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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시멘트공장도 4백 몇 십만불인가 들었어."
"그럼 이번엔 몇 천만불 가져야 하게?"
"정회장 의욕은 좋지만 잘 안 될 걸."
"조선소 질 땅은 어디다 사 놨는가?"
"땅만 있으면 뭘 하나? 돈이 있어, 기술이 있어?"
"하긴 지금 하고 있는 조선공사도 잘 안 되는 판인데....."
경제기획원의 관계자들도 정 주영이 조선소를 건설한다는 데 대해서는 회
의적이었다.
"현대건설, 저희들이 토목공사나 하고 빌딩이나 지었지 배를 어떻게 만들
어?"
"정부에서 조선공업을 육성한다니까 이제 토목쟁이들까지 한몫끼자고 하
니......."
"종이배도 하나 만들어 본 일이 없는 친구들이 원....."
"아, 만들기야 만들겠지."
"만들긴 어떻게 만드나?"
"만들기야 어떻게 두들겨 만들면 만들겠지만 그 만든 배가 뜨느냐 가라앉
느냐가 문제 아니겠어? 하하......"
조선업계의 반응이었다.
"정말 조선소는 왜 하려고 그러시는지 모르겠단 말야. 그냥 자동차 공장
이나 잘 키워 나가면 편하실 텐데 말야."
"그 어른이 언제는 편한 생각하시는 분이야? 일하는 재미로 산다는 어른
인데."
정 주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일을 하나의 재미로 알고 해 오고 있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면 어떤 것이든지 누구한테나 크든 작든 항상 재미로 묻
고 배웠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생각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도 계속 발전해
가고 있었다.
"우리 회장은 옛날부터 일을 꾸미고, 안 되는 일은 되게끔 풀어 나가고
하는 게 취미라구."
"그게 바로 우리 회장님의 도전력이고 개척정신이라는 겁니다."
"하긴 뭐 우리 회장님한테서 그런 박력 빼 놓으면 사실 아무것도 없지."
"하지만 될 만한 일에 도전을 하셔야지. 이번 일은 좀......"
"99퍼센트가 불가능할 땐 해 내라구 하셨어."
"우리 회장님이 무슨 나폴레옹인감?"
회사 내부에서도 이번 일이 꼭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
다.
그 시간에 정 주영은 권 기태와 함께 북해 연안에 위치한 노르웨이의 아
커 그룹의 조선소를 방문하러 가는 길이었다.
아커 그룹과의 합작투자 얘기는 작년에 끝난 일이지만 대체 유럽의 조선
소는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한번 하자는 것이었다. 일본 조선소는 더러
돌아보았지만 아직 그는 유럽 쪽 조선소는 보지 못했었다.
내일 모레가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전유럽이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들떠 있
는 때였다. 때가 때니 만큼 조선소에 일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테니까 그
는 대충 겉만 훑어보고 나서 바로 다음 행선지인 서독으로 날아갈 작정이었
다.
몹시 춥고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정 주영은 큰 감명을 받았다. 한산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조선소는 활기에 넘치고 있었으며 그 추운 날씨는 밤일까지 하는 기능공들
의 뜨거운 열기로 오히려 훈훈했다.
벌크(bulk)선을 만드는데 다른 조선소에서 블록을 제작해다가 조립하고
있는 중이었다.
각자 맡은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는 기능공들의 모습은 크리스마스에 들
뜬 바깥 분위기와는 딴판으로 진지하고 숙연하기까지 했다.
바로 그 순간 정 주영은 강력하게 밀어붙이면 한국에서도 틀림없이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아주 굳혀 버렸다.
그는 세계에서 한국 사람처럼 착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
게 바탕이 착하고 천성이 곱고 부지런하고 재주 있는 한국 사람이 못 살아
야 할 이유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한국 사람은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잘살 수 있다고 믿었
다. 지금까지는 한국 사람의 잠재능력을 체계적으로 개발해 오지 못했기 때
문에 여태껏 세계 선진국 대열에 끼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국
의 발전이 늦는다고 통탄하면서 애타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두메 산골에서 세 끼 밥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집을 뛰쳐나왔던 소년 정
주영이 어느덧 50고개를 넘어서면서부터는 못 사는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게
되었다.
아직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젊은 시절의 정 주영은 몸만 건강하면 행
복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몸져 누
워 있는 환자라 할지라도 본인 스스로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지 않은 것이라고까지 생각했었다.
그랬던 그의 행복관이 변해서 지금은 내가 행복하려면 내 주위 사람하고
다 같이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언젠가 어느 여성잡지 살롱의 여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행복관
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적이 있었다.
"사람은 자기 혼자서는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읍니다. 자기 혼자 아무리
좋은 일이 있더라도 주변이 불만으로 가득 차 있으면 행복할 수가 없읍니
다. 가정에서도 남편이 설령 출세를 하고 돈을 벌었다고 해도 아내나 자녀
들이 불만에 꽉 차 있다면 행복할 수 없지요? 가정이나 사회나, 어디나 불
만과 불평, 증오와 의혹이 가득 차 있을 때는 불행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 나가는 길은 자신은 물론, 주변의 불평 불만이 없어지도록
노력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위 사람들을 어떻게 기쁘게 해줄 수
있는냐가 행복의 열쇠지요."
이미 지금의 정 주영은 나 혼자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청년 정 주영
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그가 경영하는 사업도 자기 혼자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내키지 않으면 그만둘 수 있었던 쌀가게나 자동차 써비스공장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소홀히 하거나 자칫 그릇 판단하거나 해서 만
약 현대그룹이 도산이라도 하는 날에는 그의 선친의 말대로 지금은 정말 하
루 아침에 수천 수만의 떼거지가 날 것은 물론이고 나라의 경제 질서가 흔
들릴 판국이었다.
하기 때문에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익을 생각하기 전에 공익을 생
각하게 되었고 사업을 생각할 때는 기업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러는 사이
에 자신의 기업이 민족 장래와 국가발전에 중대한 연관성을 갖는다는 생각
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일찌기 애국자가 된다거나 자본주가 된다는 생각은 해본 일이 없었
다. 다만 복흥상회에서 쌀 배달을 하던 시절, 시골에서 읽은 신문 연재소설
<흙>속의 주인공인 허 숭처럼 불쌍하고 가난하고 억울한 농민들을 위해서
변호사가 되어 보겠다는 가당찮은 생각을 하고 법정통신 강의록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 변호사 예비시험을 쳤다가 떨어진 일은 한번 있었다.
그 일 말고는 오직 남보다 잘 살아 보겠다는 일념만으로 일해 온 그였다.
최근에 어느 대학생이,
"정회장님은 어떻게 해서 대한민국의 제일 재벌이 되셨읍니까?"하고 물었
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등산하듯 한 거예요. 등산을 하려면 좁은 길, 벼랑길, 험한 계곡......
여러 가지 길이 있잖아요? 그 길을 따라서 열심히 올라간 거예요. 남을 돌
아볼 시간도 없었고 뒤 돌아볼 시간도 없었던 거지요. 그렇게 부지런히 발
밑만 바라보고 올라가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상까지 올라오게 된 거
지요."
어느 대학생은 정 주영을 만나보고 나서 재벌 같은 냄새는 하나도 안 나
더라고 하면서,
"남대문 시장에 데려다가 리어카 옆에 앉혀 놓으면 틀림 없는 리어카군
같더라."고도 했다.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양복 바지도 잘 다려 입으
려고 하지 않았다. 구두도 잘 닦아 신지 않았다. 지금도 강원도 산골에서
물리도록 먹었던 감자떡과 옥수수를 제일 좋아했다.
어느 여류 작가는 그를 가리켜 겉으로 보기에는 영락없는 촌영감이지만
대화를 나누노라면 사나이의 미학을 느끼게 하는 위인이라고도 했다.
그는 자신이 거느리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계층의 어느 부류의 사
람들에게도 따뜻하고 친절하고 겸손했다. 이솝의 우화 중에서 행인의 옷을
벗긴 것은 강풍이 아닌 따스한 태양이었음을 그는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었
다.
서독에 가서 정 주영이 처음 접촉한 회사는 아베게서 조선소였다. 아베게
서 조선소는 선박 도면과 용역비조로 5백 80만불을 요구하고 다시 선박 한
척당 판매 수수료로 선가의 5퍼센트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정 주영은 용역
비가 비싼 대신 현대가 만드는 배에다 아베게서 조선소의 상표를 사용해서
판매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서독측은 자기네 조선소의 권위를 실추시킬
염려가 있다고 거절하는 것이었다.
"권부사장은 어떻게 생각하나?"
"판매수수료 5퍼센트는 터무니 없이 비쌉니다."
"그렇지? 우리 나라 기업들의 평균 매출 이익률이 겨우 5퍼센트 안팎 아
냐?"
"이왕 나오신 김에 다른 데를 좀더 접촉해 보시죠, 회장님."
"그래, 영국 쪽으로 한번 건너가 보자구."
정 주영과 권 기태는 영국의 애플도어사를 찾아갔다. 현관 문에는 회사
이름을 상징하는 사과가 그려져 있었다. 애플도어사는 실내 도크를 갖추고
특수 선박만을 건조하는 유명한 조선기술회사였다. 애플도어사는 일반 선박
건조회사인 스코트리스고우사를 소개했다. 스코트리스고우사는 매달 1만 5
천톤급 선박 한 척씩을 건조해서 팔고 있는 유력한 회사였다.
그 무렵 영국이나 독일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 적극적인 경제진
출을 꾀하고 있는 시기였다. 그때 마침 현대건설에서는 고리 원자력발전소
를 착공한 때였으므로 어디 가서든지 원자력발전소를 시공하고 있는 현대건
설이라고 하면 상대방은 머리를 굽신거릴 정도로 알아 주었다.
사실 알고 보면 고리 원자력 1호기 공사의 주 계약자는 미국의 웨스팅 하
우스사였고 그 밑에 하청계약자인 영국 회사가 둘 있었는데 그 중의 한 회
사는 2차계통 기기공급 및 설치공사를 맡은 잉글리시 이렉토릭사였고 다른
한 회사는 토목공사를 담당하고 있는 죠지 윔피사였다.
거기에 현대는 단지 그들 외국 기술회사에 노무를 제공하는 노임 하청 형
태로 참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속사정까지야 알리 없는 영국 사람들은 아마 현대도 자기 나라의 잉
글리시 이렉토릭사나 죠지 윔피사처럼 동격으로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참여
하고 있는 줄 알았으리라.
사실상 현대는 모든 분야에서 그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기술을 축적해
왔었다.
해방 후, 북한의 단전 조치로 서울 일원의 당면한 전력난을 해소하기 위
해 정부가 당인리 화력발전소를 미국의 벡텔사에다 턴 키 베이스(turn key
base)로 발주했을 때였다. 그때는 미국 사람들이 용접공까지도 제 나라 사
람들을 데려 왔기 때문에 노임 하청조차도 받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어떻게 기능 인력을 제공할 기회가 닿아서 용접을 하게 되었다.
자동차 수리공장에서 땜질을 하던 용접공들이었기 때문에 싼값으로 일을 잘
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다음의 감천 화력 때는 하청을 받다가 영월 화력에서
는 주 계약자가 되고 군산.인천 등 그동안에 건설된 주요 화력발전소에 참
여해서 국내 건설업체 중 가장 많은 발전소 시공실적을 쌓게 됨으로써 그나
마의 고리 원자력발전소 공사에서도 다른 경쟁업자들을 물리치고 노임 하청
이라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몫 얻어 낀 원자력발전소 공사에서 현대 기술진은 말할 수 없는
기술 후진국의 서러움을 겪는다. 그러나 그들은 좌절하지 않고 기술자립이
라는 사명감과 불굴의 개척정신으로 원전 건설 기술을 꾸준히 축적함으로써
70년대 후반에 이르러는 고리2, 월성3, 고리5.6, 영광7.8호기 등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주도해 간다.
어쨌든 정 주영은 조선사업을 발상한 지 3년 만에 영국의 애플도어사 및
스코트리스고우의 조선소와 기술, 판매협조 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계약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조선소 설계 레이 아웃(lay out)및 설계도면 등 모든 기술 사항을 제
공하는 기술 용역비는 1백 70만불로 한다.
2. 애플도어사는 울산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12호 선박가지의 판매 또는
판매 융자 알선을 담당하며, 현대는 그들 선박에 애플도어 또는 스코트리스
고우사 중 현대가 선택하는 상표를 사용하되 선박 1척당 수수료는 선박 제
조 원가의 0.5퍼센트를 지불한다.
3. 현대는 애플도어사와 스코트리스고우사는 연수 협정에 따라 현대가 파
견되는 전문 기술직 및 관리직 요원 약 60명에게 조선기술 및 관리능력을
습득케 한다.
4. 애플도어사는 생산계획, 원가계산 등 조선소 운영에 관한 자문을 제공
한다.
5. 일정기간 외국인 관리직 및 전문 경영자와 전문 기술자를 제공한다는
것들이었다.
이러한 조건은 당시의 국제관례상 파격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애플도어사
측은 기술 용역비 1백 70만불을 일시불로 내라는 것이 아니고 배 12척을 건
조 판매할 때까지 분할 지불하도록 배려를 해주었던 것이다.
그해 여름부터 애플도어 기술진이 한국에 나와서 정 주영이 작년에 매입
한 울산 내항 염포리 일대의 조선소 부지 조사를 시작했다.
조선소를 짓기에 적당한 지역인지 아닌지 하는 것을 과학적으로 진단하는
작업이었다. 영국에서 내한한 기술진에는 조선사업부의 건설담당 과장인 전
갑원이 붙어 있었다.
전 갑원은 정 주영이 소양강의 콘크리트 댐 계획을 사력 댐으로 바꿀 때
권 기태와 함께 설계를 담당한 바 있었던 공채 7기 사원으로서 지금은 본사
의 관리담당 이사로 있는 이 명박의 동기이기도 하다.
그는 입사하자마자 군산 화력발전소에 배치됐었다. 그가 회사내에서 일약
유명하게 알려진 것은 바로 그 현장에서였다.
공장 굴뚝의 용역설계를 검토하는 중 설계상의 큰 오류를 발견해 냈던 것
이다. 굴뚝의 하중에 비해서 기초의 파일(말뚝)설계가 약하게 잘못 설계되
어 있었다.
그 사실을 현장 감독에게 지적하고 다시 설계를 하게 함으로써 공사 수주
액을 배로 늘려 놓았었다.
그후, 그는 월남으로 나가 준설선 현대 2호에서 근무하다가 69년에 귀국,
김포 국제공항 확장공사 현장을 거쳐 지금은 본사의 조선사업부 일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전 갑원은 속이 끓었다. 정회장에게 벼락 맞을 생각을 하면 입술이 바짝
바짝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