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 역사공원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웅어))
행주산성 역사공원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표지
행주산성 역사공원은 행주산성아래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산성로 93-38
(행주외동 145 )일대 강변을 따라
3만3천평방미터에 행호관어도를 복원조성한 공원이다.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가 눈에 들어 온다.
알림판에 의하면
행주산성 앞의 한 강을
조선시대에는 행호(杏湖)라부르기도 하였다.
이곳을 행호라 한 것은
행주산성 인근으로 창릉천이 들어오면서
강폭이 넓어지고 물살이 약해
마치 호수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741년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이
양천현감으로 있으면서 그린그림이"행호관어도"이다.
이 그림은 당시의 행주나루 인근에서
작은 배를 이용하여 고기잡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옛부터 행주는 웅어로 유명하였는데
이 그림에서
어부들은 웅어잡이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행호관어도" 그림에서는 행주나루 뒤편의
덕양산, 고봉산, 견달산, 심학( 악)산 등도 보인다.
당대 최고의 화가
겸재 정선(鄭敾:1676~1759)이
양천 현령에 제수된 것은
영조 16년(1740년) 겨울 그의 나이 65세였다.
정선은 궁산(가양동)의 소악루에 자주 올랐다.
궁산은 한강변의 절승을 조망하고
사생하기에 더 없이 좋은 장소였다.
여기에서 소악후월,
목멱조돈, 행호관어도,안현석봉등
한강변의 아름다운 진수산경들을 낳았다.
겸재 정선의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
겸재 정선의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
행호관어도는
정선의 33점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중 하나이다.
경교 명승첩은 겸재 정선이 이병연과 정선이
약속한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시와 그림을
맞바꾸며 감상함)에 의해 양수리 근교에서
행주산성에 이르는
서울 주변의 풍경을 그린 대표적인 진경산수화첩이다.
1권으로 되어 있었으나 1802년 2권으로 개첩되었으며
상첩에는 정선이
양천 현령으로 재임하던 1740~41년에,
하첩은 이보다 10여 년 뒤에 그린 그림들이다.
상첩은 양천팔경을 비롯,
한강과 남한강변의 19폭의 그림이 들어있다.
하권은 타계한 이병연을 회상하며
그로부터 받아두었던 시찰을
화제로 한 서울 주변의 14폭의 그림들이 들어있다.
春晩河腹羹,
夏初葦魚膾,
桃花作漲來,
網逸杏湖外.
늦봄이니 복어국이요,
초여름이니 웅어회라.
복사꽃 가득 떠내려 오면,
행주 앞강에는 그물 치기 바쁘다
행호관어도의 이병연의 제시이다.
고양사람들은 한강을 행호라고 불렀다.
한강물이 행주산성의
덕양산 앞에 이르러 강폭이 넓어져
강이 마치 호수와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덕양산 자락에는 경치가 좋아
서울 세도가들의 별서들이 즐비했다.
또한 행호(杏湖)는
서해의 조수와 한강 민물이 만나는
기수역으로 많은 어류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아름다운 행주 별서 지대
아래에서 어부들의 고기잡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음력 4월 말이면
행주나루는 온통 웅어잡이 배로 가득했다.
이병연의 시가
당시의 풍광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1741년 어느 맑은 초여름 겸재는 소악루에 올랐다.
멀리 덕양산 자락
행주나루에 웅어 잡이가 한창이었다.
우측에 북악산,
삼각산, 견달산을, 좌측에는 고봉산을 앉혔다.
멀리 파주 교하의
심학산, 개성의 송악산까지 처리했다.
한강 중간 중간에 모래섬들도 그려넣었다.
2,3명이 탄 14척의 돛대 없는
웅어잡이 배를 그렸고 한강 넘어
행주나루엔
초가집, 기와집, 산위에는 정자도 앉혔다.
소나무, 기암절벽, 버드나무,
행주산성, 덕양산 기슭도 배치해놓았다.
고양땅의 산수실경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행어관어도는
이병연의 제시와 함게 이렇게 해서 완성되었다.
웅어는 고양지역의 진상품으로
맛이 뛰어나 임금의 수라상에 오른 물고기였다.
조선말기에는 아예
행주에 위어소를 두어 왕가에 진상하였다고 한다.
웅어는 갈대 속에서 많이 자라
갈대 ‘위(葦)’자를 써서
위어(葦魚, 갈대고기)라고도 하며
지역에 따라 ‘우여’, ‘우어’, ‘웅에’라도도 부른다.
이제는 초여름 행주나루를 가득 메웠던,
지난날의 웅어잡이 고깃배들은 사라졌다.
행호를 바라보며
붓을 잡았던 겸재의 그림만이 남아
옛 한강의 웅어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다.
고양시는 덕양구 행주외동
한강변에 겸재 정선의 「행호관어도」를
토대로 300여년 전의 행주마을을 재현해 놓았다.
행주산성 역사공원으로
행호관어도가 새롭게 탄생되었다.
이렇게 예술은
지난날의 향수만이 아닌
현재와 미래의 나침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하지 않았는가.
웅어

생각해보면
웅어만큼 팔자가 기구한 생선도 없다.
조선 시대에는
임금에게 진상될 정도로 귀한 신분이었는데
지금은 세상에 그 이름을
아는 사람조차 드문 형편이 되었으니 말이다.
청어목 멸치과에 속하는 웅어는
양식이 힘든 회유성 물고기로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기수역(汽水域)에서
많이 잡히는데 늦은 봄에 그 맛이 절정에 달한다.
바다에서 살다가 음력 4월 무렵
강으로 올라와 갈대밭에 산란하고
그곳에 한동안 머무르기 때문에
갈대 위(葦)자를 써서 위어라고도 하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우어, 우여 또는 웅에라고도 부른다.
자산어보는 웅어를
드문 글자인 ‘웅어 도’ 자를
써서 ‘도어’라고도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의 모습도 가늘고 길게 생긴데다
빛깔까지 은백색이어서 칼과 흡사하게 생겼다.
본초강목은
웅어를 제어, 열어, 멸도등으로 기록하고 있고
다른 문헌에는 망어(望魚) 등의 호칭도 보인다.
조선 시대에는 궁중의 음식 관련
업무를 맡아보던 사옹원(司饔院)의
분장(分掌)으로 위어소(葦漁所)를
고양에 설치하여 임금이 드실 웅어를
전담해서 잡았을 정도로 성가가 높은 생선이었다.
일찍이 정약전도 웅어의 맛을
“극히 감미로워서 횟감으로는 상등품”이라고
치켜세운 바 있지만
이즈음에 나는 웅어는
살에 기름이 올라 엇구수하면서도
들부드레한 것이 참으로 예사롭지 않은 맛이난다.
웅어는 회로 먹어도 맛이 좋지만
구이나 매운탕, 회덮밥을 해먹어도
맛이 뛰어나며 완자를 만들어 먹어도 좋다.
웅어젓갈은 옛날 궁궐에서도
필히 담가 먹었을 정도로 맛이 별스럽게 좋다.
월탄 박종화도 “5월 단오 때,
행주강으로 나가서 행주산성을 바라보면서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선유를 하면서 웅어회를 먹는맛은 기막히게 좋다.
웅어는 회로만 먹을 것이 아니라
칼날같이 푸르고 흰 웅어를 두름으로 낚아서
집으로 가지고 돌아온 후에 주부한테 주어
난도질을 쳐서 동글동글 단자를 만든 후에
고추장을 물에 타서 끓여 놓고 상추쌈을 해서
먹으면 천하일품의 진미”라고 극찬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행주에서 웅어가 잡히지 않는다.
1980년대에 한강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설치된 신곡수중보로 인해 물길이 막혔고,
강변의 개발로
웅어의 산란 장소인 갈대숲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정은 지방의 웅어 산지였던
금강 하구의 강경포구나
영산강 하구의 구진포도 비슷하다.
1980~1990년대에 만들어진 하굿둑이
물의 교류를 막아 둑 안에 갇힌 물이
민물로 바뀌면서 웅어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예로부터 웅어는 임금이 사는 곳을
그리워한다는 전설이 있지만 요즘의 웅어는
수라상에 오르던 옛 시절을 더욱 그리워할 것 같다.
지금도 고양시 능곡역앞에 있는
행주장어웅어(031-974-2052)나
자유로민물장어(031-971-0418)와
행주산성주변의
많은 음식점등에 가면 웅어를 맛볼 수는 있다.
그러나 옛날
행주나루에서 즐기던 풍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첫댓글 내일 이곳에 가서 꼭 먹어봐야겠어요,
행주산성 가깝고 좋아서
자주가는편인데
여기는 몰랐네요,
어는쪽에 있을까요?ㅎ
늘 방긋님 반갑습니다.
능곡역에 내려 광장에서 오른쪽으로보면 행주장어웅어는 1분 자유로민물장어는 5분이내 거리에 있습니다.
물론 행주산성에 가도 주변음식점에도 많이 있습니다. 맛나게 드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