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Whitney Houston(휘트니 휴스턴)
“I'm gonna go see Jesus"
"나는 가서 예수님을 볼꺼야.“
휴스턴이 죽기 얼마 전 친구들 만나면 위와 같은 말을 자주 하였답니다. 자기의 죽음을 예견이나 한 듯 저런 말을 하고 갔습니다.
휴스턴(1963 - 2012)는 미국의 가수, 모델, 영화배우였습니다. 2009년 기네스 북은 그녀가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상을 많이 탄 여가수였다고 했습니다. 음반 판매량이 2억장을 넘었습니다. 휴스턴은 7년 연속 빌보드 챠트 1위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1985년 영화 보디가드에서는 주연으로 출연합니다. 그 영화의 주제곡 “I will always love you(나는 당신을 언제나 사랑할태요)”는 음악 역사상 여가수가 부른 노래로는 가장 많이 판매되었고 그래미상을 획득했습니다. 뉴욕 타임즈은 ‘가장 흥분되는 새로운 재능의 목소리‘라고 격찬 했습니다.
휴스턴은 뉴저지주 뉴왁의 증산 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군연예대에 다니는 아버지와 복음 찬송가 가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그의 오빠도 가수였습니다. 대모인 아레사 프랑클린은 유명한 쏘울 가수였습니다. 휴스턴은 이런 음악이 넘치는 분위기에서 자랐습니다. 그녀는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네델란드계 백인 피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녀는 11살 때 교회 성가대에서 독창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니던 교회에서 피아노도 배웠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녀는 나이트 클럽을 순회하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1980년 대 초 그녀가 어머니와 함께 카네기홀에서 노래하는 것을 본 어느 사진작가가 발탁하여 패션모델이 됩니다. 그녀는 이웃집 처녀 같은 수수하고 다정한 모습의 얼굴로 하여 많은 잡지의 모델이 됩니다. 모델 생활을 하면서 가수의 길을 개척하는데도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Memories(추억들)’이란 노래를 불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몇 곳에서 취입 제의가 들어왔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녀가 고등학교 졸업 전에는 안 된다고 하여 무산되기도 했습니다. 1985년 2월 그녀의 첫 앨범 ‘Whitney Houston'이 발매되었습니다. 그 이후 그녀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의 디바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1986년 그녀는 그래미상을 수상합니다. 그녀는 모델을 할 때부터 남아공 넬슨 만델라를지지 했고 남아공의 인종차별을 반대했습니다.
런던 공연차 갔다가 당시 투옥되었던 만델라의 70회 생신공연을 다른 가수들과 함께 런던의 웸블던 경기장에서 하였는데 72,000명의 팬이 운집했다고 합니다.
1989년 에는 The Whitney Houston Foundation(휘트니 휴스턴 기금)을 만들어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습니다.
1992년 8월 그녀는 R&B(Rhythm and Blues)가수 보비 브라운과 결혼합니다. 1993년 딸을 낳습니다. 1994년에는 3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합니다. 1995년 이후에 그녀는 여러 영화에 출현했는데 영화도 노래처럼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한편 그녀의 남편은 가끔 법정에 서기도하고 징역을 살기도 합니다.
1992년 케빈 코스트너와 공연한 ‘보디가드’도 공전의 히트였습니다. USA Today신문은 2006년에 평하길 ‘보디가드’는 과거 25년 동안 상연된 영화중 가장 우수한 25개 영화 중 하나이라고 했습니다. 1996년 그녀는 코미디 영화 ‘목사의 아내’에 출연했는데 출연료가 자그만치 천만 달러였답니다. 그녀는 노래하고 영화에 출연하며 부와 인기를 함께 누렸습니다, 1980년대와 1990년 대 초 까지 수수하고 사람 좋던 휴스턴은 1990년대 후반부터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인터뷰하고 연습하는데 한 시간 이상 지각하고 계획했던 음악회도 TV 쇼 출연도 일방적으로 취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마약을 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소문은 사실로 들어났습니다. 이들 부부가 하와이 공항에서 대마초를 짐 속에 숨긴 것이 들킨 것입니다. 그녀는 아카데미 시상에도 초청받지 못하고 어느 모임에 초청받아 노래를 하는데 예정에 없는 노래를 하여 주최 측을 당황하게 했습니다.
2001년 그녀는 음악 역사상 가장 큰 1억 달러짜리 계약을 하는데 6개의 앨범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2007년에는 남편과 이혼합니다.
2009년에 그녀는 7년 만에 처음으로 오프라 윈프리 쇼에 나갑니다. 이 인터뷰에서 그녀는 전 남편과 마약을 복용했노라고 실토합니다. 2009년 그녀는 해외공연을 기획하고 여러나라를 다녔으나 그녀의 공연은 참패로 끝났습니다. 관중을 사로잡던 시원한 목소리는 간 곳이 없고 탁하고 상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많은 관중이 공연 중에 현장을 떠났습니다.
2012년 2월 11일 휴스턴은 LA의 베벌리 힐튼 호텔방에서 욕조에 얼굴을 담근 채
죽은 것으로 발견 됩니다. 검시관이 내린 결론은 ‘코카인 복용과 심장병’이 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막대한 재산을 외동딸에게 상속한다고 미리 유언장을 써 두었습니다.
그렇게 시원한 기교파 가수를 또다시 보기는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2015년 7월 26일 휴스턴의 외동 딸 Bobby Christina Brown 23세의 젊은 나이에 죽습니다.
이해 2월 욕조에 잠긴 채 실신했는데 자기 엄마 휘트니처럼 수면제 과다 복용이었답니다.
엄마를 닮아 노래 며 연기 다재다능한 젊은이가 세상을 떴습니다,
그녀는 부모의 마약, 파파라치 준동, 집안의 폭력사태 등으로 우울했습니다.
어머니가 별세(2012)한 후로는 한 때 정신병원에 입원했는데 “슬픔을 가눌 수 없는”증상으로 입원했다고 합니다. 휘트니가 딸에게 남긴 상속재산은 휘트니의 모든 부동산, 보석류, 자동차, 개인 소유품, 가구류. 또 그 유언장은 부라운이 30이 될 때 까지 할부로 일정금을 지지급하고 30이 지나면 일억천 오백만 달러의 부동산을 지급받는 것이었읍니다
지금 그녀의 재산은 남편과 아버지가 다툼을 벌리고 있다고 합니다.
근자에 그녀의 남편이 그녀을 죽였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습니다.
휘트니도 그렇고 그의 딸도 너무 세속적인 일(돈, 명예,권력)에 집착하다
제명을 다 하지 못 했습니다. 얼마나 하루하루 삶이 긴장되었으면 마약을 복용하고
세상을 잊는 노력을 계속했을까요?
첫댓글 내가 할 줄을 몰라 저 좋은 곡을 못 올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