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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주성당
100년 신앙의 얼이 배인 정서깊은 고성당이며 현재 지방 문화재로 등록된 역사적인 건축물임
위치: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주 외 1동194
†성인 남종삼 (요한)묘
박해시대의 순교자 가운데 가장 높은
관직에 있던 성인
위치: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울대리 산 22-2
†순교자 황사영(알렉시오)묘
조선의 천주교 박해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위치: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가마골
행주성당 간판
행주성당 약사
1909년 약현성당(현 중림동) 에서분리
성당 신축 김원영 초대신부 부임
1922년 본당과 사제관 증축
1945년 일제의 외국신부 국외추방으로 인한
2년간 공백
1947년 행주본당으로 부활
1950년 6.25전쟁으로 공석
1956년 도시 집중화 현상으로 신자수가 1000여명으로 급감
1957년 수색동 205번지로 본당 이전
행주 본당은 공소로 변경
1981년 능곡 본당 설립으로 능곡 본당 행주구역으로 이전
1991년 두봉(레나도) 주교 안착
2004년 의정부 교구 행주 본당으로 부활
현재 공사중인 역사기념관.....고목사이로 성당이 보이는데
어수선한 분위기다..
성모님상........
현재 역사 기념관 공사중 임에 성당 입구 벽 모서리에 모셔져 있다
성당 전경 입구........... 미사준비중
성당 입구에 있는 종탑........... 미사 시작을 알리는 종을 치고 있다
성당 전경(옆) ...... 역사기념관 공사중..
십자가의 길 14처를 성당 벽에 기대어 놓았다
마치 먼길 쉬어가는 순례자들의 모습같다
성당 옆을 분주히 오가시는........ 노 자매님...
오랜 고성당에서 느낄수 있는 평화롭고 고즈넉한 분위기다..
성당 전경 (후) .......... 보기에는 예전에 살던 평범한
시골 여염집 모습 그대로다..
성당 사제관 , 사무실......
두봉주교님이 (전 안동 교구장) 이곳 조립식 가건물에서
13년간을 지내셨다는데, 비가오는 날이면 빗방울이
가건물에 떨어지는 소리에 잠못 이루셨고
현재 주임 신부님도 7년째 여기서 비오는 날이면
그 소리에 잠못 이루신다고 어느 노자매님이
살짝 알려 주신다.
성당 안 전경.......
1910년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어 인근 5개 군을 관활하던
남한에서 오래된 성당 중 하나이며 우리 교회의 초창기의
소박한 모습을 아직도 담고 있는 소중한 성당임
제대 앞...........명동 성당 개축할때 여기에 옮겨온
예수 그리스도 그림이 10여점이 걸려있다
성당 안 전경......앉는 의자가 인상적이다.
바닥에 앉아 미사드리면 더 편할 것 같은데.....?
여성 신자들만 따로 드나들었던 특별한 문....
건축초기에는 남녀 구분이 엄격하여 여성 신자들만 이용하였는데
지금도 나이 지긋한 노 자매님들은 이문으로만
다니신다고 한다.
청소년 미사 9시......제 1독서... 초등학교 저학년 형제가..
청소년 미사 9시.... 신부님 강론
청소년 미사 9시..... 영성체
청소년 미사 9시...영성체
성당 미사 드리고 성당 입구에서 잠시 하늘을 보다...
예쁜 구름 모여있는 청명한 하늘..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낄수 있었다
남종삼 요한 성인 가족 묘소가 있는 곳
(장흥면 울대리)로 순례 이동
10시 10분 출발
--> 송추역까지 대중교통 이용
송추역에서 길음동 본당 울대리 공원묘원)까지 도보순례 2.5km
남종삼 성인 가족묘소로 순례 이동중.....
길음동 본당 울대리 공원 묘원위에 걸려있는 뭉게구름
남종삼 성인의 시신은 수 많은 순교자들이 시신을 수습했던
증거자 박순집에 의해 수습되었고, 특히
갑곶성지에 봉안된 성인의 유해는 그뼈가
빨간 핏빛으로 물들어 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강화 갑곶성지...... 증거자 박순집 묘
남종삼 성인 가족묘소로 순례 이동중.....
우연이겠지만 산넘어 더 내려가면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가 있다
특히 황사영은 흔히 말하는 부귀영화가 약속된 길을 버리고
진리의 길을 갔고 남종삼 성인은 승지 벼슬까지
올랐던 분이 아닌가...
묘재성지...... 남종삼 성인의 유택
남종삼 성인 가족묘소로 순례 이동중...
남종삼 성인의 흔적을 찾아서 베론 성지 가까이에 있는 묘재 생가터를
찾는 발길은 많은데 성인의 묘소는 덜 알려진것 같다.
이제 부터라도 그분의 자취를 찾아 순교의 정신을
이어갈 발갈이 많아 졌으면 한다.
길음동 본당 묘원에 도착하다....... 남종삼 성인 묘역을 알리는 와비(臥碑)
남종삼 성인 묘역의 성역화 작업을 시작하고 그 첫번째 결실이
와비 설치였다. 묘원에는 와비 4기가 세워졌다
묘원 전경..... 묘원전체의 분위기가 밝고 단정한 천주교 신자의
참된 내면의 모습같다.
남종삼 성인 묘역 가는 길........ 묘원 맨위 끝에 성인가족의 묘가 있다
남종삼 성인은 (1817년 ~1866년) 박해시대의 순교자 가운데
가장높은 관직에 있던 신자였다.
벼슬이 지금의 차관급인 승지에 이르렀다
성인 묘역 하는 길...... 경사가 무척 가파르다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말살정책은 이 기간동안 처형된
순교자 만도 8천명 혹은 이만여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쇄국주의자의 만행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가슴이 아프다..
남종삼 성인 가족 묘소............ 아늑하고 평화로운 묘소
앞쪽에서 부터 남종삼 요한 성인
남상교 아우구스티노 (성인 부친)
남규희 프란치스코 (성인 아들)
남종삼 성인 가족묘소.....
박해는 남종삼 성인 한몸에 머물지 않았다 .
부친 남상교도 공주에서 순교하고 아들은 전주에서 순교,
아내 이소사와 차남 그리고 두딸은 경상도 창녕으로
유배되어 노비로 전략한다. 끝내 이소사도 순교한다.
3대에 걸쳐 네분이 맞은 순교의 영광이다
묘재성지
또한 성인의 막내아들 남규희( 프란치스코 ) 는 요절하고
아내 이씨마저 유복자 남상철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남상철의 세딸은 우리나라 최초의 세자매 수녀가 되었다
남종삼 성인 가족 묘소... 온마음을 다하여 묵주기도 5단을 봉헌하다
묵주기도 중 내내 흘러내린 땀은 오늘 여기계신
성인의 거룩한 순교정신을 본받고 부끄럽지 않은
신앙 선조의 후손이 되기 위한 실천이었으면...
남종삼 성인 묘....
성인으로 시성되었지만 묘비에는 여전히 '복자' 라고 새겨져 있다
" 주님을 믿는 것이 옳은 일 이기에 그렇게 했다"고
당당히 신앙고백을 하고 1866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 되셨다
성인 묘소에서 바라본 묘원 전경
여기계신 모든 형제자매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사람의 구원을 기뻐하시는 하느님 저희와 함께
주님을 섬기고 서로 사랑하며
구원의 길을 걸어온 저희 형제와
친척 친구와 은인을 위하여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오니
저희기도를 들으시고
이들이 주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아멘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 묘로 순례 이동
--> 다시 송추역까지 이동 -->
송추역에서 장흥리 부곡리로 순례 이동
(2.7km)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 입간판...
기록에 의하면 황사영은 헌헌장부로 수염이 아름다운 청년이라고 한다.
황사영의 이름은 조선팔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서울 장안에서는 황사영의 모습을 먼 빛으로
구경이라도 한번 하는것이
소원이었다고한다.
도로가 먼발치에서 황사영의 묘가 보인다....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누군가 서소문에서 치명한 시신을
황씨 일가가 있는 이곳으로 모시고 왔는데,
갑자기 묘가 생기면 의심할까봐 봉분을 못새우고
새카맣게 그을린돌 일곱개를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어
바닥에 깔아 놓았다고한다.
(교하 순교자 현양회 최성우 신부)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의 묘...
황사영은 명문대가 정약종을 스승으로 모시고 정약현의
맏딸 정난주와 혼인을 하는데, 이 혼배성사를
주문모 신부가 주례하였다
당대의 대 학자가 깊은 천주교 교리를 그빼어난
황사영에게 가르쳐 놨으니...
황사영은 영세 입교 하고부터는 모든걸 집어치우고
서울에 올라와 1797년에서 98년까지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고 다닌다
당시 최고 천제가 교리를 완벽하게 다 알고
분명하게 말하였으니 황사영의 설명을 듣고도
못알아듣는건 개 밖에 없다는말이
나오기도 했었다고 한다.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의 묘........
이때도 천주교 박해 중이었다. 다른사람이 이렇게 했으면
벌써 잡혀갔지만 황사영은 어무가 내려서
( 정조임금이 손목을 잡았음)
아무도 손을 못대었다.
그러니 황사영은 마음놓고 다니면서 2년동안
교리를 가르쳤던 것이다
묘비에 세례명이 잘못 세겨져 있다....
하루속히 고쳐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황사영은 깊이 숙고한 끝에
수염도 깍고 양반신분도 보장된 출세길도 버리고
신앙생활 하나를 지키기 위해 거지로 변장해서
충북 제천 베론으로 들어간다.
베론성지... 황사영 토굴........
여기서 황사영은 주문모 신부의 순교소식을 접한다.
황사영은 토굴속에서 중국 교회에 보내는 글을 쓴다
이게 그 유명한 "황사영 백서"이다
그글은 "죄인 토마스.... 등은 엎드려 눈물로 호소합니다"
하고 시작하여 당시 초기 한국 교회 삼십여명 순교자들이
생생한 순교사실을 기록한다.
그리고 박해 받고 있는 조선교회의 의로운 사정을 알리면서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그의 개인적인 생각
네가지를 적고 글을 맺는다
베론성지 황사영 토굴 내부.....
그해 10월 이 편지를 중국에 전하려고 옥천회가 동지사 편에
숨어 들어 가려다가 출발도 못한채
국경에서 체포되고 백서도 발각된다.
이에 그 백서에 서명한 황심이 잡히고 토굴속에 있던
황사영도 잡힌다. 그들은 미리 약속을 했던 것이다
"만약 잡히면 우리가 숨어있는 곳을 알려줘라
우리를 찾다가 딴 교우들까지 잡히면 큰일이다"
베론성지
황사영 순교 현양탑
황사영은 하느님을 바로 모시기 위해
스물일곱살 젊은 나이에 현세의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진리를 향해 두려움 없이 생애를 마쳤다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의 묘..... 온 마음으로 묵주기도 5단을봉헌하다
기도중 내내 주변에서 울리는 엠프 노래소리 ,고성방가
순교자께서 편히 쉴 장소가 안되있는 것이
신앙의 후손으로서 가슴아프고
안타까울 뿐이다..
(자료도움)
한수산: 순교자의 길을 따라
김길수:하늘로 가는 나그네
정진석: 너는 주초놓고 나는 세우고
달래: 천주교회사
오영환: 순교의 맥을 찾아서
알려드립니다.
의정부 교구에서는 은총의 성지순례 길을
매달 첫주 목요일에 시행하고 있습니다
접수 : 선착순 40명(버스 1대 이용)
지도신부: 최성우 신부 동행
순례비: 2만원
문의: 031-947-1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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