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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과 거북선 지폐 함께 앉아 있었어요. 무거운 침묵이 오래 동안 흘렀지요. 박 대통령이 막걸리 한사발을 들이키고 담배를 하나 피워 물더니 정주영에게도 한 대를 권했어요.
않는다’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지요. 원래 과묵한 박 대통령 이지만 이날은 더욱 말이없이 시간만 흘렀어요.
하나 못하겠다고 여기서 체념하고 포기를 해요? 대통령은 그에게 시간을 주지않고 압박 아닌 압박을 하고 있었지요. 생산되는 철을 대량으로 소비해줄 산업이 필요했던 거지요. 당시 김학렬 경제부총리는 먼저 삼성 이병철에게 조선 사업을 권유했어요.
것도 알고 있었지요.
배지 !! 뭐. 배가 별거야. ” 발휘 되었지요. 정주영은 조선업자로 조선소 건설을 생각한게 아니라 건설업자로서 조선소 건설을 생각했어요.
용접을 하면 되고 배의 내부 기계는 건물에 장치를 설계대로 앉히듯이 도면대로 제자리에 설치하면 된다고 여긴 것이지요. 조선소를 지으려면 차관을 들여와야 하는데 해외에서 차관 얻기란 하늘에 별따기 였지요.
상대해주지 않았어요. 오히려 미친놈 취급만 당했지요. “ 너희같은 후진국에서 무슨 몇십만 톤의 조선소를 지을수 있냐? ”는 식이었어요. 있다는데 ... " 당장 필요한건 돈이었어요.
했어요.
수 없었어요. 돈을 빌리기 위해선 영국식 사업계획서와 추천서가 필요했지요 사업계획서와 추천서를 의뢰했어요. 타당성 있는 사업계획서와 추천서가 있어야 은행에서 돈을 빌릴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위해 런던으로 날아갔어요. 그에게는 조선소를 지을 울산 미포만의 황량한 모래사장을 찍은 흑백사진이 전부였지요. 사리 만났어요. 그러나 롱바톰 회장은 비관적인 말만 되풀이 하고 있었지요. 잠재력도 믿음직스럽지 않아 힘들것 같다 ”는 말이었지요. 그 많은 돈을 갚을 능력이 없는걸로 알고있다 " 고 말했어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 이었지요.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500원짜리 지폐가 생각 났어요. 지폐 그림은 바로 거북선이었지요.
철로 만든 함선이지요. 당신네 영국의 조선역사는 1800년대 부터라고 알고 있소.
있는 잠재력이 바로 이 돈안에 담겨있다는 말이지요 " 했어요. 앞면에는 한국의 국보 1호인 숭례문이 있고 뒷면에는 바다에 떠있는 배가 그려져 있었지요. 그 모습이 거북이와 많이 닮았어요. 말입니까? " 대단한 역사와 두뇌를 가진 나라 이지요. 불행히도 산업화가 늦어졌고 그로 인해 좋은 아이디어가 묻혀 있었지만 잠재력만은 충분한 나라 입니다.
것입니다. 회장님!! 버클레이 은행에 추천서를 보내주십시오 "
얼굴에 어느새 환한 미소가 번졌어요.
배를 만들기를 응원하겠오.'
있었지요. 수많은 프레젠테이션과 완벽하게 만든 보고서에도 'NO'를 외쳤던 롱바톰 회장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500원짜리 지폐 한장 이었 지만 정주영의 번뜩이는 기지의 산물이었지요. 큰 배를 만들 능력이 충분하다는 추천서를 버클레이즈 은행에 보내 주었어요.
연락이 왔어요. 점심 약속 하루전 정주영은 호텔에서 초조와 불안 속에서 시간을 보내느니 만사 제쳐놓고 관광이나 하는게 나을것 같았지요.
보고 낙조 무렵에는 윈저궁을 보았어요. 되물었어요.
계획서는 보셨읍니까?”
본 생각이 났어요. “ 어제 내가 그 사업계획서를 가지고 옥스퍼드대에 갔더니 한번 척 들쳐보고는 바로 그 자리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주더군요 ” 말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그의 큰 배포를 보여주는 유머를 내던졌어요. 가진 사람도 그런 사업계획서는 못 만들겁니다. 당신은 그들보다 더 훌륭 하군요 당신의 전공은 유머 이시군요?
테니 행운을 빌겠소!! ” 만들려는 CEO의 됨됨이를 보기 위해서였지요. 부총재는 그런식의 만만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CEO라면 대출을 해 주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최종적인 확인을 한 것이지요.
치밀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라 하네요. 실제로 현대건설은 치밀한 사업 계획서를 만들었고 그 치밀함을 인정한 은행이 대출을 해주기로 결정한 것이지요.
치밀하게 조사했던 거지요. 그러나 최종적인 확신은 정주영의 배포가 한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두 번째 관문도 통과 되었어요.
어렵고 힘든 관문이었지요. 보증을 받아야 했어요. 그런데 수출신용보증국 총재는 배를 살 사람의 계약서를 갖고 와야 승인해 줄수 있다고 했지요. 배를 세계 유수의 조선소들을 다 제치고 선박 건조 경험도 전혀 없고 또 조선소도 없는 당신에게 배를 주문하지는 않을거요.
금을 갚을수 있겠소? 입장을 바꾸어 당신이 나라면 배를 주문할 사람이 없는데 보증을 해주겠소?
이 차관을 승인할수 없소 ” 나라였지요. 그런 가난한 나라에서 배를 만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 는지도 몰라요.
사줄 선주를 찾아 나섰던 거지요. 허허 벌판 모래사장 사진 한장을 내밀며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어주겠소 ”
있었어요. 그는 다름아닌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이었던 그리스의 리바 노스였지요.
했어요. 선박에는 세계적인 리바노스지만 정주영의 사람 됨됨이에 밀려 파격적으로 정주영과 계약을 맺었어요.
못 지키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주겠다 계약금은 조금만 받겠다 .
배에 하자가 있으면 인수를 안해도 좋고 원금은 몽땅 되돌려주겠다 ” 별장에 가서 유조선 2척을 주문받았지요. 이렇게 해서 마지막 관문을 넘어섰다 하네요.
부하직원이 어렵다고 하면 "해보기나 했어?" 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냈다 하네요. 통령은 청와대 대문앞까지 달려나와 그를 맞았지요. 그때 지도를 놓고 볼펜으로 그리며 본인의 구상을 설명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빙그레 웃으며 비서들에게 정회장이 볼펜으로 그리는 대로 공장을 짓게 해주고 정부에서 지원할수 있는것은 무엇이든 하라고 지시를 했다 하네요.
격려했다 하지요. 그 조선소에서 다시 배를 만들어야 했지요. 그러나 정주영은 이때 그의 특기인 역발상 창의력을 발휘했어요.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만들기로 한 것이지요.
소에서 선박을 만들어야 된다는 법이라도 있는것이냐? ” 가르쳐 달라고 ... 웅덩이를 파놓고 거기에 올라오는 물을 펌프로 퍼내 가면서 그 웅덩이 속에서 최초의 배를 만들었어요. 주문한 배 한척을 만들면서 동시에 방파제를 쌓고, 바다를 준설하고 얼굴을 씻고 일터로 나가 밤늦게까지 일하고 숙소에 돌아와 구두끈도 못 푼채 잠을자며 배를 만들었어요.
어김없이 서울에서 울산으로 내려갔어요. 이른 새벽 남대문 근처를 지날 때면 부부가 그날 팔 물건을 리어카에 싣고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며 길을 지나는 장사꾼들을 보곤 했지요. 부터 열심히 일을 해야만 생계를 꾸려 갈수있고 자식을 키울수있는 것이 다고 하네요. 그때마다 " 그래 다 같이 노력해서 하루빨리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주먹에 불끈 힘을 주었다고 했어요. 쏴 들어오면서 배가 붕 떴어요. 그리고 잠시후 붕뜬 배가 바다 쪽으로 쑥 밀려나갔지요.
눈물바다가 되었어요. 단 한척의 배도 만들지 못했던 우리가 세계적인 대형 선박을 만든 것이지요.
규모의 조선소 준공을 본것은 1974년 6월. 기공식을 한 1972부터 2년3 개월 만이었지요.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준공식에 참석하여 조선입국(造 船立國)’이라는 휘호를 써 주었어요. 위기가 닦쳐왔지요. 이는 바로 1973년에 불어 닥친 오일쇼크 였어요.
취소가 잇따랐지요. 현대조선이 만든배 가운데 3척이 울산 앞바다에 그냥 떠 있었어요. 그 중 1척은 오나시스의 처남이었던 그리스의 리바 노스가 주문한 유조선 이었지요.
놓은 배를 가져가지 않으면 우리가 그 배를 갖고 새로운 사업을 하면 되는것 아니냐 !!” 유조선 3척을 가지고 아세아상선을 설립 했어요. 우리나라에서 수입해 오는 기름을 우리가 우리 유조선으로 운반하겠다는 생각이었지요. 있을리가 만무했지요. 아세아 상선에 수송권을 넘겨주는 댓가로 1400만 달러를 요구했어요. 내가 택시를 타다가 자가용을 구입했는데 택시회사에 돈을 주어야 하나?
쓴 것인데 우리가 배를 만들고 우리배로 우리기름을 운반하겠다는데 돈을 달라? 말도 안되는소리 그런요구는 절대 받아들일수 없다” 였지요.
현대 아세아상선에서 운송할수 있었어요. 거기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뚝심도 큰 힘이 되었다 하네요. 몹시도 정주영을 힘들게 했던 현대조선은 요즘 세계적인 현대중공업이 되었구요 리바노스 그러나 정주영은 그를 고마운 사람으로 생각했다 하네요. 고마움을 잊을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지스함이 진수됐어요. 정주영이 처음 조선소를 짓겠다고 했을때 우리 해군은 미군이 폐기처리한 구축함을 가져다 페인트칠을 해서 쓰고 있었지요.
천지개벽이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인가봐요. 이날 진수식에서 정몽준 회장은 500원 짜리 거북선 이야기를 하며 아버지 정주영 회장을 그리워 했다 하네요. 중 4척이 한국산이라 하지요. 한국 조선소들은 중국에 싼가격으로 수주를 맞긴 배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있지요.
높이의 배를 땅위에서 조립해 바다로 끌고가 띄우는데 이런 신 공법은 한국 조선소에서만 하고 있으며 선박 엔진 또한 세계최고라 하지요.
리던 미포만은 이제 배 조립품을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비좁아졌지요.
일은 없었다고 하네요. 한척의 배를 만든 이익금으로 오늘날의 현대중 공업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정주영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사람이라 했나봐요. 놀라게 했지요. 당시 충남 서산간척사업 A지구 매립공사는 6.4㎞를 연결 함으로써 완공되는 사업이었지요. 이 사업으로 생기는 육지는 여의도 면적의 43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땅이었어요. 생겼어요. 이곳은 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드나드는 물의 양이 3억 4천만 톤, 밀물시의 유속은 초당 8미터에 달해 20톤에 달하는 돌망태를 넣어도 그대로 물에 휩쓸려갔지요. 바닥을 점차 높여가는 점고식(漸高式) 또 덤프트럭등 육상장비를 이용해 점차 구간을 좁혀가며 축조하는 점축식(漸縮式) 그리고 이들 두 방법을 같이 쓰는 병행식 등이 있어요. 로는 엄청난 비용과 작업기간이 오래동안 소요될것이 불을 보듯 뻔했지요.
물막이 공사를 하면 시간과 비용이 크게 절감될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내 놓았어요. 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방조제를 쌓는 성과를 올렸으며 280억원의 경비도 절약함으로써 전세계을 놀라게 했지요.
도 주목을 받아 "유조선공법"으로 명명되어 지금 세계 여러나라에서 배우고 있다 하네요. 설립한 서울아산병원에서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요. 정주영 회장이 타계했을때 미국 CNN 방송이 한시간 이상을 특집으로 방송했는데 이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네요. 어머니 한성실(韓成實)의 6남 2녀중 장남으로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났지요.
그와 함께 졸업한 동창생은 27명 그의 정식 최종학력은 소학교 졸업이 유일하지요.
198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8년 IOC훈장과 노르웨이 왕실훈장을 수상 하였으며 사후에는 2001년 5월 제5회 만해상 평화상이 추서되었지요.
선정되었으며 2008년 DMZ 평화상 대상이 특별 추서되었지요.
▲ 건설현장에 선 정주영 회장... ▲ 당시 미포만 항공사진 ...
▲ 지금의 현대중공업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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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런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는데.....
감회가 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