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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의 순서는
중론 24장의 40개 게송을 살펴보고
거기에서 사용된 공과 불공의 의미를 살펴보고 ,
전체내용에 대한 설명을 한 다음,
초기 경전에서의 공의 3가지 의미를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진제와 속제의 의미를 설명할 것입니다.
어렵지 않으니 찬찬히 살펴보시길....()
24. 사제(四諦)를 관찰하는 장[觀四諦品]
-----------외도의 문제 제기(1-6번) ----------------
만약 모든 것이 다 공하다면 발생함도 없고 소멸함도 없고
그대는 사성제(四聖諦)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류에 빠지네.(1)
사성제가 있지 않기에 고(苦)를 보는 것, (번뇌와 업의) 집(集)을
끊는 것, 멸(滅)을 증득하는 것, 도(道)를 수습(修習)하는 것이 모 두 있지 않네. (2)
이와 같은 것이 있지 않기에 四向四果도 있지 않네. 네 과보가 있지 않기에
果를 얻은 자도 向으로 나아가는 자도 있지 않네. (3)
만약 여덟 부류의 성자가 있지 않다면 승보(僧寶)가 있지 않네.
사성제가 있지 않기에 또한 법보(法寶)도 있지 않네. (4)
법보과 승보가 있지 않기에 또한 불보(佛寶)도 있지 않네.
이와 같이 공함을 말한다면 이는 삼보(三寶)를 파괴하는 것이네.(5)
공성[空法]은 원인과 결과를 파괴하고 죄와 복도 파괴하고
모든 세속의 법도 파괴하네. (6)
------------용수스님 답변 (7-40번) ------------------
그대는 지금 空性과 공성의 효용과 공성의 목적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고 스스로 번민을 만들어 내네. (7)
모든 부처님들은 이제(二諦)에 의지해서 중생을 위해 설법하시네.
하나는 세속제이고 다른 하나는 승의제이네. (8)
만약 사람이 이제(二諦)의 구별을 알지 못한다면
심원한 부처님 가르침의 진실한 의미를 알지 못하네. (9)
만약 세속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승의제를 얻지 못하네.
승의제를 얻지 못하면 열반을 얻지 못하네. (10)
잘못 파악한 空性은 지혜가 낮은 자를 파괴한다. 마치 잘못 잡은
뱀이나 잘못 닦은 주술 같이. (11)
세존께서는 이 법이 매우 깊고 오묘해서 지혜가 약한 자가 미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말씀하려 하지 않으셨네. (12)
그대는 내가 空性에 집착하기에 내가 과실을 범한다고 말하네.
그대가 지금 말하는 과실은 공성에는 있지 않네. (13)
空性의 이치가 있기에 모든 법이 성립하네.
만약 空性의 이치가 없다면 모든 법이 성립하지 않네. (14)
그대는 지금 자신에게 과실이 있으면서 나에게 돌리네. 마치 사람
이 말을 타고 있을 때 (말을) 탄 것을 스스로 잊어 버리는 것과 같네. (15)
만약 그대가 법들에 自性이 존재한다고 본다면
법들에 인(因)이 없고 연(緣)이 없다고 보는 것이네. (16)
그것은 因果와 행위자와 행위 수단과 작용을 파괴하는 것이고
발생과 소멸을 부정하는 것이 되네. (17)
여러 가지 인연으로 발생하는 법을 우리는 空性이라고 말 하네.
그것은 가설(假設)이라고도 하고 중도(中道)의 이치라고도 하네. (18)
因緣으로 발생하지 않는 법은 하나도 없네.
그러니 모든 법은 空하지 않은 것이 없네. (19)
만약 모든 법이 공하지 않다면 발생과 소멸이 없을 것이네.
그렇다면 그대는 四聖諦가 없다는 오류에 빠지게 되네.(20)
因緣으로 발생하지 않는 苦가 어떻게 존재 하겠는가? "
무상한 것은 고(苦)이다"고 설파하네. 확정된 자성(自性)은 무상하지 않네. (21)
만약 고(苦)에 자성이 있다면 어떻게 다시 발생 하겠는가?
그러니 공성의 이치를 부정 한다면 발생은 존재하지 않네. (22)
만약 고(苦)에 자성이 있다면 멸(滅)이 있지 않을 것이네.
그대가 자성에 집착하는 것은 소멸을 부정하는 것이 되네. (23)
만약 고(苦)에 자성이 있다면 도(道)를 수습(修習)하는 일이 없을 것이네.
그리고 도를 수습할 수 있다면 自性이 있는 것이 아닐 것 이네. (24)
만일 고제와 집제와 멸제가 없다면 고(苦)를 멸할 수 있는
도제를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25)
그 자성은 변화하는 것이 아닌데 고(苦)에 자성이 존재한다 면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지금 어떻게 보겠는가?(26)
그대가 고(苦)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듯이 집제와 멸제와
도제와 四果도 그대는 얻을 수 없네. (27)
이 四果는 이제껏 얻을 수 없었는데 법들의 자성이 있다면
지금 다시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28)
만약 네 가지 과보가 없다면 (과보를) 얻은 자도 (과보로) 향하는 자도 없네.
여덟 부류의 성인이 없으니 승보(僧寶)가 없네. (29)
사성제가 없으니 또한 법보도 없네.
법보와 승보가 없는데 어떻게 불보(佛寶)가 있겠는가? (30)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 깨달음을 인연하지 않고도 부처가 있고
부처에 인연하지 않고도 깨달음이 있다는 오류가 발생한다. (31)
그대의 말대로라면, 부지런히 정진(精進)고 修行 하더라도
만약 미리 부처의 자성이 없는 자는 깨달을 수 없을 것이네. (32)
만약 법들이 공하지 않다면 죄나 복을 짓는 자가 없을 것이네.
그 자성이 이미 확정되어 있는데 무엇을 다시 짓겠는가? (33)
그대의 말대로 空하다면, 죄나 복을 지어도 과보가 발생 하지
않게 되고 不空하다면, 죄나 복을 떠나서 과보는 존재 한다는 말이 된다. (34)
만약 죄나 복에서 과보가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과보가
죄나 복에서 발생했는데 어떻게 不空이라고 말하겠는가? (35)
그대가 緣起이고 空性인 것을 파괴한다면 그대는 세속의 모든
언어 관습을 파괴하는 것이 되네. (36)
만약 공성의 이치를 파괴한다면 지어야 할 것이 없다.
짓지 않아도 짓는 일이 있고 짓지 않아도 지은 자라 불리게 되네. (37)
만약 자성이 있다면 세간의 갖가지 상(相)은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아 상주해서 괴멸하지 않을 것이네. (38)
만약 不空하다면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지 못할 것이고
번뇌를 끊는 일도 없을 것이며 고(苦)가 멸진하는 일도 없을 것이네. (39)
그러므로 붓다는 "만약 연기를 본다면 나를 보고 또한 그는
고(苦)․집(集)․멸(滅)․도(道)를 보게 된다"고 설하고 있네.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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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연기의 공성을 말하는 중론의 24장 [觀四諦品]은 1-6번까지는 자성(아트만)을 믿는 외도가 공의 뜻을 잘못 파악하고 [만약 모든 것이 다 공하다면 발생함도 없고 소멸함도 없고 그대는 사성제(四聖諦)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류에 빠지네.(1)] 라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 7-40번 까지는 오히려 공하기 때문에 사성제(四聖諦)등이 존재하게 된다고 하는 용수스님의 답변이다.
[觀四諦品]에서 보듯이 空이라는 의미를 두고 외도와 용수스님은 각각 다른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위 대화에서 自性을 고수하는 외도가 사용하는 공의 뜻은 없다(無)는 뜻이고 용수스님이 사용하는 空의 뜻은 緣起의 뜻이다.
(여러 조건에 의지하여 생성과 소멸이 하는 것이므로 변하지 않는 자성은 있을 수 없다는 뜻으로. )
외도는 공을 허무단멸로 보고 있기에 [만약 모든 것이 다 공하다면 발생함도 없고 소멸함도 없고 그대는 사성제(四聖諦)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류에 빠지네.(1)] 라고 불교를 비판하는데 용수스님은 [만약 고(苦)에 자성이 있다면 어떻게 다시 발생 하겠는가? 그러니 공성의 이치를 부정 한다면 발생은 존재하지 않네. (22)]라고 반박한다.
똑같이 空이란 용어가 사용되었지만 1번의 게송은 無의 의미의 空이고 22번의 게송은 연기의 의미인 空이다. 이 사실을 잊어 버리면 중론의 이해는 참말로 어려워 진다.(그래서 누가 어떤 의도로 사용하는 단어인 줄도 모르고 중론의 한 부분을 인용하여 다른 경전들과 함께 설명하면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게 될 수가 있다.)
공의 의미는 초기경전에서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1.없다는 의미(無)--위에서 본 외도가 이해한 공이다. 그러나 붓다도 상황에 따라 없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2.비었다는 의미(虛)--예를 들면 집은 있는데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우리는 집이 텅 비었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때때로 비어있기 때문에 채울수 있다는 등의 효용성의 문제로 해석되기도 한다.
3.실체가 없다는 의미(無自性)--이것이 연기와 무아의 뜻이다. 외도는 自性이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에 실체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아연기의 뜻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공의 의미를 이러한 뜻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래서 스스로 모순에 빠진다. 이밖에 공은 쓸모없다, 허망하다는 등의 뜻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3번 연기의 뜻으로서의 공이다.
이 연기의 뜻으로서의 공은 진제(승의제) 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진제(승의제)는 사실 그대로를 표현하는 언어들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속제는 세상의 관습에 따라 불리어지는 이름들이다.
이를 테면 심형래, 노무현, 노트북등 이 속제(차별성)라면 그들의 속성이 공이고, 연기적인 존재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진제(공통성)이다.
그리고 진제와 속제의 관계는 不一不二 이다.
중론 25장 관열반품 19번에는 “열반은 세간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세간도 열반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는 반야경에서 色卽是空으로 화엄교학에서는 理事無碍등으로 정리되었다.
"자신을 섬으로 삼아라"의 해석
그런데 연기와 제법무아를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반열반경(D,N.16)에서 “그러므로 아난다여,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안식처로 하지 다른 누구도 그대의 안식처로 하지 말라.”라는 문장에서 “자신”을 참나로 보려는 시도가 있다.
이때의 “자신”은 속제로서의 자기 자신을 말한다. 그리고 섬이라고 하는 것도 무위법이나 열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제로서의 의지처 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장에서 “자신“을 ‘참나‘,“대아”등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정작 의지해야 하는 “참나”가 무엇인지는 모른체 단지 “참나“라는 관념만을 붙들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지금은 모르지만 깨달으면 알 수 있다고 한다. 붓다는 결코 지금은 모르지만 깨달으면 알 수 있는 참나에 의지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what the thought”(왈풀라 라훌라스님,전재성역),나 “自燈明 法燈明의 번역에 대한 고찰”(마성스님의 논문)에서 잘 설명 되었다.)
여래장 사상의 문제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여래장사상도 겉으로는 연기무아라고 말하지만 어떻게 연기와 여래장이 같은지는 설명을 못하고 있다. “승만경” <眞子章> 제14에는 “여래장이 범부에게 갖춰지는 것은 알기도 어렵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에 단지 붓다의 말씀을 믿을 수 밖에 없으며, 붓다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는 큰 이익이 있다.”고 말하며 信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참나, 진아, 여래장 상주불변 등의 언어는 무엇인가 영원한 것이 있다는 기대를 하게 하고, 이해하기 보다는 믿음을 강조하기에 연기와 공의 입장에선 초기불교에서는 여래장사상을 비판을 하게 된다. 여래장사상의 가장 큰 문제는 언어 사용의 문제다. 여래장사상은 뭔가가 영원한게 있다는 기대를 하게 만드는 언어이다.
끝으로 중론24장을 인용하며 [속제가 空이고 진제가 공하지 않음(不空)입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은 전혀 안 맞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대승에서는 공과 불공을 다 포함해서 空이라고 한다.] [有無를 아울러서 空이다]라는 등의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러한 언어들은 불교를 어렵게 만드는 주요 원인들이다. 공이란 위에서 설명한 1,2,3,번의 공의 뜻이 사용됨으로 문맥에 맞게 해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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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0번은 연기한 것, 조건지어진 것을 대해서 말을 합니까? 조건지어지지 않는 것을 말 합니까? 모든 법은 조건지어진것, 의존하여 생기한 것이다(연기). 연기한 것은 공한다. 이걸 말하고 있지,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은 불공이 아니다가 어디에 나옵니까?
님은 제가 질문한 것 하나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님은 1251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토론하면서 대승불교를 벗어나서 전체적인 불교의 역사를 이야기 하고 불교 언어의 쓰임새와 영향을 이야기 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 이 취지에 맞게 님의 논리를 피셨으면 합니다.
중관의 교학으로 니까야를 해석할 건지, 아니면 초기경의 공성, 제일의 공의에 따라(상좌불교의 교학이 아닌) 중관의 공을 해석할 건지를 정하세요. 저의 해석은 초기경의 공성, 제일의 공의에 따라 중론의 공성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님이 중론에서 유위가 공이고 무위가 불공이다는 저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다라고 논증할 수 없을 겁니다. 그건 불법의 이치에 맞기 때문이죠.
중관의 교학은 중론 이후의 해석입니다. 유무위를 공이라 하죠. 그리고 공한것 까지도 공하다고 전개됩니다. 공공입니다. 중관의 교학을 꿰뚫지 못하고 어설프게 알고서 중론의 주석서를 참고해서 논리를 전개하면 그런 논리는 중론에 나와있는 글귀로 금방 비판할 수 있지요.
중론은 반야경을 바탕으로 한것이라 제1장에서 보듯이 학자들이 팔부중도라 하는 건 반야심경의 공상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처럼 공상의 언설이며. 중도는 공하다, 공하지 않다, 공하면서 공하지 않다, 공하지도 않고 공하지 않지도 않다. 4단계의 논리로 언설하지요. 그래서 유위가 공하고 무위가 불공하다는 소공경에 바탕으로 한 저의 해석을 잘못했다고 논증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위글에 대해 몇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습니다. 그것이 위글을 인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후박나무님이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질문을 하시기 때문에 위글의 오류를 지적합니다.
님이 재미나다고 하면서 질문한 중론 24장은 [1- 6번 외도의 문제 제기이고 7-40번 용수보살의 답변 입니다.]라는 것을 답변했는데 여기에 대해서 동의 하는 것인가요? 아닌가요?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시길 바랍니다.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건 어떤 주석서의 입장일겁니다. 저의 질문은 용수보살이 24장을 1-6번은 외도의 문제제기 7-40번 그에 대해 답한다 하는 내용이 원문에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1-6번은 외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연기의 공성에 대해 바른이해를 하지 않은 경우이겠지요 아니면 다른 종파의 견해에 대해 비판하는 거라면 말이 되죠. 어떻게 외도가 사성제를 알겠으며, 연기를 알겠습니까?. 이것이 님의 견해대로 외도의 문제제기라면 옳은 문제 제기가 되는 거지요.
모든 것이 공하다고 공성을 이해하면 바른이해가 아니므로 1-6번이 외도의 문제제기라면 옳은 지적이 되지요.
그리고 님이 [조건 지어지지 않은 것은 불공이 아니다가 어디에 나옵니까? ]라는 질문은 내가 묻지도 않은 것인데 .....이상한 말을 하는군요.
님의 이전 댓글에 {[그대의 말대로 空하다면, 죄나 복을 지어도 과보가 발생 하지 않게 되고 不空하다면, 죄나 복을 떠나서 과보는 존재 한다는 말이 된다. (34) ] 이처럼 空과 不空을 모두 부정합니다.여기에선 空과 不空이 속제 진제가 아닙니다.} 라는 귀절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저의 답글에 {속제가 공이고 진제가 공하지 않음(불공)입니다.] 라고 썼지요. 저는 이글의 마지막 문장을 인용한 것이고요}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과정에서 위 구절이 나온 말입니다.
님은 송34를 인용하면서 저의 속제는 공하고 진제는 불공이다는 저의 견해가 틀렸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7-40까지는 조건지어진것(연기한것, 속제)에서 발생하는 잘못된 견해의 타파에 대한 것이지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것이 아니다라는 뜻에서 나온거지요.
님이 말대로 중론24장에서 [속제: 고성제, 고집성제 진제: 멸성제, 멸도성제]라면 "고성제, 고집성제= 空 이고, 멸성제, 멸도성제속제=不空 "이 되겠군요. 이런 말이 맞다고 생각하습니까?
이건 제글을 읽어 보면 금방아실겁니다. 공, 불공은 지금, 여기서 입니다. 공성에 들어간 [지금, 여기서]에서는 그렇게 되죠. 그건 부처님께서 당부하신겁니다. 자등명입니다. 나를 섬(열반)으로 밝힐때가 그렇게 됩니다.
[어떻게 외도가 사성제를 알겠으며, 연기를 알겠습니까?]님은 인도 불교사에 얼마나 많은 외도 와의 논쟁이 있었는지 모르고 계시군요. 붓다시대 당시에도 외도들이 우리도 붓다가 가르치는 것을 가르친다.라고 말하면서 붓다의 제자들을 혼란하게 한것이 니까야에 나오지요. b.c 3세기경에 외도가 상가에 들어와 승단을 어지렵혀서 아쇼카왕이 6만명의 가짜비구들을 쫒아 냈다고 사만타빠사디까(율장주석서)에 나옵니다. 이들이 외도라는 것은 sabhava(자성)라는 단어를 처음부터 끝까지 사용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동의하지 않습니다]라고 해놓고 [모든 것이 공하다고 공성을 이해하면 바른이해가 아니므로 1-6번이 외도의 문제제기라면 옳은 지적이 되지요. ]라는 말을 하고 있군요. 그리고 동의하지 않는 이유가 [어떻게 외도가 사성제를 알겠으며, 연기를 알겠습니까?]라는 것이구요. 이말은 님은 그냥 감으로 반대하는 것입니다. 님이 여래장을 옹호하는 의도는 좋지만 초기불교의 이해나 중론의 이해는 많은 문제를 보입니다..더 큰 문제는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한다는 데 있지요....()
[1-6번은 외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연기의 공성에 대해 바른이해를 하지 않은 경우이겠지요 아니면 다른 종파의 견해에 대해 비판하는 거라면 말이 되죠. 어떻게 외도가 사성제를 알겠으며, 연기를 알겠습니까?. 이것이 님의 견해대로 외도의 문제제기라면 옳은 문제 제기가 되는 거지요] 이부분을 {[모든 것이 공하다고 공성을 이해하면 바른이해가 아니므로 1-6번이 외도의 문제제기라면 옳은 지적이 되지요. ]라는 말을 하고 있군요}으로 이해한 것은 님의 해석입니다. 제글귀를 그렇게 이해하는건 제가 어떻게 할수 있겠습니까?
제안합니다^^ 비단금님께서 사용하는 주요 단어에 대하여 정의를 먼저하고 설명하시면 좀더 설득력이 있을것으로 설명됩니다. 논리의 적확성이 우리 보다 강한 서양인들에게 님처럼 설명하다가 번번히 그 들이 스스로 마음으로부터 인정하는 수준까지 설명하지 못하였습니다...한걸음 넘어에 자라는 우리 다음 신신한 새대에게 단언하건데 절대로 지금의 논리로는 여래장을 올곧게 설명할수없을것입니다..._()_
제가 사용하는 단어의 정의는 불교의 교학을 공부하시면 무슨 의미인지 알수 있습니다.
후박님은 저의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곤 [초기불교의 이해나 중론의 이해는 많은 문제를 보입니다]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저의 이해의 문제점은 지적이 없지요. 저는 중론의 공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요. 저의 해석은 초기불교의 연기의 공성과 같이 해석하기 위해 중론에서의 연기의 공성을 해석하였습니다. 제가 올린 글 (댓글을 포함)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요. 이번 주제에 대한것은 나의 불교의 연기의 공성에 대한 이해와 후박님이 보는 공성의 이해가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토론은 계속 헛바퀴만 돌수 밖에 없습니다.
님의 동의여부와 관계없이 대승의 교학을 잘 알고 있는 분들은 여래장사상과 중관의 공은 연기의 공성을 말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래장사상이 상견이라고 제대로 주장하려면 여래장사상은 중관의 공과 어떠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연기의 공성이 아니고 상견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후박님의 이번 여래장 논란을 [나는 이 문제를 가지고 토론하면서 대승불교를 벗어나서 전체적인 불교의 역사를 이야기 하고 불교 언어의 쓰임새와 영향을 이야기 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본다면 초기불교의 연기의 공성과 대승불교에서의 연기의 공성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이야기하는 자리가 되어야 겠지요. 그런 관점에서 저의 주장의 문제점을 지적하셔야지 자신이 이해 못한 부분을 가지고 잘못된것이다고 하면 토론이 헛돌수 밖에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