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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두륜산 '대흥사'
대흥사는 지난해 가을, 두륜산 산행후에 들렸던곳이라 머리속에 훤하게 남아있어서 그다지 시간을 더 투자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흥사를 간 이유는, 산행 하산을 두륜산 진불암 방향으로 하산을 하여 그땐 미처 들러보지 못한 일지암, 북미륵암을 가기 위함이다. 그리고 미황사 부도전을 꼭 가보고싶었다.
매표소에서 본 두륜산 대흥사 일주문.
동백꽃을 볼려나... 기대를 좀 하고 왔지만...
동백나무에 매달린 꽃은 아직 망울이더라.
대흥사 가는 길목에 있는 설향다원을 지나고,
400년 된 여관, 1박2일에서 알려지면서 유명해진 '유선관'을 또 지나고...
피안교를 지나...
대흥사에 도착한다.
큰 사찰임을 말해주는듯 근엄하게 세워져있는 대흥사 부도탑 비 들을 지나...
반야교를 지나...
대흥사 해탈문으로 들어간다.
대흥사(大興寺)는 우리 국토의 최남단에 위치한 두륜산(頭崙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22교구의 본사이다. 현재 해남ㆍ목포ㆍ영암ㆍ무안ㆍ신안ㆍ진도ㆍ강진ㆍ광주 등 8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하며, 서ㆍ남해 지역 사찰을 주도하고 있다.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에 원래 사찰명은 대둔사(大芚寺)였으나, 근대 초기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동안 흐트러지지 않을 땅(萬年不毁之基)”이라 하여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토록 한 도량이기도 하다. 이후 대흥사는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즉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13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조선중기 이후 수많은 선승(禪僧)과 교학승(敎學僧)을 배출하면서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으로 성장한 대흥사는 대표적인 호국도량의 위상도 간직하고 있다. 현재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표충사(表忠祠)는 서산대사의 구국정신을 기려 국가에서 건립한 호국도량의 한 표상인 것이다.
그리고 13 대종사 가운데 한 분인 초의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문화(茶文化)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대흥사 경내.
천불전 천불(千佛) 조성 설화
완호(玩虎) 대사는 초의선사의 스승이었는데, 1813년(순조 13)에 천불전을 중건한 뒤 경주의 옥석(玉石)으로 천불을 조각하게 했다. 열 명의 조각사가 6년에 걸쳐 천불을 완성하자, 모두 3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울산과 부산 앞바다를 지나 해남 대흥사를 향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한 척의 배가 울산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일본 장기현(長岐縣)까지 밀려가게 되었다.
바닷가에서 배를 발견한 일본인들은 그 속에서 300여 개의 옥불(玉佛)을 발견하고, 서둘러 이를 봉안할 절을 짓기로 의논하였다. 그러나 어느날 밤 이 불상들이 그들의 꿈에 나타나 “우리는 조선국 해남 대둔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해서는 안 된다”고 현몽하자, 하는 수 없이 해남으로 돌려보내면서 불상 밑바닥에 모두 ‘日’자를 새겨 보냈다고 한다.
천불전에 봉안된 옥불상은 근래에도 그 영험함을 보인 바 있다. 인근지역 신도들이 꿈속에 불상들이 나타나 “가사를 입혀 달라”는 현몽을 여럿이서 꾸게 되었는데, 그 뒤부터 4년마다 한번씩 가사를 갈아입히고 있다. 따라서 이때 갈아입은 헌 가사를 지니고 있으면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다는 속설도 함께 전하고 있다.
대흥사는 간단히 둘러보고 같이 간 일행들을 뒤로한채 홀로 서둘러 일지암을 향해 간다.
일지암(一枝庵)
한국의 차 성, 초의스님의 자취를 찾아서...
일지암은 대흥사에서 700m 가량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선승 가운데 한 사람이자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초의선사(草衣禪師)가 그의 "다선일여(茶禪一如)" 사상을 생활화하기 위해 꾸민 다원인 일지암이 나온다.
일지암 풍경들.
일지암이다.
대웅전에서 바라다 본 풍경.
"일지암" 편액이 붙어 있는 정자.
초의선사는 39세 때인 1824년(순조 24)에 일지암을 중건하였는데, 1866년(고종 3) 81세로 입적할 때까지 40여 년간 이곳에서 독처지관을 한 유서 깊은 암자이다. 선사는 이곳에서 그 유명한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펴냈고, 다선일여의 가풍을 드날리며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의 석학ㆍ예인들과 교류하며 쇠퇴해가는 차문화의 중흥을 도모해 왔으므로 이 일지암은 한국차의 성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이곳에는 옛 정취가 그대로 살아 숨쉬는 차나무가 정자 앞에 심어져 있고 선다(禪茶)를 음미했던 다정(茶亭)이 있으며, 집 뒤의 바위 틈새에서 솟아나오는 물이 나무 대롱에 연결된 수조에 머물다가 졸졸졸 흘러내리고 있다. 이 다천(茶泉)과 석수조(石水槽)를 비롯하여 차를 끓이던 다조, 위아래의 연못, 좌선석등 등은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일지암의 본당인 초의다합(草衣茶盒)은 윗쪽의 연못에 평석을 쌓아올린 4개의 돌기둥이 누마루를 받게 하여 독특한 운치를 자아내는 부속채 건물로서, 규모는 누마루 포함해서 3칸이며 형태는 방과 부엌을 "ㄱ"자로 꺾어 세운 기와집이다. 초정과 연못 사이에 축조된 석축에는 "茶感"이라 새겨진 평평한 면이 끼여 있고 그 앞에는 이보다 넓은 판석이 하나 놓여 있는데, 이 돌은 차를 마시며 선을 하던 좌선석(坐禪石)으로 보기도 한다.
"일지암" 편액이 붙어 있는 정자는 1980년 한국다인회 회원들이 다도의 중흥조 초의가 기거했던 일지암을 기념하기 위해 복원한 것이다. 이 초정은 가운데에 방 한 칸을 두고 사면에 툇마루를 두른 4평 규모의 띠집이다.
한국의 차 성, 초의스님의 자취를 찾아서!
달은 밝았다.
스님을 찾아온 벗들과 차를 나누던 다정(茶亭)에 달그림자가 깃들었다.
초당 뒤 유천에서는 소리없이 샘물이 흘러넘치고 무성한 야생차나무들엔 정적만이 감돌았다. 가부좌하고 앉은 초의스님의 얼굴에서 광명이 소리없이 빛났다.
뜬구름과 같은 속세의 양변을 여읜 채 청빈과 소박함으로 살아온 초의스님이
80년의 생애를 다하고 입적하는 순간이었다. 초의와 함께 한 달그림자도, 유천수도, 무성한 야생차나무도
스님의 깨달음처럼 더함도 덜함도 없이 그저 그렇게 거기에 함께 했다. 1866년이었다.
초의스님은 39세 되던 해에 두륜산 대흥사 동쪽계곡의 유천샘터옆에 초가집을 짓고
'뱁새는 항상 한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뭇가지끝에 있어도 늘 편안하다’라는
한산(寒山)의 시에서 일지를 따서 일지암으로 이름하였다.
초의스님은 40여년동안 홀로 불이선(不二禪)의 깊은 진리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곤 하였다.
차와 함께 청빈한 수행정진으로 인해 초의스님은 차성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초의스님의 사상은 선(禪)사상과 다선일여(茶禪一如)사상으로 집약되는데
이는 ‘차의 티없는 정기를 마시며 큰 도를 얻는다’는 뜻이다.
초의스님은 차의 달인일뿐만 아니라 선,교,율을 겸비한 당대의 선지식이었으며
시,서,화,음악까지 겸비한 풍류인이자 예술가였다.
스님에게는 차와 선과 시가 다르지 않은 하나였다.
이는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등과의 폭넓은 교류를 통해 그 깊이를 더하였다.
당시 동갑내기였던 추사 김정희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두사람은 서화취미가 같고 차를 지극히 사랑하였다.
초의스님은 매년 햇차를 만들어 추사에게 보내고
추사는 답례로 그의 글을 보내 서로의 깊은 정신세계를 나누었다.
또한 초의스님은 24세 위였던 다산 정약용과 각별히 교류하여 실사구시를 익히면서
구시대가 이미 종말을 고하고 있음과 또다른 시대가 오고있음을 예지한 선각자였다.
초의스님은 한국의 다경(茶經)이라 칭해지는 ‘동다송’을 저술하여 차를 예찬하고
널리 그 가르침을 전하였으며 그속에서 실학정신을 구현하려 하였다.
뿌리깊었던 중국의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우리것이 더 우수하다는 것,
우리의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영원히 우리민족이 살길임을
‘동다(東茶)’에서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일지암을 떠나 북미륵암 마애불을 만나러 간다.
지겹지 않은 북미륵암 가는길.
간간히 바위구간도 지나면서...
북미륵암 해우소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북미륵암.
북미륵암에서 내려다본 대흥사 경내 클로즈업.
마애여래좌상을 모신 용화전.
너무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 마애여래...
입이 벌어져서 다물어지질 않는다.
북미륵암(北彌勒庵)ㆍ남미륵암(南彌勒庵)
두륜산 노승봉 아래에는 마애미륵불이 조성되어 있는 북미륵암과 남미륵암이 있다. 하나는 북쪽에 있다하여 북미륵, 다른 하나는 남쪽에 있다하여 남미륵이라 부른다.
이 두 암자는 창건에 관한 기록이 없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대둔사지」에는 1754년에 온곡영탁(溫谷永鐸) 대사가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서는 북미륵암이 북암으로 불려졌음을 알 수 있으며, 근세에 연담유일(蓮潭有一)ㆍ벽담행인(碧潭幸仁)ㆍ아암혜장(兒庵惠藏) 같은 고승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북미륵암은 용화전과 요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용화전은 마애여래좌상을 봉안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이곳에 신중탱화ㆍ산신탱화 및 1987년에 조성한 범종 등이 모셔져 있다.
남미륵암에 대해서는 「대둔사지」에서 “두륜봉 아래 남미륵암에 있는 미륵불은 전실(前室)이 없어 이끼가 끼어 있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도 남미륵은 전실 없이 밖으로 노출되어 있어 바위 틈새로 난 이끼를 볼 수 있다.
북미륵이 볼록하게 도드라져 올라온 양각의 조각수법임에 비해 남미륵은 평평한 곳에 선을 이용해 그린 음각의 조각형식을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두 미륵은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조성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구전에 의하면 음각의 남미륵은 남자가 조성했고 양각의 북미륵은 여자가 조성했다고 하며, 이들은 모두 제석천이 하강하여 남북에 각각 조성한 것으로 음양각(陰陽刻)으로 한 것은 음양의 조화를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에 하늘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천동과 천녀가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다시 하늘에 다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하루 만에 바위에다 불상을 조각해야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하루 만에 불상을 조각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해가 지지 못하도록 천년수 나무에다 해를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천동은 남쪽 바위에다 입상의 불상을 조각하고 천녀는 북쪽 바위에 좌상의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천녀는 앉아있는 좌상의 불상을 조각했기 때문에 서있는 입상의 불상을 조각하는 천동보다 먼저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조각을 마친 천녀는 먼저 하늘에 올라가고 싶은 욕심이 생겨 그만 해를 매달아 놓은 끈을 잘라 버리고 말았다. 해가 지자 천동은 더 이상 불상을 조각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하늘에도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이러한 전설 때문인지 북미륵은 완성되어 현재 보물 제48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남미륵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채 암자 터에는 초라한 전각만 남아 있다.
이곳 북미륵암에는 마애불이 있는 곳에서 약 30m 오른쪽에 고려초기의 석탑인 북미륵암 삼층석탑이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의 전형을 따랐지만 각 부재의 짜임방식이나 간략한 양식 등이 고려시대 석탑으로 이행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석탑은 현재 보물 제301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시대 초기라 하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탑 끝부분이 정감이 가는 비교적 마음에 편안하게 다가오는 모습의 탑이었다.
북미륵암을 떠나기전 여운이 남아 살짝 다시 용화전 문을 열고 마애여래좌상을 향해 아쉬운 이별을 고하면서
북미륵암을 내려간다.
다시 대흥사로 내려왔다.
대흥사 대웅전에서 본 모습.
대흥사 경내.
대흥사 입구에는 새로 만든 서산대사의 이런 싯귀가 있다.
달마산 미황사 가는 길...
미황사는 대흥사보다 같은 남도지방이지만 좀 더 따뜻한가보다.
동백꽃이 쪼~금 더 붉은색을 보여준다. 예뻐라......^^
달마산 미황사.
땅끝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미황사는 우리나라 최남단에 있다는 것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사찰이다. 그리하여 미황사는 바다와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창건이야기, 중창이야기를 비롯 경내의 성보에도 바다 냄새가 가득한 사찰이다.
미황사의 바다는 부처님 세계이며, 부처님 나라로 가는 길이다. 땅끝은 중생들에게는 삶의 종착역이지만, 수행자들에게는 또 다른 시작이다. 부처님나라 서방극락정토로 항해하는 배에 승선하는 항구이다. 그래서 미황사는 새로운 시작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수행공간이다.
병풍처럼 둘러쌓여있는 달마산을 뒤로 미황사 대웅전 모습.
"미황사사적비"에 의하면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때 인도 국왕이 한 척의 배에다 법화경과 화엄경, 비로자나 및 여러 불상과 불화를 가득 실고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獅子浦口)에 들어와 이를 의조(義照) 스님이 옮겨 봉안하게 되면서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이야기를 살펴보면 미황사의 불법은 부처님 나라에서 직접 전해 받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깨달음을 이룬 선지식인들이 부처님 나라로 가는 길이 바로 미황사라고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부처님 나라로 항해하는 배에 승선하기 위한 중생들의 발원과 수행의 흔적이 미황사 곳곳에 남아있다. 대웅보전 4개의 초석을 살펴보면... 게와 거북이, 자라들이 바다 속에서 노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또한 깨달음을 증득하고 적멸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계신 부도전의 세계에는 선지식들이 성취한 깨달음의 세계마다 거북이 자라 가재 게 등 바다 물고기와 노루 토끼 다람쥐 새 사자 말 같은 동물 그리고 연꽃과 화초들이 장엄하고 있으며, 용은 깨달음의 세계를 호위하고 있다.
미황사는 끝과 시작을 함께 공유한 시간적 공간이다. 수행의 시간을 통해 불법의 진리를 깨달으며 부처님 나라로 항해하는 배를 탈 수 있는 공간을 부여받게 되는 도량이다.
1692년(숙종 18)에 건립된 <미황사사적비(美黃寺事迹碑)>에 기록된 창건 연기 설화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 8년(749)에 사찰이 창건되었다고 하니 천년고찰(千年古刹)이라 할 수 있는 매우 유서 깊은 사찰이다.
또한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수려한 달마산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사찰이다.
저어기 앞에 미황사 부도전 가는길...
미황사에 오면 꼭 빼먹지 말고 들러야할곳이있다.
미황사 부도전이다.
학인지, 몰오리인지... 공작같아 보이기도 하다...
맨 뒷줄 중앙쯤에 있으니... 젤로 오래되고 높은 부도탑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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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도량 감사합니다 ()
예전에 몇번 갔었는데 다시 보아도 좋습니다 _()_
너무 좋네요^^
고맙습니다.. 감사히 잘보구 모셔갑니다 ^^
자세한 설명까지...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