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타키아 (ANTAKYA) [안디옥(Antioh)]
안타키아의 옛 지명은 안디옥(Antioh)이었고, 공동번역 성서에는 안티오키아로 표기되어있는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500km북방에, 지중해로부터 약 30km내륙에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있다. 고대시대에 안티오키아는 오론데스(Orontes)강이 북서쪽으로 흘러내리며 BC 300년 Alexander 대왕이 죽은 후, 그의 장군 Seleucus Necator가 세웠다. BC 64년에 로마제국에 정복 당하였고 로마의 통치를 받기도 했다.
지금은 터어키의 안타키야라는 이름의 보잘 것 없는 도시에 불과하지만 사도 바울 당시에는 로마의 속주 중의 하나인 시리아의 수도로서,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대도시였다. '동양의 여왕'이란 명칭을 가질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였다.
스테판의 순교이후 예루살렘교회의 신자들이 각지로 흩어지면서 시리아 안디옥 지역에 정착하여 안디옥 교회를 형성하였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미사를 몰래 드려야 했고 안디옥 도시 동편 실피우스 산 중턱의 동굴교회도 이러한 상황 가운데 형성된 것이다. 허리를 굽히고 겨우 들어 갈 수 있는 통로의 입구와 길이 4 km 되는 비밀 통로의 모습들을 보면서 환란과 핍박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켰던 신자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이다.
누가에 의하면 안디옥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처음으로 그리스도인 들이라고 불리던 곳이며, 초대교회 선교의 출발지라 할 만큼 중요한 곳이었다. 성서 시대 이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안디옥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근거지 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견 하였는데 바나바는 먼저 고향인 다소에 피신해 있는 바울에게 찾아가서 그와 함께 1년간 안디옥에 머물며 선교 활동을 한다. 그 후 이곳은 이방인 선교사인 바오로의 선교 활동의 거점이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AD 45-47년 팔레스티나에 기근이 들어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워 지자 안디옥 교회는 성금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도 한다.
[관련 성경구절]
- 때에 스데판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사행 11:19)
-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아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니엔과 및 바울이라 (사행 13:1)
-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사행 11:22)
■ 하 란 (Harran)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갈데아 우르를 떠나 이곳에 정착했으며 데라는 이곳에서 죽었다. (창 11:31~32)
아브라함의 형제들중 나홀의 집안만 이곳에 남고,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났다.
나중에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고르기 위해 종을 하란에 보내어서 나홀의 손녀 리브가를 며느리로 맞이한다.
또한 하란은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하자 야곱이 하란에 있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기도 한다. (창 27:43~44, 28:10,29:4)
야곱은 라반의 두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14년간 하란에서 데릴 사위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아브라함 가문 4대에 걸쳐 정신적 고향이 되었던 곳이 바로 이곳 하란이다.
하란은 이미 BC 2000년경부터 인간이 거주했다고 비문은 전하는데 설형문자로 된 이 비문에 의하면 '길'이란 뜻의 Harran은 이미 당시에 상업적 도시로 상당히 번성했다고 한다. 또한 바로 구약의 시대에 해당하는 BC 14세기에는 이미 부근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도시로 성장했는데 그 이유는 이 도시가 니느웨 (Nineveh) 및 유프라테스강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에스겔 27:23) BC 1100년경 앗수리인들은 이 부근에서 유목하며 이 도시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열왕기하 19:12, 이사야 37:12)
이 도시는 당시 우상숭배의 도시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이미 그리스어로도 Hellenopolis 즉 '신들의 도시'로 알려졌던 바와 같이 많은 신전들이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바벨론 및 앗시리아인들의 '달의 신'인 Sin 신을 숭배했다. 구약에서도 이 도시에 정착했던 아브라함의 조카이자 야곱의 장인이었던 라반이 우상을 숭배했던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창세기 31:19, 31:32)
오늘날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건축양식이 특히 순례객들의 눈길을 끄는데 즉 집의 지붕을 진흙으로 구운 벽돌을 사용, 4~5 m 높이의 원뿔 모양으로 높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천장에 공간을 많이 둠으로 해서 한 여름의 태양열을 감소시키고자 하는 수단이다.
[관련 성경구절]
창세기 11:31~32, 12:4~5, 24:10, 27:43, 28:10, 29:4 열왕기하 19:12 에스겔 27:23, 이사야 37:12, 사도행전 7:2~4
■ 다 소 (Tarsus)
다소는 지중해로부터 16 Km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시드너스(Cydnus)강이 흐르고 타우르스(Taurus)산이 있으며, 이 지역은 실리기아 (Cilicia) 지역에서는 비옥한 땅이다. 다소를 지나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Cydnus 강이 있기 때문에 다소는 지중해 연안의 중요한 교역도시가 되었다. 지중해로부터 운반된 물건들은 다소에 모여져 이곳에서 소아시아와 북부지역, 시리아 지역으로 배포되었다.
따라서 다소는 지중해 교역과 상업의 중심지였고, 국제적인 성격을 띤 도시였다. 로마제국 시대의 다소는 실리기아(Cilicia) 지역의 수도였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는 다소를 소읍이 아니라고 표현했다. (행 21:39)
다소의 역사
주전 9세기 중엽에 앗수르 제국은 다소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앗수르의 산헤립왕 (704~681)때 앗수르에 반기를 들었다가 이 도시는 파괴되엇다. 바사(Persia) 통치 시대에 다시 재건 되었고 333년 알렉산더 대왕은 다소를 페르샤 제국으로부터 빼앗고 잠시 이곳에 머무르기도 했다.
로마제국이 다소를 통치했을 때 실리기아 지역의 수도가 되었고 로마의 웅변가요, 정치가였던 키케로(Cicero)는 다소의 총독이 되기도 했다. 주전 41년에 클레오파트라는 배로 지중해를 건너 Cydnus강을 거슬러 올라와 다소에서 안토니우스를 만나기도 하였다. (클레오파트라)
로마의 어거스트 황제 (Augustus : BC 27 ~ AD 14) 때 다소는 황금기였다. 이때 다소는 알렉산드리아나 아테네를 능가하는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다소는 스토아 철학의 중심지였고 많은 스토아 철학자를 배출하였다. (Zeno, Antipater, Nestor, Athenodorus 등) 다소 출신이었던 사도 바울도 스토아 철학을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Athenodorus는 Augustus 황제의 선생이었다. 그는 황제에게 화가 났을 때 말하거나 행동하기 이전에 Alphabet을 반복해서 외우라고 가르쳤다).
사도 바오로와 다소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에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사행 22:3)
주전 170년대에 많은 유대인 (Diaspora Jew : 로마에 의해 가나안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다소로 이주해 왔다. 이때 그곳의 거주민들에게 로마의 시민권을 주었고 그 이유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바울의 조상도 로마시민권을 이렇게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도 바오로는 자소에서 베냐민 지파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베냐민 지파의 가장 위대한 인물인 사울왕의 이름을 따서 사울이라고 이름지었다. 그의 가정은 '바리새' 가정이었고 엄격한 유대교육을 받았다.
바오로는 형제들이 있었겠지만 한명의 누이만이 알려지고 있다. 바오로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을 때 그의 조카(누이의 아들)가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다. 바오로는 예루살렘에 유학하려 당시의 유명한 랍비 Gamaliel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 바오로는 일찍이 생계를 위한 직업교육도 받았다. 그것은 염소털로 직조하여 천막이나 배의 돛을 만드는 기술이었다.
Cilicia 지역은 이러한 직조물로 유명하였고 Cilicia 지역에서 생산되는 이러한 직조물을 'Cilicium'이라고 불렀다. (유대교 전통에서 랍비들은 그들의 가르침에 보수를 받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생계를 위한 직업을 갖는 것이 상례였다.
현재의 다소는 지중해 연안에 접해 있으며, 아다나에서 40 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인구 8만의 소도시이다. 그러나 로마시대에는 유명한 키케로가 총독으로 지낼만큼 로마의 중요한 도시이자 상당히 큰 문화도시였다.
다소에는 바오로의 생가로 알려진 장소와 '바오로의 우물'이라 불리는 장소가 있다.
■ 클레오파트라의 문
다소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문' 기원전 41년경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로마 장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찾아와 만난 곳이 바로 이곳 다소이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만남은 그후 지중해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