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번버리 항 준설공사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호주는 인종에 대한 편견이 심한 나라다. 하기 때문에 외국인이 자국 내
에서 취업하는 것을 무척 꺼려했다. 입찰이 끝나고 계약하는 과정에서 호주
당국은 준설선만 끌고 와서 호주인 선원들을 고용하라는 것이었다.
호주에도 자국의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규가 있었고 또 영국을 본따
서 정부에다 대고 큰소리 치는 노조가 뒤에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건
설로서는 공사를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말 잘 듣고 부지런하고
착한 우리 선원들이 꼭 필요했다. 그래서 호주의 노조측과 협상의 협상을
벌인 끝에 호주인 25명과 한국인 25명을 쓰기로 했던 것이다.
막상 한국인 호주인이 반반씩 한배에 타고 보니 어려운 일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서로 말이 다르고, 생활풍습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사람의
기질까지 딴판이라서 처음에는 입으로 싸우더니 나중엔 기어이 주먹질이 오
고갔다.
호주인들은 작업환경이 어떠니 거주환경이 어떠니 하고 항의를 해오기 시
작했다. 준설선을 산 뒤에 선실 내부를 한국인에게 편리하게끔 개조했는데
그것이 불편하니 다시 서양식으로 고치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뒤에서 버티
고 있는 강력한 노조 때문에 그들의 불평이나 요구를 그냥 묵살해 버릴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번버리 항에서 작업 중인 바로 이 준설선 현대 1호가 월남의 메콩
강에 투입되었을 때, 마침 정 주영이 사이공 지점에서 들은 이야기다.
67년 빈롱에서 베트공의 구정공세를 만났다. 메콩 강변에 위치한 빈롱은
곡창지대로서 원래부터 격전지였다. 구정을 이용한 베트공의 대대적인 공격
으로 준설선 현대 1호는 그 베트공과 사이공 정부군과의 중간 지점에 들어
가게 되었다.
어느 쪽이 정부군이고 어느 쪽이 베트공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고, 포화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도 없고 해서 일주일 동안을 생사의 기로에
선 채로 그 부근을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간판에만 나가면 머리 위로 날아 가는 실탄 소리로 소란하기만 했다. 현
대 1호의 선체에는 바로 그때의 유탄이 지금도 숱하게 박혀 있다.
선장 겸 현장 소장인 양 상서는 선원들이 선실 밖으로 못 나가게 할 생각
으로 선원 한 사람 앞에 월남 돈 5백 피아스터씩을 나누어 주고 노름을 시
켰다. 한 사람만 교대로 망을 보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선실에서 노름
을 하게 했는데,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판국에 노름이 될 리 없었다.
밤새도록 노름을 하면서도 불안에 떨던 선원들은 날이 밝아 오자 준설선
을 버린 채 예인선만 타고 사이공으로 탈출하자는 모의를 했다.
"양소장은 어떡하지?"
한 선원이 동료 선원들에게 물었다.
"양소장은 배를 버리고 가자면 틀림없이 안 간다고 할 거야."
"그럼 할 수 없지 뭐. 우리끼리라도 달아나야지 여기서 양소장하고 같이
죽을 순 없잖아."
"야 임마, 아무리 죽는 마당이라도 의리가 있지, 어떻게 지금까지 한배를
타고 있다가 양소장은 죽으라고 내버리고 우리끼리만 가니?"
한 선원이 방금 말한 선원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럼 어쩔 거야?"
"뭘로 뒤통수를 내리쳐서 기절을 시키는 거야. 그래서 업고 가자구."
"좋아, 좋아!"
체격이 좋은 몇 사람이 자고 있는 양 상서를 때려 눕혀 가지고 업어서 내
오기로 했다. 양 상서는 깡다구는 세었지만 체격은 원체 왜소한 편이었다.
소장실 문을 열고 들어간 선원들은 어처구니 없어 해 하면서 서로 얼굴만
쳐다보다가 되돌아 나와 버리고 말았다. 자고 있어야 할 양 상서가 잠옷 바
람으로 일어나 앉아서 천하태평하게 책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 상서는 무언가 수상한 기미를 느끼고 살그머니 그들을 따라가 보았다.
선원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아 골통을 까고 업고 나와야지 그냥 나오면 어떡해?"
"임마, 눈깔을 새까맣게 뜨고 있는데 어떻게 골통을 까니?"
"그러지 말구 공갈 협박을 해서 이 배를 그냥 몰구 가자구."
"야, 양소장이 우리 공갈 협박에 떨어질 사람이냐?"
"그럼 여기서 이러구 죽치고 앉았다가 그냥 죽을 거니?"하고 선원들이 수
군거리는 판에,
"뭐야 뭐?"하면서 양 상서가 끼어 들었다. 선원들은 일제히 함구해 버렸
다. 양 상서는 선원들을 야단도 치고 달래기도 하면서 설득하기 시작했다.
사실 메콩 강은 급류가 많은데다가 사이공가지는 거리도 너무 멀기 때문
에 그런 상황 속에서 섣불리 움직인다는 것은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었
다.
선원들의 동요는 간신히 막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식량이 떨어졌다. 다
들 이제는,
"꼼짝 없이 굶어 죽는구나."하고 절망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무작정
구원의 손이 뻗쳐 올때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용감한 직원 두 사
람이 작은 터그 보우트를 타고 다섯 시간 동안의 험난한 항해 끝에 메콩강
하류 미토에서 작업 중인 다른 회사의 준설 현장에 닿았다. 두 직원은 그곳
에서 미공병단을 찾았다. 사태의 절박성을 설명한 그들은 미군 C레이숀 5백
상자를 터그 보우트에 싣고 다시 준설선으로 돌아왔다.
터그 보우트가 돌아왔을 때의 감격은 말할 것 없다. 그 C레이숀으로 연명
하는 동안에 어느 정도 포화가 가시자 구사일생으로 적진에서 탈출해 온 준
설선 현대 1호였다.
캄란에 세운다는 소도시 건설공사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공사는 현
대건설 창립 이래의 최대 규모의 공사였으므로 정 주영을 비롯한 회사 간부
진들이 입찰 때부터 총력을 기울여 왔던 터라 공사 낙찰 소식이 전해지자
회사 전체는 축제의 분위기로 휩싸이기까지 했었다.
주월 한국군 사령부에서까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사현장의 안전을 지키
기 위해 캄란과 반오이 중간 지점에 주둔하고 있던 백마부대 30연대에서 1
개 소대의 병력을 파견해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에 걸친
베트공의 기습으로 모든 직원과 기능공들은 불안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었
다.
현장의 부식 공급은 주로 반오이 시에서 2백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나트
랑 시에서 조달하고 있었는데 부식 공급차가 도중에서 베트공의 습격을 받
는 일은 다반사였다.
68년 구정공세 때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전간부 직원들은 현장 캠프
안에 있는 휴게실에 모여 앉아서 내일 일을 진행시키기 위한 공정회의를 하
고 있었다.
별안간 포탄이 작렬하는 소리가 쨍 했다. 총 소리가 빗발쳤다. 한 순간의
일이었다. 두 귀가 멍멍한 가운데 간부 직원들이 휴게실을 뛰쳐 나갔다.
베트공이 쏜 박격포 포탄이 기능공 숙소를 때렸던 것이다. 피투성이가 된
두 명의 기능공이 앰블런스에 실리어 후송되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정 주영은 발주처의 무성의로 늦어진 공기를 따라 잡
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하루에 1만 1천 5백장의 블록을 찍어낼 수 있는 최신
블록제작기계를 도입해다가 현장에 설치하고 가장 우수한 작업반을 직접 편
성해서 투입했다.
그때 미국에서 도입했던 블록제작기계를 국내에 들여다가 결국은 훗날 건
재 생산업체로 발전한 동서산업의 전신인 벽제 콘크리트 주식회사를 설립하
기는 했지만, 좌우간 남들이 쉽게 번 돈이라고 생각하는 월남에서조차도 그
와 같은 피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 주영은 그런 갖가지 고생과 수모를 당하지 않고 해외에서 일하
는 만큼의 큰일을 국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하고 오래 전부터 곰곰
이 생각해 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생각해 낸 것이 배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배 만드는 것을 외국
에서는 건조(Shipbuilding)한다고 하는 말에 착안했다. 건조와 건축이 비슷
하듯이 배를 만드는 일이나 집을 짓는 일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 일은 국내에서 하고 외국에 내다 팔아서 큰 이익을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선박이다!)
그는 다른 산업플랜트도 생각해 보았지만 아직 우리 기술이 약하니까 단
일 품목인 선박이 제일 낫겠다고 생각했다.
(선채라는 것은 정유공장 탱크를 만들 때처럼 도면대로 구부려 가지고 용
접하면 되는 것이고 그 속에 들어가는 기계도 모두 생산해 내야만 하는 것
이 아니고, 빌딩을 지을 때 냉 온방장치나 엘리베이터 같은 것을 따로 사다
넣듯이 선박 속에 들어가는 기계들도 사다가 도면대로 제자리에 설치해서
끼우면 되는 거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는 자신이 생겼다. 선박하고 빌딩하고의 차이
점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선박은 움직이는 물체고 빌딩은 고정되어 있는 물
체라는 데까지 착안한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빌딩만한 몇 십만톤짜리, 몇 천만불짜리 선박을 건조할 생
각이었다.
빌딩만한 선박이 움직인다는 것은 그 큰 선박 안에 조그만 발전소가 하나
있기 때문인데, 발전소라면 그동안 나주 비료공장의 자가발전시설(2만 5천
킬로와트)을 비롯해서 부산의 감천 화력.삼척 화력.영월 제2화력.군산 화력
발전소 등을 시공해 왔고 또 그 시공을 통해서 양성된 기술자가 강전.약전
어떤 계통에든지 다 있었다.
호남비료 나주공장이 착수되던 59년만 해도 우리 나라에는 이렇다 할 공
업시설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따라서 기계설비의 제작은 물론 시공기술까지
도 보잘 것 없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기술회사였던 서독의 루루기
열 공업주식회사의 파견 기술자들은 한국의 용접 기술까지도 믿지 못해서
가스 탱크를 용접하는 데 하루에 18미터 이상은 못 하게 했었다.
태국 고속도로 공사 때는 마카담 롤러라고 하는 손바닥으로 땅을 다지는
식의 장난감 같은 기계를 가지고 나갔다가 유럽 사람들이 진동식 자동 롤러
기계를 쓰는 것을 보고 한 대만 견본으로 사다가 뜯어보고는 부품들을 구입
해서 우리 손으로 만들어 쓰지 않았는가. 콤프레서도 믹서도 필요할 땐 우
리가 우리 힘으로 만들어서라도 써 왔다.
정 주영은 배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그러나 당장은 무엇보
다도 자본도 없고 기술도 없었다. 그래서 정 주영은 차관도 얻어 들이고 또
배를 같이 만들 사람을 찾아서 일본으로 건너갔었다.
그때가 69년 1월. 일본의 조선업계를 쫓아다니다가 미쓰비시 중공업에서
흥미를 느끼게 되자 그는 곧 귀국해서 부랴사랴 구체적 안을 작성해 가지고
다시 배를 만들게 된다는 부푼 꿈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때마침 일본은 중공과의 국교정상화 기본원칙인 주사원칙에 묶여 있는 때
였으므로 미쓰비시는 큰 중국 시장에 눈을 돌린 채 정 주영의 조선소 건설
안은 아예 거들떠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정 주영은 하는 수 없이 일본 정부에 지원을 요청해 보았다. 그러자 일본
정부에서는 통상성의 관계관을 한국에 파견해서 타당성을 조사시켰다.
조사결과는 한국의 기술수준과 시장성을 감안할 때 최고 조선 능력은 5만
톤에 불과하므로 그 이상의 대형 선박을 건조하는 것은 사업 타당성이 없다
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정 주영이 처음부터 겨우 5만톤짜리 배나 만들자는
생각으로 조선소 건설을 발상하거나 구상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세계의 선박시장 전망은 매우 밝았다.
영국의 램버트 시장조사기구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세계적인 에너지
수요의 확대에 따른 유류 이동량의 급증 추세로 세계의 신규 선박 수요량은
70년과 75년 사이에 7천 6백만톤, 75년과 80년 사이에 9천 5백만톤, 80년과
85년 사이에는 1억 1천 9백만톤으로 증대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그러나 세계의 기존 조선 능력으로는 그와 같이 격증하는 선박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영국과 서독 같은 선진국에서는 극심한
노동력 부족과 노임 상승으로 계속적인 선박 수요의 증가 추세에도 불구하
고 조선업은 사양산업화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따라서 유럽 지역에서는
저렴하고 유능한 노동력을 풍부히 보유하고 있는 스페인.유고 같은 나라가
신흥 조선국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 역시 적응력이 뛰어나고 저렴한 노동력이 풍부했다. 정 주영은
외국의 기존 선진 조선소와 제휴하고 그곳의 관리자들과 기술자들을 초빙해
서 초기 단계의 미경험만 보완한다면 오래잖아 한국은 세계 조선 시장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력을 갖춘 조선국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69년 10월, 정 주영은 이스라엘의 팬 마리타임 회사와 노르웨이의 아커
그룹과 함께 합작으로 투자할 것을 계획하고 카나다의 에이커스 기술회사에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팬 마리타임 회사는 이스라엘 국회의원을 지낸 바 있는 메리도가 경영하
는 해운회사였다. 그 메리도가 첫번째 선박 수주상담자로 나타났다. 노르웨
이의 조선회사인 아커 그룹의 시엠과 같이 한국을 방문한 메리도는 50대 50
의 비율로 조선소를 설립하자고 제의했다. 그 제의와 함께 그는 기술을 자
기네가 제공하고 3천만불짜리 유조선 30척을 자신이 책임 지고 팔아서 한
척에 1백만불식의 순익을 정 주영에게 보장하겠지만 조선소의 운영권은 자
기네들이 장악한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때 국제 선박시장 정세에 어두웠던 정부 당국자는 그보다 더 나은 조건
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서 정 주영으로 하여금 메리도의 제의를 받아들이
도록 종용했다. 그렇지만 정 주영은 그 제의를 점잖게 거부했다. 돈 벌어서
죽을 때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닌 데 운영권을 남에게, 그것도 외국인에게 맡
기는 그런 사업은 안하면 안 했지 하고 싶지 않았다.
그후 정 주영은 당초의 합작투자 방침을 포기하고 장기 저리 차관을 도입
해다가 독자적으로 조선소를 설립한다는 방향으로 방침을 바꾸고 그에 따른
차관과 기술도입 선을 유럽 쪽에서 구해 보기로 했다.
차관도입에 의한 조선소 설립으로 방향을 바꾼 정 주영이, 그래서 지난 3
월의 조선사업부를 설치하고 여름에는 울산 내항 내의 염포리에다 부지 25
만평을 사들였던 것이다. 그래 놓고 정 주영은 지난 12월에, 그러니까 조선
사업부를 설치한 지 10개월 만에 차관도입선과 기술도입선을 찾아보기 위해
서 부사장 권 기태를 대동하고 유럽 여행 길에 올랐던 것이다.
그가 조선소를 지으려고 한다는 소문은 이미 관계는 물론 경제계에도 널
리 퍼져 있었다.
"조선소를 한두 푼 갖고 짓는 건가?"
"자동차 공장을 하나 짓더니만 배 공장을 짓겠다고 나서니, 또 비행기 공
장 짓는다고 안 하겠어. 하하......"
"아냐, 그래도 정회장, 그양반 해 낸다면 해 내더라구."
"허기야 뭐, 또 어디 가서 차관이나 얻어 오면 안 될 것도 없겠지."
"하여간 알아 줘야 할 양반이야. 정부가 중공업을 육성한다 하니까, 보라
구. 날쌔게 차관선을 찾으러 나선 거."
경제계 일각에서까지도 정 주영이 하는 사업이라면 으례 정부 시책과 연
관을 지어 생각하기가 일쑤였다.
"차관은 누가 그렇게 맘대로 준대? 정회장 조선소 짓는다는 얘기는 재작
년부터 해왔어."
"조선소는 몇 백만불 정도 갖곤 안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