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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되는 일을 추진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려운 일, 골치
아픈 일을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해서 해결해 냈을 때의 성취감이 잘 되는
일을 성취했을 때의 기쁨이나 보람보다 몇배 더 큰 것임을 그는 그동안에도
수없이 체험해 왔다.
그리고 오늘날까지의 정 주영의 시련의 시기는 새로운 도전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새로운 용기를 내고 다시 오 윤근 영감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5천원
을 빌려 줄 것을 요청했다. 오 윤근 영감은 이번에도 두 말 없이 5천원을
대출해 주는 것이었다. 그 5천원도 물론 신용대출이었다.
그는 불 탄 그 자리에 다시 써비스공장 허가를 내려고 했으나 당국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우고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써비스공장
허가 내는 일이 여간 까다롭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50명 종업원을
거느리고 신설동 대로변의 3백50평짜리 빈터를 얻어가지고 나가서 허가도
없이 다시 써비스공장을 시작했다.
그때 서울에 승용차라고는 몇몇 귀족과 조선총독부 국장급이 타는 10여
대와 도지사가 한 대, 경무부장 그리고 일본군 제20사단 사령부의 사단장과
참모장이 가지고 있었고, 조선은행 두취 등 큰 은행과 큰 일본회사 몇 군데
서 가지고 있는 정도였다. 그밖에 택시가 좀 있었지만 그것은 불과 몇 대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차가 고장 나면 그 고관대작들의 발이 묶여서 꼼짝
을 못 했다. 빨리 고쳐 주는 것이 제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써비스공장에서는 고치는데 여러 날이 걸린다고 해서 많은
돈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역이용했다. 다른 데서 열흘이 걸리
는 것이면 사흘에 고쳐주고 그 대신에 수리비를 더 많이 요구했다.
그러자 서울 장안의 승용차라는 승용차는 전부 신설동 써비스 공장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공장 종업우언이 50명에서 60명으로 늘어났다.
그때 서울에는 황금정 6정목에 경성 써비스공장이 있었고 혜화동 로터리
에 경성공업사, 종로 5정목의 일진공작소 같은 비교적 큰 규모의 자동차 수
리공장들이 있었지만 일거리는 신설동 무허가 써비스공장이 제일 많았다.
그러자 파출소 순사들이 허가증을 보자고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파출소
순사들은 어떻게 적당히 겨우 겨우 피해갈 수가 있었는데, 동대문 경찰서의
보안계장이 허구한 날 찾아와서는 잡아넣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가는 것이었
다.
보안계장은 일본인 곤도오 경부였다. 요샛말로 빽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정 주영으로는 참으로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허가를 내주는 것
도 아니었다.
정 주영은 매일 아침마다 곤도오 경부 집을 찾아가서 통사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첫날은 과자를 사 들고 갔다. 그러나 곤도오 경부는 안 받는 것이
었다. 그냥 들고 나오다 그는 뒤통수가 부끄러워서 얼른 그 집앞 쓰레기통
에 처넣고 말았다. 다음부터는 매일 아침 빈 손으로 찾아가서 손이 발이 되
도록 봐 달라는 사정만 했다.
그러기를 한달여. 작대기도 세워 놓고 정성을 들이면 응감한다는 옛말은
맞는 말이었다.
"내가 졌다. 너는 내가 벌써 구속했어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매일 아침
마다 찾아오는 너를 차마 구속할 수 없었다. 네 말대로 네가 법은 어기고
있지만 나쁜 짓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단속하는 경찰의 체
면을 생각하라."하고 곤도오 경부는 대로변에서 안 보이도록 판자로 울타리
를 막고 숨어서 하는 척이라도 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감사하다는 소리를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곤도오 경부 집을 나왔다.
그는 <진실과 성실은 모든 것을 초월해서 이길 수 있다>고 하는 신념을
얻었다.
그후 신설동 써비스공장은 날로 번창해 갔다.
그 무렵, 정 주영은 현저동 산꼭대기 집을 팔고 신설동 공장 가까운 곳에
집을 사서 이사하는 한편 시골에 있는 둘째 동생 순영과 그 아래 누이동생
을 서울로 불러 올렸다.
그의 바로 아래 동생인 인영은 일찌기 서울로 올라와서 인쇄소에 취직하
고 있다가 몇해 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지금은 청산학원 영문과에 재학 중
이었다.
공장은 밤을 새워 일해야 할 때가 많았다. 공장이 밤샘을 할 때면 정 주
영은 집에서 종업원들의 밤참을 해 내다 먹였다. 실은 그 때문에 시골의 누
이동생도 불러 올렸던 것이다.
"여보, 그 김씨 있잖아요?"
어느 날, 저녁 밥상 머리에서 밑도 끝도 없이 꺼낸 정 주영 아내의 말이
었다.
"어느 김씨말야?"
"아이, 공장에 자주 오는 다꾸시(택시)운전사 김씨말예요."
"아아 김 영주, 왜?"
"오늘 낮에도 목이 마르다고 하면서 집에 들어와서 물을 달라지 않겠어
요?"
"그래서?"
"아가씨가 물을 한 대접 떠다 줬어요."
"거, 뭐 대단한 일이라구......"
순간 그는 불현듯이 지난날의 이장 딸 옥선이를 머리 속에 떠올리면서 아
내의 말 속에 다른 뜻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전에 정 주영이 매일 한차례씩 신문을 보기 위해 이장 집을 들렀을 때,
그는 어쩌다가 옥선이가 집에 없어서 못 본 날에는 공연히 물 생각도 없으
면서 목이 마르다는 핑계를 대고 옥선이를 보기 위해 이장 집을 다시 들르
곤 한 일이 있었다.
그를 좋아했기 때문에 두번씩이나 그의 행방을 고자질한 옥선이었다. 그
러나 옥선이는 그가 쌀가게에 취직하던 다음 해에 소식 없는 그를 야속해
하며 다른 사람에게로 시집을 가고 말았었다.
정 주영이 고향에다 논 30마지기를 사 놓고 올라오던 해, 갑자기 아버지
한테서 장가 들러 내려오라는 기별이 왔었다. 본인들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
없이 이미 어른들 사이에 정해진 혼인이었다. 그래도 색시 감을 한번 보기
는 해야 할 것 아니냐고 해서 그때 본 규수가 바로 송전면 면사무소 강당에
서 야학을 가르치던 지그미의 아내 변씨였다.
그렇게 든 장가였지만 그는 아내에 대한 불만은 조금도 없었다. 아내는
어디에 내놔도 남의 축에 빠지지 않을 만큼 예뻤고 건강했고 착했으며 바느
질 솜씨며 음식 솜씨 또한 빼어나게 훌륭했다. 특히 그녀의 음식 솜씨는,
공장에 밤일이 있는 날이면 종업원들이 맛있는 밤참을 기대하고 저녁밥을
조금만 먹어 둘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아내는 다시 택시 운전사 김씨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여보, 김씨 총각이에요?"
"총각이면 어떡허고 총각 아니면 어쩔 거야?"
그는 볼멘 소리를 했다.
"아가씨 나이도 열여덟이에요. 좀......"하고 미소하는 그녀도 열여덟살
에 그와 결혼했었다.
장안에 몇 대밖에 없는 택시 운전사 직업은 인기 직업이었다. 또 김 영주
라는 청년은 평소에 말이 없고 건실했다. 정 주영은 그만하면 매제를 삼아
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 아직 제 위로 장가 안 든 오라비가 둘이
나 있어. 어림도 없는 소리......"하는 핀잔을 놓고 공장으로 나갔다.
정 주영은 밖에 나가서 주문을 받고 돈을 받고 하는 시간 외에는 언제나
공장 안에서 모든 종업원들과 똑같이 일해 왔다. 분해하고 조립하고 하는
사이에 그는 온갖 기계원리가 포함되어 있는 자동차 엔진의 구조를 완벽하
게 터득했다.
얼마 안 되는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일본 사람들에 의해 독점되다시피 해
서 한국 사람으로서는 좀처럼 현대 기계문명에 접할 기회가 드문 그때에 그
가 메카닉의 원리를 체득했다는 것은 훗날의 현대 창업사에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정 주영의 말대로 그는 사장이 아닌 돈 많은 노동자가 되었다. 공장은 날
로 번창해 갔다.
그러나 시국은 또 한차례 정 주영을 폐업의 수렁으로 쓸어 넣었다. 1941
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그 이듬해에 기업정비령을 공포했다. 일제
는 힘 겨운 전쟁을 수행하느라고 민가에서 받아 먹는 놋그릇 놋수저까지도
걷어 들이는 판국이었다.
1943년 초, 신설동 써비스공장은 종로의 일진공작소와 합병되었다. 합병
이라기보다는 흡수되었다고 하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합병될 때 동
업자였던 이 을학.김 명현은 손을 뗐고 정 주영도 합병 후 얼마 뒤에 손을
떼고 말았다.
정 주영은 이미 가난뱅이가 아니었다. 그는 새트럭 20여 대와 헌트럭 10
여 대를 사고도 기만원의 돈이 수중에 남아 있었다. 그가 트럭을 산 것은
보광광업주식회사로부터 광석 운반의 하청을 받기 위해서였다.
보광광업주식회사는 당시의 식산은행 두취 아들 하나오까가 하는 회사였
는데, 황해도 수안군에 홀동금광을 가지고 있었다.
정 주영은 그해 5월, 보증금 3만원을 걸고 홀동금광의 광석을 평양 선교
리까지 실어내는 하청 운반계약을 체결했다. 홀동금광에서 평양 선교리까지
운송 거리는 장장 1백30킬로미터가 넘는 먼 거리였다. 먼 길이기도 했지만
원체 노면이 험했기 때문에 하루에 두 탕을 뛰는데도 빡빡했다.
그런대로 트럭이 30여 대나 돼서 벌이는 쏠쏠하게 괜찮은 편이었는데 최
근에 와서는 회사측 잔소리가 어찌나 심해졌는지 머리가 지끈지끈하도록 아
팠다. 많이 실었다, 적게 실었다, 왜 금덩이나 다름없는 광석을 싣고 가다
가 길바닥에 흘리느냐는 등.
돈벌이라고는 하지만 회사측 잔소리를 들을 때면 당장 때려 치우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그렇다고 당장 그만둘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또 당장
에 그만두면 징용에 끌려 나갈 염려도 있고 해서 그는 꾹꾹 참고 지냈다.
정 주영은 오늘도 광업소 사무실로 불려 가서 한바탕 잔소리를 듣고 나오
는 길이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버리세요 형님."하고 누군가가 뒤에서 따라
왔다. 정 주영은 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김 영주다. 그는 서울에서 하던 택시 운전을 그만두고 정 주영을 따라 와
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운전만 잘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계박사였다. 자동
차 엔진 소리만 듣고도 어디가 고장인지를 알아냈으며 달리는 차 속에 앉아
서도 어디가 고장인지를 대번에 알아냈다.
정 주영에게는 그런 기계박사인 김 영주가 꼭 필요했었다. 자그마치 트럭
이 30여 대고 보면 고장이 나기 전에 매일같이 트럭을 점검해야 할 일류 정
비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고장난 차를 뜯어 고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고장이 나기 전에 어느 부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미리 알
고 정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 영주는 무엇보다도 책임감이 투철하고 성실했다. 새벽이면 으례 남보
다 먼저 일어나서 세워 놓은 트럭 운전대에 일일이 올라가서 시동을 걸어보
고 또 트럭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차체를 망치로 두드리며 점검해 보곤 하
는 것이었다. 그래도 고장은 났지만 김 영주가 아니었더면 하루에도 몇 대
씩 써비스공장에 들여 놓고 고쳐야 하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그렇게 철저한 정비를 하는데도 원체 운송거리가
먼데다가 길이 험했기 때문에 고장도 그만큼 자주 생겼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기계박사인 김 영주 덕분에 아직까지는 하루종일 세워 놓고 고쳐야 할
이만큼 크게 고장난 트럭은 한 대도 없었다.
김 영주는 월급을 더 많이 준다고 해서 정 주영을 따라 왔다. 하지만 그
는 월급을 덜 준다고 해도 따라 나섰을 것이다. 그가 그토록 성실한 것은
천성이나 다름없는 그의 성품 탓이기는 했지만 실상 그의 속셈은 아무쪼록
정 주영에게 잘 보여서 그의 매제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
에 더욱 그런 열성을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정 주영네 가족이 홀동으로 이사와서 있었으므로 그 집에서 같이 생
활했다. 그의 가족은 자신의 내외와 남동생 여동생 넷이었는데 그동안에 한
식구가 늘어서 지금은 다섯이었다. 그 한 식구는 작년에 득남한 몽필이었
다. 몽필이는 장손이자 장남인 셈이다.
어린 몽필이는 고모와 김 영주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가까와지도록 하는
데에 단단한 한몫을 차지했다. 고모와 김 영주는 몽필이를 업어주고 받아주
고 하는 사이에 손과 손이 맞닿을 때면 마음과 마음도 짜릿하게 하나로 이
어져 갔다.
그런 눈치를 오래 전부터 채고 있던 정 주영은 어느날 그와 함께 고장난
트럭을 고치러 평양까지 나갔다가 같은 여관방에 들었을 때,
"내 누이동생을 부탁하네."하는 말로 그들의 혼인을 승낙했었다.
그날부터 김 영주는 정 주영을 형님이라고 불러왔다.
"형님! 자요, 한잔하고 확 잊어버리세요."
정 주영과 함께 대폿집에 들른 김 영주는 한되들이 술주전자를 대접에 기
울이며 그를 위로했다.
"정말 아니꼬와 못해 먹겠어. 이번 계약이 끝나면 그만두든지 어쩌든지
해야지."
"그만두면 저 많은 트럭들은 다 어떡허구요?"
"누군가 한 사람이 서울에서 이걸 해보겠다고 본사에 드나드는 친구가 있
는 모양이야."
"그래요?"
김 영주는 금시초문이었다. 사실은 그래서 현지 광업소 소장이 정 주영으
로 하여금 광석운송에서 손을 떼게 하려고 일부러 트집을 잡고 있는지도 모
를 일이었다.
이듬해 봄, 정 주영은 서울에 있는 본사로 올라가서 광석운송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을 만나 트럭 전부를 인수한다는 조건하에 하청계약을 그 사람 이
름으로 갱신하고 계약 보증금을 챙긴 다음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때가 1945년 5월 15일. 그로부터 만 3개월 만에 일제가 패망하자 홀동
금광도 폐광하고 말았다. 자칫하면 정 주영은 기십만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하루아침에 날릴 뻔했었다. 그는 스스로 운이 좋았었다고 생각했다.
좌절과 시련의 뒤안길
고향에서 8.15해방을 맞은 정 주영은 한달 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의 고향은 38선 이북이었지만 그때가지만 해도 38선에 전혀 구애되지 않
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마냥 놀고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조선제당이라
는 적산회사에 취직하고 있으면서 독자적인 사업을 할 생각으로 기회를 엿
보았다.
일본이 패망한 다음 38선 이남에진주한 미군이 군정을 선포하고 나서 일
부 적산(일본인 명의의 재산)을 불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중구 초동 106번지의 대지 백여 평을 불하받았다. 그 지역이 원래는
주택가였으나 전쟁 말기에 집들을 헐어 냈었기 때문에 그가 불하받은 땅은
빈 공터였다.
첫댓글 진실과 성실은 모든 것을 초월해서 이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