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침투
기미히토와 사도광탄은 수아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었다
라이언펀드의 투기 자금이 한국의 주식 시장을 붕괴시키고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야 해요. 그것을 저는 컴퓨터 조작을 통해
막으려고 하는 거예요.
어떻게 조작을 한단 말이죠??
딕슨은 저가에 사서 고가에 팔아요. 물론 엄청난 자금을 동원
하기 때문에 주가는 뛸 수밖에 없죠. 뒤늦게 뛰어든 일반 투자자
들은 딕슨이 주식을 팔아버리고 철수하면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어요. 선량한 외국인 투자자들이 자금을 빼면 외환 위기까지
겹치죠. 어쨌거나 딕슨이 한국의 투자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면
서 엄청난 단기 차익을 가지고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하는데 정부
에서 할수 있는 일이 아녜요.다행히 모든 거래는 컴퓨터를 통
해 이루어지고 있어요. 저는 딕슨이 판 주식 대금으로 그들이 모
르게 자동 매입이 이루어지도록 컴퓨터로 조작하려는 거예요.
수아의 이야기가 끝나자 기미히토는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
다. 어린 여학생이 한 나라의 증권 전산망에 손을 대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방법이 너무나 대담했기 때문이다
또 한 번 놀란 것은 수아의 그 가상한 의도였다 동기야 어쨌
든 발각되면 바로 형사 입건될 일을 자신의 한 몸은 개의치 않고
미국에서 여기까지 날아와 혼자서 프로그램 제작에 노심초사해
왔다는 사실이 었다.
기미히토는 이제껏 미국이나 일본에서 수많은 해커들을 봐왔
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심한 장난꾼이거나 시시한 좀도둑에 불과
했다. 하지만 이카로스는 달랐다. 물론 솜씨도 단연 탁월했지만
어떤 경우에도 해킹으로 피해를 입히는 경우는 없었다. 이카로
스의 해킹은 컴퓨터의 비밀을 샅샅이 캐내기 위한 무한한 열정
이었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밑거름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카로스는 기미히토나 실리콘밸리 연구소에 커
다란 도움이 되었다. 연구소사람들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작
하고는 이카로스가 침투하기를 기다렸다 그의 해킹을 통해 시
제품에 대한 검증을 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 수아가 증권 전산망에 손을 대려 하자 기미히토는 크게
실망했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수아의 사정을 듣고는 감격했다.
펠젠스타인이나 워즈니악이 거대한 컴퓨터 기업의 횡포로부터
대중의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운 해커들의 영웅이라면, 이카로스
는 조국의 위기를 컴퓨터 기술 하나로 구해보려는 또다른 해커
의 영웅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수아는 윗입술을 깨물며 긴장하고 있었다. 기미히토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를 일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것은 범죄
였다. 외국인인 기미히토가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일에
기꺼이 협력해 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왜 이카로스가굳이 프로그램 변형이라는 번거로운 방
법을 쓰려고 하나 궁금했어요. 그 빼어난 해킹 실력으로 ID를
도용한다든지 록을 푸는 것이 훨씬 쉬울 텐데 말입니다.
부탁이에요. 도와주세요.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가뜩이
나 어려운 우리 나라의 증시는 무너져 버릴 거예요. 선량한 외국
인 투자자들이 모두 빠져나가 버리면 또다시 외환 체제가 붕괴
되고 경제는 무너지고 말 거예요.
기미히토는 다시 한 번 감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범죄 행위에 섣불리 동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미히토는 자
신의 신분을 생각했다. 동경대학교의 교수가 타국의 전산망을
조작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미히토는 힘
들게 말했다.
미안해요, 내가 그 일을 직접 도울 수는 없어요.
이때 기미히토의 귓전에 뜻밖에도 사도광탄의 나지막한 목소
리가 들려왔다.
내가 돕지요.
기미히토는 너무나 놀랐다
그러나 사도광탄의 결의에 찬 말에도 불구하고 기미히토는 이
런 일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의문스러웠다 그렇지만
자신이 뭐라고 얘기할 입장은 아니었다.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기미
히토의 마음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수아의 그 가상한 노력에 도
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러나 어쨌거나 명
백한 범죄 행위에 가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답답한 심정으로 담배를 피워문 기미히토는 창 밖을 내다봤
다. 멀리 북악이 보였다.
기미히토는 범죄란 무엇이며 애국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혼돈스러웠다. 단순히 실정법을 어긴다는 이유로 수아의 애국적
행위를 범죄로 치부해 버린 자신이 과연 옳은가 하는 회의가 밀
려왔다.
기미히토는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안 돼, 고뇌 끝에 다다른
기미히토의 결론은 역시 수아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딩 동 -.
문을 열어보니 사도광탄이었다.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은
사도광탄은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 밤하늘에는 보름달이 떠 있더군요. 마지막이라는 생각
이 들어 나는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달에 비추어보았
지요. 이윽고 나는 대열에서 빠져나와 단상을 향해 한걸음 한걸
음 나아갔어 요. 동료 사병들이나 장교들은 너무나 뜻밖인 나의
행동에 모두 놀랄 뿐 제지할 생각은 하지 못했지요. 나는 단상으
로 올라갔어요. 그러고는 목이 미어지게 외쳤지요. 당시 병영 내
에서의 데모란 바로 죽음과 같은 의미였어요. 그러나 우리 국민
모두가 죽음이 두려워 벌벌 떨며 끌려갈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우선 네가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수아를 보니 그 옛날의 내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사도광탄은 말을 마치고 기미히토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았
다. 기미히토는 가슴이 옥죄어오는 것을 느꼈다. 사도광탄은 수
아를 도와주기를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기미히토 교수님이 일본에서 여기까지 오신 것은 바로 참된
삶을 위해서가 아닌가요.우리의 시야를 가리는 허위에서 벗어
나 진리를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요. 수아 역시 마찬가지이지
요. 법망을 피해 교묘하게 저질러지는 범죄 행위를 수아는 법을
어기면서 막아야 하는 입장에 서 있어요. 그 옛날 내가 병영에서
군사독재 반대 데모를 하고 법에 의해 처벌받았던 것과 다름없
지요. 교수님이나 수아나 나나 참된 것을 위하여 껍질을 과감하
게 벗어던진다는 점에서는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사도광탄의 얘기를 들으며 기미히토는 숙연해졌다. 사병의 신
분으로 병영에서 데모를 했다는 사도광탄의 이야기도 놀라웠고,
금융 붕괴를 막으려 미국에서 날아와 범죄자가 될 위험을 무릅
쓰고 애쓰는 수아도 감탄스러웠다. 그들은 개인의 이해 관계를
넘어선 보다 큰 뜻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는 사람들로 생각되
었다.
그리고 자신도
기미히토의 뇌리에 이윽고 수아의 행위는 범죄가 아니라는 확
신이 섰다. 그것은 애국이었다. 그녀의 행위가 범죄가 아니라면
그것을 돕는 자신의 행위도 범죄가 될 이유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기미히토는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틀 후 자동 변환 프로그램은 완성되었다 기미히토는 밤을
새워 작업을 했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을
리는 없었지만 수아와 함께 실험을 해가며 완벽한 논리 구조를
조합해 냈다.
자, 이제 목표물에 이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것은 이카로스의
몫입니다.
기미히토의 농담에는 여유가 있었다. 그는 수아의 해킹 실력
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아는 얼굴을 찌푸리며 무엇
인가 풀리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곤란한 문제가 생겼어요.
그게 뭐죠??
시간이 문제예요.
시 간이 라니 ??
이제 스탠더드증권의 컴퓨터에 접속하여 기존의 프로그램을
깨고 우리 것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 해요. 이 작업은 장이 마
감되고 자체 일일 결산 및 증권거래소와 증권결제 원과의 거래
확인을 마친 후 홍콩에 있는 본사와의 결산을 본 다음에야 할 수
있어요.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본사와의 결산 후 정확히 30분
이 지나면 터미널이 다운되는데 그후에는 접속을 할 수 없어요.
본사의 메인터미널에는 접속을 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고, 한
국 지점은 아예 전화선을 끊어버리기 때문이죠.
30분이면 가능하지 않은가요??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 이 자동 변환 프로그램을 보니 설치
를 위한 검색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만만찮을 것 같아요. 저
의 휴대용 컴퓨터로는 역부족이에요.
음 그렇군요.
중형 스테이션이 필요해요.
기미히토는 수아가 고심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번 일은
단순한 해킹이 아니었다.
그것뿐이라면 일단 다른 기관의 스테이션에 정보를 보내고
그 시간대에 증권 회사로 전송하는 방법을 쓰면 되겠지만, 프로
그램을 설치한 후 증권 회사에서 쳐대는 엄청난 양의 매도 매수
주문을 다 소화하려면 저의 휴대용 컴퓨터 하나로는 어림도 없
어요. 중형 스테이션이 있고 컴퓨터마다 내부 개별 통신 설비가
극도로 잘되어 있어야 하거든요.
산 넘어 산이었다
그 얘기는 결국 전산실을 통째로 며칠 빌려야 한다는 얘기 아
닌가요??
거의 불가능한 일이군요.
세상에 전산실을 외부인들에게 통째로 빌려줄 기업이나 기관
이 있을 리 만무하다. 전산실이 없으면 1분 1초도 일을 할수 없
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더군다나 교섭을 할 시간도 없다 당장
내일 작업을 해야만 한다 누구보다도 이틀 밤을 새워 프로그램
을 만든 기미히토가 가장 실의에 빠졌다.
아,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수아는 급한 손길로 전화기를 들어 미국에 있는 정완의 번호
를 돌렸다
회장님께서는 해외 출장중이십니다.
연락이 안 되나요??
회장님께서 연락을 주시기 전까지는 안됩니다. 그런데 누구
시죠?~
한국의 이수아라고 하는데요.
이수아 씨라구요? 회장님이 메모를 남기셨어요. 이 번호로
빨리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셨어요.
비서가 불러주는 번호는 뜻밖에도 한국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정완의 해외 출장지가 한국이라는 얘기가 아닌가.수아는 즉각
번호를 눌렀다
비서를 거쳐 건네진 전화기에서 정완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
려왔다.
수아야, 어떻게 된 일이냐?~
네? 아저씨야말로 웬일이세요??
몸은 괜찮니? 별일 없어? 수아가 걱정돼서 바로 날아왔어.
그날은 웬 술을 그렇게나 많이 마셨니??
술을요? 그랬었죠, 제가 술을 마셨었죠. 그런데 어떻게 아셨
어요??
울먹이면서 나에게 전화했던 거 생각 안 나니?수아가 끊고
나서 바로 전화를 했는데 자는지 안 받더구나 푹 자게 하려고
나중에 전화를 했더니 그때는 체크아웃하고 나갔고, 항공사에서
는 예약은 했는데 타지는 않았다고 하고, 다음날부터 미스터 최
가 수백 번이나 삐삐를 쳤다는데 연락은 되지 않는다고 하고. 걱
정이 돼 마음졸이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즉각 날아왔지.
죄송해요, 아저씨 중요한 일을 하느라 그동안 삐삐를 꺼왔어
요.
그래 그건 어떻든 간에 지금 어디 있어?바로 봐야겠다 내
가 너를 괜히 보낸 거나 아닌지 모르겠어. 그렇게 부담 가질 필
요는 없었는데. 나는 단지 미래를 위해 경험을 해두라는 뜻이었
는데 .
아녜요, 아저씨.마침 미국의 아저씨 회사로 전화를 했던 참
이에요. 여기 호텔인데, 이리로 급히 와주세요. 아저씨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요.
내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왜??
설명드릴 시간이 없어요. 어서 와주세요.
알았다.
호텔에 도착한 정완은 수아가 멀정한 것을 보고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뭐가 그리 급하다고 했지?~
정완은 수아와 같이 있는 사십대 가량 돼 보이는 두 사람에게
의문의 눈길을 던졌다.
수아는 먼저 사도광탄과 기미히토를 소개했다. 그러고 나서는
이제껏 일어났던 일들을 설명했다. 설명을 듣고 난 정완은 기미
히토에게 깊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기미히토 교수님, 너무도 큰일을 해주셨군요.
그러나 전산실이 없어서 모든 게 물거품이 될 형편입니다.
수아야, 대학교의 전산실 정도면 가능하겠니??
수아는 깜짝 놀랐다.
그럼요. 학교의 전산실이라면 직접적인 업무에 묶여 있지 않
을 수 있지요.
기미히토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학교라고 해도 쉽게 빌리기는 힘들 텐데요
내가 연락을 한번 해보지요.
정완은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일이 상당히 급한 상황이며
내일부터 작업을 시작하면 좋겠다는 내용을 전했다. 저쪽에서
의외로 순순히 승낙을 했는지 정완은 금방 전화를 끊었다. 수아
와 기미히토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이 너무도 쉽게 이루
어지고 있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전화 한 통으로 이루어질 수 있죠??
기미히토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마침 우리 재단에서 세운 대학교가 있습니다.
그제야 수아는 정완이 어떤 인물인지를 기미히토에게 설명했
다. 수아의 설명을 듣는 기미히토의 표정에 놀라움과 부러움이
스쳐갔다.
사도광탄, 정완, 수아라는 각기 신분도 생각도 다른 세 사람이
범죄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자기 판단에 근거해 나라의
경제 위기를 구하려 달려드는 것을 보고 한국인들의 무서운 단
결력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이들을 보자 기미히토에게는 극도
의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틀림없이 다시 일어날 것이
라는 확신이 생겨났다.
네 사람은 오랜만에 편한 마음으로 정완이 사는 저녁 자리에
마주앉았다. 모두의 관심은 수아에게 쏠리는 분위기였다.
특히 사도광탄은 수아의 컴퓨터 조작에 협력은 하면서도,수
아가 해킹에 빠져 인생을 그르칠 수 있다는 위험도 경계하는 표
정이었다. 그는 수아의 표정에 여유가 생기자 그녀의 가치관을
테스트하는 듯한 물음을 던졌다.
해킹의 윤리에 대해 수아는 어떻게 생각하지?
제가 그것을 말할 자격이 있을까요? 취미로 하고 있지만요.
그러면서 수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야무진 목소리로 자신의 생
각을 전개했다.
해킹의 기본 정신은 자유에 있어요. 세상의 모든 정보를 함께
나누자는 거죠. 인간의 역사는 좀더 많은 사람이 좀더 많은 자유
를 누리자는 쪽으로 진행되어 왔어요. 아마 이것을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자본주의가 심화됨에 따라 인간은 자
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본에 예속되었어요. 일방적인 정보의 장
악은 이 예속을 심화시켰죠. 해킹은 정보의 세계만큼은 가진 자
못 가진 자를 떠나 모든 사람이 같이 자유롭게 나누자는 기본 정
신에서 출발했어요.돈이 아닌 인간의 노력과 능력만큼 정보를
갖는 평등이 해킹에는 있어요.
의외구나 그런 정도로 철학적 기반을 갖고 있다니.
해킹을 통해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죠. 지금의 세계는 이 점
을 두려워하지만 무수한 해킹 범죄를 겪으면서 인류는 올바른
대처 방법을 마련할 거예요. 해킹을 무조건 금기시하면 오히려
사회는 뒤떨어질걸요. 해킹 범죄는 해커가 잡아낼 수 있으니까
요. 게다가 컴퓨터의 인간 지배를 막는 것도 역시 해커의 몫이
죠. 그런 점에서 해커란 매우 인간적인 존재들이에요.
수아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리고 해커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넘겨버리지 않
아요. 단서는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찾아지거든요.
그렇다면 이번 일도 추적당하지 않게 배려를 했다는 건가??
기미히토는 말은 안 해도사도광탄이 자신의 안위에 대해 신
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요. 함부로 공개는 할 수 없어도 도저히 추적하지 못하는
방법이 있어요. 초일류의 해커들에게는요.
내게 얘기하면 안 되는 모양이지??
네, 안 돼요.
수아가 너무도 분명하게 대답을 했기 때문에 세 사람은 모두
웃었다
해커의 세계에서는 지극히 사소한 것이 언제나 가장 큰 문제
가 되거든요.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얘기해 드릴게요.
사도광탄은 해킹에 대한 수아의 철학이 마음에 들었는지 안심
하는 표정이었다
1989년 3월에 FBI는 다섯 명의 서독 청년들이 미국의 국방성
을 비롯하여 항공우주국, 핵 연구센터, 유럽 핵 연구센터, 일본의
방위기술연구소 등에 침입하여 엄청난 기술과 정보를 빼내서는
소련의 KGB에 팔아넘긴 것을 알아냈어요. 그들의 해킹은 4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오고 있었어요.
정완이 흥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4년 동안이나 해킹이 계속됐는데도 정보 당국에서는 몰랐단
말이야?~
워낙 솜씨가 좋은 해커들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잡았지??
참으로 의외의 곳에서 의외의 사람이 잡아냈어요. 하버드대
학교의 스미소니언 천체물리연구소에서 근무하던 클리포트 스
틀이라는 천문학자가 그들을 탐지하게 되었어요. 그는 컴퓨터의
시간당 사용 요금을 정산하다가 75센트의 오차가 나는 것을 발
견하고는 의문을 품게 되었죠.
불과 75센트에??
네 비록 적은 액수였지만 기계적으로 생각하면 오차가 있다
는 사실은 틀림없었죠. 액수는 차치 하구요.
그래서??
사도광탄도 컴퓨터의 세계에 차츰 끌리는지 자못 흥미 있는
얼굴로 물었다
스톨 박사는 생각 끝에 이것은 누군가 바깥의 침입자가 전산
망에 무단 접속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전화 기록을 모두
살폈어요.그러나 그들은 교묘한 방법을 섞어 접속했기 때문에
도저히 끝까지 추적하지 못했죠.
교묘한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지??
사도광탄이 웃으며 물었다. 수아가 어떤 방법을 쓰려는지 알
고 싶어하는 태도였다
예를 들면 서독에서 캐나다의 어느 연구소로 전화를 해서는
접속을 했어요. 그러고는 다시 파리로 연결하고 또 미국 국방성
과 연관이 있는 일본의 어느 기업 컴퓨터와 연결을 한 후 마지막
에 국방성의 컴퓨터와 접속을 했죠, 때로는 정식 업무와 관련하
여 접속중인 회선에 끼여들기도 하고, 하여간 여러 가지 방법으
로 추적하지 못하게 했죠. 가장 중요한 것은 전세계를 빙빙 돌아
온 그들의 접속 시간이 매우 짧다는 거였어요. 베테랑인 그들은
바로바로 정보를 빼가곤 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추적을 했지?~
추적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유인에 성공했어요.
그 천문학자가??
네 스톨 박사는 그들이 군사 관련 핵심 정보를 노린다는 것
을 알고는 몇 군데 중요한 연구소의 컴퓨터에 iDle네트라는 종합
방위 시스템에 관한 정보를 심어두었죠. 아주 획기적이고 중요
한 극비 군사 시스템인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 말이에요.
그들이 거기에 걸려들었나?~
네. 워낙 큰돈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들은 무려 두 씨간 동안
이나 그 가짜 컴퓨터 네트워크 속에 들어가 헤매고 있었죠. 그
자신도 탁월한 해커인 스톨 박사가 그들이 도저히 그만두지 못
하도록 심리적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죠. 예를 들면 (이 시스템은
무단 접속되었기 때문에 폐쇄됩니다)하는 식으로 그들이 이번
에 정보를 얻지 못하면 다음의 접속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죠. 마치 머드게임처럼요. 그들이 한없이 헤매는 동안 박
사는 최초의 전화 발신지를 찾아낼 수 있었던 거죠. 바로 서독의
하노버였어요. FBI는 서독 경찰과 같이 그들을 붙잡을 수 있었
지요.
사도광탄과 정완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기미히토 교수님 부탁 하나 더 드려도 돼요??
뭐죠??
기미히토는 프로그램 제작이 다 끝났는데 무슨 부탁이 또 있
을까 하는 얼굴로 물었다.
스탠퍼드의 친구가 이번에 일본과 만주에 가게 됐어요. 인류
학을 전공하는데 동북아시아의 샤머니즘에 대해 논문을 쓰게 되
었대요. 일본으로 가실 때 좀 데려가 주셨으면 하구요. 일본에는
아는 사람이 없대요.
기미히토는사도광탄의 얼굴을 쳐다봤다. 두 사람은 같이 고
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사도광탄과 기미히토, 그리고 테드는 홀가분한 표정으
로 호텔을 나섰다. 테드는 곱슬머리를 빗지도 않은 채 헝클어뜨
리고 청바지 차림에 등에는 배낭을 하나 달랑 메고 있었다
정완과 수아가 공항까지 그들과 동행했다. 공항에는 변 박사
와 조 교수까지도 나와 있었다
기미히토 교수님은 언제 미국으로 돌아가세요??
수아는 예전처럼 미국에서 기미히토와 해킹 전쟁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일단 일본에서 비과학적 현상에 대한 나의 의문을 풀어야 돌
아갈 것 같아요.
일본에서 확인할 것은 무엇인데요??
글쎄요, 지금에 와서는 한국의 신비한 힘이라고 얘기해야 할
까요.
저도 함께 가서 그 힘이 뭔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요.
당연한 얘기였다. 지적 호기심이 가득한 수아가 그런 신비한
토우에 관심을 갖지 않을 리 없었다.
수아 양, 일을 마치는 대로 일본으로 한번 놀러 와요. 마침 친
구도 일본에 있을 테니.
수아는 자기도 모르게 테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테드의 얼
굴이 환해져 있었다 수아는 얼른 대답했다.
네, 고맙습니다. 그런데 사실 토우도 보고 싶지만, 있지도 않
은 임나일본부니 뭐니 하면서 게임으로까지 역사를 왜곡해대는
일본이라는 나라를 꼭 직접 가서 보고 싶어요.
그게 무슨 말이지요??
수아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기미히토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
졌다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왜 그런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는지 이
유를 모르겠어요. 미국인들이 임나일본부라는 것을 알 리도 없
고, 틀림없이 일본인이 만들었을 텐데
어떻게 알지요??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제조 회사명 밑에 프로그래머의 이름이
씌어 있었으니까요,도치아키 미치오라든가도시아키 미치오라
든가, 뭐 하여튼 그런 이름이었어요.
도시아키? 지금 도시아키 미치오라고 했어요?~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정확한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교수님
께서 아시는 분인가요??
기미히토는 대답 없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틀림없는 도시아키
였다. 같이 컴퓨터를 전공했지만 자신이나 오카모토와는 달리
도시아키는 게임에 몰두했고, 지금은 야마자키 연구소에 수석
연구원으로 가 있었다. 게임을 통해 역사를 알리는 일을 한다고
했으니 그가 틀림없겠지.
기미히토는 조 교수에게 물었다.
임나일본부설, 즉 일본이 과거 2세기에서 4세기까지 약 3백
년 간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우리 일본인
들은 그렇게 알고 있는데요.
조 교수는 개탄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크게 흔들었다.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러 나온 자리에서도 이런 얘기를 해야 한
다는 게 갑갑하다는 의미였다.
지난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의 육군 참모본부는 광개토대왕비
의 안 보이는 세 글자를 억지 해석해서 거짓 주장을 꾸몄지요.
한반도를 침략하기 위하여 국민을 증원할 구실을 거기서 찾은
겁니다. 한반도는 과거 우리 땅이었으니 이제 가서 찾자는 논리
를 만들었지요. 일본 국민은 거기에 속아 전쟁으로 내몰렸지만
정작 문제는 지금까지도 어린 학생들을 계속 그렇게 가르친다는
데 있어요.
기미히토는 할말을 잊었다 한국에 와서 보니 자신이 일본에
서 배웠던 것은 상당 부분 허위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해인사의
그 웅장한 팔만대장경도 훔치지 못해 안달하다가 경판 몇 장이
라도 빼내고 가판으로 채워넣은 것을 직접 목격하는 등 부끄럽
기 짝이 없던 터였다.
그의 이런 부끄러움은 친구 도시아키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
다 그리고 이치로 교수가 하던 일에 대한 의구심과 더불어 베일
에 싸인 연구소의 정체에 대한 의심이 진하게 솟아났다 기미히
토는 어쩌면 연구소의 흑막을 벗기는 데 수아의 해킹 실력이 필
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 원장이 조심해서 다녀오시라는 말을 꼭 전해달라고 하더
군요.
조 교수가 사도광탄에게 작변 인사를 했다.
일행은 탑승구를 향해 올라갔다.
선생님, 몸 건강히 다녀오세요.
수아는 불과 며칠 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사도광탄의 폭 넓
고 깊이 있는 인품에 감동했는지 진심이 깃든 목소리로사도광
탄에게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며 사도광
탄은 수줍은 듯 웃었다. 기미히토는 그가 유독 수아에게 잘 대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가 일본으로 갔다고?~
그렇습니다.
경찰청에서 새로 사도광탄을 맡은 최 계장은 공항에서 돌아온
직원의 보고를 받자 아연 긴장했다. 사도광탄이 비행기를 탔다
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무슨 일로 갔지??
동경대학교의 교수와 재미 유학생을 동반했습니다. 무슨 일
로 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항공사에는 연락했나??
네, 인터폴에도 연락하고 기내 보안관에게도 특별히 당부해
두었습니다.
짐 검사도 했고?.
짐은 없었습니다.
짐이 없다고? 외국에 가면서 가방 하나도 안 가지고 갔단 말
이야
그렇습니다.
최 계장은 도저히 그 괴상한 인물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
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이제까지 그의 행적은 어땠나??
최근의 행적 말입니까??
아니, 처음부터 지금까지 말이야.
최 계장은 컴퓨터에서 사도광탄의 파일을 찾으면서 부하 직원
에게 물었다.
우리 경찰 기록에 처음 들어온 것은 군에서 제대하면서부터
입니다.
왜? 군에서 범죄를 저질렀나??
아뇨, 범죄라기보다는 의병 제대를 했습니다.
의병 제대라고? 무슨 병인데??
정신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신병잔데 왜 감시 대상에 올랐지??
그게 사정이 좀 복잡합니다. 그가 군에 있을 당시 문제의 그
하이재킹이 일어나 인터폴과 교황청에서 감시 요청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무렵 그는 영내에서 대통령을 처단하라는 요구를 했
고,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 정신병 판정을 받고 의병 제대했던
것입니다.
참 희한한 인간이군 그러니까 하이재킹과 정신병으로 감시
대상이 되었단 말이잖아.
두 가지가 다 이유란 말입니다.
그후에는??
수년 간이나 움막 같은 거처에서 안 나오기도 하고 전국 각지
를 헤매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에는 성당에 다니고, 어떤 때에는
굿에 미치고, 또 어떤 때에는 절에서 몇 년 살기도 하는 등 도대
체 종잡을 수 없는 행동거지를 보여 왔습니다.
한심하군 우리가 이런 정신병자나 감시해야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