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성님의 글을 읽고
김호성님의 글은 각묵스님의 문제제기에 대한 답글이라기 보다는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이 흘러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글의 내용으로 봐서는 그가 자발적으로 쓴 글이라기 보다는 신문사가 기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청탁을 해서 쓴 글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을 살펴보자면
그는 여래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 하며 글을 시작하고 있다.
“여래장이란 여래로 태어날 수 있는(부처가 될 수 있는) 태아를 수태(受胎)하고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때 ‘태아’라는 말 역시 하나의 비유이다. 그래서 “모든 중생은 부처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직은 가능태로서만 말한다.“
이러한 기초적인 용어정의 후에 그는
“여래장의 개념에는 애시당초 절대불변의 실체라는 관념은 들어올 수 없다. 그렇게 되려면, 번뇌로서의 존재라고 하는 측면은 말해져서 안 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절대불변의 실체라는 관념은 들어올 수 없다고 하면서도 절대불변의 실체라는 관념이 들어온 역사를 그는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다.
“ 실제로 여래장 사상을 실체론으로 오해했던 사례 역시 전혀 배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다.
“문제는 여래장 사상을 설하는 경론에서는 번뇌로서의 측면보다는 부처로서의 측면에 대한 서술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스스로 논지의 모순을 드러내면서도(그 모순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심판의 입장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체론적으로 표현되거나 오해되고 있는 측면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과 동시에 연기.무아.공과 여래장이 사실은 한 목소리(一音)일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라고 양자를 비판하는 쪽과 비판당하는 쪽을 동시에 아우르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을 하기에는 지금이 너무 이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 이야기가 시작도 되기 전에 서둘러 마무리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가 지적한 여래장이 실체론적으로 표현되거나 오해되고 있는 측면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각묵스님의 문제제기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제기를 통해서 연기.무아.공과 여래장이 사실은 한 목소리(一音)일 수 있음이 밝혀 지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토론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가 가진 약점 중에 하나인 믿음과 실참(이론이 아닌)이라는 이름으로 문제를 단순화 시키고 무마시키려는 태도와 언어사용을 경계 한다.
지금으로서는 근거를 가지고 자신의 이해를 분명히 밝히는 것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한 토론과 치열한 논쟁 자체가 이 문제를 바로 풀어가는 과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 부분 “왜 일까? 번뇌의 얼굴을 한 인간에 대해서는 바로 앞 시대에 유식불교 경론들에서 집요하게 설해졌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여래장사상은 불교심리학인 유식과 밀접한 관계 속에 나온다). 여래장 사상이 성립하였던 시기의 힌두교 사상으로부터 많은 표현들이 차용되었던 것 같다.”라는 주장에 깊은 공감을 보내며 그의 글이 이 부분에서 자세하고 일관되게 설명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가진다.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토론하면서 대승불교를 벗어나서 전체적인 불교의 역사를 이야기 하고 불교 언어의 쓰임새와 영향을 이야기 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
그것은 이제 까지 통시적인 안목으로 불교역사와 언어와 사상을 가늠해보는 작업이 우리 불교계에 부족했다고 보기 때문이고 각묵스님의 문제제기 자체가 그러한 이유에서 출발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제대로 풀어 간다면 여래장 사상이 현양구매라는 주장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여래장사상이 연기와 공과 어떻게 같은 것인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붓다의 일음성이란 것이 어떻게 이해 되는지가 밝혀 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문제를 논의 하는 자리는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만나는 자리이고 니까야와 화엄경이 만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역사적인 시간의 틈새에서 그 둘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이해하는 것은 한국 불교에 꼭 필요하며 올 초봄에 단행되었던 해인사강원의 초기불교와 중, 유식,화엄을 아우르는 교과과정 개편도 이러한 문제를 지금 고민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이러한 거시적인 안목으로 불교를 공부하는 것은 전 세계의 흐름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를 불편해 하거나 실참 수행을 안 하는 사람들의 하릴없는 논쟁으로 치부 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는 우려가 들기도 한다.
다행히 요즘 불교 학계에는 역사와 함께 불교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많아 지고 있고 사찰에는 훌륭한 강주, 강사스님들이 많이 계시니 이런 분들이 통쾌한 반박을 펼쳐주길 기대해 본다.
제가 이해할수 있도록 쉽게 쉽게 썼는데.... 이해시켜 드리기가 어렵군요.
여래장은 용수보살의 진속원융의 상태입니다. 여래장 중에 공여래장은 속제에 해당되고 불공여래장은 진제에 해당됩니다.
상좌에서는 유위의 세계만을 봅니다. 그래서 유위의 세계는 공합니다. 니까야에서는 유위법에서 무아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초기경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면 각묵스님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나는 오온이고 무아는 상주불변한 실체가 없는 것인데, 무상, 무아, 고를 철견하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왜 여래장은 상주불변이다, 我는 여래장이다. 열반을 상락아정이라 하는가 하는게 각묵스님의 주장입니다.
숫타니파타 뱀의 경 5번째: 무화과 나무에서 꽃을 찾아도 얻지 못하듯, 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발견하지 못하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 전재성박사역
무화과 나무에는 꽃이 피지 않습니다. 그런 무화과 나무에서 꽃을 찾습니다. 꽃을 찾겠습니까? 찾을 수가 없겠죠. 존재들은 진속원융입니다. 드러난것은 속제인 오온만 드러났습니다. 오온에는 꽃이 없지요. 즉 실체가 없지요. 이게 무아입니다. 공여래장입니다. 속제입니다. 상좌부에서는 여기만 다루게 됩니다. 무상,고, 무아를 유위법의 특성이라 하지요. 대승에서는 진제까지 다릅니다. 유식30송에서는 법신이라고 합니다. 불공여래장이라 합니다. 진속원융이라 하고 이것이 중관의 공입니다. 그리고 무상,고,무아, 부정을 유위법(공)에서 말하고 무위법에서는 상,락,아, 정(불공)입니다.
상주불변하고 아는 바로 불공여래장을 말하게 됩니다. 이렇게 각묵스님은 대승의 교학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불공여래장을 상주불변하고 아를 이름한 것을 가지고 상견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공경에서 공성이 설명되고 있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각묵스님은 초기경전을 번역도 하시는 분이니 빨리어로 읽어 보았겠지요).
각묵스님은 [그들은 여래장에는 공여래장과 불공여래장이 있다고 말하였다. 만일 여래장이 불공(不空)이라 한다면, 평천창 교수의 말처럼 이것은 공을 무아와 연기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적멸한 것으로 잘못 이해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만일 불성이나 여래장이 불공이요, 존재의 배후에 일심이 상주불변한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면, 여래장 계열의 경론은 스스로가 불교이기를 포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고 있지요.
[여래장이 불공(不空)이라 한다면, 평천창 교수의 말처럼 이것은 공을 무아와 연기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적멸한 것으로 잘못 이해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이부분은 각묵스님이 완전히 잘못알고 있는 부분이 되겠습니다. 각묵스님은 여래장이 공여래장과 불공여래장으로 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소공경에 분명히 불공과 공의 쓰임이 있는데도 이해를 못하고 있지요. 공과 불공이 공성의 현현, 무아와 연기이죠. 교학적으로요. 공(성)=무아=연기라고 교학에서 말하고 있지요.
다시 강조합니다. 공여래장과 불공여래장은 이것이 한 set로 연기의 공성을 의미합니다. 니까야의 근거를 두는 겁니다. 공-불공이 연기의 공성의 현현입니다. 공여래장은 야뢰야식입니다. 아리야는 니까야에 근거를 둔다고 소슬님이 펴온 글에는 있네요. 맞는 건지 틀리는 건지 모르니 레퍼런스로 하기에는 신뢰성이 떨어지죠. 어띠 되었든 중도 공관과 유식을 주류의 불교로 각묵스님도 인정하니, 여래장 사상은 불법과 어긋난 힌두사상의 변형이 분명히 아니죠.
각묵스님의 주장은 심각한겁니다. 여래장 사상이 힌두의 영향이어서 이젠 폐기하여야 한다면, 여래장 계열 경론들, 능가경, 능엄경, 대승기신론도 폐기해야 합니다. 그말은 한국의 대표종단인 조계종은 짐을 싸란 소리입니다. 능가경은 선종에서 중요시한 경전이었지요. 강원에선 대승기신론, 능엄경 배웁니다. 헛것을 배우고 있다는 소리 아닙니까? 이정도로 하고 마치겠습니다....
^^설명 잘 들었습니다..감사 드립니다...아까는 손님이 와서요^^;....텅 비었으나(공) 가득 차있다(불공)...공성이라는 말씀 이시겠지요...제가 생각하기론 아무도 공이 그저 텅비었다로 아는 사람은 없을듯 한데..아마도 소공경의 등장하는 불공이라는 용어에서 오해가 생겼지 않을까 합니다(저만 그럴수도 있구요^^)..그저 공이라는 용어 하나로 이중적인 듯하나 그 안에 내포된 의미는 충분히 공감한다고 생각 했는데 불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야 소공경을 얘기할때는 말이 성립이 되나 봅니다.공은 비어 있는듯 하나 가득찬 에너지의 상태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연기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것이 잇으면 저것이 있으니..공이 있으면 불공이 있다는 말도 성립이 될 수 있겠지요...."여래장은 용수보살의 진속원융의 상태입니다. 여래장 중에 공여래장은 속제에 해당되고 불공여래장은 진제에 해당됩니다."..이해 시키고 싶어하시는 요지가 여래장은 공여래장(속제)과 불공여래장(진제)이 있다..속제로 진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은 엄연히 원융하게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다라는 불공 여래장을 인정 하지 않고서 상을 가지고 있다라는 상견으로 몰아 부쳐서는 안된다.불굥여래장은 진제로서 무위법이다...라는 말씀 이신 것인지요
그럽습니다. 대승의 기본입니다. 진제에 해당되는 것이 체, 성(性), 理 속제에 해당되는 것이 용(상), 상(相), 事입니다.
공의 오해중에 하나가 가득찬 에너지의 상태 등과 같은 어떤 것으로 보는 겁니다.
용수보살은 중론에서 연기의 공성을 논리적으로 드려 내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기경에서 보듯이 공성의 현현은 경험으로 증득하는 것을 우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전을 철학적 이해의 접근으로는 흔히 오해가 발생합니다.....
.."공이 부정과 함께 긍정을 의미한다는 점에서"..공과 불공이라는 의미 이시겠지요..그러나,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 공=연기=무아 임을 반드시 알아야 하나,불공 여래장은 있다라는 막연한 느낌을 주기에 그 점이 지적을 받는것이 아닌가 합니다...불공 여래장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는지요...()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대화를 이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내일은 다회날이니 바쁘고^^;...다음에 또 대화를 하도록 하지요..감사 합니다..늦은밤 편안한 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