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의 「낙화, 첫사랑」감상 / 나희덕
낙화, 첫사랑
김선우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시집『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에서
김선우 / 1970년 강원도 강릉 출생. 1996년 《창작과비평》겨울호에 「대관령 옛길」등을 발표하면서 등단.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도화 아래 잠들다』,『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등.
-------------------------------------------------------------------------------------------------------------------
꽃이 진다는 것은 아름다움의 소멸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성찰을 김선우의 시 곳곳에서 발견합니다. “나는 꽃을 거둔 수련에게 속삭인다 / 폐경이라니, 엄마, 완경이야, 완경!”이라고 말할 때, 낙화는 닫힘이 아니라 새로운 열림을 의미하지요. 또한 “사람이 모르는 다른 이름을 찾아 / 길 떠나야 하는 꽃들이 있다”고 말할 때, 꽃들이 떠나야 하는 이유는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함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허공을 향해 길 떠나는 꽃잎을, 그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는 것까지가 온전한 사랑의 몫이겠습니다. 이 시를 수많은 그대에게 보냅니다.
나희덕 (시인, 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