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서양, 중세와 근대, 과거와 현재가 교묘하게 뒤섞인 그곳이 바로 이스탄불이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영화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부가 살아 숨쉬는 곳이며 지정학적 특성상으로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갖은 변화를 맞이 했던 곳이다.
터키의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인 이곳의 옛 지명은 비잔티움이었다. 기원전 600년 명성을 날리던 메가리아인인 비자스에 의해 창건되어, 그의 이름을 딴 비잔티움은 보스포러스 해엽을 관장하는 훌륭한 자연 항이다. 콘스탄틴 대제가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히포드럼에서 도시의 완공식을 갖고 '콘스탄틴의 도시' 라는 뜻의 콘스탄틴노플로 부르기 시작했다. 기독교 박해시대를 거쳐 기독교 국가로서 123년 동안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 계속되다가 1453년 5월 29일 터키족이 정복자 마호멧 술탄 영도하에 침입, 용감하게 방어했으나 결국 망하고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500년간 사용될 때는 도시명을 이스탄불로 바꾸고 회교국가(전체 인구의 90%)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스탄불은 비잔틴 제국의 기독교 문명과 오스만 제국의 회교 문명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도시이기도 하다.
이스탄불은 아주 독특하다. 다른 어느 곳도 역사 속에서 그런 굉장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없는 지정학적 위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두 거대한 대륙이 만나는 중요한 전략적 위치 때문에 이스탄불은 군사,종교,상업, 문화적으로 세계 역사의 초점이 되어 왔다.
서구의 기독교가 흔들릴때 고대 제국의 수도 시민들은 콘스탄틴의 멸망을 환영했다. 비잔틴 제국의 최후 영도자였던 노타리스 대공은 가톨릭과 그리스정교 간의 수세기에 걸친 반목을 언급하면서 '누가 추기경의 모자보다 터키 터반을 더 좋아하지 않겠는가?' 라고 공공연히 기뻐할 정도였다.
이 도시는 세워진 후 1000년이 지난을 때 오토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 이 되는 새로운 역활을 맡게 되었다. 웅장한 성 소피아 사원은 모스크로 변모 되었다. 알려진 대로 정복자 메멧은 귀중한 모자이크 작품들을 파괴하기 보다는 그 위에 석회를 덧 바름으로써 그대로 보존 시켰다. (1933년에 아타튀르크의 명령에 따라 성 소피아 사원은 오늘날의 박물관이 되었다)
또한 메멧은 부의 극치를 이룬 톱카피 궁을 건립하였다. 1465년에 완공된 이 보물로 치장된 복합 구조물에는 하렘까지 있어 약 400년간 오토만 제국의 중심이 되었다. 또 하나의 경외감을 일으키는 건축물로는 푸른 모스크라고 불리우는 술탄 아멧 모스크이다. 톱카피궁 근처에 술탄 아멧 1세에 의해 1609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한 이 모스크는 6개의 웅장한 첨탑을 가지고 있으며 기둥과 돔 벽에 명암이 있는 99가지의 푸른 타일을 사용하므로서 이처럼 설명적인 이름을 얻었다.
이국적인 것으로 가득한 이 도시에는 그 외에도 볼 것이 많이 있다. 대규모 바자르, 향신료 시장, 즐비한 상점들, 2층으로 된 갈라타 다리, 흰 대리석으로 장엄하게 건립한 중세의 탑, 은빛 넘실거리는 보스포러스 해엽을 높다랗게 가로지른 현수교.... 어디를 여행하든 마로우의 '영웅과 리앤더'에 나오는 구절 ' 첫 눈에 사랑하지 않은 것을 누가 사랑 하겠는가?' 를. 이 이스탄불이라는 도시에서는 절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 성 소피아 성당 (Aya Sophia Museum)
성스러운 지혜' (하느님의 지혜인 그리스도)라는 뜻의 성소피아 성당은 세계 건축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중의 하나로 이스탄불의 상징이 된다.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이 지어지기 전까지 규모면에서도 세계 최대를 자랑하던 성소피아 성당은 오늘날까지도 비잔틴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성소피아성당의 중앙에 서면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가 공존하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는 역사적인 장소임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통로와 중심, 혹은 통로와 목표가 완벽하게 통합되어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지상의 순례자로서 영원한 하느님을 향하는 길목에 서 있다는 근본적인 그리스도교 정신의 표출이라 하겠다.
비잔틴 제국의 가장 주목할 만한 황제인 유스티니안 황제의 명에 의하여 수학자이며 건축가, 구조학자인 안테미우스(Anthemieus of Tralles)와 이스도루스(Isidorus of Mulet) 가 532년부터 536년에 걸쳐 건축되었다.
성 소피아란 하나님의 지혜란 뜻으로 그리스도를 지칭하며, 성소피아 성당은 세계 건축사상 가장 뛰어난 건축물의 하나로 평가된다. 다중 돔형의 이 사원은 건축하는데 비교적 짧은 시일이 걸렸으나, 그 규모는 엄청난 것으로 전체적 직사각형의 크기는 71 X 77 미터에 달하며 돔의 직경이 약 30m로 바닥에서부 터 56m나 치솟아 있으며, 중앙부분의 거대한 돔 둘레에는 40개의 창문이 있다. 사원의 내부는 세계적인 수준의 최고급 대리석 유물 및 장식 모자이크로 채웠다.
성소피아 성당은 통로와 중심, 혹은 통로와 목표가 완벽하게 통합되어 있는데 이것은 자신이 지상의 순례자로서 영원한 하느님을 향하는 길목에 서 있다는 근본적인 그리스도교 정신의 표출이라 하겠다.
1453년 오토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모스크로 개조되었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비잔틴 시대가 시작되었던 시절의 콘스탄티노플은 로마와 닮아 있었다. 비잔틴은 기독교 국가였고, 그래서 도시 안에는 기독교의 상징물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도시의 건설자인 콘스탄티누스황제는 성 소피아 사원의 건설에 착수 했다. 아이야(Aya)는 '신성한 지혜' 란 뜻으로 이 사원은 비잔틴 시대의 대표적인 사원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교회당이 다. 성 소피아 사원은 그후 532년에 일어난 대폭동 시의 화재로 완전히 불타버린 것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532-537년 사이에 완벽하게 재건된 것이다. 소피아 성당의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건물안으로 들어오던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이같은 훌륭한 위업을 완성하게 해주신 능가했소"라고 흥분되어 외칠 정도로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이다. 762년까지 전 기독교의 본부로 사용되었으나 서로마의 가톨릭과 분리된 이후에는 그리스 정교의 총 본산으로 사용되 었다.
그러나 15세기 중엽(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한 이슬람 제국인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성 소피아 사원은 기독교의 교회당이 아니라 이슬람 의 모스크로 바뀌어 500여년 회교사원으로 사용되었다. 성당밖에 세워진 4개의 첨탑은 시대에 따라 각기 형태를 달리하면서 세워졌다. 15층 높이에 해당하는 56미터 높이에 거대한 중앙 돔과 많은 돔을 갖고 있는 이 성당은 건축학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물의 표본이며 회교 건축 양식은 물론 유럽의 각종 건축 양식에 직접, 간접적으로 막 대한 영향을 미쳤다. 비잔틴 시대의 내부벽화는 모두 회칠로 감춰져 있 고 일부만이 회칠이 제거되었다. 성당벽에는 모자이크 그림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성화들이 있는데 이것이 후일 기독교 성화에 표본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 지하 물 저장고 (Yerebatan Sarayi)
유스티니아누스가 532년에 완공한 저수장으로, 도시민의 식수 문제를 해 결하기 위해서 이곳에서 19킬로미터 떨어진 벨그라드(Belgrad)초원에서 물을 공급받아 저장했다. 길이 140미터, 폭 70미터, 높이 8미터이고 336 개의 기둥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어 기둥 숲을 이룬며 80,000톤의 저수량을 갖고 있다.
이스탄불은 많은 공격을 당했었기 때문에 언제나 충분한 물의 공급이 필요했던 도시였다. 따라서 비잔틴 제국 시대에 지하 저수저를 많이 건축하게 되었다. 지하 궁전이라 불리우는 이 지하저수지는 건물의 양 구석의 기둥의 받침은 메두사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이를 제조한 사람들이 이단을 믿지않는 그리스도교인임을 알 수 있다. 물 속의 잉어 조각은 장식적 효과를 주는 것인데 이는 오염으로부터 물을 보존한다는 의미를 띄고있다. 어떤 이들은 비잔틴 인들이 실제 이 저수지에서 물고기를 길렀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 블루모스크 (Sultannahmet Camii)
술탄 마호메트 1세가 이슬람 세력의 우위를 상징하기 위해 성 소피아 성당의 건축 양식을 모방 발전시켜 1609-1616년에 유명한 건축가 시난의 제자인 메흐멧아에 의해 완성된 모스크. 내부의 벽을 장식한 2만 1천 개의 푸른 타일 때문에 푸른 모스크라고 한다. 모스크에는 첨탑이 네 개 있는 법인데, 여기에는 예외적으로 첨탑이 6개 있다.
술탄 아흐멧 모스크는 정확히 비례에 의한 6개의 탑이 인상적인 돔과 잘 조화되어 17세기 터키인들의 이슬람 건축 예술의 우수성을 대표적으로 반영해 주는 건물이다. 맞은편에 있는 성 소피아 성당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우위를 상징하기 위해 그 양식을 모방, 발전시켜 건축한 독특한 형상의 회교사원이다. 성원 내부의 위쪽 벽을 뒤덮고 있는 푸른 색상의 타일 장식과 중앙 돔으로부터 나 있는 260개의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어우러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한 장관을 연출해 내고 있는데 이로 인하여 이 성원은 "푸른 모스크"(Blue Mosque)라는 애칭을 갖게 되었다.
정식 명칭이 '술탄 아멧 모스크'인 블루 모스크는 톱카프 궁 근처에 술탄 아멧 1세에 의해 1609년부터 건립되기 시작 했다.
블루 모스크는 정확한 비례에 의한 6개의 탑이 인상적인 돔과 잘 조화되어 이슬람 건축 예술의 우수성을 반영해 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술탄 아멧 1세는 기독교의 소피아 사원을 능가하도록 지으라고 명령했고 성 소피아 사원 바로 건너편에 건립하였다. 이 모스크는 당시 유명한 건축가 이던 시난(sinan)의 제자이던 메흐멧 아가(Mehmet Aga)에 의해 1609 ~ 1617년에 지어졌다.
모스크 내부의 위쪽 벽을 뒤덮고 있는 푸른 색상의 타일 장식과 중앙 돔으로 부터 나 있는 260개의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어우러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한 장관을 연출해 내고 있으며, 기둥과 돔 벽에 명암이 있는 99가지의 푸른 타일을 사용함으로써 이 사원은 "푸른 모스크"(Blue Mosque)라는 애칭을 갖게 되었다. 그후 왕들은 이곳을 중요한 종교적 정책을 결정하거나, 종교적 축제를 거행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모스크안에서는 남자, 여자 모두 긴바지를 입어야 한다.
■ 톱카프 궁전
톱카프 궁(술탄 궁)은 터키어로 "톱"은 대포, "카프"는 문을 뜻한다. 이 곳은 1478-1853년까지 약 400년간 강대한 권력을 휘두르며 대제국을 다 스렸던 오스만 일족의 궁전이다. 이 제국의 영토는 발칸을 포함하여 빈에 이르고 북으로는 크레미야, 코카서스 지방, 동으로는 페르샤만에서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고 남으로는 챠드호에 이르는 북아프리카까지 이 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보스포러스 해협과 말마라 해, 골든 해협의 감면의 바다가 만나는 고대 비잔틴 성터 위에 위치한 이 궁은 70만 스퀘어 미터 면적을 갖고 있으며 1839년 새로운 궁전 돌 마바흐체로 옮길 때까지 22여명의 술탄과 그 여인들이 살았던 거주지이다. 단순한 궁전이라기 보다는 온갖 보물로 치장된 복합 구조물로 정원, 집, 도서관, 할렘까지 갖춘 400년간의 권력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오토만 제국의 술탄 메멧은 부의 극치를 이룬 톱카프 궁을 건립하였다. 1478년에 완공된 이 궁은 보물로 잔뜩 치장되었으며 복합 구조물에는 하렘까지 있고, 약 400년간 오토만 제국의 권력 중심이 되었다.
1478년 완공되 이 궁전은 역대 25명의 왕(술탄)이 거주하면서 새로운 궁전으로 옮겨지기까지(1853년) 오스만 터키제국 통치의 심장부로서 그 역사적인 중요성을 지켜왔다. 톱카프 궁에 거주하였던 첫번째 술탄은 쉴레이만 대왕이다. 이스탄불의 지평선을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장대하고 음향학적으로도 흠 잡을데 없는 슐레이마니예 모스크를 장식한 사람도 바로 그 였다. 이 모스크는 그의 우두머리 건축가였던 천재 시난에 의해 건립되었다. 시난은 톱카프 궁 이외에도 이스탄불의 각종 건축물 290채 이상을 건축했다고 전해진다.
이 궁전은 비잔틴 시대에 건립된 난공불락의 해안 성벽으로부터 뻗치고 무장이 단단히 되어 있는 5km의 성벽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므로 '톱가프'(대포문)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궁전은 궁정, 정자, 모스크 그리고 우물의 복합체로 크게 4개의 궁정과 하렘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1924년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는 이곳에는 왕족의 소유였던 도자기와 보석, 무기, 원고,서예품 그리고 많은 예술품들이소장되어 있다. 특히 술탄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던 방에는 사도요한의 두개골과 손 , 그리고 다윗왕의 칼, 요셉의 모자와 모세의 지팡이등 종교적인 유품들도 전시되고 있다.
이곳은 세계 최대의 도자기 박물관의 하나로 중국의 송청자, 명백자 및 청화백자, 청의 적, 녹자기, 일본의 이미라 자 기, 유럽의 각종 자기, 은제품 등 약 10,5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보석 관에는 세계에서 3번째 가는 86캐럿의 다이아몬드를 비롯, 세계 제일의 에머럴드(1320g), 6666개의 다이어가 박힌 48㎏의 순금 촛대, 마호APT의 보석 단검 등을 비롯하여 진기한 보석들이 버려진 유리조각만큼 전시되어 있다.
회교 성물관에는 이슬람교조인 마호켓이 생전에 사용하던 칼, 활, 의류, 도장, 턱수염, 머리털 등이 보존되어 있다. 이외에 왕자들의 교 실에 책과 연필도구, 의복관에는 역대 궁중 의상들이 전시되어 원시적인 직물기술이 발달을 엿볼 수 있다. 또 궁중 경비대들이 사용했던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고 술탄과 후궁, 내시들이 거쳐하던 금지된 별궁이 있으며 전성기에는 400여개의 방과 1,500여명의 후궁들이 이곳에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 그랜드 바자르 (Grand Bazaar)
성 소피아 사원 광장에서 투어리스트 인포메이션 센터 쪽으로 1km 채 안 된 지점에 이스탄불 대학이 있고 이 바자르는 바로 대학 앞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의 이름은 카파르 차르쉬로 골목길로 이루어진 이 시장 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시장으로, 일반인들을 위한 시장이 아니라 외국 관광객들을 위한 시장이다. 피혁제품, 보석제품, 골동품, 카펫, 의류 등으로 구역이 나뉘어져 있다. 가격이 상당히 비싸 물건을 살 때는 물론 깎아야 한다.
■ 돌마바흐체 궁전 (Dolmabahce Sarayi)
가득한 정원이란 뜻을 가진 돌 마바흐체 궁은 해변을 흙으로 메꾸고 세운 궁이다. 50만 금화, 현재 돈 5억 불에 맞먹는 기금으로 건립된 이궁은 1843년 부터 1856년에 걸쳐 지어진 궁전으로 오스만 터키제국 붕괴 후에는 터키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의 관저로 이용되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의 힘을 상징하는 이 궁전에는 43개의 홀과 285개의 방, 156개의 다양한 시계, 4톤과 2톤 중량의 샹들리에를 포함 36개의 샹들리에, 58개의 크리스탈 촛대, 560점 이상의 그림 등 손으로 직접 짠 대형 카페트 등이 있으며 내부 장식과 방들을 꾸미기 위해 14톤의 황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되었다.
오스만 터키 제국의 세럭이 급격히 악화되어 가는 시점에서 이를 만회 하고자 서구화를 추진하고 국력 쇄신을 도모하던 압두메짓 1세가 불란서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해 초호화판으로 이 왕궁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막대한 건축비 지출은 어려운 왕실 제정을 더욱 악화 시켜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촉진하였다. 이 궁전에 있는 모든 시계는 모두 9시 05분에 멈추어 있는데 이 시간은 1938년 11월 10일 아침 카멜 아타튀르크가 57세 일기로 돌마바흐체 궁 전에서 숨을 거둔 시간이기도하다.
■ 갈라타 탑(Galata Kulesi)
높이 68M의 9층탑으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는 총400M의 갈 라타교를 건너 신시가지쪽으로 15분쯤 내려가는 곳에 있으며 이 탑은 1348년 이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던 제노바 인들이 갈라타 지구를 방어하 기위해 만든 요새이다. 오스만 터키 시대에는 감옥으로 사용하기도 하 고 봉화대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 탑의 정상에서는 이스탄불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있고 8, 9층은 고급 식당과 나이트 클럽이 있어 이곳 에서 멋진 야경을 바라보며 식사를 즐길 수있다.
■ 코라 구세주 성당
CHORA의 구세주 성당은 터키어로 카리예자미라 불리워진다. CHORA의 의미는 IN THE COUNTRY이다. 내부에는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공생애 장면, 기적과 이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의 모습, 부할과 심판등 성경에 나오는 장면들이 상당히 많이 그러져 있다. 이 교회는 1500년에 모스크로 사용되었다가 미국의 비잔틴 협회에 의해 정리되고 (1948~ 1959)보존되어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알레기우스 1세의 장모 도우카니에 의해 11세기 후반(1077-1081)에 세워 졌다. 이곳은 건물 보다도 훌륭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로 더 유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어린 시절, 공생애와 기적들, 최후심판, 천사들 등 신약성서의 중요한 사건들을 이해하기 좋게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다. 이 교회는 1500년에 회교 사원으로 개조 되었다가 , 1984년부터 1954년에 걸쳐 미국의 비잔틴 협회에 의해 정리 보존된 후,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교회의 작품들은 예술적인 면에서 비잔틴 문예 부흥기의 초기 예술성을 잘 반영해 주는 작품들로 정평이 나있다. 사진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프레스코화
■ 니케아
고대도시 니케아는 현지명 이즈닉으로 이즈닉 호수의 동편 끝에 위치하고 있다. 선사 시대에도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있는 굉장히 비옥한 땅을 가진 곳으로서 지금도 수많은 올리브 나무와 이즈닉 호수의 갈대들이 우거져 있는 풍요로눈 시골 풍경을 볼 수 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그의 장군중의 하나인 안티고노스(Antigonos)가 BC 316년에 이즈닉 호수의 연안에 안티고니아 라는 도시를 세웠으며, 15년 후인 BC 301년에 그가 전사하자 이 도시는 승전한 장군의 처 Nike 의 이름을 따서 NIKAAIA로 명명 되었다.
또한 중요한 점은 로마시대 비두니아 주 (현 부루사 지역)의 변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 수많은 돈을 들여 건축한 극장이 지진으로 파괴되어 현재는 대부분이 땅에 묻혀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이 도시에서 AD 325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300여명의 종교 지도자들과 콘스탄틴 대제가 참석한 가운데 제1차 종교회의가 열려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이슬람의 세력이 확장되던 AD 718~727 사이에 니케아는 아랍 족에 의해 포위 되기도 했고, 우상타파주의 운동 시대 때인 에이렌 여왕은 전통적인 인물그림을 부활하는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AD 787년 니케아의 성 소피아에서 회의를 열기도 했다.
AD 740년 과 AD 1065년에 지진이 이 도시를 강타하여 도시가 많이 파괴되었다. 1075년에는 셀죽 터키가 이 도시를 22년간 점령했다가 비잔틴 제국에 다시 되돌려 주게 되고, 1204년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 했을 때 이 도시는 비잔틴 제국의 피난 수도로 약 60년간 사용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으로는 성 소피아 성당, 비잔틴 시대의 성벽 등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이즈닉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곳은 또한 도자기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 니케아 세계 공의회
예루살렘 사도 회의 다음 가는 최초의 교회 회의였던 니케아 공의회는 정통적인 신학 정립에 있어서 교회사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교회가 동과 서로, 그리고 개혁으로 갈라지기 전의 교회는 에큐메니칼한 교회, 하나의 교회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 후 그리스도 교 안에는 여러 교파가 대립되어 각각 자기 주장을 내세워 혼란을 거듭할 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하여 교회의 교리를 확립한 니케아 공의회는 에큐메니칼 공의회 였다.
이단 논쟁이 격화되고 교회가 분열되자 온 교회의 대표들을 한 자리에 모으기가 어려워져서 어떤 공의회가 진정한 에큐메니칼 공의회 인가가 분명치 않게 되었으나 대부분의 교회들은 첫 번째의 일곱 공의회를 에큐메니칼 공의회로 인정하고 그 공의회들로부터 나온 자료들과 가르침들이 교리와 신조의 기초로서 받아 들여 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 공의회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 (AD 325), 제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AD 381), 에베소 공의회 (AD 431), 칼게돈 공의회 (AD 451),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AD 553),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AD680~681), 제2차 니케아 공의회(AD 787)이다.
교회사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논쟁들 중에서 기독론 논쟁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논쟁) 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그 중 예수님의 신성을 확립한 이 논쟁은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니케아 회의(Nicea, 325년 5월)에서 일단락을 맺었는데, 이 회의는 318년 아리우스 (Arius)에 의해 발생한 아리우스 논쟁 때문에 소집 되었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물'이라는 주장을 하였고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스와 서신을 주고 받았으며 323년 알렉산더 감독에 의해 지역 주교관구에서 정죄 되었으나 논쟁은 깊어만 갔다.
314년 8월 1일 도나투스 논쟁을 중재한 바 있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논쟁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324년 9월에 감독 코르도바의 오씨우스를 알렉산드리아에 파송 하였는데, 그는 325년 초 안디옥을 거쳐 니코메디아에 이르는 과정에서 안디옥에 머물며 안디옥 회의를 열었는데 여기에서 아리우스와 카에사레아의 에우세비오스는 정죄되고 안디옥의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
황제는 도나투스 논쟁을 해결할 때처럼 교회의 분쟁을 중재하여 자신이 지켜온 로마 제국이 이분화 되는 것을 막고자 하여 로마 제국 전체의 감독들을 소집함으로써 최초의 세계교회 회의를 열게 하였다. 니케아 회의의 장소는 처음 앙카라로 예정 되었으나 후에 니케아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앙카라가 내륙이어서 참석자들의 여행에 어려움이 있고 황제의 거주지로부터 멀리 있었기에 황제 자신의 회의 참여에 효과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황제는 '공적인 길' (Cursus Publicus)을 제공하고 숙박과 음식을 부담하고 의사일정을 결정하였다. 회의는 325년 6월 19일 니케아의 황제의 궁에서 콘스탄틴이 참석한 가운데 시작되었고 8월 25일 폐회될 때까지 거의 두달간 계속되었고 318명의 감독들이 참석했다. 회의에 참석한 감독들은 세 개의 파로 나위어져 있었다. 가이샤라 유세비우스를 포함한 대다수의 중도파, 안디옥의 루시안에게서 공부한 아리우스와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이끄는 좌파, 그리고 정통 우파인 알렉산더와 아타나시우스 및 기타 소수파로 갈라져 있었다.
암브로시우스에 의하면 헬라어의 300을 가리키는 T 는 십자가를 의미했고 18의 수 IH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참석자의 수는 주님의 수난의 표식과 그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기에 주께서 회의에 계셨다고 하여 이회의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며, 십자가의 표식과 예수의 이름의 깃발을 높이 들고 이단자들인 아리우스주의자들을 제압하는 하나의 승리였던 것이다.
회의에서는 ① 부활절의 날자 (봄을 맞아 첫 번째 만월 후 첫 번째 주일 : 폴리캅과 소아시아 지방은 니산월 14월로 주장) ② 20개의 교회 계율 제정 (디오클레티안의 새로운 제국의 구획에 따른 새로운 교회의 조직 즉 교구 관활권 확정 : 로마,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을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으로 ) ③ 성직자의 직위 ④ 공적인 참회에 대하여 ⑤ 분열자들과 이단지들의 재입회에 관하여 ⑥ 예배의식의 규정 등이 다뤄졌고 아리우스의 견해를 누르고 아들과 아버지는 동일 본질 (homoousios) 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 히포드롬의 오벨리스크
히포드롬은 각종 경기 및 황제를 위한 축제 등이 거행되었던 비잔틴 생활의 중심지로 10만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경기장의 한가운데 서 있는 오벨리스크는 24m 의 반암 대리석으로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에 세워진4개 오벨리스크 중 하나로 AD 390년에 데오도시우스 1세가 이곳으로 가져와 세운 것이다.
■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Arkeoloji Muzesi)
세계의 가장 풍부한 박물관인 고고학 박물관은 궁내의 건물이다. 이곳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박물관으로써 귀한 골동품들이 수집되어 있다. 이 골동품들은 대부분 안탈랴에서부터 모아진 것으로써 오스만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중앙아시아나 북아프리카의 것들이다.
■ 돌마바체(Dolmabace Saray)
'가득찬 정원'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이 궁전은 압둘메짙(Abdulmezit)1세에 의해 터키의 르네상스 스타일로 보스포로스 해안에 세워져(1843~1856) 1876년까지 근세 오스만 제국의 공식적인 왕의 저택이었다.
■ 그랜드 바자르
1461년 MEHMET 2세가 처음 세운 나무로 지은 시장이여서, 잦은 화재로 재건되었다. 이곳에는 약 5000여개의 상점들이 작은 거리와 통로로 된 미로에 퍼져있으며 카페트, 공예품, 금, 은, 가죽제품 등을 취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