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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8일(4월초파일 : 석가탄신일)단 하루만 일반인들에게 사찰 경내를 공개한다는 그 유명한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 갔다. 이번 해가 3년째 오는 것 같다.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매년 너무 많은 사람이 몰린다기에 새벽 2시에 출발하여 5시쯤 도착하니 아직은 이른 새벽이라 인적이 드물었다. 사찰 경내에 차량을 주차하고 날이 밝아 오기를 몇 십분 기다리며, 드디어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전날까지 너무 많은 비로 걱정했는데 다행히 간간이 이슬비만 내린다. 이른 산사의 새벽을 맞으며 둘러본 경내는 조용하기 그지없다. 최근 2003년 4월 2일 대한불교 조계종 전 종전 서암스님의 다비식이 대웅보전 앞에서 있었는데 사부대중 5천 여명이 봉암사 주변을 꽉 메운 채 왕생극락을 기원하는 조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봉암사는 1982년부터 조계종단에서 청정 수행도량(특별수도원)로 지정되어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어찌 보면 가장 문턱이 높은 사찰일지 모른다. 봉암사는 흰 바위산인 희양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신라 헌강왕 5년(879)에 지증대사가 지었다. 881년 절이 완성되자 헌강왕은 절의 경계를 정하게 하고 봉암사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하며 지증대사는 이곳을 둘러보고 ‘스님들의 수도처가 되지 않으면 도적들의 소굴이 될 자리라며’ 봉암사를 세웠다 한다. 그 후 세월을 지내 오면서 극락전을 제외하고 모든 건물들이 불에 타 지금의 건물들은 다 1900년대 이후의 건물들이다. 사찰 경내를 여유 있게 둘러보며..... → 봉암사 노주석 대웅보전은 근래에 불사한 전각으로 화려하기가 그지 없었고, 올라가는 계단과 문짝의 꽃창살 무늬는 다양하게 다 달랐다. 앞 마당에는 노주석이라 하여 양쪽에 돌 받침이 있는데 한밤중 행사가 있을 때 관솔불을 피워 올렸던 것이라 한다. 즉 행사용 조명시설이다. 순 우리말로는 불우리라 한다. → 봉암사 금색전(대웅전) 다음으로는 금색전인데 처음에는 못 보았으나 후면에는 대웅전이란 전각명을 달고 있었다. 내부에는 큰 비로자나불이 봉안되어 있고 벽화는 삼장탱이 있었다. 대웅보전의 동쪽에 위치한 극락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5호)은 문화재 안내간판은 없으나 지방지정문화재이다. → 봉암사 극락전 → 봉암사 극락전 측면(왼쪽)과 아미타불 사모지붕의 건물로 내부에는 소규모의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으며, 극락 회상도가 있다. 신라 경순왕이 견휜의 군사에게 쫓겨서 이곳까지 피난을 와서 잠시 머문 곳이라 한다. 유일하게도 수차의 대 화재에도 건재하였으며 신라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전하는 목탑형의 건물이다. → 봉암사 산신각 옆에는 단 칸의 산신각이 있다. 가장 봉암사에서 보아야 할 유적들을 이제 만난다. → 지증대사 부도(왼쪽)와 부도비(오른쪽) 지증대사의 부도와 부도비는 대웅보전에서 서북쪽편 전각안에 양 옆으로 있다. 봉암사 개창조인 지증대사적조탑(보물제137호)은 지증대사의 부도로 지증대사가 입적한 883년 신라 헌강왕 8년 음력 12월(883)에 팔각원 당형을 기본으로하여 세운 것이다. → 지증대사 부도 문양 → 지증대사 부도비 문양(왼쪽), 부도 사리기 문양 8각의 하대석에는 마멸이 조금 심하나 각면마다 사자를 새겼고, 중대석에는 가릉빈가를, 고양상과 주악상도 볼만하다. 특히 안상안에 새겨진 사리기는 볼만하며 그 외 사천왕상과 자물쇠 문양도 눈 여겨보아야 한다.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방형의 지대석 위에 장식조각이 섬세하고 화려하게 제작된 것이다. 한쪽의 지붕 부분이 개어져 있었으나 복원하여 놓았다. 바로 옆이 지증대사 적조탑비(보물 제138호)인데 이 비는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일대기와 봉암사의 유래를 소상하게 적은 부도탑비로서, 신라 경애왕 원년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상당부분의 글자가 식별이 곤란하며, 귀부와 이수를 완전히 갖추고 특히 앙련과 8마리의 용이 서로 얽히어 싸우듯 장식한 매우 섬세하고 다양한 이수를 비신 위에 갖추고 있다. 사용한 석재는 점판암이며, 특히 남해에서 운반해온 해중석으로서 조각된 우리나라 유일의 것 전한다. 비문(碑文)은 신라의 대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지어 성주사 낭혜화상비, 쌍계사 진감국사비, 경주 숭복사비 등과 함께 사산비명의 하나이며, 사산비 가운데는 가장 늦은 893년에 것이다. 글씨는 비문의 맨 끝에『분황사 노승 혜강이 83세에 쓰고 새겼다고』되어 있다. 지증의 입적을 최치원은 "아! 이땅에 내려왔던 별이 상천(上天)으로 되돌아가고 달이 큰바다에 떨어졌도다(嗚呼星廻上天月落大海)"라고 적었으니 큰스님의 입적에 대문장가의 장쾌한 표현으로 보인다. 왕은 시호를 지증(智證), 탑호를 적조(寂照)라 내렸다. → 봉암사 삼층석탑 봉암사 3층석탑(보물 제169호)은 금색전 바로 정면 앞에 있으며 석가탑과 비슷한 비율을 가진 아름다운 탑이며 특히 상륜부가 제 것인 이 탑은 단층기단 위에 삼층의 탑신부와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는 특색있는 탑으로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창건한 때인 헌강왕(憲康王) 5년(879)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탑신은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한돌로 되고, 옥신에는 각층마다 우주가 있고, 옥개석은 추녀밑이 직선이며 전각에 이르러 낙수면에서 반전하고 받침수는 각층마다 5단으로 되어있다. → 봉암사 정진대사원오탑비 전경(왼쪽), 정진대사부도비(원오탑비) 봉암사 정진대사원오탑비(보물 172호)는 절 경내에서 조금 벗어난 입구에 있다. 정진대사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는데, 정진대사(878~956)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로, 효공왕 4년(900) 당나라에 들어가 25년간 유학하고 경애왕 1년(924)에 돌아와 신라 경명왕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고려 태조 18년(935)에는 봉암사를 두번째로 크게 짓고, 불교의 중흥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특히 고려 전기의 태조ㆍ혜종ㆍ정종을 선문(禪門)에 들게 한 장본인으로,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왕은 '정진'이라는 시호와 '원오'라는 탑이름을 내리었다. → 봉암사 정진대사원오탑비 비문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리돌을 올린 모습으로, 거북의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이 두드러지게 커 보인다. 고려 광종 16년(965)에 세워진 비로, 전체적인 조형이 간략화되었으며 조각 기법이 퇴화하였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이몽유가 짓고, 명필 장단열이 글씨를 썼다. → 봉암사 정진대사원오탑(왼쪽) 문양(오른쪽)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보물 171호)는 정진대사 긍양의 사리탑으로, 경내에서 벗어나 사찰 입구 북쪽 산중턱 가까이 자리하고 있어 경승지를 택해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 봉암사 정진대사 부도비 문양 이 탑은 탑신(塔身)을 받치는 기단(基壇) 곳곳에 꽃무늬조각과 구름ㆍ용ㆍ연꽃무늬 등의 불교 세계를 상징하는 각종 장식을 화려하게 두었다. 탑신의 높직한 8각 몸돌은 면마다 모서리에 기둥조각이 있고, 앞쪽면에 자물쇠 모양의 조각이 있을 뿐, 다른 7면은 조각이 없다. 지붕돌은 지나치게 두꺼워 둔중한 느낌을 주며, 꼭대기에는 연꽃 모양의 머리장식만이 남아 있다. 고려 광종 16년(965)에 세워진 탑이다. → 봉암사 마애보살좌상(왼쪽-2000년 모습, 오른쪽-현재) 봉암사 마애보살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21호)은 봉암사 경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으며 불상 옆에는 최치원이 섰다는 글씨도 있으나 믿을 수 없다. 백운대 마애불이라고도 불리며 전날 비가 너무 많이 와서인지 계곡의 물은 파치 폭포를 연상시키는 듯 급류를 하고 있어서 건너가 보지는 못하고 멀리서만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입구에서 다 보았다. 이 불상은 머리는 두드러지게 표현하였으나 몸체로 내려오면서 선각으로 얇게 처리하여 불두의 조각수법과 다르게 하였다.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의 중앙에는 꽃무늬가 있고, 신체에는 속옷에 매어진 띠매듭이 매우 뚜렷하고, 옷주름은 자연스럽게 밑으로 흘러내렸다. 왼손은 배 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위로 들어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 대좌(臺座)에 앉아 있는 자세로 무릎이 넓고 높아 안정감이 있다. 전체적으로 탄력과 힘이 감소되고 형식화되어 가는 고려말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 봉암사 석종형 부도 봉암사 석종형 부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35호)는 정진대사원오탑비 오른쪽에 있는 밭의 끝지점에서 좌측 산길따라 70여미터 지점에 위치한 이 부도는 통상적인 석종형 부도로 보주와 탑신은 2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고 지대석은 방형이다. 탑신높이 1.02m, 보주높이 41㎝로 기명이 없어 지눌보조국사 부도인지 태고보우국사 부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전한다. 이 길은 일반인들이 잘 찾지 않으나 우연히 답사길에서 지나쳤던 청주에서온 아주머니들이 길을 헤메이다가 발견하고 가르쳐 주었다.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 특히 지방 문화재이며 왠만한 책에는 소개되지 않은 환적당지경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33호)은 암자 뒤쪽 기슭에는 자리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중기의 승려인 환적당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환적당(1603~1690)은 '지경'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16세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고 팔공산 동화사에 들어가 성현대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21세에는 청량산에 들어가, 그 곳에서 31년간 곡식 대신 솔잎ㆍ밤ㆍ대추 등을 먹으며 지내었다. 88세에 해인사의 백련암이라는 암자에서 생을 마치었다. 부도는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로, 탑신(塔身)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며,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다. → 한적당 지경지탑(왼쪽), 함허당 득통지탑(오른쪽) 기단 중에서 아래받침돌은 8각에 맞추어 연꽃을 하나씩 새기고 그 사이마다 잎을 새겨두었다. 가운데받침돌과 윗받침돌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 놓았다. 탑신의 몸돌 한 면에는 '환적당지경지탑(幻寂堂智鏡之塔:환적당 지경의 탑)'이라 새겨 그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지붕돌은 윗면에 여덟 모서리 선이 표현되어 있고, 처마의 여덟 귀퉁이는 위로 들려 있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룬다. 꼭대기에는 2단의 8각받침 위로 꽃봉오리 모양의 둥근 머리장식이 놓여있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 세운 것이다. → 함허당 득통탑 바로 근처에 있는 함허당득통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34호)은 조선 전기의 승려인 함허당의 사리를 모신 곳으로 허당(1376~1433)의 호는 득통으로, 21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세종의 부름을 받아 4년동안 대차어찰에 머무르며 교화를 하였고, 봉암사를 새로이 보수하기도 하였다. 이 절에서『금강설의』를 지었으며, 세종 15년(1443)에 입적하였다. 부도는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로, 탑신(塔身)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후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 하였는데, 각 부분이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기단에서 아래받침돌은 연꽃무늬를 둘러 새겼다. 탑신의 몸돌에는 함허당득통지탑(涵虛堂得通之塔:함허당 득통의 탑) 이라 새겨 그 주인공을 밝히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액자 모양의 윤곽을 두른 후 그 위아래에 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지붕돌 윗면에는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으며, 처마는 양끝이 위로 살짝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일부 없어진 머리장식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조선시대 전기인 15세기 중엽에 세운 것이다. 일년에 단 한번의 기회가 있는 봉암사 KBS1 TV에서 봉암사의 사계를 방송하고 난 이후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몰리기 시작하여 부엉이 등 자연 생태계를 만끽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봉암사 사찰림에서 멸종위기식물(제99호)인 고란초의 국내 최대 군락지가 발견했지만 희양산 정상부와 주능선에 많은 등산객들이 몰리고 있어 희귀 법정보호식물과 일부 한국 특산종이 사라질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한다. 또한 봉암사 사찰림에는 고란초 군락 이외에도 한국특산종인 꼬리진달래의 대규모 서식지가 발견됐고 환경부 법정보호종이자 희귀식물인 천마와 솔나리를 포함, 600여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국립공원을 능가하는 새로운 생태계 보고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처럼 희양산은 희귀한 바위가 연봉을 이루는 자연경관과 함께 천연기념물인 수달, 산양, 하늘다람쥐, 환경부 법정보호종인 살쾡이와 담비, 구렁이, 까치살모사 등이 서식해 시급히 자연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돼야 할 것으로 지적됐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 자연 보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 봉암사 마애불 계곡 들어가는 입구 계곡부터 시원스런 봉암사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인해 또 한번 알려져 이제는 초파일날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나 예전의 그 모습을 점점 잃어가고 있어 또 한번 세월의 안타까움과 자연 생태계가 우리에게 주는 영향을 되새기며 왜 출입을 통제해야만 하는지 다시금 생각해 본다. 봉암사를 한번 다녀간 사람들은 언젠가는 다시금 찾을 정도의 그런 사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봉암사의 흥망과 성쇠를 고스란히 담아 온다. 돌아가는 길에 이강년 선생 생가지(경상북도 기념물 90호)를 둘러 보았는데 입구에는 너른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주변에는 선생의 유품들을 모아 전시한 박물관도 있다. 가은읍 완장리에 있는 이 곳은 한말의 의병장 이강년(1858~1908) 선생이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현재 건물은 다 복원되어 있다. 선생은 이 고장 출신으로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1896년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1907년 조선의 군대가 해산되자 영춘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주로 강원도와 충청도, 경상북도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저서로는 『운강문집』과『운강선생창의일록』이 있다. 안중근, 김구, 윤봉길 선생등과 함께 대한민국 건국훈장중장을 추서(追敍)받은 22인중의 한 분이다. * 봉암사 가는 길 : 문경시 중심가 - 3번국도 마성방면 15km, 모곡 - 901번- 지방도12km, 가은읍 - 괴산방면 922번 지방도 12km, 도태교 - 희양분교에서 우회전-봉암사 방면 4km - 봉암사 * 참고로 이정표는 문경 석탄 박물관 이정표를 참고삼아 가면 더 찾아가기가 쉽다. |
출처:김환대의 문화유산답사기 (현대불교)
첫댓글 마애불 계곡 너무 멋져요~^^
흰 등이 줄지어 있던 그 모습이 떠오르네요..올해 처음 가봤는데 감탄을 연발하다 아쉽게 걸음을 돌렸습니다. 경이로운 자연에 패쇄성이 주는 신비로움이 더해져 매력적인 곳으로 기억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