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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사
66. 사허 강 전투(1)
쿠로파트킨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후퇴하기 위해 적당한 상황을 형성중이었으나, 황제의 명예를 유지하고 추락한 정권의 권위를 높이려 했던 짜르정부의 요구에 따라 뤼순으로 진군하여 포위된 러시아군을 지원하려 했다. 이런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는 공격으로 전환해야 했던 만큼 쿠로파트킨은 따이쯰허(太子河) 강의 우안을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8월 19일 공격의 주도권을 장악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만주군은 언제나 강력한 정신력을 갖추었지만, 현재까지는 일본군을 격파하기에 수적으로 충분하지 못했다. 모든 장애를 극복하며 이런 상황에서 활동중인 아군을 강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아군의 부대가 까다롭지만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과제를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이 요구되었다.…… 러시아를 위해 승리의 중요성을 인식하자. 특히 지난 7개월 동안 영웅적으로 요새를 고수한 뤼순의 우리 형제를 보다 빨리 구출하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승리가 필요하다. <쿠로파트킨의 명령서 중 일부>
당시 러시아 만주군의 군사력은 보병 194,427명, 기병 18,868명, 대포 758문 그리고 기관총 32정이었다. 만주군은 동부군(군의 좌측)과 서부군(군의 우측)으로 구분되었다. 일본군 지휘부는 러시아군의 군사력을 보병 20만, 기병 2만 6천 명 및 대포 950문으로 산정하고 있었다. 러시아 정찰군은 일본군이 보병 14만 4천명, 기병 6,360명 및 대포 648문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작전중에 보강된 보충대를 제외하고서도 보병의 수가 17만 명(8개 보병사단, 9개 예비연대 및 2개 기병연대)에 달했다.
러시아군의 공격준비는 산만하고 일관성이 결여되어서 쿠로파트킨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성급하게 수집된 정보에 근거하여 부정확한 지도가 작성되었으며, 공격로 상의 산악지역은 조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군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만주군 참모부의 장교를 비롯하여 동부군과 서부군의 지휘관이 참석한 가운데 작성된 공격계획에는 명확한 목적이 결여되었으며, 이런 점 때문에 쿠로파트킨은 각 부대의 지휘관에게 매우 조심해서 작전에 임하라고 지시했다.
러시아의 공격계획은 일본군의 우익을 점령한 후, 결정타를 가함으로써 적군을 따이쯰허(太子河) 강 대안으로 격퇴시키는 것이었는데, 다롄(大連)과 랴오양을 연결하는 철도와 일본군의 보급로였던 수상교통로 등이 공격대상에서 제외되었으며,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도 없었다. 러시아군의 주 공격지역은 산악지형이었기 때문에 작전수행에 어려움이 따랐다. 쿠로파트킨은 동부군에 집중된 “보다 강인하고 경험이 풍부한 부대는 지형적 상황이나 일본군에 익숙하지 않은 부대가 감당할 수 없는 많은 것들도 해낼 수 있다”는 것에 근거하여 산악지형을 주 공격지역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공격부대편성으로는 예정된 공격계획을 원만히 수행하기 힘들었다. 쉬타겔베르크 중장의 동부군은 제1, 제2, 제3시베리아군단과 렌넨캄프의 분견대 등으로 구성(총 86개 대대, 50개 백인중대, 대포 198문에 기관총 32정)되었으며, 임무는 정면과 우측에서 일본군에게 결정타를 입히는 것이었다. 이 동부군은 구로키 장군의 일본군 제1군의 정면에서 공격에 나섰는데, 최초 임무는 일본군 진지를 점령한 후 계속해서 진격하는 것이었다.
빌데를링 중장의 서부군은 제10, 제17전열군단과 뎀보프스키 장군의 분견대로 구성(총 77개 대대, 56개 기병중대와 백인중대, 대포 22문)되었으며, 랴오양과 봉천(奉天) 사이의 철도노선을 다라 공격하기 위하여 사허(沙河) 강 방면으로 향했으나, 쿠로파트킨의 명령에 따라 처음에는 단지 시위적 군사행동에 국한해야 했다.
러시아군의 총예비대는 제4시베리아군단, 제1전열군단 및 미트첸코 장군의 분견대로 구성(총 56개 대대, 20개 백인중대, 대포 228문)되었으며, 동부군과 서부군 사이의 12㎞에 걸친 중간지점에 돌출된 형태를 이루어 포진했다. 예비대의 양 측면 방어에는 마드리토프의 기병부대와 코르사코프스키의 기병부대가 각각 배정되었다. 그 외에도 서부군의 우익에는 24개 대대, 6개 백인중대 그리고 대포 96문으로 구성된 제6시베리아군단이 포진하고 있었다.(본 군단 소속의 2개 연대는 봉천(奉天)을 방어하기 위해 머물고 있었다) 쿠로파트킨의 결정에 따라 350문의 대포만이 공격에 투입되었고 나머지 400문 이상의 대포는 예비대에 잔류했다. 이런 식의 병력과 화력 배분은 최선이 아니었다. 주 전선에 배당된 병력이 전체의 1/4에 불과했으며, 보조전선에 집결된 병력 또한 비슷했다. 전체의 절반에 해당되는 병력은 공격부대의 후방과 양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 예비대에 잔류했다.
작전 초기의 일본군 전개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이루어졌다. 즉, 랴오양과 봉천(奉天)을 잇는 철도와 갱도 사이의 중앙에 노쯔 장군의 제4군(2개 사단, 3개 예비여단)가 포진했다. 갱도의 동쪽인 우익에는 구로키 장군의 제1군(3개 사단, 1개 예비연대)가 위치했으며, 오쿠 장군의 제2군(3개 사단)은 좌익에 배치되었다. 약 3개 사단과 중포(重砲) 부대로 구성된 총예비대는 랴오양에 집결했다. 제2군의 좌측 전방에서는 제1기병여단이 아키야마의 지휘 아래 훈허(渾河) 강 방면으로 전진했으며, 우측 전방에는 제2기병여단이 포진했다. 우메자와(梅澤道治)의 근위예비여단(6개 대대, 대포 6문)은 사허(沙河) 강 근교에 집결했다.
일본군 지휘부는 군수물자를 각 부대에 확실하게 공급하기 위해 노력하여, 다롄(大連)과 랴오양 사이의 철도를 협궤로 재부설하여 부동항과의 교통을 개선했다.
오야만 원수는 러시아군의 공격을 기다리지 않았다. 일본군 총사령관은 공격 초기에 요새에서 포격을 가하여 러시아군을 지치게 만든 후, 반격에 나서기로 했다.
67. 사허 강 전투(2)
9월 22일 만주군이 봉천(奉天)과 푸슌(撫順) 전선에서 군사행동을 개시함으로써 사허(沙河) 강 전투가 시작되었다.
9월 23일 서부군은 사허(沙河) 강에 도착하여 방비를 강화했다. 같은 날 동부군은 우메자와의 근위예비여단의 우측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동부군은 일본군의 배치상태를 정찰했다. 동부군의 주력부대는 우메자와의 여단을 격퇴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군사행동에 착수하지 않았다.
9월 25일 아침 러시아군은 일본군의 비어 있는 진지를 발견했다.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한 우메자와의 여단은 대량의 예비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던 새로운 진지에서 방어에 들어갔다. 약 20㎞에 걸친 동부군의 전방에는 7개 포병대대로 구성된 미약한 방어망이 배치되었다. 9월 26일 쿠로파트킨은 동부군에게 “주 진지를 정찰할 것…… 그리고 측면공격과 일본군의 주요 진지의 우익을 포위하기 위한 출발진지의 점령을 준비할 것……”을 명령했다.
대규모의 러시아군이 우메자와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구로키 장군은 그날 오후에 지원군으로 제12사단을 파견했다. 사단 병력 중 1개 연대는 심야에 도착했다. 강인노미야 노리히도(閑院宮載仁親王)의 기병사단은 러시아군이 따이쯰허(太子河) 강의 좌안을 다라 이동하는 것을 차단하면서 동시에 일본군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남쪽 15㎞ 지점 방면으로 향했다. 러시아 동부군이 공격을 지체하는 사이, 일본군은 제때에 맞춰 우익에 증원군을 파견했다.
러시아 동부군에 대응할 수 있는 병력은 19대대, 12개 기병중대 그리고 대포 48문에 불과했는데, 그나마 각각 다른 시각에 전장에 도착했다. 따라서 러시아군은 특별한 어려움 없이 일본군을 괴멸시킬 수 있었으나, 쿠로파트킨의 명령을 준수하고 있었던 동부군 지휘관 쉬타겔베르크 장군은 부대 운용을 자제했다.
9월 26일 삼소노프의 기병대 및 제1, 제3시베리아군단의 개별적 군사행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제3시베리아군단 소속의 제24동시베리아보병연대는 일본군 초소를 격퇴한 후, 9월 27일 밤 러시아군의 공격로 상에 있었던 바위산과 인접한 산의 정상을 점령했다. 그러나 다른 산의 정상에 있던 일본군이 십자포화를 퍼붓자 다음날 아침 그곳으로부터 후퇴해야 했다. 렌넨캄프의 분견대 또한 일본군의 화력에 의해 제지당했다.
일본군 총사령관 오야마 원수는 9월 26일 일본군의 모든 전선에 걸쳐 러시아군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을 천명했다. 이 사실은 그로 하여금 소극적 방어 이후 반격으로 전환한다는 애초의 계획을 포기하도록 만들었으며, 결국 일본군의 우익의 제12사단과 우메자와의 여단이 전투에 투입되었다. 만일 오야마가 우익을 강화했다면, 러시아의 계획에 말려들었을 것이다.
오야마의 상황 분석에 따르면 일본군에게는 단 하나의 가능성만이 존재했다. 즉, 러시아군으로부터 주도권을 빼앗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지원군 없이 우익을 방치한 후, 좌익에 배치된 부대를 공격에 투입해야 했다. 더구나 러시아군의 우익에 제6시베리아군단과 뎀보프스키의 분견대가 포진중인 사실을 몰랐던 오야마는 오쿠 장군의 부대만으로 러시아군의 우익을 포위하려 했다. 이러한 그의 계획은 러시아군이 다수의 군사력을 동쪽에 할당함에 따라 우익이 약해졌을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오야마는 그와 동시에 중앙에서도 강력한 공격을 가하려 했다.
9월 27일 오야마의 명령에 따라 일본군 제4, 제2군이 공격을 개시했다. 제1군은 기존의 위치를 고수했다. 일본군은 러시아군을 포위하듯 전선의 좌익을 약간 앞으로 전진시켰다. 이후 사허(沙河) 강 전투의 주도권은 일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동부전선의 제3시베리아군단과 렌넨캄프의 분견대가 취한 군사행동은 전세를 바꾸지 못했다. 9월 28일 새로이 공격했지만 잘못된 계획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지원한 대포의 수는 총 198문 중 38문에 불과했으며, 공격준비 포격 또한 아군 보병부대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우려에서 제한된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험준한 바위산에서 진지를 보강한 일본군은 8문의 포를 위장하여 러시아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제1시베리아군단은 공격을 개시했으나 부족한 화력지원 때문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쉬타겔베르크는 9워 29일 밤에 총공격을 계획했으나 역시 실행되지 않았다. 제3시베리아군단과 렌넨캄프의 분견대가 동부 고지 탈환작전에서 일부 성과를 올렸으나, 동부군 주력부대가 그것을 지켜내지 못했다. 집중화력을 동반한 일본군의 반격에 러시아군은 어렵게 점령한 진지로부터 후퇴해야 했다. 적군에게 치명타를 입히기 위해 실행된 동부군의 공격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일본군 또한 힘들게 진지를 고수했으며, 여러 부대가 무질서하게 되섞였고 병력손실도 컸다. 그런데도 러시아군 지휘부는 적극적 군사행동을 자제하고 방어태세로 전환했다.
서부군과 제4시베리아군단 그리고 제1전열군단(후자의 2개 부대는 동부군과 서부군의 중간지점에서 전투에 참가했다)은 9월 28, 29일에 러시아군을 압박하며 공격해 들어오는 일본군 제2, 제4군을 물리쳤다. 9월 29일 일본군 제2군 소속의 제33연대가 점령중이었던 촌락에서의 전투는 특히 격렬했다.
위 지역을 쟁취하기 위해 제139모르샨스키 연대 및 제140자라이스키 연대 소속의 2개 대대가 보강되었다. 이 부대는 21시경 촌락의 북쪽에 포진했다. 제1전선에는 4개 대대가 배치되었으며, 2개 대대가 예비대를 형성했다. 러시아군은 사격을 자제한 상태에서 3개 방면에서 공격해 들어갔다. 일본의 방어군 중 혹은 전사하고 혹은 도주했다. 러시아군은 방어부대를 편성했다. 러시아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다른 방면으로의 공격을 연기했다. 일본군의 대규모 야간공격은 인근 산악지에서만 이루어졌다. 제4군 제10사단 소속의 2개 여단은 예비연대와 4개 대대로 구성된 증원군과 함께 신호탄의 발사와 동시에 공격을 개시했다.
이 산을 방어중이던 군사력은 노보체르카스키, 차리친스키, 사마르스키 연대 소속의 총 6개 대대와 대포 16문이었다. 월등한 군사력을 보유한 일본군은 낮에 선택한 진로를 따라 조용히 접근했는데, 러시아군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산의 남쪽에 위치한 촌락 근교에서 격렬한 백병전이 벌어졌는데, 일본군은 예비대 전체를 비롯하여 총력을 투입한 후에야 러시아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남서 방면에서도 공격을 시작했는데, 월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일본군은 장교 60명과 사병 1,250명의 희생을 치른 후에야 진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야간공격으로 인하여 일본군의 사기는 상당히 저하되었으며, 결국 노쯔 장군은 제10사단을 전투에서 철수시켜야 했다. 러시아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한 제4군은 매우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이 포진한 중심부에 침입함으로써 전선이 돌파될 수 있다는 위협을 느끼도록 했다.
일본군은 서부군의 우측 전선에서도 전과를 올렸다. 제2군 소속의 제4사단이 러시아군의 진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제6시베리아군단의 측면공격을 두려워한 일본군은 더 이상의 전진을 자제했다. 당시 제6시베리아군단은 쿠로파트킨의 예비대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제17군단에 소속된 부대가 수행한 이 전투를 관망하고 있었다. 제6시베리아군단의 지휘관 소볼리에프 장군은 쿠로파트킨의 명령에 따라 3개 대대를 진군시켰다. 그러나 제17군단과 합동작전중이던 그리에코프 장군의 기병대가 후퇴하자 원래의 위치로 복귀했다. 쿠로파트킨과 소볼리에프는 예비대였던 제6시베리아군단과 젬보프스키 장군의 분견대를 동원하여 제2군의 후방과 측면을 공격해야 하는 결정적 시기를 놓쳤다.
러시아 지휘부는 공격이 실패하자 생소한 산악지형에서 이루어지는 공격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우익은 일본군에 의해 포위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불안한 전황이었다. 결국 쿠로파트킨은 방어에 전념하기로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다.
서부군의 우익을 진격시키려 했던 빌데를링의 기도 등은 비록 실패로 종결되었지만 동부군의 공격 같은 일련의 사건을 경험한 오야마 원수는 9월 29일에 최종적으로 포위작전을 포기했다. 일본군의 모든 전선에 걸쳐 러시아군이 출현했으며, 그 이후에 중앙에서 정면충돌한 것등은 러시아군이 일본군의 좌익을 포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철도를 잃을 수 있다는 위협을 느꼈다.
68. 사허 강 전투(3)
사허(沙河) 강에서 계속된 전투에서는 확실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10월 3일에 산 위의 진지를 쟁취하기 위한 전투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일본군은 사허(沙河) 강의 좌안을 점거하기 위해 산 위의 진지를 공격했다. 이 산에는 제1전열군단 제22사단에 소속된 3개 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10월 3일 동이 트자 일본군은 강력한 포격과 기관총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으며, 러시아군은 우안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제10군단 소속의 부대는 포격에 의해 완전히 격퇴되었다. 산을 점령한 일본군은 근처에 포진하고 있었던 노비코프 장군의 분견대(제22사단 소속의 3개 연대)에게 사격을 가했으며, 러시아군은 후퇴했다. 일본군은 사허(沙河) 강을 도하하여 진지를 점령했으나, 오후에 있었던 러시아군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사허(沙河) 강 협곡의 양측을 제압할 수 있었던 산과 그것의 약간 남쪽에 위치한 산(후일 러시아 장군의 이름을 따서 푸칠로프로 명명됨)에 큰 의미를 두었던 쿠로파트킨은 빼앗긴 진지를 탈환하기로 결정했다. 위의 두 산은 가파른 절벽을 이루며 사허(沙河) 강 방면으로 낮아지는 높은 구릉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허(沙河) 강은 수심이 낮고 강폭이 좁아서 도보로 손쉽게 도강할 수 있었다. 야마다 주사부로(山田忠三郞) 장군의 지휘 하에 5개 대대와 대포 30문으로 구성된 일본군 혼성부대가 위의 두 산을 점령했다.
제2시베리아군단 소속으로 예비대에 편입되었던 푸칠로프 장군의 여단이 제10군단의 증원군으로 파병되었다. 그 외에도 제1시베리아군단의 지휘관은 산을 공격하기 위해 제36연대를 파병했다. 이후 증원군의 자격으로 2개 연대가 더 증파되었다. 전체 25개 대대의 총지휘관에는 공격임무를 부여받은 푸칠로프 장군이 임명되었다. 여단을 이끌고 도착한 푸칠로프 장군은 노비코프 장군과 함께 공격계획을 작성했다. 노비코프 장군의 연대는 산을 정면에서 공격해야 했다. 반면 푸칠로프 장군의 부대는 푸칠로프 산의 서쪽에서 포위공격을 실행하기로 되었다.
15시에 포병의 공격준비포격이 시작된 후, 16시 50분에 러시아군은 일본군의 강력한 포격과 기관총 및 소총 사격을 받으면서 공격에 나섰다. 저녁 무렵 러,일 양측은 혼전을 벌였으며, 러시아 측의 손실이 막대했다. 제22사단 소속의 연대장 3명이 부상을 입었다. 산을 점령한 러시아군 제36연대는 남쪽으로부터 일본군 참호를 불시에 침입하여 강력한 백병전으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손실도 컸기 때문에, 제36연대를 철수시켜야 했다.
푸칠로프 장군의 여단은 보다 성공적으로 작전을 수행했다. 도강을 완료한 푸칠로프의 여단은 야음을 이용하여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접근했다. 일본군의 강력한 화력에도 불구하고 푸칠로프의 부대는 일본군 참호를 공격하여 치열한 백병전으로 자정 무렵 그 참호를 점령했다. 그 사이에도 제22사단은 공격을 중단하지 않았다. 10월 4일 밤 노비코프는 출발진지를 점령했으며, 산 정상으로도 2개 중대를 파병한 후, 나머지 부대도 그 뒤를 따랐다. 잠시 동안의 백병전 후 이 산 역시 러시아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공격으로 발생한 러시아군의 사상자 수는 약 3천 명에 달했다. 반면 야마다의 분견대는 거의 괴멸된 상태였다. 러시아군은 대포 14문(야전포 9문, 산악포 5문)과 기관총 1정을 전리품으로 획득했다. 10월 4일 일본군은 촌락에서 철수했으며, 다음날 산을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나자 완전히 철수했다.
러시아군은 산 탈환전투에서 여러 차례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것이 사허(沙河) 강 전투의 전체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일본군은 경계선에 주둔했으며, 봉천(奉天)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 진지전을 고수하면서 진지 강화작업에 임했다.
일본군은 본 전투에서 결정적 성과를 얻지 못한 채 막대한 손실을 감수했으며(일부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2만 명 정도의 인명 손실이 있었으며, 그 중 전사자는 3,951명에 달했다), 이후 얼마 동안은 적극적 군사행동을 삼갔다. 러시아군의 병력손실은 41,473명(이 중 전사자는 4,870명)에 달했으며 역시 가시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철저한 준비도 없고 충분히 숙고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더구나 우유부단한 지휘를 받으면서 이루어진 러시아군의 공격조차 일본군을 압박하여 평정을 잃게 만들었으며, 폭넓은 전선에 병력을 분산시키도록 만듦으로써 일본군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러시아군 보병은 이전의 전투 경험에도 불구하고 사허(沙河) 강 전투에서도 지나치게 밀집된 전투대형을 유지했으며, 따라서 산병선 내에서 신속하게 산개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성공적인 행동을 펼 수 없었다. 러시아군 대대는 중대 단위의 밀집된 종대로 정렬했기 때문에 병력의 일부만이 사격할 수 있었다. 이런 전투대형은 일본군의 강력한 화력에 의한 막대한 인명 손실을 초래했을 뿐, 공격의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
사허(沙河) 강 전투는 원거리 전투의 경우 대포의 역할이, 근접거리일 경우 기관총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충분히 강력한 화력과 준비된 진지의 부족이라는 두 가지 조건 하에서 대규모의 혼성부대를 운용했던 탓에 부대 전개가 장거리(60㎞)에 걸쳐 이루어지는 상황이 발생했으며, 전투기간도 연장되어 총 14일간 진행되었다. 이런 점에서 사허(沙河) 강 전투는 전술사에서 작전술에 관한 이론이 발전하는 새로운 단계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