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천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지 금은 진리를 감당할 수 없다. 때가 되면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오시어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성령은 어떤 분인가? 성령은 하느님의 영혼이요, 얼이다. 하느님의 속마음이다. 모든 비밀을 담고 있는 내면의 회로를 우리가 알 수 있게 해주신다는 약속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의 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단다. 직원들을 채용하여 일을 시키면서 자신이 그들 처지일 때의 속마음을 보게 되었단다. 사람의 마음은 이처럼 그 처지가 돼보면 알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영혼 속사정을 우리가 무슨 수로 알겠는가? 그분이 직접 알려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분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가? 다행스럽게도 그분이 당신의 영을 보내시어 우리에게 당신 마음을 알려주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시면 더 이상 왜냐고 물을 필요가 없어진다. 하느님의 비밀을 알게 된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보시듯 나와 이 세상을 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알면 사랑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시면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이 밖에서 부과된 의무가 아니라, 내면에서 우러나오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은 우리 혼에 불을 붙여주실 것이다. 내 영혼의 심지에 불을 당겨주실 것이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도록 영안을 뜨게 해주실 것이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새삼 기도하고 싶다.
‘오소서! 성령님, 제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제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조명연신부-
저는 1989년에 그토록 가고 싶었던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입학 환영식 때, 어떤 선배님이 제게 이렇게 묻더군요.
“너 그러면 언제 신부가 되는 거야?”
“정상적으로 될 수만 있다면 1999년에 신부가 될 것 같습니다.”
이에 그 선배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1999년이 올까? 더군다나 1999년에 인류가 멸망한다고 하잖아. 어떻게 하니?”
10년이라는 시간, 그때는 정말로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더군다나 그 당시 한창 유행처럼 퍼졌던 노스트라다무스의 인류 멸망에 대한 예언을 기억하면서 신부가 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1991 년 7월에 저 역시 대한민국의 건강한 남자로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한 고참이 제게 제대가 언제냐고 묻더군요. 저는 “네. 1994년 1월 제대입니다.”라고 씩씩하게 말했습니다. 이 고참은 크게 웃으면서, “1994년 1월? 그날이 올까?”라고 말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정말로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었습니다(더군다나 지금이야 군복무 기간이 21개월이었지만, 제가 군복무 할 때에는 30개월이었거든요).
‘그 날이 올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이 2013년이니까 어떻습니까? 오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났습니다. 이렇게 그날은 분명히 옵니다. 문제는 지금이라는 현재에는 그 시간이 너무나도 멀게 느껴진다는 것이지요.
너 무 까마득하다고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또한 내가 목표로 하는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포기해버리는 바보 같은 모습 역시 갖춰서는 안 됩니다. 계속해서 미루거나 또 포기해버리면 미래의 멋진 내가 존재할 수 없음을 기억하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미루거나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말처럼 쉽지는 않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도울 협조자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 협조자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진리의 영인 성령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진리의 영인 성령의 이끄심에 따를 때, 절대로 미루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이며 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사 실 성령의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 외의 또 다른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제자들이 깨닫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도록 도와주고 격려하여 주시는 일입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길로 제자들을 이끄시는 인도자 역할을 하기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어,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 진리의 영인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바로 나를 높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높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움은 새로운 곳에 없다.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서는 ‘세상에 없는 것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것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이명우).
권효가(勸孝歌)
어버이날을 맞이하여 어떤 지인으로부터 받은 글을 올립니다. 우리 모두 효도합시다.
부생모육(父生母育) 그 은혜는 하늘같이 높건만/ 청춘남녀 많은데도 효자효부 드물구나.
출가하는 딸아이는 시부모를 싫어하고/ 장가드는 아들네는 살림나기 바쁘도다.
제자식이 장난치면 싱글벙글 웃으면서/ 부모님이 훈계하면 듣기싫어 외면하고
시끄러운 아이소리 듣기좋아 즐겨하며/ 부모님이 두말하면 잔소리라 관심없네.
제자식의 오줌똥은 손으로도 주무르나/ 부모님의 흘린침은 더럽다고 멀리하고
과자봉지 들고와서 아이손에 쥐어주나/ 부모위해 고기한근 사올줄은 모르도다.
개가아파 쓰러지면 가축병원 달려가며/ 늙은부모 쓰러지면 노환이라 생각하네.
열자식을 키운부모 한결같이 키웠건만/ 열자식은 한부모를 귀찮다고 생각하네.
자식위해 쓰는돈은 계산없이 쓰건만은/ 부모위해 쓰는돈은 계산하기 바쁘고나.
자식들을 데리고서 바깥외식 자주하며/ 늙은부모 모시고는 외식한번 힘들구나.
살아생전 불효하고 죽고나면 효심날까/ 예문갖춰 부고내고 조문받고 부조받네.
그대몸이 소중커든 부모은덕 생각하고/ 서방님이 소중커든 시부모를 존중하라.
가신후에 후회말고 살아생전 효도하면/ 하늘에서 복을주고 자식에게 효를받네.
오월 회상
-김대열신부-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요한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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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회상
언제부턴가 낯선 얼굴이 되어버린
오월 하늘을 쳐다봅니다.
깡충 바지 철부지 때
울 엄마 손 붙들고
성모 엄마 찾아가던
그 설렘이 기억납니다.
묵주 한 알 소망 심고
묵주 두 알 눈물 담아
기도하는 울 엄마가
무척이도 아름답던
그 어린 미소가 기억납니다.
울 엄마 주머니 속
십 원짜리 동전 몰래
딱지 사고 구슬 사고
동무들에게 인심도 주고
코 묻은 손 모아
성모 엄마한테 기도하다
미안한 마음 울어버린
그 순수함이 기억납니다.
울 엄마가
조그만 다락방 조그만 불빛아래
성모 엄마 얘기할 때
절로 붉어졌던
그 어린 볼이 기억납니다.
"엄마! 성모 엄마가 높아요?
하느님 아빠가 높아요?"
개구쟁이 동심 어린 물음에
말없이 웃어주던
울 엄마의 그 얼굴이 기억납니다.
마루 위 꽃병 속 이름 모를 꽃
들킬세라 짧은 키 조심 조심
한 송이 뽑아
성당 마당 성당 엄마
부끄럽게 내밀던
그 두근거림이 기억납니다.
언제부턴가 낯선 얼굴이 되어버린
오월 하늘을 쳐다봅니다.
세월이 늙었고
울 엄마도
꼬마 친구도
이미
늙어버린 세월입니다.
광주 무등산 통곡 소리도 들었고
기름 불꽃 사라져간 마음들도 만났고
소꿉동무 정님이가
허리 띠에 목을 맨 것도
알아버린
그런 나이가 되어버렸습니다.
키도 컸고
마음도 컸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올려보는 하늘이 서럽습니다.
세상의 아픔을 생각하는 지금보다는
성모 엄마 보고 싶어
꽃 한 송이 몰래 꺾던
때묻은 작은 손이
한 가슴 가득 그립습니다.
언제부턴가 낯선 얼굴이 되어버린
오월 하늘을 쳐다봅니다.
1991년 5월 김 대열 사베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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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중순부터 계속해서, 미사 복음이 요한복음에서 선택되어 읽혀지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달력이 부활을 전후하여 항상 요한 복음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마 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 네 개의 복음서는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지요. 그 중, 서술방법이나 주제가 가장 다른 것이 요한복음서입니다. 그래서 4복음 중 요한복음만을 제외한 마태오, 마르꼬, 루카복음들만을 보는 관점이 같다 해서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서의 많은 특징들 중 하나는 말이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같은 주제의 내용이 많다는 이야기지요.
이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은 그날의 복음 중 한 구절을 선택해 묵상하는 형식을 취해왔는데, 오늘의 복음 역시 어제와 그 이전의 내용과 별 다른 내용이 없네요.
그래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20년이 넘은 글 하나 소개하고 오늘 하루는 도망가고자 합니다.
참, 오늘은 어버이날이지요. 모든 부모님들께 진심으로 축하 인사 드립니다.
저 역시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께 전화라도 한 통 드려야겠습니다
그분이 가시는 그 길로 나아갑시다.
-김기현신부-
지난 번에 땡큐라는 프로그램을 봤는데 여배우 장서희 씨가 대략 이런 얘기를 했었습니다.
“나는 아역 탤런트로 방송 생활을 시작했는데, 오랜 무명 시절을 겼었다. 그래서 연기 외에도
내 얼굴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리포터로도 활동을 했다. 많이 힘들었는데 오디션도
잘 되지 않았다. 매번 떨어졌고, 맡게 되는 역할이 남의 남자 뺏는 역할이나, 착하고 예쁜 주
인공 옆에서 심술부리는 역할들을 주로 많이 했다. 그래도 그 역할을 열심히 하니 친군데 착
한 친구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계속 친구 역할을 전전하다가 드디어 서른 한 살에 20년 만에 ‘인어아가씨’ 라는 방송
에 주연을 하게 됐다. 그 방송을 통해 많은 인기를 얻게 되고 큰 상도 타고, 지금은 중국에서
활동도 하고 있다. 남들은 중국에서 활동하기에 늦은 나이가 아닌가.. 하지만, 나는 늦은 나
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 긴 마라톤을 뛰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
향인 거 같다. 계속 가야 할 길을 가다보면 좋은 일이 있을 거 같다.”
‘방향이 중요하니 힘들어도 가야 할 방향으로 계속 가라~’ 하는 이야기를 했던 거 같은데요.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방향을 놓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
다. 오늘 복음 서두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
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차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 그 방향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근심 속
에 싸여 있었던 거 같은데요. 우리에게도 그 비슷한 모습이 있는 거 같습니다. 신자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나 지금 너무 아파.. 괴로워.. 바뻐.. 힘들어..’ 하고 자기 근심 속에 싸여
있는 분들을 많이 보게 되지, 아프고 힘든 가운데서도 그분이 어디로 가시는지 그 길을 찾고
따라 나서는 분들을 많이 보게 되는 거 같지는 않습니다. 힘들어도 가야 할 방향을 잃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면, 그분이 주시는 선물과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될 터인데, 대부분은 근심에 눌
려 그 방향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거 같습니다.
그렇게 '근심과 걱정에 파묻혀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제가 기타를
배우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타도 못 치는 제가 아이
들에게 기타를 가르쳐 주기 시작했는데요. 아이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손가락
아프다..’ 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보통 연습을 20~30분 하기 힘든 거 같은데요. 제 생각에
아픈 거를 좀 참고 따라와 주면, 아이들에게서 기타 치며 노래하는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을
거 같은데.. 따라와 주는 모습보다는 아파하는 모습을 볼 때가 더 많은 거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당신을 닮은 더 영광스러운 모습을 바라보시고, 우리가 당
신을 따라와 그러한 모습이 되길 바라실 텐데, 예수님께서 보시는 모습은 따라와 주는 우리
의 모습보다는 아프고 힘들고 어렵다고 주저앉아 있는 우리의 모습일 때가 더 많을지도 모르
겠습니다.
<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
-전삼용신부-
누구나 자기가 지닌 경험, 혹은 지식수준에 따라 받아들이고 이해하게 됩니다. 선생님은 선생님 생각이 있고 아이들은 아이들 생각이 있습니다.
선생님이 문제를 냈습니다.
‘술에 취해 거리에서 크게 소리치거나 노래를 부르는 행위’를 일컫는 ‘가’로 끝나는 사자성어는?
답: <(고)(성)(방)가>
아이들 재미있는 오답들.
고음불가
이럴수가
미친건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짜 압권인 오답
아빠인가
아이들은 답을 알지 못하여 자기 수준에서 대답한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그릇이 있습니다. 자기의 한계가 있고 자기의 수준이 있습니다. 가끔인 위의 예와 같이 재미있게 끝나기도 하지만, 가끔은 자기의 ‘수준’을 알지 못하면 커다란 위험에 처하는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엄마 젖을 먹는 아기가 딱딱한 견과류나 떡과 같은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자칫 목에 걸리면 생명이 위험해 질 수도 있습니다. 어른도 떡이 목에 걸리거나, 낙지가 목에 걸려 생명을 잃기도 합니다. 그래서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확실하지 않으면 어떤 행동을 취하기보다는 행동을 취하지 않는 편이 더 안전합니다.
전에 들은 가슴 아픈 사연이 떠오릅니다. 한 형제님이 친구들과 있다가 갑자기 간질발작 증세를 보였습니다. 주위에 있던 친구들이 그 형제님을 돕겠다고 응급처치로 흉부압박을 하였다고 합니다. 결국 그 형제님은 목숨을 잃었는데, 그 원인이 응급조치를 잘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간질은 발작을 하면 압박을 가해선 안 되고 그냥 발작이 끝날 때까지 놓아두어야 한다고 합니다. 내가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것을 하다가 보면 이렇게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안 좋은 일이 벌어지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실 말씀이 아직도 많이 있지만 아직은 제자들이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제자들도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수준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님이 오시면 모든 것들을 알려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진리의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해할 능력을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충만한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성경 하나를 놓고 수많은 해석들이 오고갑니다. 그래서 많은 종파로 그리스도교가 갈라졌습니다. 모두가 성경해석의 차이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각 종파도 각자의 한계 안에서 진리를 해석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요? 만약 성령님이 도와주셨다면 해석은 하나만 정답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도 한 분이시고 진리도 하나이기 때문에 같은 말씀에 서로 다른 해석을 일러주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가톨릭교회의 성경해석이 성령의 도우심을 통한 가장 권위가 있는 해석이라는 것을 증명해낼 수 있을까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성경을 정해서 지금 이대로 묶어놓은 권위가 바로 가톨릭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신약성경을 권으로 정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여기저기에서 서로 다른 정경목록을 구성하였고, 또 사실은 그 이후에도 그것을 받아들이려하지 않는 세력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복음들(예: 야고보 원복음서, 베드로 복음서, 막달레나 복음서, 유다 복음서 등)과 더 많았던 서간들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었음을 명확히 짚어낼 수 있다는 것은 교회가 그만한 진리를 지니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문제를 풀 때 많은 예문 가운데서 어떤 것이 정답인지 오류 없이 하나하나 짚어낼 수 있는 완전한 진리를 알고 있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당신의 성령을 주신 교회의 권위에 따라서만 성경을 해석하지 자유해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할 그릇이 될 수 없음을 겸손되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충만한 성령의 도우심으로 온전한 해석과 가르침을 줄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정한 성경 목록은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정해준 교회의 권위는 무시하고 자신들 뜻대로 각자 해석하겠다는 것은 교회가 성경을 정할 당시의 성령님이 이제는 자기 자신들에게 옮겨오셨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갈라진 그리스도교에서 더 이상 분열이 없었어야 했는데 그 이후로도 너무 많은 분파들이 생겨난 이후가 바로 갈라져나간 교회들에 충만한 진리의 영이 함께하지 않으셨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로 일치시키는 분이시지 분열을 일으키는 분은 아니신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지 못하면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생각을 각자가 오류 없이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성령이 충만하고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성경을 쓰지 않으시고 교회를 세워 그 교회에 당신 진리를 보존할 수 있도록 성령님을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 교회의 권위에서 나온 하나의 믿을 교리와도 같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믿으면서 그 성경을 믿을 교리로 선포한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모순입니다.
년 동안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하물며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온전히 해석할 수 있다는 교만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나의 사랑이 너에게 사랑이 될 때까지
-김찬선신부-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글을 읽을 때도 그렇지만
요한복음을 읽을 때면 주님께서는 너무 말씀이 많다는 느낌,
이렇게 말해도 좋은지 모르지만, 참 수다스러우시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것이 그런데 사실은 사랑이 많은 사람의 특징이지요.
사랑이 식거나 없을수록 할 말이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사랑이 많으면 이것도 유익하고, 저것도 유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할 말이 아직도 많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심은 사랑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할 말이 아무리 많아도 그 말을 삼키시는 것도 사랑의 표시입니다.
우리는 정말 해주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랑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속 시원히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속 시원히, 하고 싶은 말 다하는 것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고 틀림없이 나를 위한 것이고,
이런 사랑은 사랑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당신이 하고픈 말 많지만 그것을 다 하면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이 너에게 사랑이 될 때까지
우리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켜야 합니다.
사랑은 나의 때가 아니라 너의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너의 때>가 바로 성령의 때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이라고 하시는데
나는 이때라고 생각하지만 성령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성령께서 말씀하시도록 자리를 내드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