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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선오(Vincenzo Donati)신부님 작곡 * 살레시오회 |
원 신부는 그의 생활 자체로도 학생들에게 무언의 가르침을 줬는데, 그것은 바로 가난한 삶이었다. 한 번은 광주 수도원 원 신부 방에 도둑이 든 적이 있었다. 도둑은 그의 투철한 직업근성으로 방 구석구석을 뒤져봤지만 훔칠만한 값비싼 물건이 하나도 없자 방주인 만 원망하며 나오다가 붙잡혔다고 한다. 원 신부의 가난한 삶이 빚은 불쌍한 도둑 이야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계란 꾸러미나 겨울 속내의 같은 선물이 들어오면 원신부는 수도원 옆에 있었던 판자집을 찾아가 모두 나눠줬다. 또 지금은 다이어트 한다고 안 먹는 청소년들이 있는데 원 신부가 가르칠 당시엔 점심을 굶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 때는 학생들이 여린 가슴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식당으로 데려가 함께 식사를 하였다.
“가난한 청소년들이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했을 때 우리가 이를 갖고 있다면 줄 수 있겠고 없으면 줄 수가 없다. 하지만 있으면서도 이를 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물건에 애착을 가지면 가질수록 청소년들과 이를 나누기가 어려워질 것이고, 그러면 결국 우리는 그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물질적인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것은 우리 마음과 활동을 제약한다.” 이것은 원 신부의 청빈에 대한 지론이다.
지금은 사랑에 목말라하는 아프리카 수단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 있는 원 신부는 살레시오회가 운영하는 ‘성요한 기술학교’에서 청소년들의 자립의 길을 도와주고 있다. 수단의 수도인 카르툼 인근에 몰려있는 약 2백만 명의 난민들은 보통 이틀에 한 번 옥수수나 단감자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 성요한 기술학교의 난민촌 학생들에게도 학교에서 주는 점심 한 그릇이 유일한 식사다. 끊임없이 도움을 줘야 설 수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원 신부는 느낀 점이 많다. “줄 것이 없어도 달라고 달라고 하면 줄것이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들의 얘기를 들어줘도 줄 물건이 없다는 결과는 같아서, 겉으로 보기엔 아이들을 도와주지는 못하고 시간만 낭비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고 함께 나누는 과정에서 저의 맘속에 이들을 향한 사랑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아이들도 그걸 느끼죠.”
한국을 떠난지 15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은 1997년 10월 4일 다시 아프리카로 향하는 원 신부의 바람은, 많은 동문들이 진정한 살레시안으로 살면서 살레시오 일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다. 졸업생들은 살레시오의 귀중한 일꾼들이고, 세상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돈 보스꼬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밀어 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실 평신도인 살레시오 가족을 기르는 데는 학교만큼 유리한 것이 없다. 살레시오의 복음전파는 교육과 함께 수행하는 것인데, 한국에는 살레시오 남녀 중고등학교가 단 하나씩밖에 없어 아쉬움이 많다. 캐냐의 경우 순전히 졸업생들에 의해서만 운영되는 살레시오 학교가 4군데나 있다면서 원 신부는 아프리카에서 가능한 일이라면 한국에서도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살레시오 학교를 세우고 운영할 가능성은 무한하다고 말한다.
▲ 원신부님의 육성 회상기 (돈보스코 청소년 방송국 제공) |
한국의 나쁜 점이나 개선해야 할 점에 대한 물음에 “지금 내가 한국에 발붙이지 않고 떠나서 한국의 나쁜 점을 말할 자격이 없다”며 고개를 흔든다.
이런 원 신부의 삶은 하느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삶과 같이 하느님이란 목표를 향하면서 주님이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 하나의 도구가 되어 ‘네’라고 응답하는데....지금 일흔이 다 되어 가는데도 어디론가 다시 떠나야 된다면 기꺼이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는 쉼 없는 열정을 뿜어낸다.
아프리카에서 남은 여생 가득히 돈 보스꼬 정신을 실천하며 살아갈 원 신부의 훈훈함이 한국의 가을을 물들인다.
7. 아프리카로 간 우리의 영원한 친구 원선오 신부 한국 방문
우리 벗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친구로 남아있는 원선오 신부님이 한국을 떠난 지 근 15년 만인 1997년 가을에 다시 한국을 방문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 기쁨은 물론 우리 벗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커다란 기쁨이었다. 제6회 아시아 오세아니아 살레시오 동문 총회를 준비하면서 몇몇 뜻 있는 벗들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이번 방문을 통해 원신부를 아는 모든 벗들과 살레시오 가족들이 만나서 하나되는 커다란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원선오 신부는 1962년 한국에 선교사로 온 이래 20여년 간 모교에서 성무감으로 일하면서 살레시안들에게는 물론 광주 시내 전체에 그 친절과 사랑이 널리 알려질 만큼 흐뭇한 사랑과 미소의 사목자였다. 수많은 벗들은 원신부의 낡은, 때론 군데군데 기운 검은 수단의 모습으로 비가오나 눈이오나 교문에서 학생들을 맞이하던 그를 기억하고 있다. 말썽을 부리는 학생이 있으면 손을 꼭 잡고 함께 울던 모습 또한 벗들에게 있어 늘 감동이었다. 또한 동창회 지도신부로서 ‘벗’지의 창간자요, ‘벗들의 큰모임’과 동문회 활성의 주춧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나이 55세이던 1982년 당시 총장이던 비가노 신부의 아프리카 선교 계획에 동참하여 아프리카 케냐와 수단에서 새로이 시작된 선교사의 삶을 살고 있다. 지금은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삶의 전반이 혼란스럽고 극한 대립만이 있는 수단에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며 선교에 전념하고 있다. 원선오 신부는 이번 방문 동안 호의를 베풀어준 벗들에게 감사한다는 인사말을 전해왔다.
<벗87호-1997년>
첫댓글 감사합니다...
연세가 높으신데. 그 열악한 아프리카에서 선교하시공~~ 또 그곳애 학교를 지으시겠다는
한 마음으로 지난 번에 한국 방문하시고~~ 신부님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주님 은총 그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훌륭하신 신부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더 축복된 신앙 생활을 할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꾸벅~~미소가득한 행복한 하루 되셔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