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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은 소사모게시판에 이덕영님께서 올리신 글 시보네 편집했습니다 우리모두 부모님에 대한 사랑은 똑 같습니다, 그리고 고향 죽마고우의 우정은 영원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님, 어머님 오래 오래 건강하세요! 아는 친구들은 다 알고 있지만 내 얘기쫌 할까 싶다.
내 나이 마흔 다섯살 . 본적은 경북 영주시 봉현면 유전1동 468-1번지 (북촌) 아버지 성함은 이 병선(올해 일흔 다섯) , 어머니 성함은 이 숙희(올해 일흔 넷) 가난한 시골 농사꾼인 아버지, 어머니의 4남1녀중의 딱 중간인 3 째 아들로 태어났어. 부모님께서는 평소'자식들에게 시골의 논.밭 땅때기 한마지기 더 물려주는 것 보다 자식들 머리속에 글 한자 더 넣어주는 것이 살아가는 데 더 보탬이 된다'는 믿음으로 자식들 4 남 1 녀를 모두 대학 공부를 시키셨지. 그 과정에서 우리 부모님께서는 그야말로 죽을 고생을 하셨고 또한 5 남매의 고생도 말이 아니었어.
아버님께서는 젊으신 시절에 동네의 어느 분 보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서 들에 나가셨고, 저녁 늦게서야 집에 돌아 오실 정도로 억척이셨지. 동네 사람들은 그런 아버님더러 "새벽별 보면서 들판에 나갔다가 저녁에 달보며 집에 들어오는 사람은 병선이 자네 밖에는 없네. 좀 쉬어가면서 하게. 몸도 돌봐 가면서 말이야"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노력으로 아버지 어머니가 신혼 살림을 처음 차렸던 시기에는 논 한 마지기로 살림을 났지만, 그 이후 한 때는 우리 집도 동네에서 꽤 넉넉한 살림을 이루었다네. 나랑 큰 형님은 나이 차가 9 년이었고, 둘 째 형님과는 나이 차가 6 년이였는데,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였던 1979 년도에 나의 큰 형님은 아마도 영남 대학교 경영학과 3-4학년 이었던 거 같고, 둘 째 형님은 경북대학교 경영학과에 막 입학을 하던 해였다. 지금이야 대학의 문이 워낙 넓어서 대부분 대학에 진학을 하지만 나의 형님들이 대학을 다니던 1970 년대 후반기는 예비고사란 제도가 있었고 대학의 문턱도 매우 높았고 대학의 숫자도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시골에서는 물론이려니와 대도시에서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중.고등학교를 졸업시키는데도 돈이 많이 들어갔지만 대학교 한 학기 등록금을 내려면 시골의 논.밭 몇 마지기를 팔아야 하던 시절이었다. 위에서 언급하였 듯이 그렇게 근면하셨던 부모님이셨지만 큰 형님과 둘째 형님을 외지에 유학보내느라 내가 중학교에 입학을 하던 해 우리 집은 이미 가세가 기울대로 기울었고 우리 가정의 기둥이셨던 아버님은 가세에 대한 걱정으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 일을 거의 하지 못하실 지경에 놓이셨다.
당시로부터 딱 30 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들리는 듯한 아버님의 음성은 " 덕영아! 아버지가 몸이 많이 아프고 집에 빚이 많아서 너를 중학교에 보낼수 없으니 한 해 만이라도 휴학을 하면 안되겠니?" 이다. 그 때가 내가 금계 중학교 1학년이던 4 월 경이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힘드시면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 당시에도 이해는 갔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어린 마음에 당장 머리속에 떠오른는 생각은 ' 초등학교를 함께 졸업한 내 친구들은 모두 학교에 다니는데 내만 학교를 못 다니면 혹시 친구들을 길에서라도 마주치면 얼마나 부끄러울까 ?' 하는 것이었지. 그래서 "휴학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더니 아버지께서는 마지 못해 "그럼 공부를 하려거든 제대로 하고 아니면 때려 치워라" 라고 말씀 하셨어. 돌이켜 보면 어린 나이에 내가 아버지로 부터 들어야 했던 그 말씀은 살아오면서 내가 힘들 때마다 오히려 나에게 지칠 줄 모르는 힘을 주었어. 중, 고등학교 와 대학교를 마치는 동안 시골에서 농사일에 고생이 많으신 아버지 와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는 부모님께 죄스럽고 너무나 감사하는 마음이었다. 대구에서 자취생활을 하며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몇 달에 한 번씩 부모님을 뵈러 시골에 갔다가 내려 올때는 낮에는 들판의 밀린 일감 때문에 바쁘시기에 나의 어머니는 늘상 새벽이 되기도 전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전 날 당신께서 미리 풍기 시장에서 사다 놓으셨던 마른 김에다가 참기름을 바르시고 소금뿌려서 정성들여 직접 구운 고소한 김을 한 보따리 가득 씩 장만해주시곤 했다. 돌아 보면 난 어린 나이에 너무 빨리 어른스러워 진 것 같아서 줄 곧 아쉬운 점이 많다. 중학생의 어린 나이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무슨 일을 하면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하고 생각했었다. 물론 지금와 생각해 보면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인류와 사회의 유익함에 누구나 기여할 수 있는 존재들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분야든 자기 분야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생각이다. 요즘 벤쿠버 동계올림픽 기간인데 (21)세기적인 스타, 피겨의 여왕 김연아를 비롯한 이 승훈이나 이 정수, 성시백등 금 번 동계 올림픽 스타들이 금메달을 따는 장면을 볼 때면 와이프랑 '와~우리 아이들도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말고 운동을 시켜볼 걸 그랬나?' 하고 농담 반 주고 받을 때가 많다.
여하튼 나는 어린나이치고는 엉뚱하리만큼 외골수로 독하게 마음먹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 학창시절에는 또래의 아이들이 하는 다양한 운동이나 취미생활을 누려 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난 고등학교때는 농구를 잘하는 친구가 많이 부러웠고, 대학교때는 누구나 하는 당구를 배울 여유가 없어서 참 부끄럽고 난처한 경우가 있었다. 이제 나이 마흔이 넘으니 당구장에 따라 가야하는 경우가 없어서 요즘은 당구를 못쳐서 난처한 경우는 별로 없다. 중학교.고등학교를 다니며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수 많은 우여 곡절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누구나 그럴수 있듯이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남대 의과대학을 진학했다가 우리 집의 어려운 가정 형편상 당시 전국의 의과대학 중에서 등록금이 제일 비쌋던 영남대를 마치기가 너무 힘겨울것 같아서 도중에 자퇴를 하고 , 이듬 해인 1986년도에 입학 비사 장학생으로서 6 년 간 의대 등록금 전액을 면제 받고 많지는 않았지만 매달 대학교에서 지급하는 일정액의 생활비를 받는 조건으로 계명대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대학교를 무사히 마쳤다. 2001년도에는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받고 , 2006년도에는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받았다. 2000년도에 내과 전문의를 취득하고 경산시 하양읍에서 하양중앙내과로 개원을 했고 벌써 다가오는 4월이면 10년을 채운다.
개원을 해보니 아침 이른 시간부터 저녁 7 시에 병원 문을 닫을 때까지 정신없이 하루가 지난다. 그게 꼭 환자가 많아서라기보다는 원장으로서 오너로서 작은 사업장이지만 잘 꾸려 나가기 위해서는 원장이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로는 나를 보고 찾아오는 환자들 한 분 한 분께 최선을 다해서 진료를 해드려야하고, 정확한 진단과 더불어 적절한 치료를 해 드려야 하며 , 둘째 원장에게 소속된 5 명의 병원 식구들을 때로는 칭찬으로 , 때로는 야단을 쳐 가면서 까지 환자들에게 친절한 직원들, 일 잘하는 직원들 , 원장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원장을 잘 도와줄수있는 가족같은 직원들을 만들어야 하므로, 세째는 각종 공문서 처리와 와 다양한 각종 대외 업무를 처리하느라 하루종일 여유가 없을때가 많다. 그 외에도 낡은 전구를 교체하고 막힌 하수구를 뚫고 고장난 장비의 A/S 를 요청하는 등 등의 부딪히는 모든 문제를 내가 해결해야 한다. 그러니 어떤 해는 카페에 일년에 몇 번 밖에 못들어 올 경우도 있더라 . 그것도 내가 카페에 들어올 수 있는 경우는 지금처럼 아무도 접속안 할 시간인 토요일 밤 시간 아니면 일요일 가끔 ... 보통 눈 팅 밖에 못하지. 지금 시간이 새벽 3시네. 지금 우리 친구들은 아마도 대부분 잠들어 있겠지? 아 ~~ 오늘 낮에 우리 직원들이 태워 준 다방 커피 한 잔과 아메리카노 한 잔 때문인가? 보통때라면 나도 한 참 곤하게 잠들어 있을 시간인데 글쓰다가 보니 오히려 의식은 또렷해진다. 우리 소사모 카페를 무척 사랑하지만 자주 접속 못하는 관계로 자유게시판을 빌어 난생 처음으로 학창시절의 소중한 나의 친구들에게 못다한 인사도 하고 싶다.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나를 오늘에 있게 여러면에서 도와 준 학창 시절의 수많은 나의 소사모 친구들아 고맙다 . 그리고 어린시절의 우리들의 순수했던 우정을 늘 간직하고 있단다. 건강하자. 가족들과 행복하여라 ." 내가 오늘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이런 글을 쓰고 있는지 나도 모르지만 ...
자유게시판이 특정인에게 인격적 모독을 주는게 아닌 이상은 신변잡기의 아무런 글이나 올릴 수 있을거라 생각해서 힘들게 용기를 낸다. 나를 오픈시켜서 소사모의 우정으로 현재의 나를 이해받고, 어린 시절의 나를 이해 받고, 혹시 격려와 위로를 받으면 감사하고 .. 또 분명히 나와 비슷한 환경 혹은 더욱 어려운 여건에서 청소년기와 학창시절을 보낸 친구들도 있을텐데 그런 친구에게도 위로가 되면 하는 바람으로 썻다. 앞으로 기회가 될 때마다 건강 관리에 도움이 되는 글이나 진료중에 있던 에피소드들 한 번씩 올려 볼 께 . 친구들아 너무 길게 쓴거 미안하다 . 다른 오해는 하지 말아줘. 묵묵히 나를 응원해 주던 학창시절의 좋은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적었을 따름이다. 혹시 읽다가 지나치다 싶은 곳이 있으면 너그럽게 이해해 주길 부탁하고. 힘드신 가운데도 역경을 딛고 저희 5남매를 위해서 희생하신 부모님의 한 없는 사랑 늘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싸랑합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째아들 이 덕영
[712-903] 경북 경산시 하양읍 금락2리 1-11 하양중앙내과의원
053)856-3777 --------------------------------------------------------------------------- 아래기사는 의학전문지 MD저널의 김은식 가자님이 이덕영 박사님이 운영하는 하양내과의원을 취재한 내용입니다 기본을 지키는 것, 작지만 가장 큰 차이 경북에 위치한 경산시 하양읍은 인구 3만여 명의 작은 지방도시다.
하지만 인구수에 비해 병원은 무려 30여 개, 말 그대로 병원 천국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병원이 많다. 단순 통계를 내자면 한 병원 당 천여 명을 담당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억지춘향이격 통계에 불과하다. 이곳에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잘 되는 병원이 있는가 하면 또 그렇지 못한 곳이 있다. 잘 되는 병원, 다시 말해 환자들이 많이 찾는 병원의 비결은 무엇일까? 물론 그 이유가 좋은 시설일 수도 있고, 유능한 의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 하양중앙내과 이덕영 원장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 원장이 말하는 잘 되는 병원의 비결은 죽은 사람을 벌떡 일으켜 세우는 것도 아니요, 팔십 노인을 스무 살 청년으로 바꾸는 것도 아니다. 환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의사로서 진료에 최선을 다하는 것, 바로 ‘기본을 지키는 것’이다. 기관지 천식과 비만클리닉, 명실상부 최고의 위치 밖에서 보자면 여느 병원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하양중앙내과, 하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차이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어서 오세요~”라며 밝게 인사하는 직원들의 생기발랄한 목소리와 한쪽에 잘 가꿔진 화초들이 병원이라는 딱딱한 분위기를 한꺼번에 날려버린다. 열린 문 너머로 기자 일행을 본 이덕영 원장이 웃는 얼굴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리 오세요”라며 인사를 건넨다. 하양중앙내과의 콘셉트는 ‘스마일’인가보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손님이 뜸해서인지 이 원장이 직접 병원 안내를 한다. 하양중앙병원은 총 3층으로 1층에는 진료실과 초음파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놀이방이 있고, 2층에는 내시경실, 수액실, 물리치료실, 방사선실, 병리검사실, 비만상담실, 검사실, Operating room(지방흡입수술실), 비만치료실 및 회복실이 있다. 그리고 3층에는 피부 관리, 체형미, 발관리, 경락마사지 및 메이크업을 할 수 있도록 스킨케어 뷰티 숍과 헬스 실 등이 갖춰져 있다. 처음 하양중앙내과가 유명세를 얻기 시작한 것은 바로 기관지 천식환자들을 치료하면서부터다. 이곳은 다른 지역에 비해 기관지 천식 환자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많다고 해서 그렇게 눈에 띄게 많은 것은 아니었는데, 손님이 한명 두 명 찾아오더니 어느 때부터인지 ‘기관지 천식하면 하양중앙내과 이 원장’이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대구는 물론이고 영덕, 포항, 구미 그리고 김천에서까지 환자들이 찾아왔다. 그 후 하양중앙내과의 유명세에 날개를 달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바로 이 원장이 비만클리닉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처음 이 원장이 비만클리닉에 관심을 갖고 시작하게 된 때는 2001년, 당시 비만클리닉을 하는 병원은 대구 경북지역을 통 틀어서도 불과 열 손가락 안쪽이었다. 이 원장은 비록 가능성이 희박한 미개척분야였지만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 그렇게 6년이 지난 지금, 이 원장을 거쳐 간 이만해도 벌써 1,200여명이 넘는다. 뿐만 아니라 하양중앙내과는 기관지 천식과 비만 클리닉 외에도 소아 및 성인 성장클리닉에서도 단연 최고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기본에 충실한 병원, 하양중앙병원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사실 기관지 천식을 치료하는데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 6년 전이지 지금에 비만 클리닉도 시설이나 효과 면에서는 각 병원마다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환자들은 그 명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이덕영 원장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한다. 그 원인을 찾던 중 그 해답은 너무나 간단히 이 원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 스스로가 그리 대단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위대한 의료철학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저 기본을 지키는 것뿐이죠. 세밀하게 검사한 다음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환자가 다시 병원을 찾는 일이 없도록 확실하게 치료하는 것이 의사가 할 일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언제나 모든 환자에게 친절히 설명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요.” 여기서 어떻게 더 이상 하양중앙내과가 유명한지에 대해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뿐만 아니라 이 원장은 환자가 대학병원으로 가야할 경우에는 진료의뢰서를 작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진료의뢰 및 특진 교수 지정까지 해주고, 일일이 경과 상황이나 결과를 모두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하니 어지간한 정성이 아니고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그런데 이런 모든 일들이 이 원장에게는 의사들이 지켜야 할 기본 중에 기본이라고 말한다. 기본에 충실한 병원, 이덕영 원장이 있는 하양중앙내과에는 그렇게 오늘도 환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취재 김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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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동생 친구인 후배 덕영이는 중학교때 다닐때 조그맣고 똑똑해 보이던 소년이였지요.....2년전 금계중 체육대회때 만나보니 30여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건만 여전히 수줍어 보이던 웃음,...무지 반가웠답니다..........이렇게 잘 지내고 있다니 기쁩니다..........
가까운 경산 하양에 자랑스런 후배님이 계셨군요! 부모님께서는 존경받아 마땅하실 분들이지만 덕영 후배님도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아무쪼록 부모님의 강건하심을 빌며 덕영 후배님도 더욱 허리를 굽혀 존경받는 의료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귀한 글 옮겨주신 시보네님! 감사합니다!!!
자랑스런 풍기인 이십니다. 부모님께서도 훌륭 하시고요. 우린 공부보단 일이 우선이었으니, 농사 잘 거들면 최고의 자식이었는데~~!
우리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나는 글입니다.하지만 저는 선배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못되어서.....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