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6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6,30-35)
"I am the bread of
life; whoever
comes to me will
never hunger, and
whoever believes in me will never thirst."
말씀의
초대
스테파노는 최고 의회에서 가진 설교를 통하여 사람들이 성령을
거스르고 있다며 질타한다.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가 하느님 곁에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환시를 말하자 사람들은 그에게 돌을 던져 죽게
한다. 스테파노는 주님께 의탁한 채 그들을 용서해 주십사는 기도를 올리며 순교한다(제1독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처럼 배를 불리는 표징을 요구한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을 말씀하시며 당신이 바로 그 생명의 빵이시라고 밝히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스테파노의 삶은 교회의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시작을 전하는 「사도행전」의 두 장(6-7장)을 온전히 스테파노에 관하여
할애한 것은, 초대 교회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해하는 데 그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스테파노에
관하여 알게 되는 것은 그의 일대기가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스테파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보여 준 두 가지 핵심적 활동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먼저 스테파노는 교회 안에서
애덕의 실천에 온전하게 투신한 사람입니다. 그는 오늘날 부제직에 해당하는 '식탁 봉사'의 직무를 맡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
가운데 하나였습니다(사도 6,1-6 참조). 그러나 스테파노는 식탁의 봉사자만이 아니라 복음 선포자고 증언자였습니다. 그의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그는 순교에 이르기까지 복음 선포와 증언에 투신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님은 이러한 스테파노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인
삶의 본질을 본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애덕의 봉사'와 '믿음의 선포'의 결합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교회가 끊임없이 본받아야 하는
모범입니다. 세상과 교회에 대한 섬김의 봉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선포는 어느 한 쪽도 덜어 낼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그 원형을
스테파노에게서 봅니다. 스테파노는 순교의 자리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처럼 그의 박해자들을 용서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순교자에게 선사된 '영원한 젊음'을
느낍니다. 세상을 새롭게 하는, 복음의 힘으로 태어난 교회의 참모습을 봅니다. 우리 역시 애덕의 실천과 복음 선포에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놓는
삶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어렸을 때, 흙을 가지고 많이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모래가 쌓여있는 곳이면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모여서 모래를 가지고 여러 가지 놀이를 했습니다. 모래를 퍼 다가 옆으로 나르는 놀이, 모래에
나뭇가지를 하나 세워 놓고서 쓰러지지 않게 모래를 조금씩 더는 놀이, 조그만 성곽을 만드는 것 등등 부드러운 모래를 가지고서 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했고,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그리고 뙤약볕에서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그냥 모래 있는 곳에서만 놀아야
한다고 명령하면 어떨까요? 과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 수 있을까요? 명령에 의한 놀이는 진정한 놀이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유가
전제될 때에만 마음껏 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보지요. 어떤 회사의 사장님께서 오랜만에
등산을 갔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또한 운동도 되면서 모든 스트레스를 내려놓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좋은 것을 자기 혼자만 누려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직원들에게 이야기해서 한 달에 한 번은 의무적으로 주말에 등산을 가는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과연 직원들이 기뻐했을까요? 등산이 좋다는 것은 알지만
자유가 있지 않은 등산은 그 어떤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장님은 그렇지 않지요. 사장님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들어있기 때문에 기쁘게 이
규정을 이행할 것입니다.
자유의지란 이렇게 중요합니다. 자유의지가 억압된 곳에서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만족을 얻기가 힘들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군중은 예수님께 따지듯 묻습니다.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마치 지금까지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것처럼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하지요. 게다가 이들은 기적을 일으키는 선택권이 주님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있는 것처럼, 자기네 조상들에게 내렸던 것과 같은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합니다. 어쩌면 자신들에게 좋은 것만 알아서 달라는 요청이 아닐까요? 우리에게 주신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대신 무조건
최고의 것을 알아서 달라는 욕심들, 그러나 과연 최고의 것을 받아도 이것이 최고의 것임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스스로의 주어진
자유의지를 활용하지 못해서 하느님께서 주신 최고의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표징도 필요가 없게 됩니다. 생명의 빵을 매 미사 때마다
받아 모셔도 그 빵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없겠지요.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선물인 자유의지를 가지고 주님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신 그 많은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지를 깨닫게 될 것이며, 동시에 주님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최고의 분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겠지 생각하고, 나에게는 엄격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반대로 하죠. 다른 사람에겐 엄격하고 자신에겐 관대하잖아요. 관계를
맺을 땐, 상대에게 내가 모르는 수많은 사연이 있을 거라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신영복).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언젠가 어떤 할아버지의
하소연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할아버지께서는 제게 자신의 아내가 빨리 하늘나라에 갈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부탁하시더군요.
사실 할머니께서 치매와 중풍을 앓고 계시기에, 간호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매일 미사에 함께 손을 잡고 나오시는 등, 사랑을 많이
보여주신 할아버지이시기에 할머니가 빨리 죽을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얼마나 힘드시면
그럴까?’라는 생각도 들었지요.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제게 그런 기도를 부탁하신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암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지요. 즉, 자신이 없으면 누가 자기 아내를 보살피겠냐면서 자신이 끝까지 돌볼 수 있도록 먼저
할머니가 돌아가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생각하게 되더군요. 과연 우리
사회는 이 할아버지가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하는 사회일까요? 자신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회, 그래서 사랑이 넘쳐나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세월호 선박 침몰 참사는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슬픔을 안겼습니다. 선박에서 희생된 많은 영혼들과 그 유가족들,
또한 안타까운 사연에 전 국민이 슬피 울었습니다. “이 나라가 내 자식을 버렸기 때문에 나도 이 나라를 버리겠다.”는 어느 학부모의 절규에 많은
이들이 공감합니다. 왜냐하면 사고가 나면 바꾸는 시늉만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또 다시 참사가 되풀이되는, 이 지독한 악순환의 고리를
더 이상 보기 싫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우리 모두의 힘으로 끊어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만이, 돈 많고 능력 많은
사람에게만 맡기고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외면하는 무관심이 아니라,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모아서 악순환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천교구는 내일(5월 7일 수요일) 오전 10시에 답동 주교좌 성당에서 세월호 침몰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미사가 봉헌됩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하셔서 희생자 영혼을 위로하고, 또 가족들에게는 힘을 북돋아주고,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마음을 무관심이 아닌 진정한 사랑으로
하나 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 표징은 누군가의 존재가
녹아있는 선물 >
-전삼용신부-
엄마가 부엌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엄마,
이게
뭐야?”
“으응...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
드리려고 죽을 쑤는 거야.
그분은 딸을 잃어서
가슴에 상처를 입었거든.”
엄마는 사람이 아주 슬픈 일을 겪을
때는 음식을 만들거나 청소를 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옆집엔 여섯
살짜리 딸과 어머니가 단둘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나쁜
병을 앓다가 그만 하늘나라로 떠난 것입니다.
아주머니는 슬픔이 병이
돼서 몸져 누웠지만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
옆집에 사는
사람인데요....
이것 좀
드시라고....”
“아이고,
이렇게 고마울
때가....”
아주머니는 엄마가 가져간 죽을 몇 술
뜨다 말고 목이 메어 우셨습니다.
“흑흑....”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오던 나는 약국에
들러 반창고 한 통을 산 뒤 옆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수지구나.
네가 무슨
일로....”
“아줌마!
가슴에 난 상처에 이걸
붙이면 금방 나을 거예요.”
아주머니는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와락 껴안았습니다.
“고맙다.
수지야...
고마워.”
그 다음날 자리를 털고 일어난
아주머니는 작은 유리상자가 달린 열쇠고리 하나를 사 왔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내가 준
일회용 밴드를 넣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반창고!
그것은 가슴의 상처를
치료하는 묘약이었습니다.
[TV동화 행복한 세상,
사랑의
반창고]
오늘 복음도 역시
‘기적과 표징’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기적은 외적으로 일어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의미하지만 표징은 그 안에 누군가의 존재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 존재를 넣는
방식은 그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빵만 먹고 배불렀던 사람들은
아직도 표징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표징을 그저 누군가가 해
줄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의 계시라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예수님은 표징에 대해 가르치시고
싶으십니다.
표징은 누군가의
초자연적인 힘이 아닌 누군가의 사랑이 담긴 무엇을 의미합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이 말씀은 곧 니코데모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가르침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즉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우리에게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내려오게 한 모세의 능력이 아닌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당신 아드님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믿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지,
기적이나 이적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화에서 수지가 상처받은
아주머니에게 준 그 ‘반창고’,
그것 안에 수지의 사랑이
들어있고 또 그렇다는 것을 아주머니가 믿었기에 그 아주머니의 상처는 나았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사랑이
들어있는 선물이 곧 표징이고,
그 표징의 완성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
‘성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밀떡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기적이 필요하지만 우리 가슴에 스며들어 우리를 살리는 표징이 되기 위해서는 그 밀떡 안에 그리스도의 존재가 들어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체가 우리
상처를 치유해 줄 뿐만 아니라 매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양식이요,
그 사랑을 믿는다면
그분의 존재가 우리 가슴에 스며들어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빵을 먹을 자격
-인영균신부- 어제 오전 늦게 어떤 신자분한테 이런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신부님.. 어제 새벽
세시쯤 일어나 도저히 아픈 맘을 가눌 수 없어 안산으로 갔습니다.
어둠속을 운전해서 동이 터오고 그렇게 아침을 맞으며 분향소에 도착해서 아이들 하나하나 이름부르며
얼굴보고 간절히 기도했어요.
침묵시위를 하는 유가족분들을 보고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어요.
야외음악당 미사에서 많은 이들이 울먹이고 흐느끼며 함께 미사를 했답니다.
미안해서 이런 세상을 만든 어른이어서 속죄하는 마음과 잊지않겠다고 약속하며
돌아왔어요. 우리는 이 죄를 씻을 수 없을거예요.
고통과 두려움속에서 그래도 어른들이
구해줄거라 믿은 아이들을 어찌 잊을까요.”
이 세상에는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이 많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더욱 정의에
굶주리고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정의는 편협한 편들기나 흑백논리의
폭력이 아닙니다.
진실을 바탕으로 아픈 곳을 치유하고
서로 화해를 하도록 이끄는 내적 힘입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생명은 정의를 통해서만 꽃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이들을
대신하여 생명의 빵이신 주님께 눈물로 호소합시다.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정의에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내적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진실에
눈뜨도록 합시다.
유가족의 호소에 귀를 막고 진실에
눈을 감는다면, 정의에 무관심한다면,
우린 생명의 빵을 먹을 자격이
없습니다.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반영억신부-
일반적으로 세상의 것은 ‘이것, 저것
다 해봐도 결국은 싫증이 납니다. 물론 취미생활로 한 곳에 투신하기도 하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신비롭고
깊어만 집니다. 그러니 세상 것에 매이지 마십시오. 세상 것은 결국 그의 혼을 유혹 할 뿐입니다.’천상 것에 마음을 두고 하느님만을 갈망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준 것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하자,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 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차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원을 살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서의 몇 년은 잃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성녀 체칠리아). 그러므로 현세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은 천상의 것을 바라며 영원한 것을 미리 준비하며 투신을 해야 하겠습니다.
농사 준비를 하더라도 가을의 풍요로운 수확을 위해서 봄부터 씨를 뿌리며 온갖 수고와 땀을 흘리는데 영생을 위해서 그만한 대가를 감당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인간의 공로 이전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선물을 주십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 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시고 여인이 그것을 거절 하자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군중들이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했듯이 그리고 여인이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하고 간청했듯이 우리도 영원의 빵을, 생명의 물을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면 주님께서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16,9). 그러므로 ‘우리의 앞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몸소 해 주실 것입니다.’ 생명의 빵, 생명의 물을 희망하는 오늘을 축복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이수철신부-
어제는 한국 천주교회 첫 순교 터인 전주의 전동 성당에
이어
동정부부 순교자가 묻혀 계신 치명자산 성지를
순례했습니다.
어제는 어린이날에다 행사가 열리고 있는 관계로 전동 성당은 온통 젊은이들의 쉼터가 되고
있었습니다.
.
고풍 찬연한 건물에 아름다운 성당 내부를 관람한 후 한옥마을을 지나 치명자산 성지에
갔습니다.
잘 조성되고 정성껏 관리되고 있는 성지를 보면서 순교자들의 후예 답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특히 해발 300m 산 정상 바위 암벽에 세워진 산상기념성당은
장관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정신과 영성은 살아있는 여기 신자들을 통해서 면면히 계승되고 있음을
봅니다.
죽어서만 순교자가 아니라 이미 살아서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어낸 분들
역시
살아있는 순교자들로 순교자들의 후예임을 깨닫게
됩니다.
.
믿는 이들의 신앙의 뿌리와 정체성을 기억하고 확인하는 데 순교성지의 역할은 얼마나
중요한지요!
천주교의 사회현실참여와 순교성지의 보호와 발전은 함께 해야 함을 절감하게
됩니다.
관상과 활동의 리듬처럼
순교성지의 쉼터에서 현실참여에 필요한 활력과 동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순교자들이 주님을 위해 순교할 수 있었던 그 믿음과 사랑은 어디서
연유할까요?
영원한 생명의 체험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을 체험해야 비로소 자기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
돌비에 새겨진 동정부부였던 루갈다의
고백입니다.
"모든 도덕을 구함이 좋으나 그 중에 으뜸은 신, 망, 애
삼덕이니
이 세덕이 영혼에 창으로 들어가면 다른 모든 도덕이 절로
따르리라.“
.
루갈다 순교성녀 역시 영원한 생명의 신, 망, 애 주님을 체험했음이
분명합니다.
오늘 복음 중 다음 말씀이 그대로 순교적 삶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을 체험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의
삶입니다.
.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6,35).
.
주님이, 주님의 말씀과 성체가 광야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세상 그 무엇도 우리의 영적 배고픔을, 영적 목마름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주님의 말씀, 주님의 성체만이 우리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며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입니다.
.
'내가 생명의 빵이다'
얼마나 고마운 말씀인지요.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모시고 영원한 삶을 살아 갈 때 더 이상 배고픔도 목마름도
없습니다.
순교자들의 후예답게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습니다.
.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이런 하늘에서 내려 온 하느님의 빵인 주님과 하나될
때
비로소 자아초월의 이타적, 천상적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1독서의 순교자 스테파노의 거룩한 죽음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
추호의 원망이나 증오가 없는 참 순수한 '영혼의
기도'입니다.
주님과 하나된 '사랑의 기도'입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의 깊은 일치를 보여주는 스테파노의
임종기도입니다.
.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오묘한 구원 섭리는 이미 사울을 예비하고 있음을
봅니다(사도8,1ㄱ).
.
부활하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시어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원하소서."(시편31,17).
.
아멘.
확신에 찬 믿음 -김대열 신부- 확신이란 보거나 만져서 확인을 한 후 갖게 되는 믿음이다. 그렇다면 확신에 찬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 앙이란 원래 보이지도 않는 것을 있다고 하고, 들리지도 않는 것을 들린다고 하는 세계를 말한다. 우리는 그런 신앙의 세계에 살고 있다. ‘신앙이 깊다.’ 또는 ‘신앙이 얕다.’와 같은 표현이 가능한 것은 바로 확실히 보이고 들리는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 리 각자의 신앙은 어떠한가? 확신에 찬 신앙이라 생각하는가? 아니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가? 우리 신앙은 언제나 부족하다. 그것이 올바른 태도다. 하지만 부족함을 떠나서 우리는 확신에 찬 신앙을 희망해야 한다. 성체를 모실 때 진심으로 예수님의 몸을 모시는 우리여야 한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확신해야 한다. 비록 신앙이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어도, 그분께서 주신 마음을 통해서 그분을 느낄 수 있음을 우리는 확신해야 한다.
올 바른 일을 했을 때,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었을 때, 여러 어려움을 극복했을 때 주어지는 행복의 느낌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의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 그분의 사랑을 체험할 때 비로소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더욱 확신에 찬 믿음을 달라고 청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인생이라는 도정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도일지도 모른다.
-조명연신부- 지난달에는 사순피정을 위해 일주일 동안 미국 시카고를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이번 달에는 거의 2주 동안 유럽 성지순례를 다녀왔지요. 이런 저를 보고서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세요.
“신부님께서는 정말로 좋으시겠어요. 외국도 많이 돌아다니시고요.”
그 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은 상당히 불안했었습니다. 우선 사순피정을 위한 일주일 동안의 미국 시카고 일정이었지만, 사순시기라 할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강의, 성소국의 일 등.... 자리를 일주일 동안 비운다는 것이 무척이나 부담되었었지요.
부 활을 시작하면서 떠난 유럽 성지순례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곧바로 예비신학교 모임, 신학교 축제와 성소주일 행사 준비로 인해서 할 일들이 많았거든요. 특히 남북 간의 긴장상태로 인해서 더욱 더 자리를 비운다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러나 이 모든 일정을 마친 지금을 돌아보니, 제가 없어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더군요. 바쁜 사순시기도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며, 부활 이후 준비해야 할 많은 것들 역시 문제없이 차곡차곡 잘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금방이라고 전쟁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이 역시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걱 정과 불안 속에서 힘든 상황에 내게 곧바로 닥칠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지만, 그러한 생각 안에서만 머물 뿐 정작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을 때가 더 많았음을 깨닫게 되네요. 그렇다면 걱정과 불안을 가지고 힘들게 살아가야 할까요? 아니면 좋은 생각과 긍정적인 마음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까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우리들 모두를 참 행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인 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먹고 마시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 외의 것은 어쩌면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지요. 그런데 그 근본적인 문제를 완벽하게 해주신다는 것, 바로 우리 모두가 참으로 행복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러한 주님의 품에 머물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것보다도 부차적인 것들에 대한 끊임없는 욕심으로 인해 괜한 걱정과 쓸데없는 불안한 마음을 항상 간직하면서 주님께 요구만 할 뿐입니다.
지 금 제가 쓰고 있는 안경은 다초점 렌즈입니다. 즉, 렌즈의 윗부분은 먼 곳을 보기 위해, 그리고 아랫부분은 가까운 곳을 잘 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종종 초점이 잘 맞지 않아서 얼굴과 눈을 움직여 초점을 맞춥니다. 안경 자체가 저절로 움직여서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초점을 맞추라고 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 내게 초점을 맞추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울한 사람은 과거에 살고, 불안한 사람은 미래에 살고, 평안한 사람은 이 순간에 산다(노자). 아버지 제가 아는 지인이 보내 주신 글입니다. 혼자만 간직하기가 아까워서 이 지면을 통해서 여러분들께 전해 드립니다.
'불가능합니다.'라고 하면, '나는 가능하다.'(루카 18,27)라고 하십니다. '너무 지쳤어요.' 라고 하면,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30)고 하십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라고 하면, '내가 너를 끝까지 사랑한다.'(요한 13,2)고 하십니다. '전 너무 연약해요.' 라고 하면,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2코린 12,9)라고 하십니다.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라고 하면, '내가 네 앞길을 곧게 해 주시리라.'(잠언 3,5-6)고 하십니다. '제 자신을 용서 못하겠어요.' 라고 하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겠다.'(1요한 1,9)라고 하십니다. '홀로되는 것에 지쳤어요.' 라고 하면 '내가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주겠다.'(히브 6,14)라고 하십니다.
이런 멋진 분을 나는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놀랍지 않나요?
오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축복을 가득히 받으소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 -김대열신부- 확신이란 보고나 만지거나 해서 확인을 한 후 같게 되는 믿음이다. 그렇다면 확신에 찬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렇다. 신앙이란 원래 보이지도 않는 것을 있다 하고, 들리지도 않는 것을 들린다고 하는 세계를 말한다. 그런 신앙의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신앙이 깊다.” 혹은 “신앙이 얕다.”와 같은 표현이 가능한 것은 바로 확실히 보이고 들리는 것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본다. 우리 각자의 신앙은 어떤가? 확신에 찬 신앙이라 생각하는가? 아니면 모자란다고 생각하는가?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모자란다. 그것이 올바른 태도이다. 하지만 모자람을 떠나서 우리는 확신에 찬 신앙을 희망해야 한다. 성체를 모실 때 진심으로 예수님의 몸을 모시는 우리여야 한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확신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어도, 그분께서 주신 마음을 통해서 그분을 느낄 수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올바른 일을 했을 때,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었을 때, 여러 어려움들을 극복했을 때 주어지는 행복의 느낌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의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 그분의 사랑을 체험할 때 비로소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보다 확신에 찬 믿음을 달라고 청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인생이라는 도정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도일 지도 모른다.
사랑하면 이해됩니다 -양승국신부- 요즘 계속되는 복음 말씀의 주제는 ‘생명의 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몸을 생명의 빵이라고 소개하면서 가까이 다가와 원 없이 먹으라고 초대하십니다. 당신의 피를 구원의 피라 하시며 마음껏 마시라고 안내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많 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마디 그대로 해석해서 초대교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인육을 먹는 식인종으로 오해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아무튼 너무나 심오해서 그런지 백번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소개하신 예수님의 말씀 보다 진지하게 묵상해봐야겠습니다. 한 의심 많은 신자가 영성이 깊은 사제를 찾아와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 질문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놀림감으로 삼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신부님, 어떻게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거 완전 거짓부렁이죠?” 그러자 사제가 진지하게 응수했습니다. “그건 일도 아니랍니다. 당신도 당신이 섭취한 음식을 살과 피로 별로 힘들이지 않고 잘 변화시키는 마당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똑같은 일을 못하실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남자는 순순히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그토록 작은 면병 속으로 쏙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사제의 대답은 명품이었습니다. “당신 앞에 펼쳐진 광활한 대자연의 풍경이 당신의 단추 구멍만한 눈 속으로 쏙 들어가는데. 어찌 그게 불가능하겠습니까?” 그래도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널린 수많은 성당 감실 안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습니까?” 사제는 작은 손거울을 하나 가져와 그에게 들여다보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 손거울을 바닥에 던져 깨트려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이 의심 많은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얼굴은 하나뿐이지만 이 깨진 거울 조각마다 당신의 얼굴이 동시에 비치고 있는 것, 안보이시나요?” 참 으로 이해하기 힘든 ‘생명의 빵’과 관련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전혀 납득하기 힘든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좀 더 사랑하면 이해가 됩니다. 좀 더 마음을 정화시키면 이해가 가능합니다. 동료들과 이웃들을 향해 좀 더 나누고 헌신하고 봉사하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신앙 의지와 불신 의지 -김-선신부=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군중이 하는 이 말이 오늘 제게는 믿지 않으려는 말로 들립니다. 이런 질문은 매우 무도한 질문입니다. “믿음이 부족한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믿고자 묻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믿을 수 없고, 믿을 생각도 없는데 어떻게 믿게 하겠냐는 도발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의 의지가 아니라 불신의 의지인 것입니다. 제 생각에 불신의 의지는 교만과 비례합니다. 교만할수록 자기 밖에는 아무도 믿을 수 없고, 교만할수록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이 좁아집니다. 사실 신앙의 의지가 있고 겸손하다면 모든 가능성에 열려 있기에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표징은 널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표징을 <일으키라고> 하는데 신앙의 의지를 가진 사람에게는 표징을 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싱싱하게 살아있는 하느님의 표징은 때려죽여 내버려두고 또 다른 표징을 새로 일으킬 것까지는 없겠지요.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표징이 널려 있는데도 거기서는 하느님을 못보고 하느님의 또 다른 표징을 <일으켜> 보여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널려 있는 물건을 놔두고 이것은 이래서 싫다, 저것은 저래서 싫다고 모두 퇴자를 놓으면서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을 내놔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또 이런 것과 같습니다. 입을 꽉 다물고 있으면서 맛보게 하라는 것이며 귀를 완전히 틀어막고 있으면서 듣게 하라는 것이고 눈을 질끈 감고 있으면서 보게 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눈을 감고 보게 하라니 이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볼 마음이 없으면서 보게 하라니 이런 생떼가 어디 있습니까?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스테파노는 하늘을 유심히 보았다고, 그랬더니 그의 눈에는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보였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스테파노가 그것을 “보십시오.”라고 사람들에게 권하니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보라는 말은 귀를 막고 듣지 않으면서 봐야 할 하늘은 보지 않고 스테파노를 증오에 가득 차 바라봅니다. 우리가 하늘을 못 보는 또 다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교만도 우리로 하여금 못 보게 하지만 증오도 그렇습니다. 증오로 누군가를 보는 것은 애착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미운 그 사람만 보이고 그 안에 계신 하느님은 보지 못하게 합니다. 교만으로 또는 증오로 널려있는 하느님의 표징들을 보지 못하면서 또 다른 표징을 <일으켜> 믿게 하라고 억지를 부리고 생떼를 쓰는 것이 우리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