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5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20-26)
"I pray not only for
these, but also for those
who will believe in
me through their word, so that they may all be
one
말씀의
초대
예 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증언하다가 체포된 바오로 사도는 최고
의회에서 자신을 변호한다. 그러자 사두가이들과 바리사이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부활에 대한 바오로의 증언에 의견이 분분해진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신 것처럼 제자들도 그러한 일치를 이루기를 기도하신다. 그리하여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해 주십사고 간청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니다. 이 기도의 뜻을 되새겨
봅시다. 첫 번째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휴대 전화는 배터리가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훌륭한 예술 작품인 피에타 상에서 미켈란젤로의 손길을 거두어 버리면
돌덩이일 뿐이지 뛰어난 예술품일 수 없습니다. 우 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쓸모없어서 우리의 재능과 생각과 행동은 다른 이들에게 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니,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임에도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어 사랑받고자 태어난 사람으로 가꿀 줄 알며, 피조물임에도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우리 안에 모시지 않으면 않을수록 이러한 생명력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습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아야 하며, 피에타 상은 성당 밖이 아니라 성당 안에 있을 때 가치가 더욱 빛납니다. 우 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지금 숨도 쉬지 못할 것이며, 인간의 품위와 존엄도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 안에 있으니 살아 있을 수 있고, 우리의 존재가 빛을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 안이 아니라 하느님 밖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우리 자신의 존재가 점점 더 비참해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러 있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가 우리에게서 온전히 실현되기를 우리 또한 간청합시다.
일치의
비결
-김현준 신부-
지 역, 경제, 사회 계층 간의 골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가 되어야 할 때라고 이야기합니다. 더 이상 골이 벌어지고 깊어지다가는 영영 갈라설 수도 있기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가 되기 위한 좋은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저마다의 원칙과 의견을 내세우며
여기에 맞춰야 한다고 우기기에 바쁠 뿐입니다.
예 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묘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 또한 하느님 아버지 안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 배우는 집합 공식이 떠오릅니다. 집합 A가
집합 B에 속하고(A⊂B) 집합 B가 집합 A에 속할 때(B⊂A) 집합 A는 집합 B와 같다(A=B)는 것입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할 때 완전히 하나를 이룰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런데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A와 B가 서로 같아야
한다는 결론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같다면 어떻게 같은지에 대해 각자의 의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희생이나 양보 없이 일치를 이루고자
한다면, 결국 이론적인 일치에 머물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같아지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가 서로의 안에 들어가 보려고 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굽히고,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속하려고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A는 B가 되려고 해야 하고, B는 A가 되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이며,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초대하시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조명연신부-
우 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로 모든
구성원의 민권(民權)이 보장된다고 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즉, 출판, 결사, 언론의 자유가 있지요. 그런데 국민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민권을
서로 방해하는 듯 한 모습을 종종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 대표적인 때가 바로 선거 때입니다. 자기와 다른 정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서로를
적대시하는 모습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긴 이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건배할 때 여당은 “위하여!”라고 하고, 야당은 “위하야!”라고 한다지요.
이 렇게
서로를 분리하는 모습은 신부들을 향해서도 그대로 드러냅니다. 만약 신부가 야당 성향의 모습을 띄면 ‘빨갱이 신부’라는 평을 하시고, 여당 성향의
모습을 띄면 ‘보수 꼴통 신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당도 야당도 아닌 것 같으면, 시대의 흐름을 뒤처지는 개념 없는 신부처럼
생각하시지요. 그러나 정치적 견해는 다분히 개인적인 것이 아닐까요? 나와 다르면 무조건 거부하고 분리시키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요? 특히 교회
안에서 조차 정치적 견해의 차이를 두고서 서로 갈라서고 싸운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배 타적인 성향들이 바로 일치가 아닌 분리를 가져옵니다.
즉, 자기와 다르면 무조건 거부하고 보는 모습은 절대로 하나로 만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악마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분리’라고 합니다.
분리를 가져올 때, 사랑 역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 신의 생각을 기준으로 일치를 가져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기준으로도 일치를 가져오기는 힘듭니다. 이것 역시 다양한 생각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일치를
가져올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기준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일치를 이루어서 한 목소리를 내시기 때문에, 이 기준을 따른다면
우리 역시 하느님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 하늘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시지요.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하 느님께서 일치를 이루시는 하나의 기준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똑같이 생각하셨고, 똑같이 활동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역시 나만의 생각을 기준으로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세상의 기준 역시 강조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사랑 안에서만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사랑을 내세워서 철저하게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가 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에 의해 일치와 평화를 가져오며, 사랑에 의해 기쁨과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내세워야 할 기준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정치적 성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한 사람이 평생 동안 취할 수 있는
행복의 양이란 그것을 느끼는 능력에 달렸다(조안 리).
포기할 것은 포기하자.
제 가 새벽 묵상 글에도
종종 써서 잘 아시겠지만, 제가 좋아하는 운동은 자전거 타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새벽마다 자전거를 타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연히 인터넷에서 자전거용 스마트폰 거치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원래는 카메라 삼각대에 스마트폰을 고정시켜서 사진을 찍기 위해서 제작된
거치대이지만, 자전거에 고정시켜서 거치대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지요. 곧바로 구매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에 택배 배달을 받았는데
난감하더군요. 왜냐하면 거치대만 있고, 자전거에 고정시킬 수 있는 도구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회사에 전화를 해보니 자전거에
고정시키는 것은 소비자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 필요한 것이 거치대의 구멍에 맞는 볼트였습니다. 마침 제가 살고 있는 동네에 공구시장이
있어서, 이곳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맞는 볼트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딱 한 군데에서 있다고는 했지만, 하나씩은 팔지 않고
오천 개 들이 한 박스를 구입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결국 포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볼트 하나를 위해 오천 개 들이 한 박스를
구입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았고, 자전거 거치대 하나 때문에 시간을 이렇게 들이는 것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이것이 안
된다고 화를 내면 나만 손해이지요. 이 경우는 포기하는 것이 이래저래 좋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화도 나고, 또 어쩔 줄을 몰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경우라면, 또한 내게 많은 손해만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지혜와 용기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까 싶네요. 물론 할 수 있는 것을 힘들고 귀찮다고 포기하는
것은 절대 금지!!!
하느님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김대열신부-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17,26) ---- 구약의 하느님은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역사와 삶을 통해 이해하려 했던 하느님이었다.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이라는 개념도 자신들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려 했다. 그것을 바로 잡아주신 분이 예수님이었다. 오랜 역사의 잘못된 하느님에 대한 이해의 틀을 깨고자 했던 예수님께서는
기존세상의 기득권자들로부터 내쳐질 수밖에 없었고, 죽음으로 몰리는 상황을 받아들이셔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상 대대로 믿어왔던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대한 근간을 뿌리째 흔들어놓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일 먼저 당황하고 위기의식을 느낀 이들이 소위 하느님의 이름으로 권력
만들어 먹고 사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알고 있는 아버지 하느님은 너희가 이야기 하고 가르치는 그 하느님과 다른
분”이라고 하신다. 눈에는 눈, 귀에는 귀라는 최소한의 보복으로 더 이상의 비극을 막으려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 아닌, 여타의 폭력적
고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원수마저도 사랑하라’는 하느님을 가르치신 것이다.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으로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남의 나라를
침탈하고 정복하는 것이 정당화되었던 이스라엘의 정복 역사에는 커다란 반역의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예정된
것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잘못된 하느님에 대한 이해는 하느님께서 가장 원하시지 않는
세상으로 우리를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팔레스타인 지역에 끊이지 않는 비극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잘못 이해한 하느님’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똑 같은 말씀을
하신다. 먼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한다고.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유한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사랑과 정의, 평화의 올바른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구하고 청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 한가지다. 당신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그
나라에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이 삶을 아름답게 사는 것밖에는 없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김기현신부-
최근에 신자들로부터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다음의 일과
비슷한 거 같습니다. 지난 주일에 성지 순례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드렸는데요. 점심을 먹고
나서 성모상 구입에 관해서 조금 문의를 드리려고 사무실에 갔었습니다. 직원 분에게 ‘더 큰
게 있는지.. 가격은 어느 정도 하 는지..’ 물어보았는데요. 실외에 두는 큰 성모상에 대해서는
성지 신부님께 물어보시면 될 거
라고.. 지금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계시니 가서 여쭤보면 될 거라고,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 다. 그래서 식당으로 가고 있었는데요. 넓지 않은 길에서 신자 몇
분이 포즈를 잡고 있었고, 다른 한 분이 사진을 찍으려 하면서 지나가는 분들에게
‘잠시만요~’ 하시더니, 제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신부님도 돌아가세요~’ 하시더라고요. 순간 사진
찍는 데에 방해가 되는 존재가 되어 버렸는데요. 그 비슷한 느낌을 신자들에게서 받을 때가
종종 있는 거 같습니다.
먼저 고해성사 받지 않는
분들을 볼 때에 그런 느낌이 듭니다. 조그만 본당이라 누가 고해 성 사를 받지 않았는지 대략 보이는데요. 죽어도 고해를 안
하고, 성체도 안 모시려는 분들이 계 십니다. 그분들을 보면서 ‘저분들에게는 내가 주님의 용서를
전하고 선포하는 화해의 통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귀찮게 하고 번거롭게 하는 존재인 거
같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거 같습 니다.
또 강복을 줄 때에도 복을 받을 준비가 아니라 대충 성호
긋고 멍하니 있는 모습, 그리고 조
금이라도 축복 기도가 길어지면
몸이 배배 꼬이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들에게는 복을 빌어주 는 기도가 실제적이지 않은가보다. 받으나 마나 한 것으로
여기는 거 같다. 기도하면 돈이라 도 떨어져야 매달릴 거 같다. 돈도 안 떨어지는 축복 기도는
있으나 마나 한 것으로 여기는 거 같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또 어제 오후에 육지에서 모임을 하고 돌아오는데 같은 배
안에 성당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아는 체를 하거나 인사를 했을까요? 성당 이외의
공간에 우연히 같이 있게 되었을 때 먼저 인사하는 경우를 본적이 없는 거 같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신부님은 성당에 있을 때 만 신부님인 거 같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얼굴만 아는 불편한
존재인 거 같습니다.
그런 일들이 조금씩 고민이 되었던 거 같은데요. 오늘 아침에
그 고민에 대한 대답을 들은 느 낌이 들었습니다. 오전에 동물들 밥을 주는데요. 닭이랑 돼지 토끼 기르는 곳에
가보니 누가 수도도 틀어놓고 돼지랑 닭장 문도 열어놓은 겁니다. 우리의 반은 물바다가
되어 있었고, 종이나 포대는 찢어
지고 어지럽혀져 있었습니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마음을 다잡고 치우기 시작했는데요.
한참을 치우고 나서 올라가는데 성당 마당에서 여러 자매님들이
다과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인사하고 누구신지 물었더니 어떤 본당에서 쁘레시디움
단원들끼리 야유회를 오셨다
고 합니다. 같이 과일
드시자고 하셨는데, 아침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해서 괜찮다고 말씀드리 고 꽃밭에 물을 줬습니다. 그리고 호수를 정리하는데 그 중에
한 분이 오셔서 ‘신부님, 저희 에게 강복 좀 주세요.’ 하시는 겁니다. 작업복 차림에
지저분하게 있었는데도 기도를 청하시 더라고요. 그래서 강복을 드리고 잠깐 있다가 사제관에
올라갔는데요.
올라가면서 제 고민에 대한 답을 들은 거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들을 성실히 하다보면, 억지로 하지 않아도 언젠가 사제의
기도와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되 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 세상 사람들에게 귀찮고 번거로운 존재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분의 말씀에 따라 성실히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세상이 우리의 기도와 사랑을 필요로 하는 때가 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때가
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 셔서 하셨던 체험을 우리도 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들도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하나가 되는 법,
희생 >
-전삼용신부-
2 차대전 때 일본군은 태국 콰이강에 다리를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동남아를 모두 점령하려는 전략 가운데 가장 큰 계획으로 군사와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영국군 포로를 이용, 콰이강의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군은 중요한 장비를 잃어버렸습니다. 일본군은 영국 포로들이 조직적으로 작업을 방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로들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놓고 총부리를 들이대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장비를 숨긴 자는 자수하라. 만일 셋을 셀 때까지 자수하지 않으면 모두가
총살이다. 하나, 둘… 셋을 외치려는 순간 한 병사가 앞으로 나서며
“내가 숨겼습니다.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순간 즉석에서 총성이 울리고 그 포로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일본군 창고에서 그 장비가
발견되었습니다.
일본군이 그곳에 잘 간수해놓고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삽니다.
사랑이 곧
성령이십니다. 그러면 사랑해주는 사람은 성령을 통해 내 안에 들어와 살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 안에 들어와 사시고 아드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시는 것이 이런 원리입니다.
하느님은 이렇듯 당신 스스로 사랑하지
않고 당신이 지니신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요한복음 장은 온통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께
성령님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버지의 ‘이름’과
‘영광’, ‘모든 것’ 혹은
‘생명’이 바로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랑’이 곧 성령님이심을 밝히십니다.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쏟아주시도록 청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곧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시기 때문에 아드님도 또 하느님 아버지도 함께 사시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은 예수님의 피와 물, 곧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희생’입니다. 다시 말해 한 몸이 된다는 것은 희생으로 그 사람의 마음
안에 들어가 산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살듯이 세상 사람들도 우리
희생으로 살아야합니다.
저는 톤즈에서 우리나라를 방문한 브라스 밴드가 이태석 신부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보고는 아직도 그분은 그들 마음 안에 사시고 계신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 인디애나 주의 어떤 시골마을에 뇌종양(brain tumor)을 병을 앓고 있는 세 소년 브라이언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병으로 브라이언은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수술을 받은 후에 그는 방사선 치료
때문에 머리가 다 빠졌지만 조금씩 회복되어 학교에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학급에 명 정도 되는 시골학교였는데 드디어 브라이언이 학교에 가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브라이언이 학교에 오기 전, 반 친구들은 그가 머리털이 하나도 없는 모습으로 오리라는
것을 알고 서로 연락해서 중요한 결정을 했습니다. 그 결정은 그들의 사랑하는 친구인 브라이언이 자존심을 다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브라이언이 고통 속에서도 당당히 학교에 계속 나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반 아이들 전체가 머리를 모두 밀기로 한 것입니다.
브라이언의 수업 첫날,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와 보니 브라이언뿐만 아니라 반 학생들
모두가 머리를 밀고 앉아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머리를 깎은 이유를 알아차린
선생님은 교단에 서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친구들도 같이
울었습니다.
아이들은 받아들임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하나가 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도 하나가 되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 사랑을 받으면 그 사랑해 주는 사람은 그 사랑을
통해서 그 사람 안에 살게 됩니다.
위의 이야기에서 브라이언의 마음 안에
반 친구들이 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브라이언은 자신을 위해 머리를 밀어준 친구들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모두 하나가 되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러나 내 자신을 먼저 찾으면서 어떻게 이웃과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희생하는 만큼만 우리 존재가 희생으로 변해서 상대의 마음
안에 들어가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만큼에 대해서만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닮았다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겉도는 나?
-김찬선신부-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이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기도>
계속되는 대사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이 대사제의 기도는 공관복음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와 함께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침을 주는 내용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가 되는 것은 주님의
바람일 뿐이 아니지요.
우리도 우리가 하나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일까요? 우리는 가지가지로
하나가 됩니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하나가
되기도 하고
공동의 적을 거꾸러트리기 위해 하나가
되기도 하고
누구를 뒤에서 같이 흉보며 하나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법 좋은 이유와 목적으로도
하나가 됩니다.
좋은 일에 의기투합意氣投合하기도
하고요,
같은 취미를 공유함으로써 하나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하나 됨은 주님이
바라시는 것과는 거리가 꽤 멉니다.
왜냐면 주님은 우리가 완전히 하나
되는 것을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해
애기하면
이상주의자는 어떻게 하면 그 멋진
일치를 이룰 수 있는지 궁금할 것이고,
현실주의자나 비관주의자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상주의자도
현실주의자도 아닌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주님의 명령이기에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추구하고,
주님의 가르침 안에서 완전히 하나
되는 법을 찾습니다.
완전히 하나가 되는 법,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완전한 하나를 이루시는 하느님
삼위일체의 그 일치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가 아니면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이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니까 모든 불일치는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느님 밖에 있기 때문에 하나가
못되는 겁니다.
내 안에 갇혀 있기에 하느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거나
세상에 풍덩 빠져있기에 하느님 안으로
못 들어가기도 합니다.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 주위를 겉도는
경우인데
하느님 주위를 겉도는 이런 존재가
우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완전히 떠나지도
못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하느님 안으로 온전히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 주위를 맴돌고 겉도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두려워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이 낯설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그 어떠한 이유이건 하느님 사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으로 겉도는 것이 내가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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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