인의 답변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죄 지은 적이 없다는 너의 말 때문에 나는 너를 심판한다”(예레 2,35)라고 예레미야 예언자도 경고한 바 있지요. 우리 인간에게 창조주 하느님은 상상할 수 없이 엄위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를 두려워할 것입니다. 세상은 마지막 심판 날에 심판관이신 하느님을 뵙게 될 테니까요.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따뜻하고 인자하신 아버지이십니다. 오늘 우리의 입에서 나온 이 찬미의 기도가 우리를 하느님의 자비의 품에 안기게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입에서 나오는 뻔?심판하실 테니까요.
땅에 묻어버린 은총
-이재화 신부-
신학교 시절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발표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장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습니다. 단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겸손한 듯 보이는 데 비해서 장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왠지 쑥스러웠습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잘난 체하는 것을 꺼려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깊이 묵상하다 보니 근본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평상시 제가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삶에 만족하지 못하니 기쁠 일이 없고, 당연히 감사하는 마음을 갖지도 못했으며, 이러한 삶의 태도는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많은 좋은 것들을 알아보지도 활용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느님께 새로운 은총을 청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느님께 청원을 드리는 것은 믿음의 표현이요, 소중한 기도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은총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셨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우리가 일상 속에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해도 말입니다. ‘미나의 비유’에서 예수님의 초점은 불어난 ‘미나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성실히 활용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양은 달라도 하느님의 뜻에 맞게끔 쓸 수 있는 충분한 은총을 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사소한 일상 속에서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을 알아보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종처럼 은총을 땅속에 묻어두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다
-이회진신부
오늘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을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라는 측면에서가 아닌
셋째 종이 주인에 대해 지녔던 신뢰와 두려움의 측면에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주인은 열 명의 종 모두에게 똑같이 금화 한 개씩을 주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로 주인 앞에 나선 종은
금화 한 개(한 미나)를 다시 주인 앞에 내어 놓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루가 19,21)
두 가지 면에서 셋째 종의 생각을 돌아보고 싶습니다.
첫째는 셋째 종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 상입니다.
이 셋째 종은 벌주고 심판하는 하느님 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두려워합니다.
맡기지도 않은 것을 찾아가고 뿌리지도 않은 것을 거두어가는 주인이기에
자신이 받은 금화 한 개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그것을 잃게 될 때 (사업을 해서 망하게 된다면)
받을 벌에 대해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엄격하고 지독한 주인을 그는 두려워합니다.
그러기에 그는 이미 두려움의 세계에 빠져
그의 삶을 자유롭지 못하게 옭아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신뢰의 부족입니다.
둘째는 그 자신의 안전에 대한 사고방식입니다.
종은 두려워합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을 혹시나 잃을까봐 두려워합니다.
누구의 비판도 받지 않기 위해서 그 어떠한 실수도 범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죠.
무사안일(無事安逸), 복지부동, 책임지지 않으려는 마음 뭐 그런 거죠.
그리스도교 신앙은 “기쁨의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며,
또한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보여주시며
그분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이 세상에서 “기쁘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은 두려움과 고통을 달게 받음에 우선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가신 금화 한 개는 바로 “기쁨”입니다.
주어진 기쁨 하나를 가지고 우리는 열 개의 또 다른 기쁨을 만들 수도 있고,
다섯 개의 또 다른 기쁨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당신의 십자가와 다시 오심이 곧 기쁨이 되리라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자 그분께 대한 온전한 신뢰입니다.
신앙이 죄를 짓지 않기 위한 규율과 법조항이라면,
또한 신앙이 벌을 받지 않기 위한 도피처 혹은 두려움을 자아내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가는 그 길을
오늘 비유말씀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다시는 자신들에게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셋째 종이 주인에게 받은 금화 한 개를 수건에 싸서 감추어 둔 것처럼
하느님께 받은 신앙을 사는 이 기쁨을 감추어 두지 않았으면 합니다.
신앙을 살며 기쁨을 얻지 못한다면 신앙을 사는 이유를 다시 돌아봐야 합니다.
하느님은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의 희망이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항상 감사하십시오.”(1데살 5,16-17)라고 이야기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는 하루이길 바랍니다.
“주님, 당신을 아는 것이 어찌 아니 기쁘겠습니까? 당신과 함께 사는 것이 어찌 아니 기쁘겠습니까? 이 기쁨을 모든 것 안에 심어주소서. 아멘.”
너는 착한 종이로구나.
-강영구 신부-
잘했다. 너는 착한 종이로구나. 네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으니 나는 너에게 열 고을을 다스리게 하겠다.
그대에게
여름 내 푸르름을 자랑하던 잎새들은 붉고 노란 옷으로 갈아입고 대지로 돌아갑니다. 땅에 떨어진 낙엽들은 뿌리를 덮어 제 몸을 감싸고 다시 썩어서 제 몸을 위한 자양분이 됩니다. 순리(順理)가 사랑이고 사랑이 순리(順理)입니다.
60년 전에 나는 이 땅에 없었습니다. 60년 후에도 나는 이 땅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 제가 누리고 있는 생명과 시간, 젊음과 건강, 재능과 지식 따위는 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제가 지닌 돈과 재물, 지위와 명예, 갖가지 물건들도 제 것이 아닙니다. 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 욕망대로 제 뜻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을 제가 사용하도록 허락하신 분의 뜻이 존중되어야 하고,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주인은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나는 주인이신 그분 앞에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셈 바쳐야 합니다. 그 때가 언제 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한 시간 후일 수도 있고 내일일 수도 있고 몇 년 후일 수도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가 관심사여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주인의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을까가 관심사여야 합니다. 저를 신뢰하시는 그분이 큰 사랑으로 그것들을 저에게 맡겨주셨으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도 사랑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언젠가 주인이신 그분이 “잘 했다. 너는 착한 종이로구나.”하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신뢰 없이는 열매도 없다.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금화를 맡은 종들의 비유’를 들려준다. 이 비유는 마태오복음의 ‘달란트를 맡은 세 종의 비유’(마태 25,14-30)와 흡사하다. 그러나 두 비유를 잘 살펴보면 많은 차이점이 드러난다. 우선 마태오복음의 비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21장), 최후의 만찬을 목전에 두고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24,45-51), ‘열 처녀의 비유’(25,1-13), ‘최후의 심판 비유’(25,31-46)와 함께 발설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는 임박한 종말의 시작과 인자의 재림을 다루는 주제에 전체적으로 편입된다. 마르코복음도 이와 비슷한 위치에서 오늘 복음의 비유에 걸맞은 몇 구절을 기록하고 있다.(마르 13,34-36) 이에 비하여 루가는 오늘 복음의 비유를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 마지막에,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 직전에 위치해 놓았다.
내용 면에서도 적지 않은 차이점을 보인다. 몇 가지 점만 지적하여 보자. 마태오는 단순히 어떤 주인이 먼 길의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그 능력에 따라 각각 5, 2, 1달란트를 맡긴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라면(마태 20,1-16; 18,35 참조),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으로서 실로 엄청난 금액이다. 루가는 왕위를 받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한 귀족이 10명의 종들에게 똑같이 금화 한 개씩을 준다. 여기서 금화 하나는 1미나로서 100데나리온의 금액이다. 루가는 비유의 배경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깔고 있다. 기원전 4년경 헤로데 대왕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아르켈라오가 왕위계승의 청탁을 위해 로마로 갔던 사실(12절), 백성의 대표단이 이를 반대한 사실(14절), 그리고 실제로 아르켈라오가 로마황제로부터 왕위를 받지 못하고 유다와 사마리아지방의 영주로만 책봉되어 돌아와서 왕위계승을 반대하던 사람들을 모조리 참살한 사실(27절) 등이 그것이다.
그 다음으로 오늘 비유의 역사적 신빙성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신빙성을 따진다는 것은 예수께서 이런 모양의 비유를 직접 말씀하셨다면 이를 두고 왜 두 복음사가가 서로 다르게 전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두 복음서가 많은 부분의 같은 내용을 두고 가감?수정의 과정을 통하여 독자적인 복음서로 발전되어 온 것을 인정한다.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이 비유를 발설하셨다면, 시기적으로는 예루살렘 입성 후가 될 것이며, 비유의 목적은 도래한 하느님 나라가 모두에게 선물로 주어지긴 하지만, 이를 맞아들이는 자세가 그 능력에 따라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비유를 가감?수정하여 마태오는 최후의 만찬 직전에 배치하고, 루가는 예루살렘 입성 직전의 시기에 배치하였을까?
문제는 하느님나라가 도래하는 시점이다. 물론 성자의 강생으로 하느님나라는 이미 도래하였다.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다윗의 후손에게서 태어난 메시아가 왕으로 등극하여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건하는 것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메시아가 그의 군대를 지휘하여 로마군대를 쳐부수는 전쟁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겠지만, 세상의 종말을 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림에 대한 것도 안중에 없었다. 그러니 오늘 비유는 각각 마태오와 루가복음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직접 발설한 비유를 두고, 마태오는 상당히 임박한 세상종말과 인자의 재림을 주장하려는 의도를 가졌고, 루가는 거기까지 아직 많은 시간이 있음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 복음의 첫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 그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의 당도하자,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예수께서는 오늘 비유를 말씀하셨다(11절)는 도입이 바로 그 이유이다.
성서의 말씀이 기록된 후 2,000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간 것을 보면 루가의 주장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또 그렇게 긴 세월이 흘러갈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순간에 종말과 인자의 재림을 동시에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 때 오늘 비유에서 주인의 질책을 받는 세 번째의 종처럼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종이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거나 다른 어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비참한 말로를 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종이 주인의 의도를 외면하였기 때문이다. 종은 주인을 두려워하였을 뿐 신뢰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주인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인은 각자가 맡은 것의 열매를 보고 싶어 한다. 하느님도 그렇다. 하느님과 그 나라에 대한 신뢰 없이는 열매도 없고, 사랑 없이는 생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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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