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춘 [朴是春/1913~1996] 작곡가, 트럼페터, 바이올리니스트, 색소포니스트, 기타리스트. 경상남도 밀양 출생. 데뷔 : 1929년 학력 -경상남도 밀양보통학교 -일본 다이조 중학교 -일본 오사카 중앙음악학원
주요 작품 <몬테 카를로의 갓난이(연주곡)>, <어둠 속에 피는 꽃(연주곡)>, <눈물의 해협>,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전우야 잘 자거라>,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Lucky Seoul(러키 서울)>등
박시춘!
생애 삼천여곡을 작곡한 가요계의 대부! 그가 빠지면 우리가요 100년사의 전반부는 백지와 다름없을 만큼 그의 업적은 위대하다.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꼬집힌 풋사랑, 울며 헤진 부산항, 가거라 삼팔선, 이별의 부산정거장등 수많은 주옥같은 명곡을 만들어 히트 시켰으며 해방 후 현인으로 하여금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고향 만리, 굿세어라 금순아, 전우야 잘 자라 등을 부르게 하였으며 최고의 가수 남인수, 이인권, 김정구, 장세정, 현인, 박경원, 백설희, 이미자, 나훈아에 이르기까지 그를 거치지 않는 스타는 없었다.
전선야곡, 고향초, 삼다도 소식, 아메리카 차이나타운, 돌지 않는 풍차등 샐 수 없이 많은 곡을 작곡한 박시춘은 밀양출신 월견초와 더불어 남천강 사랑, 밀양 아가씨등을 작곡 하였으며 오향 영화사를 만들어 육체의길, 가는 봄 오는 봄, 딸 칠형제등 우리나라 영화사에 큰 획을 그었다 . 1971년 김부자의 일자상서를 마지막으로 그가 쌓아온 금자탑은 찬란하기 그지없다.
박시춘 선생이 남긴 찬란한 명곡들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박을 견디어 살아가게 한 원동력과 위로의 노래가 되었으며 희망이 없는 암울한 조국에 희망을 갖게 하고, 메마른 가슴은 눈물로 적시우고 하소연 할 수 없는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당시의 유행가 황성옛터, 나그네 설움, 목포의 눈물등은 박시춘 선생의 서귀포 칠십리, 집 없는 천사와 더불어 나라 잃은 설움을 노래하였고 일제의 검열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더구나 박시춘 선생과 살아온 세대에게는 박시춘은 감동어린 노래의 화신이었고 마음의 고향이었다.
불운했던 일제36년!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일제시대의 우리 노래가 일본 엔카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패배의식의 노래라면 현재의 랩과 댄스음악, 지식층의 클래식은 과연 우리 음악인가?
맺힌 것을 풀어주는 음악, 슬플 때 울고 나면 시원한 음악, 이별이 그리워 사랑이 되고, 사랑이 그리워 한이 되는, 한은 슬프나 즐겁고 어두우나 밝았으며 절망스러우면서도 희망을 주는 우리민족의 한을 풀어주던 노래! 당시 이들의 노래는 일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민족의 속을 풀어주는 신호이며 약이었다.
최고의 작곡가 박시춘, 최고의 작사가 조명암, 최고의 가수 남인수, 백년설, 이난영, 박향림등이 친일을 찬양하는 노랫말을 만들고 오선지를 채우며 노래했다.
물론 일제를 찬양하고 친일의 노래를 만든것은 잘못 되었으며 친일을 단죄하지 않으면 역사의 대의를 바로 세우지 못하는 것도 사실 이지만 당시 시대상황과 한 맺힌 우리의 역사를 토대로 한 가요를 이해하지 못하는 소위 정의론자들이 친일이니 매국이니 운운하며 지금의 잣대로 단죄함은 너무 위험한 발상이며 흑백의 논리로 치우침은 더욱 안된다.
친일가요 혈서지원,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안해등 강압에 의해 만든 노래는 일제말 일본이 최후의 발작을 할 때 몇 곡 불려 졌으며 일제가 볼 때 최고의 가치가 있는 그들을 어찌 그냥 두었겠는가? 그들은 정책을 따르면서 목숨의 위협과 함께 통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오선지를 채웠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대다수의 곡들로 망국의 한을 노래했고 노래로서 서로 서로를 위로 하며 다가 올 해방을 기대했다. 또 하나의 친일을 찬양하는 노래라 논란이 되던 박시춘작곡 남인수의 감격시대는 해방과 함께 일본의 패망을 기뻐하고 해방된 조국을 찬양하며 해방과 함께 더 많이 불려졌다.
마치 해방을 예견한 노래처럼...
일제때 거의 모두가 강압에 의해 창씨개명을 하고 자의든 타의든 징집으로, 징용으로, 정신대로, 일제에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일조한 사람들을 모두 친일이라 할 수 없지 않는가? 모두 슬픈 역사에 희생된 양 이라 할까?
물론 자기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일제와 싸우며 자기 소신을 꿋꿋하게 관철해 온 애국선열도 많지만 지금 친일이라 주장하며 단죄하고자 하는 분들이 그때의 상황이라면 강자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견딜 자신이 있었을까?
그들은 살아남았고 해방 후 박시춘 선생은 신라의 달밤, 가거라 삼팔선등을 작곡 하였으며 또 하나의 비극인 6.25가 터지자 군 예대로 입대하여 제1훈련소가를 비롯하여 수많은 군가와 전우야 잘 자라, 전선야곡, 임계신 전선등을 작곡하여 우리 군의 사기를 높이고 조국의 미래를 위하여 싸웠으며, 굿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최고의 명곡을 탄생 시켰다.
주옥같이 아름다운 노랫말은 구구절절한 한편의 시였고 시대를 반영한 기막힌 조화로 조국의 아픔을 노래한 가요인들을 결코 우리는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
이재호 [李在鎬 / 1919~1960 ] 작곡가, 트럼페터, 바이올리니스트.
경상남도 진주 출생. 데뷔 : 1937년 학력 :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교 주요 작품 : <북방여로>, <나그네 설움>, <대지의 항구>, <번지 없는 주막>, <산팔자 물팔자>, <고향설>, <어머니 사랑>, <망향초 사랑>, <불효자는 웁니다>, <꽃마차>, <아네모네 탄식>, <무영탑 사랑>, <물레방아 도는 내력>, <단장의 미아리 고개>, <무정열차>, <산유화>, <복지만리>, <黃河茶房(황하다방)>, <갈매기 쌍쌍>, <귀국선>, <홍콩 아가씨>, <경상도 아가씨>, <산장의 여인>, <울어라 기타 줄>, <고향에 찾아와도>등
한국 가요계에 또 하나의 거대한 축이자 한국의 슈베르트라 불리는 이재호 선생은 작곡, 편곡, 연주 실력까지 고루 갖춘 당시 몇 안되는 실력파 작곡가인 동시에 연주가였다. 오케레코드에 박시춘, 남인수 콤비가 최정상의 인기를 구가하였다면 이에 반해 태평레코드에서는 이재호, 백년설 콤비가 있었으며 40년대 초에 연이어 스타로 성장하는 백년설, 진방남, 백난아등이 모두 태평레코드에서 이재호의 곡을 받아 데뷔, 스타로 자리잡았다. 음악생활 내내 지병인 폐결핵을 앓았으나 그의 작품들은 무엇보다 건강하고 아름다웠다. 향년 42세의 짧은 인생을 살았음에도 눈부신 명곡들을 겨레의 가슴에 영원히 남긴 그의 삶과 작품들을 보자.
일제하 망국의 설움을 노래한 '오늘도 걷는다만은...'의 '나그네 설움', 지도상에서 사라져 버린 나라를 탄한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로 시작되는 '번지없는 주막', 되찾은 광복의 기쁨을 가슴 벅차게 노래한 '귀국선', 6.25 참상을 생생하게 고발한 '단장의 미아리고개', 부패된 자유당 정권으로부터 귀거래사를 읊은 '벼슬도 싫다마는 명예도 싫어...'의 '물방아도는 내력', 그리고 그의 삶이 고스란히 배인 '산장의 여인' 까지... 이재호 선생이 한국가요의 요람기를 밝혀준 빛들은 찬란하다.
이재호 선생은 타계한지 36년이 지난 1996년 10월 20일 문화의 날에 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는 문화훈장 보관장을 추서로 서훈 받았다.
함께 콤비를 이뤄 단장의 미아리고개, 산유화, 산장의 여인등 많은 걸작들을 탄생시킨 작사가이자 원로 가요인 반야월 선생은 "외롭게 자라서인지 평소에는 말이 없고 우수에 차 있는 듯했으며 술잔이 몇 순배 돌아야 그제서 말문을 여는 분" 이라며 또한 "술을 너무 좋아해 건강을 되찾지 못했지만 늘 낭만이 넘쳤고 또 번뜩이는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살았던 예술가" 로 "그가 조금 더 오래 살아주었더라면 가요계 판도는 또 한번 크게 바뀌었을 것" 이라 평하며 그의 짧은 생애를 애석해 하기도 했다.
여전히 국민들에게 큰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그가 남긴 노래들, 천재적인 음악성의 소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만 이재호의 작품세계, 반드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우리 대중문화의 소중한 유산이다.
대지의 항구 / 백년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