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치권의 최대 화두인 ‘종북논쟁’이 두 갈래로 나타나고 있다. 우익단체는 여전히 ‘종북의원 퇴출’ 등을 요구하며 연일 국회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있다. 엊그제는 탈북여성들이 국회 앞 국민은행 서여의도지점 도로변에서 집회를 가지더니 어제(14일)는 한국전쟁 희생자 유가족 단체 등이 국회 앞 대로의 중간 화단에서 또다시 대규모 집회를 가졌다. 이와 별도로 국회 정문 앞에서는 1인시위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
▲ 14일 오전, 호국보훈안보단체연합회 주최로 여의도 국회 앞에서 종북의원 퇴출 및 종북정당 해산을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 진실의길 |
반면 새누리당은 사정이 좀 달라 보인다. 새누리당 지도부가 나서서 처음 이 문제를 거론할 때만 해도 19대 국회의 기선을 제압할 것만 같았다.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이 “국가관을 의심받는 사람이 국회의원이 돼선 안 된다”고 일갈한 이후 ‘사상검증’ 태풍이 몰아치더니 이한구 원내대표, 군 출신의 한기호 의원까지 가세하면서부터는 미처 개원도 못한 19대 국회에 피바람이 불 것도 같았다.
두어 주 전까지만 해도 민주당, 진보당은 ‘음메 기죽어!’ 하는 꼴이었고, 반면 새누리당은 기세등등했다. 그러나 요며칠 전부터 새누리당은 19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민생국회’ 운운하며 서서히 꼬리를 내리는 형국이다. 그 이유는 단 하나다. 판을 벌여놓고 보니 뜻하지 않은 변수가 돌발했는데 그건 다름 아니라 새누리당이 당력을 다해서 보호해야할 박근혜 전 위원장이 ‘역풍’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박 전 위원장의 ‘2002년 방북’ 건이 재론되면서 방북 당시의 행적, 발언내용 등이 논란이 되고 있다. 게다가 그의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도한 ‘5.16쿠데타’에 대한 박 전 위원장의 국가관 문제도 제기됐다. 이 와중에 전두환 까지 가세해(?) 새누리당이 3공, 5공으로 회귀하는 게 아니냐는 ‘검은 그림자’마저 드리우고 있다. 이런 이유로 새누리당은 결국 자신들이 꺼낸 ‘종북논쟁’을 거둬들이게 된 것이다.
정치권에서 ‘종북논쟁’을 계속 끌고 갈 경우 그 시원(始源)은 어디일까? 최근 ‘종북 정치인’으로 지목돼 논란의 대상이 된 사람은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이석기, 김재연 의원 등 ‘초선 국회의원 2명’이다. 그런데 한 때 우리나라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이 현역 육군소령 시절 ‘좌익혐의’로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적이 있다. 그는 남로당에 가입해 군부 내 총책(總責)을 맡았던 인물로 수사과정에서 조직도를 제공하고 ‘동료’들을 털어놓은 공로(?) 등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가 바로 박근혜 의원의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이나 우익단체에서 박근혜 의원을 향해 ‘사상문제’를 제기하거나 국회에서 퇴출하자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박정희로 치자면 ‘종북 정치인의 원조’ 수준을 넘어 ‘골수 친북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의 딸 박근혜 의원의 경우 ‘적국의 수괴’로부터 전용기를 얻어타는 특별대우를 받았으며, 또 그와 단 둘이 비밀회담까지 가졌다. 우익단체 입장에서 보자면 박근혜야말로 ‘사상이 의심스러운 사람’이랄 수 있는데 웬일인지 그들은 박근혜에 대해서는 꿀먹은 벙어리 꼴을 하고 있다.
|
▲ 방북 기간중 박근혜 의원이 김정일 위원장과 단독대화를 나누며 활짝 웃고 있다. |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필자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재판 판결문을 입수한 경위에 대해 간단히 밝힐까 한다. 지난 1997년 당시 필자는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현대사연구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당시 우리팀에서는 중앙일보 지면에 ‘실록 박정희 시대’라는 장기연재를 맡았다. 일제시대가 주 관심사였던 필자는 자연스럽게 박정희 전반부를 맡게 됐는데 출생에서부터 5.16쿠데타 직후 집권 초기까지를 담당하게 됐다. 필자로선 ‘청년 박정희’를 탐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연재명에 ‘실록(實錄)’을 표방한만큼 철저한 취재와 자료검증은 필수였다. 필자는 그가 태어난 구미부터 들러 그의 고향 친구, 이웃주민, 생가 지킴이 등을 취재했고, 이어 대구사범 시절 동기생도 여럿 만나보았다. 다음은 그가 교사로 근무하던 문경엘 가서 제자, 하숙집 주인아들 등을 취재했으며, 만주군관학교 선후배, 또 해방 후 한국군에서 쌓은 여러 인연들도 두루 만났다. 취재에 이어 전국을 뒤지며 사진과 자료도 발굴했는데 이번에 공개하는 판결문도 그 때 입수한 것이다.
|
▲박정희 육사 1중대장(대위) | 박정희가 김창룡의 특무대에 체포된 것은 정부수립 3개월가량 후인 1948년 11월 11일이었다. 이날은 육사 7기생 졸업식 날이었는데, 당시 박정희는 계급은 육군 소령, 보직은 육사 1중대장이었다. ‘여순사건’(1948.10.14.) 이후 군 수사당국은 육사로까지 범위를 확대해 좌익분자를 색출하고 있었다. 바로 여기서 박정희가 붙잡힌 것이다.
그 무렵 서울 태릉에 주둔하고 있던 1연대 정보주임 김창룡(육사 3기생)은 수하들을 풀어 거동수상자들을 조사하다가 이재복을 우연히 붙잡았는데 알고 보니 그가 바로 남로당 군 총책이었다. 이재복의 ‘명단’ 속에 바로 박정희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재복은 박정희의 셋째 형이자 좌익 사상가였던 박상희의 친구였는데, 박정희 바로 이 이재복에게 포섭돼 남로당에 가입했던 것이다.
|
▲ 김종신 전 비서관 | 박정희는 생전에 자신이 남로당과 ‘인연’을 맺은 사실을 실토한 적 있다. 기자 출신으로 나중에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김종신(82, 전 부산문화방송 사장) 씨에 따르면, “육사 교관 시절 형님 친구분(이재복)이 향우회에 나와 달라고 해서 갔는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부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남로당 가입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라고 박정희가 얘기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김 씨가 전한 대로라면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한 적이 없는 것 같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숙군(肅軍) 당시 실무책임자로 조사과정에서 박정희가 쓴 ‘자술서’를 직접 읽어본 김안일 특무과장은 “박정희는 ‘대구 10.1사건’으로 형 박상희가 우익에 피살되자 그에 대한 복수심과 형 친구 이재복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한 것 같다”고 증언한 바 있다. 또 춘천 8연대 시절 박정희의 직속상사였던 김점곤 장군(평화연구원장)도 “박정희가 체포된 후 그의 자술서를 봤더니 이재복을 통해 입당했다고 돼 있었다”고 97년 필자에게 증언한 바 있다.
한편, 특무대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복역 중이던 박정희는 3개월가량 후인 이듬해 2월 8일 군사법정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발을 새로 하고 머릿기름까지 바른 채 출석한 박정희는 재판장의 신문에 순순히 피의사실을 자백하고 또 시인했다. 이날 1심 재판에서 박정희는 국방경비법 제18조, 33조 위반으로 사형 구형에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 판결로 그는 현역 육군소령에서 파면됐고, 급료도 몰수당했다. 그와 함께 재판을 받았던 최남근 중령, 오일균 소령, 조병건 대위 등은 사형 구형에 사형 선고를 받고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심 재판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1월 18일 고등군법회의(2심)가 열렸다. 이날 용산 육군본부에 마련된 법정에서는 박정희 등 총 69명이 재판을 받았는데 이들의 죄명은 국방경비법 16조 위반, 즉, ‘반란기도죄’였다. 이들의 구체저인 범죄사실은 “전 피고인은 단기 4279년(1946년) 7월경부터 4281년(1948년) 11월경에 이르는 동안 대한민국 서울 기타 등지에서 각각 남로당에 가입하고 군 내에 비밀세포를 조직하여 무력으로 합법적인 대한민국 정부를 반대하는 반란을 기도”했다는 것이었다. (고등군법회의 ‘판결문’은 총 다섯 장이며, 박정희 관련 부분은 첫째, 셋째 장임. 아래 사진 참조)
|
▲ 고등군법회의 판결문 첫째 장. 대상자 첫머리에 박정희 이름이 보인다. © 진실의길 |
|
▲ 고등군법회의 판결문 셋째 장. © 진실의길 | 이날 2심에서 대다수가 감형 조치를 받거나 더러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박정희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정희는 1심에서 “파면, 급료몰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하며, 감형한 징역을 집행정지함” 조치를 받았다. 박정희는 이들 중 유일하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는데 ‘징역 10년’으로 감형된 데다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으니 ‘특별대우’를 받은 셈이다. 당시 재판에 관계했던 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가 수사과정에서 적극 ‘협조’한 공로를 군 지휘부가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감옥에서 풀려난 박정희는 다시 군 선배들의 도움으로 육군본부에서 민간인 신분인 문관으로 근무하다가 한국전쟁 발발 5일 뒤인 1950년 6월 30일 육군소령으로 복귀했다. 이로써 그의 좌익전력은 일단락되었으나 그렇다고 이 문제가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장군 진급을 앞두고 다시 이 문제가 불거지자 군 선배 몇 사람이 신원보증을 서서 겨우 통과되었다. 1963년 11월, 그가 군복을 벗고 제5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을 때 이 문제가 다시 불거져 아른바 ‘사상논쟁’이 일기도 했다. 그는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이 돼서도 사상문제로 늘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다고 전한다. (아래 <동아일보> ‘호외’ 참조)
|
▲ 박정희의 사상문제를 거론한 1963년 10월 18일자 <동아일보> 호외 겉면(왼쪽)과 뒷면. © 진실의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