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기 위해 상구네 가족은 아예 서울에서 광주 대인시장 옥탑방으로 이사했습니다.
경북 예천이 고향인 아빠 김태일과 서울 출신 엄마 주로미, 그리고 홈스쿨링이 아닌 홈플레잉을 하고 있는 아들 상구,
이 세 사람이 여섯 달을 광주에서 지내면서 시장통 과일장수 할머니와 구두딱이 아저씨, 그리고 자장면집 사장,
5.18 묘역 입구에서 꽃집을 하고 있는 부상자 장애인 등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2 년 동안 편집하여 내놓은 영화입니다.
영화는 1980년 5월 도청을 지킨 시민군,계엄군 소대장,시민들에게 주먹밥을 날렀던 아주머니 등
우리 역사가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로 80년 광주 민주화 운동과 그들이 삶을 되돌아봅니다.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피흘리며 쓰러진 젊은이들을 보다못해 택시 기사들이 집단으로 택시를 몰고
금남로로 집결하여 불을 켜고 돌진한 결과, 마침내 공수부대가 물러나고 계엄군이 광주를 에워싸면서 광주는 철저히 고립됩니다.
종교인, 교수, 시민들이 모여서 자율적으로 치안을 하면서 놀랍게도 도둑이나 강도가 없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운영되지만,
고립된 광주는 군사독재인 전두환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 공영 방송에서 공산당 빨갱이 사주받은 폭도집단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후에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새롭게 인식되어 90년대 말에 각광을 받지만,
광주 5. 18은 세월에 묻혀 대다수 국민들 기억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정부에서 충분히 보상을 하였고, 광주는 이제 상처를 씻고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영화는 5.18 동지회 사이에서도 광주 도청 철거 문제로 서로 반목하는 불편한 현실도 그대로 보여줍니다.
민주화의 성전이었던 도청 건물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순수파와
이제 광주는 아시아 문화전당으로 거듭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는 미래파 사이에 넘지 못할 벽이 있습니다.
인터뷰 대상중 가장 마음이 아픈 건 그 당시 시민군들에게 주먹밥을 해서 날라주던 아줌마들입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마음속으로 학생들이 짠하여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쌀을 얻어서 주먹밥을 날랐습니다.
시민군 취사조로 참여했던 여고생 아줌마는 끝내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그 당시에 자신이 기록한 일기를 보여주면서
5월 26일 마지막 날, 여자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다시 도청으로 돌아간 대학생이었던 시민군을 기억하며,
그때 그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한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에 대해 눈물로 호소합니다.
그저 내 고장을 지키려는 그 젊은이들의 순수한 마음과 열정만큼은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고.
이름없이 스러져간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민주화가 되어 지금 이나마 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상구네 가족은 이 영화를 찍은 이유는 역사는 기록이며, 그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을 남기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당시 계엄군 소대장이었던 산돌 대안학교 이은재 교장은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고백하지만,
아직도 5.18 시민들에게 발포명령을 내렸던 책임자들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밝혀내지 못하고 묻혀 있습니다.
주모자들이 진실을 밝히지 않는데 그들을 용서해야 하는 답답함이 가슴속 깊이 지울 수 없는 응어리로 남아 있습니다.
5월 26일 전남 도청 건물을 사수하다가 붙잡힌 시민군 출신 아저씨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밤마다 악몽을 꾸면서,
30 년이 지난 지금도 그 트라우마를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자살하여 살아 남아있는 사람들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더구나 MB 정부 들어서서는 5.18 기념식에서 그당시 시민들이 불렀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지 못하게 금지하였습니다.
단순히 물질적 보상으로 끝났다고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적 치유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 영화는 간곡히 이야기합니다.
이 기록물로 잊혀져 가는 진실에 대한 우리의 무심함을 일깨우고, 아픔을 이고가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88년 전남대학교 5월 문학상을 수상한 당시 고흥 풍향 중학교 2학년이었던 박용주 학생의 목련이 진들이라는 詩로
동지들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살아남아서 가슴아픈 이들의 마음속에 꽃이 된,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목련이 진들
박 용 주
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피었다 지는 것이 목련뿐이랴
기쁨으로 피어나 눈물로 지는 것이
어디 목련뿐이랴
우리네 오월에는 목련보다
더 희고 정갈한 순백의 영혼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던 것을
해마다 오월은 다시 오고
겨우내 얼어붙었던 이 땅에 봄이 오면
소리없이 스러졌던 영혼들이
흰 빛 꽃잎이 되어
우리네 가슴 속에 또 하나의
목련을 피우는 것을
그것은
기쁨처럼 환한 아침을 열던
설렘의 꽃이 아니요
오월의 슬픈 함성으로
한닢 한닢 떨어져
우리들의 가슴에 아픔으로 피어나는
순결한 꽃인 것을
눈부신 흰 빛으로 다시 피어
살아있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마냥 푸른 하늘도 눈물짓는 우리들 오월의 꽃이
아직도 애처러운 눈빛을 하는데
한낱 목련이 진들
무에 그리 슬프랴
- 그동안 시대의 아픔과 사람들의 상처에 무심하여 부끄러운 사람이
첫댓글 참, 당시 중학생이던 저 박용주 학생은 1988년 <바람찬 날에 꽃이여, 꽃이여> 시집으로 전남대학교 주최 5월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절필을 선언했다고 합니다. 이후 성균관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수학 중이라고 합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세상의 아픔을 겪은 천재적인 소년이 이후 산 날들이 만만치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