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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링을 해서 기초 암반을 조사해 본 결과 조선소 부지로서는 부적당하다
는 판정을 나왔던 것이다.
전 갑원은 애플도어 기술진에게 몇 군데 더 볼링해 보자고 애원 하다시피
매달렸다.
끝내 조선 부지로서의 부적 판정이 나는 날에는 누구한테 욕 얻어 먹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진짜 큰일이었다. 기 쓰고 사 놓은 그 25만평이나 되는
넓은 땅을, 그것도 농토도 아닌 쓸모없는 개펄을 장차 뭐에 이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 더 큰 걱정이었다.
전 갑원이 너무 사정하는 바람에 애플도어 기술진은 다시 해 보나마나 한
볼링을 또 두서너 군데 더 해 보았다. 역시 결론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애플도어 기술진은 볼링 시설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전 갑원으로서는 어
쩔 수 없었다. 남은 일은 본사에 보고하는 일밖에 없는 데 차마 뭐라고 보
고할 수가 없었다.
처음 볼링 결과를 보고했을 때도 정회장은 어떤 일이 있어도 영국 기술진
을 납득시켜서 그 자리에다 꼭 조선소를 짓게 하라는 엄명이 있었다. 그러
면서 정회장은 대한민국 안엔 조선소 자리로 염포리만한 곳이 없다고 했었
다.
그런 정회장에게 전 갑원으로서는 도저히 틀렸다는 보고를 할 용기가 없
었다.
(에잇!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다!)하고 그는 본사에 전화를 걸기 위해
현대자동차 사무실로 갔다.
조선소 부지로 매입한 땅은 바로 현대자동차 공장에 붙은 땅이었다.
그가 자동차공장 정문을 들어서려는데 찍하고 승용차 멎는 소리가 뒤에서
났다. 문득 뒤돌아본 그는 아찔했다. 정회장이 타고 다니는 코티나 승용차
였다.
정 주영은 그때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나온 코티나 승용차를 타고 다녔다.
"이리 탓!"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정회장의 목소리는 벌써 첫마디부터 화가
나 있었다. 전 갑원은 얼른 앞칸에 올라 탔다.
"뭣하러 가는 거야?"
"사무실에 전화 좀......"
"병신같이......나가 죽든지, 집에 가서 농사나 짓든지 해! 아 그까짓 영
국 기술진 하날 납득시키지 못해?"
그런 때는 그저 날 죽이시오 하고 잠자코 있는 것이 장땡이라는 것을 현
대 사원들은 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내내 욕만 얻어 먹으면서 서울로 올
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욕이라고 해 봤자 자주 들어오는 병신 소리였다.
"이봐, 전과장.....왜 뒤도 한번 안 돌아 봐, 병신같이!"
그렇게 욕을 얻어 먹으면서도 뒤 한번 안 돌아보니까 이젠 왜 돌아보지도
않느냐고 욕이었다. 차만 타면 잠을 자던 정회장이 오늘은 잠도 안 자고 욕
이었다. 어쩌다가 좀 잠잠해서 전 갑원이 힐끔 돌아볼라치면 그는 자다가도
눈을 번쩍 뜨고 욕이었다.
정 주영은 그만큼 낭패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6천 3백만불이
라는 내외자를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동원해야 할지 막막한 판국에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 모아서 사놓은 부지조차 글렀다면 정녕 일은 글른 성싶었
다.
(에라, 잠이나 자자......빌어먹을..........)
정 주영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앞 시트 사이로 다리 하나를 쭉 뻗고 등
을 뒤 시트로 젖혔다.
그러고도 그는 바로 오늘 아침에 확정한 조선소 창업자금을 어떤 방법으
로 동원할 것인가를 생각하느라고 쉽게 잠 들 수가 없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했는데 정 주영의 이번 조선소 설립계획은
각계(관계.재계.경제계)의 여론대로 확실히 무모한 시도에 그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유무상통을 수없이 체험해 온 정 주영은 유는 무에서 창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슬기와 지혜의 거인
정 주영은 조선소 창업자금을 6천 3백만불로 확정하고 그 가운데 4천 3백
만불은 현금 및 자재 차관 등의 외자로 충당하고 나머지 2천만불을 내자로
조달할 게획이었다. 내자 2천만불 가운데 1천만불은 현대 자체 자금으로 충
당하고 나머지 1천만불은 정부의 지원 융자금을 신청할 작정이었다.
외국에서 빚을 얻겠다는 4천 3백만불은 당시의 공정환율인 3백 99대 1로
따져도 우리 나라 돈 1백 72억원이었다. 그 1백 72억원은 그때 현대의 총재
산 1백 36억원을 훨씬 넘는 돈이다.
하기야 정 주영은 일찌기 수중에 1천원을 가졌을 때 남의 빚으로 5천원짜
리 아도 써비스공장을 인수한 일도 있었다. 그때는 다행히 삼창 정미소의
오 윤근이 그를 신용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과연 이번에는 한국정부가 믿
느냐 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외국의 은행이나 관계회사들이 정 주영을 신
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 차관도입을 성공시키느냐 못 시키느냐의 열쇠였다.
그는 이미 71년 초에 설치한 런던 지점을 통해서 몇 달 전부터 차관도입
교섭을 추천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한 나라에서 민간 베이스로 몇 천만불
을 한꺼번에 기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의 불가능한 일
이었다.
그래서 정 주영은 조선소 건설에 필요한 각종 기자재를 생산하는 나라부
터 조사케 하고, 그 생산국 별로 차관도입 선을 다변화 시킬 것을 런더 ㄴ
지점에 지시했다.
영국.프랑스.서독.스페인 등의 차관도입 선이 구체적으로 떠 오르기 시작
했다.
그런데 정 주영은 그 차관을 장기.저리.분할 상환 조건으로 도입할 생각
이었다. 이를테면 차관의 원리금은 배를 만들어서 팔아 가지고 거기에서 남
는 이익으로 갚아 가겠다는 배짱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꼬바리 마음이지 엿장수 마음은 아니었다. 아까도 말했
지만 4천 3백만불이라는 막대한 돈을 한낱 후진국의 민간기업이 국제금융시
장에서 빚내 온다는 것은 꿈 같은 이야기다.
그래서 정 주영은 런던 지점을 통해서 영국의 버클에이 은행을 간사은행
으로 하고 프랑스의 엥도 수에즈 은행, 스페인의 코페이사, 서독의 프란츠
키르히펠트사 등을 끌어 들이는 컨소시엄(차관단:consortium)을 만들려고
공작했다.
차관단을 만들려는 그의 공작은 곧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급히 런던으로 날아갔다. 그때가지도 차관도입 선에서는 그가 제출한 조선
사업계획서는 들여다보지 않고 있었다.
현대건설은 고사하고 도대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배를 만들어 낸 실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정 주영으로서는 대답에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한국이 건조해
낸 선박으로는 대한조선공사가 미국의 주문을 받고 만든 1만 7천톤짜리가
최대규모의 것이었다. 물론 현대건설은 한국 조선업계 말대로 아직 종이배
도 만들어 본 실적이 없다. 그런 주제에 그는 뱃심 좋게 25만톤급 이상의
대형선박까지도 건조하겠다는 계획서를 내놓고 있는 것이었다.
미스터 정의 사업의욕은 좋지만 한국의 조선 능력으로 보아서 그런 대형
유조선을 만들 만한 기술인력이나 중간 관리직이 없잖습니까. 그러니 미스
터 정이 제출한 이 사업계획서는 근본적으로 타당성이 없읍니다.
그래서 검토할 가치가 없기 때문에 사업계획서는 들춰 보지도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영국을 비롯한 서독.프랑스 등의 차관 교섭 대상국
정부에서는 이미 주한 자국 대사관의 상무관들을 통해서 현대건설의 선박
건조 능력에 대한 조회를 마쳐 놓고 있었는데, 그 조회 보고서 내용은 모두
하나같이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일단 호텔로 돌아온 정 주영은,
"이거 큰일 났지?"하곤 동행한 백 충기를 바라보았다.
백 충기는 그전에 해양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66년에 정 주영이 일본에서
구입한 중고 준설선 가네시로마루(금성환:현대 1호)를 월남으로 몰고 가서
거기서 항만 준설공사를 한 적이 있는데 66년에는 다시 그 현대 1호를 포항
으로 몰고 와서 포항 신항 준설 공사를 하다가 조선사업부에 발탁된 중견사
원이었다.
그는 조선사업부로 옮기자마자 정 주영과 함께 조선소 부지를 보러 다녔
는데, 울산항 내 염포리 일대의 집반이 약하다는 것가지는 모르고 바람이
없어서 방파제를 쌓을 필요가 없겠다고 해서 정 주영이 그 개펄을 사자고
했을 때 그저 덮어놓고,
"좋습니다!"하고 한마디 한 죄로 지금도 가끔 병신 소리를 듣는 처지였
다.
정 주영은 부하 직원들에게 무슨 일을 시켰을 때 안 된다고 하는 말을 제
일 싫어했지만 자기 의견에 대해서 덮어 놓고 좋다는 식의 지당한 말씀주의
자들도 싫어했다. 그는 부하 사원들이 무슨 일에든지 애로사항은 솔직히 말
하되 수행해 주기를 바랐다. 맹종이 아닌 비판적인 입장에서 순종하기를 바
랐다.
말로는 큰일 났다고 하면서도 정 주영의 얼굴은 조금도 큰일 난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옷을 훌훌 벗어던지도 목욕할 준비를 했다. 백 충기는 재빨리
욕조에 더운 물을 틀어 놓았다.
정 주영은 해외출장을 할 때도 비서가 수행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때
그때 출장 목적에 따라서 필요한 사원들을 데리고 다녔다. 호텔 방도 독방
은 쓰지 않았다. 그는 여행하는 동안에 호텔에서 비싼 잠을 자야 하는 것을
제일 억울해 했다.
다음 날부터 정 주영은 열렬한 설득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찌기 신설동에서 무허가 써비스공장을 하던 시절에 유치장에 잡아
넣겠다고 공갈하는 일본 순사도 설복한 일이 있었다. 그때 이미 그는 진실
과 성실은 모든 것을 초월해서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체득한 바 있었다.
그의 끈질긴 설득은 주로 그가 차관단의 간사은행으로 지목했던 버클레이
은행 관계자들에게 집중되었다.
첫날은 현대건설의 성공적인 해외건설 실적을 들어 설득했다. 다음 날은
외국 차관으로 건설된 단양의 시멘트공장이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사실
을 들어 설득했다. 또 다음 날은 고급 기술 인력을 요하는 화력발전소 건설
실적을 비롯한 각종 플랜트 건설실적을 들어 설득했다. 그리고 또 다음 날
은 우수하고 저렴하고 풍부한 한국의 노동력을 들어 설득했다.
정 주영의 열성적인 설득으로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던 버클레이 은행 관계
자들이 차츰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버클레이 은행 관계자는 정 주영에게 현대건설 10년간의 대차대
조표를 제출해 달라고 요구해 왔다. 현대건설이 그간에 어떻게 성장해 온
기업인가를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때가 한국에서는 영국의 애플도어사 기술진에 의해서 새로 매입한 울산
외항의 조선소 부지 조사를 막 끝낸 다음이었다.
울산 내항에 사 놓았던 염포리 일대의 개펄이 조선소 부지로서 부적격하
다는 판정이 내리자 회장한테 욕만 잔뜩 얻어먹고 서울로 올라왔던 전 갑원
은 애플도어 기술진을 철수시키기 위해 다시 울산으로 내려갔었다.
애플도어 기술자들은 경주 불국사 관광을 가고 호텔에 없었다.
"딱한 친구들이군. 지금 가 봐야 한참 공사 중일 텐데 뭘 볼 게 있다
구......."
전 갑원은 혼자 중얼거리면서 작년 5월에 착공된 불국사 복원공사 현장에
있다가 온 한 동료 사원의 고충담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고건축물을 복원하는 공사니만큼 그곳에는 오히려 현대장비가 소용없다고
했었다. 지름 1.5미터 길이 10미터짜리 대형 원목을 찾아 내느라고 석달 동
안이나 전국 산판을 누비다가 강원도 양양 지방의 깊은 산중에서 간신히 구
하기는 구했는데 그것을 잘라내 가지고 차가 들어갈 수 있는 데까지 끌어
내리는 데 만도 한달이 걸렸고, 의정부 뒷산에서 지름 2.4미터 길이 8미터
짜리 석재를 채취해서 현장까지 운반하는 데는 두달 반이나 걸렸다고 했었
다.
현대건설 안에 편하게 놀고 먹을 자리는 한 군데도 없었다. 그래도 현대
건설 직원들은 어떤 환경에서나 자기에게 맡겨지는 임무에 철저하게 충실했
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현대건설 직원들을 보고,
"너희들은 다 정 주영이 사위들이냐?"하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또한 정 주영은 가끔 외부 사람들로부터 현대건설 직원은 정말 똑똑하고
영악스럽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는,
"난 신입사원 뽑을 땐 남자 사원은 내 사위감을 고르듯 하고 여자 사원은
며느리감을 고르듯 했지요."하고 응수하곤 했었다. 사주와 사원간의 그와
같은 정신적 유대감이 없었던들 오늘의 현대건설로 성장할 수 없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 갑원은 호텔 프론트에다 불국사에 간 그들이 돌아오거든 서울로 올라
갈 준비를 하게 해 달라는 부탁을 한 다음 같이 내려온 동료 사원들과 함께
방어진으로 나갔다.
그대로 철수하고 올라가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니 허탈하기도 했고 또 정
회장한테 야단 맞은 생각을 하면 아직 화도 나고 해서 방어진의 명물인 고
래회에다 소주라도 한잔 하고 싶어서였다.
거나하게 한잔 하고 나오는데 울산 외항의 전하만.미포만.일산만이 연접
된 해안에는 해송이 한껏 멋을 부리는 천해의 해수욕장과 올망졸망하게 아
늑한 어촌들이 마치 한폭의 풍경화인 양 한눈에 클로즈업되는 것이었다. 구
체적으로 어떻다고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내항의 염포리 개펄에 비하면 조
선소 부지로서는 그곳이 바로 명당이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전 갑원은 즉시 울산으로 나와서 서울로 철수시키려던 애플도어 기술진을
방어진으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 이튿날부터는 그들로 하여금 미포만 일대
의 지질과 기초 암반을 조사케 하는 한편 그는 해도를 구해다가 해안의 입
지 조건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물론 본사하고는 아무런 협의도 거치지 않은
그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회사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잘못될 경우의 책임 같은 것은
별로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다.
기초 암반만 튼튼하다면 해도상으로만 봐도 염포리 개펄보다는 산에 둘러
싸인 포구였기 때문에 바람도 적을 것 같았고, 외항이기 대문에 조선소의
해상 여건도 내항보다는 단연 나을 것 같았다. 지금 건설 중인 포항의 종합
제철소와의 거리도 염포리보다는 가깝고, 그리고 이쪽은 낮은 해안이므로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이 무한대라고 그는 판단했었다.
사흘 동안 계속된 조사 결과는 암반도 양호하고 토질도 좋다는 결론이었
다. 좋다는 결론이 내리자 그는 슬그머니 겁이 나기 시작했다. 올라가서 회
장한테 보고를 했다가 시키지 않은 짓을 왜 했느냐고 또 야단이나 맞지 않
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보고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회장실을 노크하고 들어가서 경과보고를 했다.
보고를 듣고 난 정 주영은 벌컥 화를 냈다.
"병신같이 그럼 그냥 올라오면 어떡해?"
"예?"
전 갑원은 어리둥절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