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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말씀으로 거듭나야 한다 |
들어가는 말
제18대 대통령선거 국면을 당하여 후보들은 저마다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세운다. 후보들은 어떻게 경제민주화를 기획하고 실행하려는지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해야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을 수 있다. 한편 유권자들은 경제민주화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표를 제대로 행사할 수 있다. 유권자들의 올바른 판단을 위해 정확한 인문학의 정보를 제공하려고 여러 시민단체들이 힘쓰고 있다. 모두가 잘 사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려면 대안사회에 대한 청사진이 있어야 한다. 대선국면은 온 국민이 대안사회를 향한 인문학의 교양을 한층 더 풍부하게 갖출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대통령 후보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공약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인물됨도 중요한 쟁점이 된다. 대안사회를 만들려면 대안사회에 걸맞은 대안사람이 있어야 한다. 후보자가 대안사회에 알맞은 성품을 갖추었는지 검증하는 과정도 이어진다. 대안사회를 추동할 지도자의 성품이 독단적이냐 아니면 소통의 마당에 익숙한 사람이냐를 가늠하는 것도 올바른 선택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선택의 주체인 유권자의 성품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미래의 경제민주화는 주민이 직접 모임을 만들어 지역사회의 기초적 공동체를 기반으로 이루어질 전망이다. 자기네 사회의 문제를 주민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천하는 공동체가 경제민주화의 핵으로 제시된다. 그렇다면 공동체를 만들고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주민들의 공동체가 있어야 할 것이고, 그 공동체에 합당한 성품을 주민들이 함양하고 있어야 한다.
대선국면을 당하여 제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살펴보면서 교회가 어떠한 입장을 취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일은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교회의 실천을 위해서 성서에 묻는 과정은 당연한 수순이다.
I. 대안사회를 향한 성서의 과제
성서는 도성과 국가의 성립을 죄의 결과로 간주하기 때문에(창 4:17; 10:10; 삼상 8:20), 교회는 도성의 죄성을 극복하려는 모든 노력에 참여해야 한다. 악한 도성의 생활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의 농촌공동체운동에도 교회는 주목하게 된다. 우리사회에서 협동생활을 영위하는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공동체가 가능하다면 그 공동체들의 네트워크를 어떻게 짜낼 것인가, 커다란 국가 단위가 아니라 자잘한 마을 단위의 조밀한 관계망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등의 쟁점들이 모두 성서의 쟁점들이다.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할 쟁점들이 선거공약으로는 또렷히 나오지 않고 있다. 작은 지역 단위에서 이해당사자인 주민들이 긴밀한 관계망을 형성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소통의 통로를 만들고 또한 인터넷마당 같은 소통의 장도 한껏 확장해야 한다. 온 국민이 저마다 살기 좋은 도시와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어 가고자하는 열망으로 한껏 부풀었을 때, 대통령은 이 운동을 적극 지원하고 활발히 참여하여 국민과 긴밀히 소통하면서 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과거의 새마을운동은 정부주도형으로 이루어진 국민계몽을 위한 관변운동이었다. 경제개발계획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새마을에는 주민들이 대부분 대도시로 이주하고 말았다. 수출주도형 산업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농민들은 땅을 잃고 토지를 떠나 도시의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토지를 잃은 사람들의 생계수단은 자신의 노동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도시노동자들은 화이트칼러나 블루칼러나 모두가 자신의 노동력에 의지하는 사회계약자이다. 건강과 부동산과 동산의 무게가 어느 시대보다 더욱 심각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고 삶의 의미를 가늠하는 것이 물질에 달려 있게 되었다. 경제성장을 이룩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물질문명의 대도시에서 불편함을 느낀다. 좀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대안을 모두가 찾고 있다. 농업주도형의 사회로 돌아가자는 대안도 있으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농업사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중론이다.
성서는 대안사회를 궁구하는 책이다. 문제의 핵심을 찾아내야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문제는 왕국의 건설에 있다. 성서는 애초에 국가를 건국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애석해 한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가 멸문지화를 당한 것은 히브리인들이 국가를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성서는 일깨운다. 문제는 일찍이 사사시대에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사사들이 이끄는 지역공동체는 허약하기 이를 데 없어 보였다. 이방의 국가들이 수시로 침략해 왔을 때 점령당하는 수난을 거듭 겪어야 했다. 주민자치제로서는 중앙집중의 권력을 휘두르는 국가의 폭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이로써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국가를 세워야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외침과 내홍이 반복되던 사사시대의 기나긴 수난기를 거쳐서 마침내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나아와서 왕국을 개국하자고 요구하였다.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삼상 8:5) 모든 나라와 같이 되자는 말은 세상 속에서 구별된 거룩한 나라를 이룩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사회를 향한 꿈을 이제 그만 접어 버리자는 포기의 선언이었다.
200여 년의 사사시대 동안 본디 애굽제국의 압제를 당하던 히브리인 노예들이 이제 땅을 차지하고 어엿한 주민이 되어 저마다 지켜야할 부동산과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지켜야할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기에 그 재산을 지켜줄 폭력이 필요했다. 다른 나라들이 군대를 보내어 자행하는 침략과 약탈에 대항할 수 있는 대항마로서의 왕이 절실했다. 사무엘이 국가건설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아무리 설득하여도 장로들과 백성은 막무가내로 요구하였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삼상 8:20)
문제의 핵심은 국가라는 세속적 기구에 있다는 것이 성서의 분석이다. 모든 사회문제는 국가 안에서 발생하며, 국제사회의 분규도 국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대안사회의 설계도는 국가를 전제하고 이루어져야 하기에 근본에서 한계를 안고 출범한다. 국가사회의 한계 안에서 여러 가지 방법을 궁구할 수밖에 없다. 국가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모든 시도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실현이 가능하지 않기에 좋은 대안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러나 성서는 문제의 본질을 지적하며 교회로 하여금 국가라는 한계 안에 머물러 있지 말도록 추동한다.
하나님께서 폭력을 휘두르는 국가의 대안으로서 가나안에 이스라엘의 지역공동체를 세우셨지만 세속적 폭력 국가들의 압력으로 이스라엘은 그 공동체를 포기해야 했다. 지역공동체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힘은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에게서 나온다. 그것은 말씀의 공동체가 지닌 힘이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대를 이은 사사들을 중심으로 세상의 폭력 국가를 물리친 사례를 잘 알고 있었지만, 세상을 이기는 과정은 너무나 지난하고 지루한 세월을 요구하였다. 하나님나라의 희망을 향한 끈질긴 인내가 있어야 했지만, 자기 당대의 복지를 증진하고 인생을 향유하면서 안일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에 가나안 지역공동체의 꿈은 접어야 했다.
오랜 세월 동안 가나안의 지역공동체는 빈부격차가 심해졌고 협동체제는 약화되었다. 가진 자들은 이방나라들처럼 도성을 건설하고 도시문명을 즐겼다.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삼상 8:22) 도성에 살다 보니 가진 자들은 더욱 효율적인 방어체제를 구축해야 했다. 그 목적으로 도성을 잘 관리하는 전문가인 왕이 필요했다. 사무엘을 통해 국가체제의 불편함을 설득해 보았으나 장로들은 완강히 고집하였다. 마지못해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스라엘에게 왕을 세워주라고 허락해 주신다. 이스라엘이 왕정국가의 체제를 도입했다. 하나님은 왕국의 죄악을 경험하는 긴 과정을 이스라엘이 체험하도록 허락한다. 직접 겪어봐야 깨달을 것이었다. 그 결과는 파국과 멸망이었다. 열왕기하서 17장이 보도하는 사마리아 도성의 파괴와 북왕국 멸망, 그리고 25장이 보도하는 예루살렘 도성의 파괴와 왕국의 멸망은 이미 열왕기상서 8장이 예견한 비극이었다.
II. 대안사회를 이끌 지도자의 자격
오늘날 대안사회의 꿈은 대도시의 틀은 그대로 두고 조금씩 바꾸는 개량의 방식으로 제시된다. 대도시의 문제가 너무나 심대하기에 어떠한 인문학자도 대안사회의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한다. 대도시의 대형금융망과 대형에너지플랜트에 의지하고 있는 국가권력으로는 대안사회를 추동할 수 없다는 인문학의 잠정적인 결론에 이르렀을 뿐이다. 이런 까닭에 구미의 인문학계는 현대의 과학기술을 토대로 자연으로 돌아가서 수렵과 어로와 채취의 사회경제가 가능한지 모색하고 있다. 그러한 노력이 지역순환의 사회정치경제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제18대 대선국면은 이러한 문명전환의 기점에서 대한민국의 국민에게 다가온 매우 중요한 선택의 기회다.
국가권력에 의존하지 말고, 이제는 주민 스스로가 나서서 모임을 만들고 스스로 교육하며 협동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협동생활의 공동체를 이루어가자는 의견이 사람들 사이에 공감을 얻고 있다. 주민자치운동의 성공여부에 대안사회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에, 차후 국가권력을 위임받을 대통령은 국민의 주민자치운동의 시대적 의미를 잘 이해하는 지도자여야 한다. 유신체제의 개발독재는 다시는 있어서는 안된다. 국가권력을 잘게 쪼개어 주민과 함께 나누는 지방분권형 체제를 이끌 수 있는 지도자가 지금 시대에 필요하다.
권력을 나누면 권력이 약화되고 약한 권력은 무능해진다는 지난 정부의 경험을 과오로 여기지 말고 그 실패의 경험 위에서 더 나은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 함께 나누는 권력이 얼마나 더 효율성이 있고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지를 보여주는 지도자에게 국가권력을 위임해야 한다. 이것이 국가라는 한계 안에서 추동할 수 있는 최선책이다. 다른 사람들과 잘 소통하는 가운데 조화로운 환경을 회복해 갈 수 있는 지도자가 지금 절실하다. 국가의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주권재민의 원리를 깊이 체득한 지도자라야 국민과 함께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이러한 대선의 과제를 놓고 어떤 후보가 소통을 잘 하는 성품을 갖추었는지, 얼마나 건강한 대안사회의 인문학을 사상의 내용으로 갖추고 있는지, 그리고 그 후보의 진영에 누가 가담하고 있는지도 꼼꼼히 따져 보아야 한다.
성서는 모세를 지도자의 전형으로 내놓는다. 애굽이라는 국가체제를 부정하고 대안의 지역공동체를 추동한 지도자는 모세였다. 모세는 야웨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서 지도자가 되었다. 모세는 본디 히브리인 노예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하나님은 그를 이끌어 세속도성의 중심인 왕궁에서 자라게 하셨다. 애굽 미츠라임 도성에서 도시문명을 지탱하는 폭력을 배워 제왕의 풍모를 갖추었다. 그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폭력을 휘두르는 데 익숙해 있었다.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출 2:12)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출 2:14) 개인의 사적 폭력은 왕이 다스리는 국가의 공적 폭력에 순종해야 했기 때문에, 모세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애굽의 도성을 탈출하여 도망쳐야 했다.
광야로 도망친 모세는 미디안 부족에 몸을 의탁하고 농촌문화를 체험하였다. 미디안 부족은 우상을 숭배하는 족속이었는데 모세는 그 제사장 족장의 딸 십보라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미디안 부족의 종교문화에 자신을 내던지고 새 사회에 대한 꿈을 저버리고 살던 모세에게 야웨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있던 모세가 추락하여 세상에서 하찮은 작은 부족의 데릴사위로 전락하기까지 마음고생이 극심하였다. 강하게 세상을 이끌고 다스리지 못한 모세의 실패를 넘어서 이제 야웨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신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 이것이 모세의 소명이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말씀을 공부하고 백성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동안 성품이 변하였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폭력을 휘두르던 영웅이 이제는 온유한 사람이 되었다. ‘온유함’이란 히브리어로 ‘아나브’로서 ‘낮다’란 뜻이다. 이 단어는 ‘겸손/겸허’를 나타낸다. 그 반대말은 ‘롬’인데 ‘높다’는 뜻으로 ‘교만/오만’을 가리킨다. 뜻을 높은 데 두고 권력의 야망을 지닌 사람은 ‘롬’하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롬]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모세는 지구상의 여느 지도자보다도 겸손하고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자세를 낮춘 지도자였다. 이처럼 겸손하고 낮은 데 처하기를 즐겨하는 성품과 사상의 소유자가 대안사회를 추동할 수 있다.
이집트 도성의 백성은 교만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데 능하였다. 아브라함이 이집트 도성에 들어갔다가 봉변을 당하였다.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창 12:12) 도시인들은 폭력을 기본으로 깔고 생존을 도모하고 있었다. 소돔 도성이 대표 격이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서 소돔 도성으로 이주하였을 때 성서는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면 큰 죄인이었더라’라고 평하였다.(창 13:13) 나중에 천사들이 소돔 도성에 들어갔을 때 소돔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몰려와서 나그네를 폭행하려고 했다.(창 19:4) 소돔 도성이 멸망당한 후에 아브라함이 기근을 면하려고 그랄 도성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도 또 아내를 빼앗기는 봉변을 당하였다.(창 20:2) 하란 도성에 오래 거주하다 보니 나홀의 아들 라반은 물질주의의 도성문명에 물들고 타락하여 임금을 착취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존재로 전락하였다.(창 24:30, 55; 29:25; 31:41) 세겜 도성의 남자들은 걸핏하면 여성을 강간하곤 하였다.(창 34:2) 도성의 성문에는 시장이 열렸고 그 시장에는 남정네들이 매매춘 여성들과 성을 거래하였다.(창 38:14) 애굽 도성의 귀부인들은 노예들에게 성행위를 강요하였다.(창 39:7) 이집트 도성은 감옥을 운영하여 사람을 가두고 있다가 재소자들을 처형한다.(창 40:22) 이집트 국가는 온 땅의 토지를 사들여서 바로 왕의 사유물로 만들었다.(창 47:20) 이집트 국가는 힘없는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고 노예노종에 종사하게 강제한다.(출 1:11)
도시국가의 폭력성은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서 유래한다. 하나님의 보우하심을 의지하지 않고 가인은 첫 아들을 낳고 에녹 도성을 건설하였다.(창 4:17) 이 도성에서 방어기재가 발달하였고 보안을 위한 문명이 발달하였다. 문명의 발달로 육식을 하는 영웅들이 출현하였다.(창 6:1-4) 이로써 영웅이 지배하는 왕국이 등장하였다.(창 10:10) 왕국은 단결하여 높은 권력을 추구하였던 바벨 도성에서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였다.(창 11:9) 이집트 땅과 가나안 땅을 위시한 온 세계에 영웅들이 도성국가들을 즐비하게 세웠다.(창 10:6-20) 도성체제의 본질은 인간의 영웅성과 폭력성에 있다.
반면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도성과 바깥에서 도성문명을 멀리하여 살면서 평화를 누린다.(창 10:21; 시 131:2) 성서가 제시하는 대안사회의 지도자는 모세와 같이 온유하며 도성민들과는 달리 폭력을 멀리하고 평화를 누리며 정착시키는 인물이어야 한다. 평화의 영속을 위하여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국가권력이 분배와 나눔을 실천하도록 국제적인 노력을 다 기울이는 평화의 일꾼이어야 한다. 물론 군축을 넘어서 군대폐지를 향한 평화협정을 이끌어내고 영토분쟁에 국가해체의 관제를 제시하고 회담을 거듭함으로써 모든 국가의 울타리를 헐어나가려는 비번을 제시하는 인물이어야 한다.
평화의 과제를 시행하기 위해서 국가의 폭력을 강하게 지탱하는 군산복합산업체와 국가의 경쟁을 부추기는 다국적 기업 지배체제를 강력한 권력으로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강한 권력과 약한 권력을 유효적절하게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온 국민과 원활하게 소통하는 의사결정구조를 확립하고 권력의 분산과 집중의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는 분이 참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도자를 얻는 일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불러내시는 은총이 있어야 이상적인 지도자가 가능하기 때문에 참 지도자를 구하는 메시야를 위한 중보기도가 교회에서 끊어지지 말아야 한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중보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메시야 되심을 확언하고 예수님을 닮아 사는 지도자를 보내달라고 매일 간구하는 기도가 교회의 일상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
III. 거듭나는 국민운동
국민이 대선의 과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스스로 인문학의 소양을 갖추어 나간다면 우리는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민주주의의 사회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산적한 사회문제는 모두 국가권력의 문제와 깊이 연루되어 있다. 빈부의 양극화, 실업문제, 허술한 사회안전망, 취약한 노인복지, 보육난과 저출산 및 미혼모와 낙태문제, 반사회적 폭행, 등등 경제발전에 기초한 대도시 집중의 사회구조가 낳은 문제들이다. 이외에도 산적한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제는 정부의 해결책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직접 모여서 얼굴을 맞대고 대안을 연구해야 한다.
지방 기초단위에서 활발한 움직임이 보인다. 창업을 이끄는 ‘마을센터’, 창업을 돕는 ‘사회적경제지원센터’,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등등 사회혁신을 꿈꾸는 기획들이 제시되고 있다. 지역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놓는 뿌리센터, 시니어사회공헌센터, 주민참여클리닉 같은 조직들이 생겨나서 도시혁신과 마을혁신을 펼친다. 50여 기초자치단체장들이 모여서 ‘목민간클럽’이란 이름으로 주민들과 함께 자치행정을 꾸려나가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 모든 움직임이 행정주도형 도시계획을 포기하고 시민참여형 도시계획으로 탈바꿈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도시계획·예산안 등을 마련할 때 시민들이 참여하고 주도하도록 지방권력을 시민에게 나눠주는 진정한 권력 분할을 실현하는 데 그 관건이 달려 있다.
도시를 살고픈 도시로, 농촌을 살고픈 마을로 만들기 위해서 성심껏 노력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야 한다. 성서는 그러한 마음 자세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으로 권면한다.(신 6:4-5) 유일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종교성과 배타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보편성과 모든 민족에게 축복하는 인류애를 연마하라는 권면이다. 한 도성체제나 한 국가체제를 옹호하는 것이 우상숭배의 신전체제이기 때문에 우상을 타파하라는 말씀은 단지 우상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도성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지닌 종파적 배타성과 인종차별성과 자연파괴력을 버리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보편적 창조주 야웨만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경배할 때에 비로소 이웃사랑의 지평이 열린다.(레 19:19) 대통령 후보자들뿐만이 아니라, 표를 행사하는 주민들의 성품이 성서가 가르치는 대로 협동사회에 걸맞은 공동체의 인품으로 변화되어야 대안사회운동이 가능할 것이다. 교회의 역할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께서 율법을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 두 축으로 요약하신 것은 참으로 옳다. 사랑을 위하여 이기적 존재가 변화하여 공동체적 존재로 전환하여야 한다. 예수는 이 전환을 ‘거듭남’이라고 정의하였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거듭나다’란 그리스어 단어는 ‘위로부터 나다’란 뜻이다. 사람의 육체가 물질로 이루어졌고 그 물질에서 정신이 발현하며 위로부터는 하나님의 영을 받아야 온전한 피조물이 된다.(창 2:7) 아래로는 땅과 소통하고 위로는 보편자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소통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하여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하고 아래로 땅의 물질만 보고 사는 육의 존재로 변하고 말았다.(창 6:3) 땅과 하늘을 조화롭게 품고 사는 영육 간에 균형을 이루는 존재로 사람이 거듭 나야만 대안사회로서의 하나님나라를 전망할 수 있게 된다. 우선 보는 눈이 열려야 미래를 추동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온 국민이 대안사회를 향한 인문학의 소양을 갖추어가는 일상생활로 삶의 질을 드높여야 한다. 이 과업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선교과제가 되어야 마땅하다. 단순히 책임윤리로는 미흡하다. 성서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의 윤리가 긴급히 요청된다.
대안사회의 추동을 위해서 마을공동체, 공유경제, 사회적 경제, 더 나아가 토지문제, 등 사회혁신을 위해 국민이 직접 공부하고 고안해 내는 싱크탱크들이 많이 생겨나야 한다. 내가 보기에 대도시의 몸집을 줄이지 않으면 어떠한 대안도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 같다. 대도시에는 물질주의라는 우상이 숭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공간이 없다. 우선 교회가 오직 사랑이라는 목적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대안사회를 위한 교육의 과제는 너무나 중요하다. 도시에서 교육받는 학생들이 일정 기간 산촌유학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획도 빼놓을 수 없다. 지역순환경제를 위한 미래의 활동가를 산촌유락을 통해서 자연과 농업을 이해하도록 기르고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깨달아 아는 데까지 영성이 자라게 이끌어 주어야 한다. 여기에 인류의 미래가 달려 있다. ‘어린이 농어촌 교육제도’를 정립하는 지난한 과제도 교회가 떠안아야할 중대한 과제다. 도시교회와 농촌교회가 자매결연을 맺어 일방이 일방에게 혜택을 주는 따위의 일방적 관계는 중지하고, 하나님나라의 건설이라는 과제를 함께 놓고 미래를 이끌 영적 지도자를 양성하는 일에 굳게 결연해야 할 것이다. 농촌교회가 처한 시골마을이야말로 대안사회를 꿈꾸는 온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도시교회는 도시의 폭력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농촌교회에 매달려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과제가 산적하다. 중앙정부의 농정예산을 잘 관리하는 정직하고 강직한 주체를 양성해 내는 일, 행정권한을 대폭 지방정부로 이양하는 일, 지방정부의 관료들 사이에 부패를 척결하고 지방정부에서 민주화를 영속화하는 일, 등등 공동체 교육의 중요한 과제들이 많이 쌓여 있다. 이런 과제는 정부나 지방자치 단체에 맡길 일이 아니라 주민들이 직접 나서야 하는 일인데 교회가 이 일을 위해 기도하고 앞장 서야 한다. 왜냐하면 공동체 성품의 훈련을 배양해온 집단은 이 나라에 오로지 교회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IV. 농촌의 중요성
농촌도 도시의 한계 안에 갇혀 있다. 도시의 대형화는 농촌의 소외를 딛고 성립되었기 때문에 농촌은 도시의 유지를 위한 먹거리 생산의 기지가 되었다. 정부가 주도하는 농어업정책은 이미 농민의 신뢰를 상실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이 평생 농촌지역에서 살았으나 도성이 내뿜는 악한 물질숭배의 영향 아래에 시달리고 괴로워했다. 가정 속에 도성문명의 생활방식이 침투하여 거룩한 가계를 세속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아브라함은 가정에도 노예들이 있었다. 아브라함은 노예를 혹독하게 부리는 세속사회의 문명을 버리고 다메섹의 엘리에셀을 아들처럼 품었다.(창 15:2) 엘리에셀은 늙을 때까지 아브라함의 집안에서 한 가족의 성원이 되어서 충심으로 섬기며 살았다.(창 24:2) 반면에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이집트인 여종 하갈을 학대하였다. 씨받이를 이용하여 자식을 얻으려는 시도는 분명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속도성의 문화를 도입한 결과물이었다.(창 16:2) 사라의 세속적 시도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하갈은 이삭이 젖을 뗄 무렵 아들 이스마엘과 함께 가정에서 추방되었다.(창 21:10) 광야를 헤매던 하갈이 야웨의 구원하심으로 생존하게 되었으나 그녀는 아브라함의 가문이 아니라 이집트 도성에서 며느리를 구하여 아들 이스라엘과 혼인시켰다.(창 21:21) 하갈에게서 여주인 사라를 존경하고 따르는 마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농촌지역에 산다고 모두 농촌을 살리는 일꾼이 될 수 없다. 세속도성의 여망인 물질풍요의 여망을 가득 안고 사는 한 농촌에서도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다. 이삭의 아들 에서는 세일산 주변의 농촌에 정착하여 가계를 꾸렸지만, 그는 결국 에돔이라는 성읍을 건설하고 국가를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저해하는 우상숭배의 족속이 되었다. 이스마엘도 광야에서 활을 쏘며 생활하는 자연인으로 자랐지만 이집트 여인들과 혼인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떠나서 도성의 폭력성을 따르는 미디안 족속과 영합하여 노예매매와 인신매매를 일삼는 악한 상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창 21:20; 37:25, 28, 36)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아내의 장지를 구입해야 했는데 이미 모든 땅은 헤브론 도성의 성민들이 다 사유화하고 장지로 사용할 땅 한 뙈기도 찾을 수 없었다.(창 23:9) 아브라함과 이삭이 가나안에 정착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그랄 왕 아비멜렉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아비멜렉이 허락해준 땅이 곧 브엘세바였다.(창 21:23; 26:29) 도시건 농촌이건 온통 세속적 인간이 점령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믿음의 조상들의 삶은 힘겹고 어려웠다. 야곱이 요셉의 초청을 받고 이집트 도성 미츠라임으로 들어갔을 때 도성민들은 목축인과 히브리인을 불가촉천민으로 차별하고 있었기에 도성 안에 살지 못하고 도성 바깥의 고센 땅에 목축업을 하며 정착했다.(창 43:32; 46:34; 47:4) 이집트에서 총리대신이 되었지만 요셉은 이집트 도성이 싫어서 나중에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자신의 유골을 수습하여 조상의 땅 가나안에 이장하여 달라고 신신당부하였다.(창 50:25)
도시와 농촌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농민들 스스로 나서서 도시로부터 독립한 새로운 마을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협동조합과 같은 사회적경제조직을 활성화해서 농어업인의 소득을 안정시키고, 농도교류를 더 높은 공동체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소리가 드높아지고 있다. 주민 스스로가 지역 자원을 통합적으로 활용하고, 자원개발의 성과를 도시에 다 빼앗기지 않고 자기 지역에 귀속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이러한 과제를 달성하는 작업이 지역순환경제의 작업이다. 농업이 에너지 영역뿐만 아니라 정신적 문화적 영역에서도 도시로부터 독립할 수 있어야만 지속가능한 지역순환경제의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 그렇게 되어야 도시에도 회생의 가능성이 열린다.
더 나아가 농촌이 도시의 질병을 치료하고 도시문제를 해결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농촌주민이 의식화되어 노력해야 한다. 도시의 시민들과 함께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대안이 농촌에서 나와야 한다. ‘도농함께협동조합’이 생겼다는 소식도 들린다. 농어촌과 도시에 사는 개인이나 기업이나 사회단체가 생산과 가공의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는 방식도 좋다. 또 도시민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공동으로 출자금을 내어 기금을 조성하고 생산가공물을 공동으로 구매할 때 국제금융자본의 악한 고리를 끊어 낼 수 있다.
국가로부터 세금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도 국가권력의 협조를 적극 이끌어 내야 한다. 여기에 전국으로 교단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교회의 역할이 또렷이 드러날 수 있다.
나가는 말
새로운 협동조합운동이 사회적기업이나 비영리민간단체 등의 사회적경제조직을 활성화하는 일과 더불어 시급하다. 지역공동체 실현을 위해 농어촌의 경제를 활성화할 사회적 기금을 조성하는 일이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 일에 교회가 적극 참여하면 작은 규모나마 지역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 지역순환운동은 시·군 단위로 사회적경제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생산과 제조·가공과 유통·서비스의 과정을 한 굴레로 돌아가도록 엮어내는 일로 이어져야 한다. 이 바탕 위에 문화·예술·종교·관광 등 복합생태계가 형성될 것이다. 여기에 농촌교회가 공헌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 사역을 해낼 때 도시교회들에도 거룩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새로운 성화의 지평이 열린다. 지역공동체의 바탕 위에서 농지·수로, 습지와 철새도래지 등의 지역환경자원을 보전하고 관리하는 사업이 이루어질 수 있는데 이 일에 교회들이 기도하여 생명선교의 깃발을 드높여야 할 것이다. 국민먹을거리기본법을 제정하는 일 등 농촌을 고리로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체제를 고안하는 일이 교회의 선교에서 실천과정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생명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학의 변화가 시급하다. 서구에서 산출된 교의학을 붙들고 고집하는 기존의 신학은 성서를 현장에서 성령의 눈으로 읽고 생생한 삶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신학으로 거듭나야 한다. 서구의 교의학은 중세와 근대를 거치면서 줄기차게 도성을 지배하는 신학으로 군림해 왔다. 이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상황에서 성서를 새롭게 읽어내야 한다. 히브리인을 도성에서 이끌어내어서 광야에서 가르치고 훈련시키고 이윽고 도성들이 즐비한 가나안 땅에 들이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가나안에 이룩하신 하나님의 통치는 우상숭배 도성의 물질문명을 철저히 근절하는 바탕 위에서 완성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속주의 물질문명과 영합함으로써 실패하는 쓰라린 경험을 맛보았다. 이제 도성의 신학을 버리고 순전한 마음으로 하늘과 땅이 어울려 마음껏 춤을 추는 농의 신학으로 선교의 새 지평을 열어가야 할 때가 되었다.
이영재 l 목사는 스코틀랜드 에버딘대학교(University of Aberdeen)에서 구약학 전공으로 석사와 박사학위(Ph. D.)를 받았으며, 현재 전주화평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전주성경학당 길잡이를 맡고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