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그 이름 또한 "호남의 한(恨)"을 상징한다.
해태 타이거즈가 승승장구하던 시절 "목포의 눈물"이 한동안 경기장에 울려펴진 뒤 호남사람들은"김대중"을 연호했다.
호남인들은 그렇게 "한(恨)"의 상징성을 외치며 한풀이를 했다.
호남인들의 가슴 속에 뿌리 깊게 자리한 한의 정서는 18일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시련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1967년 6월 목포역 광장. "유달산아 네게 넋이 있다면, 영산강아 네게 뜻이 있다면 이김대중을 버리지 말아다오~."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열기에 출마한 고 김전 대통령은 목포시민에게 간절히 호소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패기 넘치는 젊은 정치인 김대중의 낙선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개도 발엔 고무신을 신고 입엔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금권,관권선거가 횡행했다.
박 전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이 자신의 최대 정적(政敵)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한 탓이다.
그러나 목포시민은 당시 여권의 돈을 거부하고 김 전 대통령의 호소를 받아들였다.
4년 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불안한 예감"이 적중했다.
지난 1971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돼 서울 장충단 공원에 운집한 100만명의 군중에게 "정권교체"를 외쳤다.
그 외침은 독재에 저항하고 있던 피끓는 젊은이들을 자극했지만 정치인 김대중과 호남인에겐 "비운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대선에서 승리한 박정희 정권은 이듬해 10월 유신을 선포했고 호남의 차별과 김대중 전대통령에 대한 탄압을 시작한다.
1973년 8월 일본으로 망명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도쿄의 한 호텔에서 괴한에게 납치됐다가 기적적으로 생환(生還)했다.
1980년 5월 김 전대중과 호남의 차별과 고통은 정점에 달했다. 5,17 계엄령을 확대한 신군부는 김 전 대통령을 내란죄로
긴급체포했고 이에 항의하며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치던 광주시민들은 무참히 짓밟혔다.
김 전 대통령은 사형수가 됐고 광주는 "폭도의 도시"가 됐다.김 전 대통령의 역경은 고스란히 호남 차별로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 시절 호남은 "한강의 기적"으로 상징되는 개발독재의 과실을 맛보지 못하고 고립된 공간으로 남았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후 23년만에 4차선 도로가 된 호남고속도로는 호남차별의 대표적인 사례다.
신속성과 대량수송을 목적으로 건설되는 고속도로는 최소 4차선이어야 하지만 1973년 호남고속도로는 2차선으로 개통됐다.
곧바로 교통량이 폭주해 4차선 확장이 불가피했지만 정부는 외면했다.
2차선인 호남고속도로는 대량 산업을 뒷받침하는 신속한 대량소통의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산업기반이 취약한 호남지역은 고속도로 개통 이후 물자는 북에서 남으로, 자금과 이윤은 남에서 북으로 역류하는 현상을 빚고
있었다.즉 호남고속도로가 호남에 부(富)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호남의 부를 유출하는 통로가 된 것이다.
산업기반이 전무한 상황에서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물자의 소통이 원활해지고 이로 말미암은 물자의 범람은 소비도시의 병폐를
조장했다. 이 지역 소비시장의 과실은 역외로 유출될 수밖에 없었다. 지역 상공인들은 정부에 도로 확장을 끊임없이 건의했고
1986년 대전~광주간 도로가 4차선으로 확장됐고 10년 이후인 1996년 담양 고서~순천 구간이 겨우 4차선 고속도로가 됐다.
23년 동안 "2차선 고속도로"로 남아있던 곳에서는 숱한 교통사고 사망자가 발생했다.
사회적 차별도 심했다. 얼마나 차별이 심했던지 서울에서는 "전라도 티"를 내기 쉽지 않았다.
호남 출신에게 지역안배를 구실로 돌아오는 감투는 체신부장관, 농림부장관, 철도청장이 고작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경우 차관급 이상 고위 공직자 395명 가운데 호남 출신은 전체의 10.2%인 41명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 영남 출신 차관급이상 고위 공직자는 173명으로 전체의 절반에 육박하는 43%를 차지했다.
그러다 보니 꿈과 야망을 지닌 젊은이들은 고향을 숨기게 됐다."호남의 한"은 매번 선거때마다 "호남 몰표"로 이어졌다.
호남사람들은 김 전 대통령이 호남의 응어리를 풀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또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어온 김 전 대통령이 왜곡된 한국 정치,사회를 바로잡을 수 있는 적임자로 판단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민주화 세력분열로 고배를 마셨다.
1992년에는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3당 야합"으로 인해 또다시 대선에서 패했고 호남은 더욱 고립됐다.
김 전 대통령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5,18의 처절한 고통을 끌어안기 위해 호남인과 함께 했다.
1988년 5공 청문회를 통해 "5월 학살"의 만행의 일부가 드러났다.
이후 김 전 대통령과 5,18 유가족 등은 신군부의 5월 만행에 대한진상 규명을 위해 함께 투쟁했다.
지난 1997년 기나긴 투쟁 끝에 5,18 주범들이 반란과 내란죄로 기소됐고 민주화운동기념일로 확정됐다.
국제통화기금(IMF)한파가 몰아치던 1997년 1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숱한 고난과 역경을 딛고 집권에 성공했다.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정권교체를 이뤄낸 것이다.
호남은 압도적인 지지(광주 97.3%, 전남 94.6%, 전북 92.3%)를 했다.
당시 호남 사람들은 환호하면서 울었다.
한맺힌 지난 세월에 대한 설움과 정치,사회 등 각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란 기대감이 교차했다.
일부 호남인들은 차별과 소외의 세월에 대한 과도한 보상을 받으려 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국가균형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망국적인 지역감정 타파를 위해 지역 안배 인사를 먼저 생각했다.
군부독재 정권의 잘못된 과오를 되풀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호남 역차별"이라는 용어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김 전 대통령은 또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햇볕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그 결과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호남에 잘못된 유산을 남겼다는 평도 받았다.
지역할거 정치구조에서 "일당독주"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호남정치권은 동교동계의 "가신정치" 틀에 갇히게 됐다.
김 전 대통령 아들 3형제의 흠결은 호남을 실망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보편적 가치를 일반화시키고 왜곡된 정치 사회구조를 바로잡는데 헌신해온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업적은 역사가
정당한 평가를 할 것이다.호남은 차별과 소외를 받았지만 김 전 대통령과 항상 함께 했다.
전라도의 恨,희망…
그가 있어 행복했다
1997년 5월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이 국립 5,18민주묘지 신묘역 준공식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모진 풍상에서 우릴 보호했던 거목 슬플때나 기쁠때나 함께 울고 웃어 시련기마다 호남은 든든한 버팀목.....
■ DJ와 5,18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5,18의 인연은 각별하다.
1980년 5월21일 신군부는 "광주학살"의 진실을 숨기기 위해 김대중(DJ)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다.
80년대 초 "서울의 봄" 당시 광주 민주화운동을 군홧발로 유린한 신군부는 26인의 민주인사를 학원 선동과 부정축재 혐의로 일사천리로
체포, 수감한 지 4일만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전격 발표했다.
한순간에 반국가단체 수괴가 된 김전 대통령은 그해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이듬해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위기에 놓이자 구명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교황까지 나선 국제적 압박을 견디다 못한 신군부는 결국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1982년12월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지난 1995년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김 전 대통령을 비롯한 관련자들의 재심 청구와 명예 회복이 이뤄졌고,
대통령 임기를 마친 2003년 재심을 청구해 2004년 결국무죄를 선고받았다.
5,18은 김 전 대통령을 죽음의 위기까지 몰고 갔지만 결국 그의 정치적 자산으로 남았고 민주화 운동가로서 그의 위상을 더욱 높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김 전 대통령도 "광주 정신"의 상징인 5,18에 대한 애정을 끊임없이 드러냈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6,29선언으로 사면된 뒤 당시 망월동 5,18묘역을 첫 참배한 뒤 통한의 눈물을 흘렸고 이후 야당총재, 전현직
대통령의 자격으로 5,18묘지를 꾸준히 참배했다.
1996년 대선 후보일 때에는 5,18묘지 준공식에 참석해 방명록에 "영원한승리"라는 글을 남겼다.
김 전 대통령은 1998년 8월 27일 현직 대통령 자격으로 국립5,18민주묘지를 처음 참배하면서 용서와 화해의 완결 그리고 사회통합을
강조했었다. 퇴임 이후에는 전직 대통령 자격으로 국립 5,18민주묘지를 꾸준히 참배했다.
2005년 9월 "추모 5,18민주영령", 2006년 6월 "민주주의는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입니다", 2007년 10월"불멸의 위업 영혼불망"이라는
글을방명록에 남겼다.민주당 광주시당 관계자는 "김 전대통령은 항상 5,18영령들과 함께 하며 정치고난 등을 이겨왔다면서 "5.18
정신과 김 전 대통령은 호남인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된 지 12년 만에야 고향 하의도를 방문했다. 뒤늦은 금의환향.하지만 축하를 받기에는 나랏일이 너무 바빴다.
외환위기를 벗어나야 했고 "망국병"인 지역 감정도 해소해야 했다.
남북 화해의 노둣돌도 놓아야 했다.한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은 그이지만 오매불망 그리던 고향땅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고향방문이었다. 수구초심이었다.지난 4월24일 고향으로 가는 쾌속선 안에서의 김대중 전 대통령.
김 전 대통령, '나로호'와 남다른 인연
김대중 전 대통령과 '나로호'의 인연도 남다릅니다.
나로우주센터 건설과 나로호개발이 모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재임시절 시작됐습니다.
우주강국의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작업은 김대중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세계에서 13번째로 지어진 나로우주센터는 김 전 대통령 취임 3년째인 지난 2000년 12월 첫 삽을 떠 9년 만에 완공됐습니다.
오늘(19일) 발사를 앞둔 '나로호' 역시 김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습니다.
'나로호' 개발은 김 전 대통령의 퇴임 2개월을 앞두고 시작됐습니다.
"김 전 대통령께서는 우주기술개발에 대한 애착이 매우 크셨고, 나로우주센터 개발 역시 그분이 대통령 재임 시 착수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 나로우주센터는 차분한 분위기 속에 막바지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정문 입구에는 김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조기가 걸렸습니다.
"연구원들도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님이 우주 개발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시작해주신
꿈을 받아서 성공함으로써 그분의 유지를 받는 것도…."
나로호 발사를 앞두고 들뜬 분위기였던 이곳 주민들도 애도 속에 발사 성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우주개발의 씨앗을 뿌린 고인은 갔지만, 나로호는 그 꿈을 안고 오늘(19일) 우주로 힘차게 비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