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글로 이어보는 풍기 유래 김인순 선배님의 "다시 테어나도 이땅에" 중에서 그럼 그 이전에는 또 거슬러서 더 이전에는 우리들의 향토의 선인들이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살아오셨을까? 쓸데없는 잡념 속에서 그래도 아주 오래 전의 모습을 상상해 보고 싶다. 분명한 것은 인류사에서 나오는 대로 인간의 발달형태였을 것이고 사람이 모여 가족이 생기고 또 이웃이 있으면 길이 만들어 졌을 것이며 공동생활의 필요성에 따라 앞장서서 일하는 사람이 선택 되었을 것이다. 결국 인류문화가 서서히 발전되어 오다보니 인간의 본능적 욕심으로 영역을 넓히기 위해 이웃과, 이웃동네와 이웃지역과 이웃나라와 싸워 이기기 위해 힘을 길렀을 것이다. 말과 문자의 활용을 비롯해 불의 사용으로 인간의 존재는 동물과의 삶의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스며 참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기간 대단히 기적적으로 우리역사는 이어왔다. 우리고장이 삼국 신라시대 기목진이라고 명명할 때를 기억해 보자. 이 고장을 다스리는 고을 대표자가 있었을 것이고 지세가 경계의 요충지였기에 분명히 진鎭자의 명칭으로 보아 고구려 땅과 경계를 이루어 오랜 세월 불안하게 국토방위를 위해 조용하거나 편안하게 지나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그 때도 죽령재 바람은 힘차게 불었을 것이고 내륙지역의 교통은 오지이기에 더욱더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백산의 풍부한 자원과 풍기벌의 비옥한 땅이 사람을 끌어 들이고 억센 기온에서 그리고 이웃나라와의 자주 겪은 다툼에서 강력한 힘이 길러져 이 땅을 지켜가는 데 가능했으며 오히려 재난을 피하는 피난처로 오늘날 까지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11세기가 되는 고려시대로 넘어 와보자. 고려 초에 기주基州라고 명명되는데 남아있는 큰 흔적이 풍기읍사무소회의실에 걸려있는 기주절제아문基州節制阿門이다. 아사에 절제사가 있었던 곳으로 아직 행정의 중심 관아가 아니고 요세를 지키는 절제사가 상주했을 뿐이다. 아마 가까운 안동과 순흥지역이 경계지역에 떨어져 있어서 안동부에 소속되거나 현의 규모로 유지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왕조 초까지 독립자치구역으로 현감이 재임하게 되며 지명은 기천基川으로 개칭하고 은풍현을 소속 안에 두고 별호로 영정永定 또는 안정安定이라 불리어오다가 세조 때에 이르러 비로소 고을중심의 관아가 들어서 군수가 재임하게 되는데 초대군수 김숭로(세조11년 1466년)이후 마지막 권병선(1914년)군수까지 224명이 우리 고을을 거쳐 간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조선왕조 세조는 비정한 혈육의 아픔을 겪으며 변칙으로 왕위에 등극하신 분인데 그 당시 조카 단종의 부父이며 형님인 문종의 태胎가 지금의 예천군 하리면 명봉산사에 모셔져 있음을 알고 현의 자치규모에서 한 단계 위인 군으로 높이면서 은풍의 풍자와 기천의 기자를 따서 풍기라는 지명으로 바뀌게 된다.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대세에 밀려 형제들의 피를 보았고 고고한 충신들이 수없이 목숨을 잃고, 정배를 가고 하루아침에 종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는 폭군이었지만 세조왕조 치세의 업적을 오늘날 평가할 때 자랑스러운 면이 매우 많다고 하여 그 치적을 다른 시각에서 보기도 한다. 200여 년 간 훌륭한 군수가 많이 거쳐 가지만 신제 주세붕군수(1541~1545)때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순흥 소수서원이 개원되고 신비의 풍기인삼이 세속으로 나와 활개를 펼치게 되니 이르러 이 땅을 가삼재배의 시원지라고 하지 않는가? 조선왕조 말에 이르러 두 번의 행정구역이 변경되는데 고종 32년(1895년)에 안동관찰부에 예속 되고 고종 33년(1896년)에 관찰부가 폐지되고 13개도로 개편되어 경상북도 풍기군으로 불과 18년 이어오다가 1914년 일제 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풍기군은 그 역사의 막을 내린다. 여기서 조선왕조 마지막 황제 비운의 순종황제처럼 비운의 마지막 풍기군수님이셨던 권병선 군수의 행적을 따라가 본다. 권병선 군수 (1871, 7, 21 - 1943, 4. 2)는 얼마전만해도 향토사에 기록된 대로 예천군 출신으로 만 알고 있었다. 다행히 풍기초등학교와 인삼조합 100년사를 준비하는 과정에 사실상 가장 공적이 컷 던 1908년 당시 군수의 치적을 상세하게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어서 여러 요로를 통해 알아보았더니 상주군출신으로 확인하였고 지금도 그 후손이 고향에 거주하며 유택을 지키고 보존되고 있어서 두 차례 직접 다녀온바 업적을 대충 정리하여보았다. 군수님께서는 상주군 이안면 출신으로 1908년 주사로 부임하여 풍기군수직무대리에서 1909년 승진되며 재임기간이 6년이었다. 1914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 시 풍기군이 영주군에 통합되자 의성군수로 이임하게 된다. 이후 약력(국사편찬위원회 직원록)을 보면 의성군수(1914년-1917년), 청송군수(1917년-1920년), 고령군수(1920년-1922년), 상주군공검면장(1927-1928년), 상주군이안면장(1928년-1941년)등 40여 년을 공직에 있었으며 특이한 사항은 15년간의 장수 군수를 엮임 하다가 고향 상주에 가서 약 13년간 면장에 재직한 분이다. 풍기군수로 부임하지 마자 신교육의 요람 사립안정학교의 설립자가 되었는데 당시 향청의 유생, 향원을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의 성원을 받아 전통을 이어 역사적인 장을 마련해 준 공로자이기도 하다. 황성신문 잡보에 나타나듯이 재정이 궁핍함에도 학교운영과 유지에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솔선하여 교육을 독려한 것으로 보아 매우 의욕적으로 신교육을 강화 시킨 면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연령이 1871년생(辛未)이니 군수부임 때가 37세였다. 그러면 초대 황낙성 교장보다는 11세, 총무 이풍환선생 보다는 4년의 연하 층이나 중앙관직은 같은 시대에 근무했던 동료였던 것으로 짐작되고 지역의 중요현안을 허심탄회하게 상의하고 민심을 다스리는데 향원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인삼조합의 설립과 인삼재배 확대도 이풍환선생과 함께 이 땅의 혁신을 가져왔으니 조선왕조 역대 주세붕군수이래 훌륭한 군수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권병선 군수의 유택은 현재 고향인 상주군 이안면 여물리 임 54-1번지 후산에 안좌해 있으며 20년 전 후손들이 뜻을 모아 비를 세웠으니(通政大夫 豊基郡守 權公 丙宣之碑)가 그것이다. 1914년 풍기군 이전까지 관할구역은 현재 풍기읍내 동부면과 서부면, 봉현지역에서 와룡면, 노좌면, 안정지역에서 생고개면, 동촌면 그리고 예천지역의 상리면과 하리면 이렇게 8개 면 행정구역을 관할했다가 결국 일제 강점 하에 영주군 풍기면으로 전락하여 지금의 풍기읍 구역 그대로 1973년 7월 1일 면에서 읍으로 승격(대통령훈령 제6543호)되기까지 매우 불행한 격동의 세월을 이어왔다. 불과 80년 조금 넘은 일이지만 지금 풍기읍의 구역에 있었던 풍기군 동부면과 서부면 그 사무소는 어디에 있었을까? 기록에서 찾지는 못했고 고령의 어른들을 찾아 기억을 되새겨 물어 본 바 동부면사무소는 보건소 가는 길 왼쪽 작은 연못 옆에 소재했으며 서부면 사무소는 교촌 향교에서 서쪽으로 금계리 성뒷들에 서 있었다고 들었다(이병균, 김성봉). 면에서 읍 단위로 승격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가까운 현대사이기에 기억되는데 우선 읍으로 승격되면 유리한 부분이 지역의 위상이 상승되며 사무소 직제가 바뀌면서 직원이 늘어나고 예산이 대폭 증액되어 타면보다 큰 수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60년 전 군이었던 지역의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달래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젠 법률적으로 공소시효도 끝나서 애기할 수 있는 일이지만 면에서 읍으로 승격되는 행정기준의 첫째가 인구수인데 기준은 2만 명이라 충분해도 그 보다 훨씬 인구수가 많아야 승격이 빨리 이루어 질 수 있기에 년 중1회 인구통계보고 시 상당한 인원을 증가하여 보고되었다고 하며 그밖에 다각적인 힘을 보태어 대망의 읍 승격을 맞이하는 기쁨을 얻게 된다. 당시 풍기읍에서 뜻있는 분들(번영회)이 역사적 사실을 기려 풍기군으로 하지고 건의서를 중앙부처에 발송했고 풍기출신이 관계요로에서 노력도 했지만 불행하게도 영주관내 다수의 반대여론이 있었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법률통과의 결정적인 시기에 일어나면서 영주의 영자와 풍기의 풍자 첫머리를 따서 영풍군으로 확정되고 안타깝게도 무산되고 말았다. 1990년도에 들어서 갑작스럽게 이농현상으로 다수인구가 대도시로 집중하기 시작하자 영주와 풍기의 인구도 예외 없이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물론 전국적인 현상이 되어 국가 정책적으로 농촌지역이 통합형도시계획 법률이 통과되어 독립되었던 영주시와 영풍군이 통합되면서 1995년 1월 1일 영풍군 역시 역사적인 발자취만 남기고 불과 15년의 단명으로 일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앞으로 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근래에 90년 전 같은 행정생활권이었던 봉현면을 풍기와 통합되도록 노력하고 있는데 작은 이기적인 다툼으로 성사가 되지 않는다. 모름지기 멀지 않아 대폭적인 행정구역이 변경될 것으로 예상된다. 아무쪼록 풍기의 명칭은 좀처럼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
|
첫댓글 선생님 책에서 읽은 내용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읽고 새기기를 기원합니다. 고향은 그저 내버려둔다고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선생님의 공적을..그저 공적을 쌓기위한 공명심만으론 할 수 없는 그 큰 사랑에 머리 숙입니다..고맙습니다 선생님.정말로 애쓰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