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신축교안 때 수백명의 신자들이 살해 당한 광장
제주도에 처음 복음이 전해진 것은 제주도의 한 뱃사공 김기량(金耆良, 1816~1867, 펠릭스 베드로)에 의해서였다. 그가 1858년 제주도에 돌아와 가족, 친척, 친구 등 20여 명을 입교시킴으로써, 교우 집단이 제주도에 생겨났으나 1866년의 병인박해 때문에 이들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 뒤 1899년 페네(Peynet, 裵嘉祿, 1873~1948, 가롤로) 신부와 김원영(金元永, 1869~1936,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제주도에 파견되면서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1900년 부임한 라크루(Lacrouts, 具瑪瑟,1871~1929, 마르첼리노) 신부와 무세(Mousset, 文濟萬, 1876~1957, 제르마노) 신부가 전교에 힘쓴 결과, 1901년 제주 교안(濟州敎案)이 일어나기 전까지 교우 수 242명과 예비신자 700여 명을 기록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약적인 발전은 자연히 제주 도민과의 마찰을 낳게 되어 1901년 5월에 제주 교안이 발생했을 때 수백 명의 교우가 학살 당하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지방 관리와 기득권을 주장하는 토호 세력, 그리고 일본인 밀어업자들의 결탁으로 유도된 이 사건은 중앙 정부의 조세 정책,즉 조정에서 파견된 봉세관(捧稅官)이 온갖 잡세를 거두어 가는 것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을 선동하여 수탈 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민란(民亂, 이재수의 난)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 과정에서 도정 책임자와 봉세관은 도피해 버리고 난민들은 공격 대상을 천주교로 돌렸다. 일부 신자들이 봉세관과 결탁하여 비리를 행한 사례도 원인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신부를 타도하려는 일본인의 음모, 축첩과 인습에 젖은 토호 세력, 그리고 생존을 위협받게 된 무당 등의 작용이 결정적인 원인으로 보고 있다. 제주 교안의 원인과 배경에 대한 해석에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도민들의 원성과 반감을 이용, 대정군수 채구석과 유림의 좌수 오대현은 일본 상인들과 결탁하여 상무사(商務社)란 비밀결사를 조직, 봉세관과 교회에 대항하려 하였다. 이중 오대현은 강우백, 이재수 등과 함께 도민들을 규합하고, 일본인들로부터 입수한 무기로 무장하여 1901년 5월 봉세관이 있는 제주읍을 공격하였다. 5월 28일 제주성은 도민들에게 함락되었고, 교우 수백 명이 처형당하였다.
6월 1일 프랑스 군함의 도착으로 소요가 가라앉았고 뒤이어 정부가 파견한 강화 진위대에 의해 사태가 수습되었다. 봉세관 강봉헌, 대정군수 채구석, 오대현, 강우백, 이재수 등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제주 교안은 막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은 추후에 보고된 바로는 300∼350명으로 추측하고 있다. 제주 교안 사건은 재판 과정에서 오대현, 강우백, 이재수의 사형으로 끝이 났지만, 교회에 대한 배상금 문제, 희생자 매장지 문제 등으로 오래 지연되었고, 희생자의 매장지가 황사평(黃沙坪)으로 결정되면서 매듭지어졌다.
교회 측에서 바라본 교안의 전개 과정을 대체적으로 나누어 보면 (1) 상무사와 신자들과의 충돌 (2) 신자들의 제주읍 교회로의 피신 (3) 신자의 한림 민회소 습격, 장두 체포 압송 (4) 신자의 대정성 진입, 발포, 주민 피살 (5) 민군의 무장 (6) 신자들의 무장 (7) 신자의 황사평 주둔 민군 선제 공격 (8) 민군의 성 밖 신자 타살 (9) 교회 측의 프랑스 함대 원조 요청 (10) 민군 진압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제주교안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해체기에 이른 봉건 사회에서 지배 계급에 대한 백성들의 항쟁이 천주교 신자와의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둘째,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독점하기 위해, 프랑스 선교사들을 쫓아내려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셋째, 성직자의 특권을 이용하려는 일부 신자들이 성직자의 특권을 미끼로, 민간에 많은 행패를 부려 도민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넷째, 토착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신목(神木)과 신당(神堂)을 없엠으로써 토착 문화와 갈등을 빚었다.
◆ 제주 관덕정 복원
제주지역 대표적 건축 문화재인 제주시 삼도1동 관덕정(觀德亭 · 보물 제322호)이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문화재청은 일제가 보수공사를 구실로 본 모습을 훼손해버린 관덕정을 2006년 21억원을 들여 복원하였다. 조선 세종 30년(1448년)에 병사들의 훈련과 무예 훈련장으로 창건된 관덕정은 고종 19년(1882년)까지 여러 차례 수리됐으며 조선시대 다른 지역 건축물과는 달리 처마가 긴 것이 특징이었다.
문화재청은 기존 관덕정을 완전히 허물고 정면 5칸, 옆면 4칸, 단층 팔작지붕 형태의 본래 양식으로 재건하고, 또 풍화작용 등으로 흔적을 알아보기 힘든 관덕정 대들보의 벽화 7폭인 경우 모사도(模寫圖)를 근거로 복원하였다. 일제는 1924년 관덕정을 보수하면서 전체 15척(454.5㎝)에 이르는 긴 처마의 끝 부분을 2척(60.6㎝)이상 잘라 버려 원형이 크게 훼손된 상태였다. 지난 1969년 낡은 관덕정을 해체, 보수하면서 처마를 30㎝ 가량 늘렸으나 원형을 찾지는 못했다.
◆ 제주 교안(濟州敎案)
'교안'(敎案)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국가 정책이 전면 박해에서 전면 개방으로 옮겨가는 과도 이행기에 생겨나는, 종교 문제 또는 종교 문제와 관련되어 벌어진 다툼이 정치적, 행정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사안을 표현하는 보편적 의미를 지닌 역사 용어이며, 전제 군주 체제의 강화를 꾀하던 대한제국은 황실 재정을 채우기 위하여 봉세관을 1900년 제주도에 내려 보내 무리한 징세를 하였고, 심지어 어장, 그물, 소나무, 목초지에 대해서도 세금을 매겼다. 더구나 지금까지 징세를 담당하던 지방관, 향임(鄕任) 세력들을 배제하고 독점적인 징세를 함으로써 토착 세력과 주민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1899년 천주교의 제주 선교는 외국인 및 이 문화에 대해 폐쇄적이던 제주도민의 습성과 뿌리 깊은 무속 신앙 등으로 인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신자가 늘어나면서 천주교회는 제주도 내의 새로운 사회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이 과정에서 마을의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을 베어 버리는 등 무리한 행위가 이루어져 자주 주민들과 충돌하였다.
결국 1901년 5월 초 중앙의 조세 수탈에 저항한 민회가 열리고 제주 교안은 민란으로 시작되었다. 봉세관의 조세 수탈을 시정하기 위하여 일어난 민란은, 봉세관이 도망쳐 버린 데다 신자들의 한림 민회소 습격사건이 벌어지자 이를 계기로 민군과 교회 측의 대결로 치달았다. 민군과 제주읍성으로 쫓겨 들어간 신자들 사이에 상호 살상이 이어졌다. 결국 서로의 접전 끝에 5월 28일 제주 성내의 주민들에 의해 성문이 열리자, 민군은 성내로 진입하여 제주성을 장악하고 신자들을 관덕정 앞에 모아 놓고 살해하는 참극으로 귀결되었다. 당시 교안의 과정에서 피살된 자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제주 교안으로 희생된 신자 수는 300~350명 정도로 보고 있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시여,
● 우리 교우들이 어떠한 시련에서도 주님을 외면하지 않는 신앙정신을 갖도록 빌어 주소서.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카페 게시글
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