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청계천 토박이다. 1946년에 태어나 유년기와 소년기와 청년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은빛 황혼"에 접어들면서도 지금도 우리 가문의 중심이 되어 버티고 있는 종로구 장사동 일사팔의 일번지를 일주일에 평균 한 번 정도 방문하지만, 누구나 나 같은 나이가 되면 글을 남가고 싶은 소망이 있지만, 나는 능력부족이다. 다행이 가문을 대표하는 내 형님(故 손광식씨)이 언론계에서 오래동안(경향신문 경제부장,논설주간, 문화일보 사장 역임)계신 관계로 글을 잘 스셨다. 형님은 돌아가시기 몇년전에 아들 딸과 손자들에게 남기고 싶다는 이유 와 청계천이라는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한 서민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고하며, "내고향 청계천 사람들"이라는 두틈한 책을 발간하였다. 그 중 한편 프롤로그을 옮겨본다. 장사동 일사팔의 일 손광식 식탁이 빈약했던 시절이라 먹거리에 대한 부푼 기대는 역시 제삿날 밖에 없었다. 없는 살림이지만 제사상만큼은 격식을 제대로 차렸다. 경제사정으로 보면 무리일 정도였다. 그러나 무리할수록 우리들은 좋았다. 평소에 잘 먹어보지 못하던 맛있는 음식들이 풍성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제삿날이 닥쳐오면 벌써부터 바빠지셨다. 제상에 올릴 제물들을 손수 만드시느라 눈코 뜰 새 없으셨다. 제일 먼저 아버지의 손이 가는 곳은 안방 아랫목에 있는 술 항아리였다. 이불을 둘둘 감으면서 하시는 말씀은 언제나 같았다. "이번에도 제대로 익어야 할 텐데" 그건 밀주였다.당시는 서울의 보통 가정에서도 제사용이나 연말 연초 접대용으로 누룩을 구해 찹쌀로 약주를 담가 먹었다. 그래도 단속에 걸리거나 잡혀간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술이 어느 정도 익었는지 맛을 보시고 다식판 앞에 앉으셨다. 그 다식판도 아버지가 손수 나무를 다듬어 만드신 것이라고 했다. 송홧가루를 물엿에 개어 판으로 찍어내면 다식이 되었다. 제기에 과일 사탕도 만드셨다. 두꺼운 기름종이로 종지 모양을 만들어 그 속에 사탕을 엉겨 붙을 정도로 녹인 다음 부어 말리면 굄용 사탕이 되었다. 오징어나 문어를 가위로 오려 온갖 문양도 만드시고, 물에 담근 생률을 껍질을 칼로 쳐낸 다음 일정한 모양으로 깍아 내셨다. 어머니는 동대문시장을 드나들며 부지런히 장을 보셨다. 안팍이 이렇게 바빴지만 나는 먹거리를 "삥땅"하기에 바빴다. 어머니의 장바구니에서 조개를 몇 개 쓸쩍해 풍로 위에 올려놓으면 껍질이 쫙 벌어지면서 오징어 타는 냄새가 났다. 그걸 국물까지 쪽쪽 빨아먹는 맛은 일품이었다. 작은어머니 옆에 광주리에 부침개가 쌓이면 개평을 뗐다. 그것도 생선전만 골라서 먹었다. 제일 먹고 싶었던 것은 과줄(약과)이었다. 여간 달고 고소하지가 않아 우리들은 제사상을 물리고 나서 선점경쟁을 벌일 정도였다. 언젠가는 제사전에 쓸쩍하다가 들켜 된통 야단을 맞은 일도 있었다. "조상님이 입도 대시기 전에 무슨 짓이냐. 제상 너머 할아버지가 보고 계셔" 그말을 듣자 진짜로 할아버지께서 호통을 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 더 영악했더라면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가 야단치실 리가 있나요, 손자라면 얼마나 부르르 떠시는 분인데' 아버지는 당신께서 들인 정성에 걸맞게 제사 의식도 철저하셨다. 절을 하면 한식경이나 지날 정도가 되어야 머리를 드셨다. 그리고 또 재배, 나는 재배 도중에 이제나저제나 하고 머리를 들어보지만 아버지는 꿈쩍도 안했다. 아버지는 피난을 가서 포탄이 날고 폭격이 심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어김없이 제삿날을 지켜 예를 올리셨다. 밥 한 그릇에 냉수 한그릇 올리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셨다. 그 전범은 우리 가족에게 제사에 대한 신앙 같은 것을 남겼다. 내가 정말로 슬피 운 것은 아버지의 구두를 보고 나서였다. 아버지는 몸이 좀 좋아지면 구두를 신고 나들이가는 꿈을 꾸고 계셨다. 그래서 구두를 한 켤레 장만해두었다. 공부와 아르바이트 때문에 바깥으로 돌던 내가 가끔 집엘 가면 아버지는 안방문을 여시고 눈으로만 아는 체를 했다. "애비가 힘이 없어 너 고생시킨다" 안방에서 나오지를 못 하셨으니 구두는 새것 그대로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그 구두를 상청 제상 밑에다 놓으셨다. 지팡이와 함께. "황천길에서라도 훨훨 당신 마음껏 나들이 하시구려" 결국 아버지는 구두를 아끼고 아끼고 아끼다 이승을 떠나셨다. "저 구두를 언제 맞춘 건데 한 번도 못 신너 보시고....." 나는 아버지의 병사에 대해 슬퍼했고 가난에 분노했다. 비단 나 뿐일까? 나의 동시대 친구들이 가난 앞에서 절망하고 분노했을 것이다. 나는 그날 우리집 차디찬 대청마루에 있던 아버지의 영전 앞에 엎드려 오래 오래 울었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가 되면 어느 집에서나 가르치는 게 있다. "너 어디에 살지. 하고 물으면 어쩔래?" 구슬치기에 골몰해 있던 나에게 느닷없이 "집이 어디지?" 하고 물으면 손과 눈은 구슬을 떠나지 않아도 "장사동 일사팔의 일" 하고 대답했다. 장사동 일사팔의 일번지에서 내가 산 기간은 20여년을 채우지 못했다. 그래도 그곳은 내 마음의 영원한 고향이다. 마을 어귀에 느티나무가 서있고, 시냇물 흐르는 정취야 원래부터 없던 곳이다. 하지만 유년 시절의 추억이 숱하게 숨어있고 아직도 우리 가문의 중심이 되어 버티고 있다. 내 유년의 희노애락이 모두 담긴 그집은 이제 몽땅 상가로 변해 그 당시의 형채는 간데 없지만, 시멘트와 판자의 상가 구조물 속에 옛날 용마루가 무슨 상징물처럼 지금도 뼈대가 남아 있다. * 형 이 출간 책(우리 집 보물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