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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국립대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금동용머리는 경북 영주군 풍기읍에서 하수도 공사를 하다가 발견되었지요.9세기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높이가 65㎝에 이르러 당당한 모습입니다.
당간이란 ‘절 앞에 세워 불·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표시하고 벽사적인 목적으로 당(幢)이란 깃발을 달기 위한 깃대’라고 작고한 고고미술사학자 김원룡 선생은 정의했습니다.
풍기의 금동용머리에는 턱밑의 공간에 도르레를 만들어 놓았지요. 깃발을 달기 위한 장치이니 당간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셈입니다.
당간은 대부분 사라져 좀처럼 보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절의 들머리에서 쉽게 만날 수 있지요. 두 개의 석재를 위로 올라갈수록 갸름하게 깎아 마주세워 놓은 당간지주는 보통 쇠로 만든 당간을 튼튼하게 고정시키는 구실을 합니다.
풍기에서 가까운 부석사와, 소수서원이 들어선 숙수사터에도 훌륭한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니 풍기읍내에서 찾아낸 용머리 장식을 부석사나 숙수사와 연결지어 상상해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미술사학자인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는 당간과 당간지주에 깃발까지 갖춘 건조물 전체를 ‘삼국유사’에 나오는 대로 법당(法幢)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했습니다. 단순히 절의 존재를 알리는 표시에 그치지 않는 신앙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적절해 보이는 이름입니다.
충남 공주 갑사와 충북 청주 용두사터에는 당간이 상당 부분 남아있어 풍기의 용머리 장식과 연결지으면 완전한 법당의 위엄있는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겠지요. 두 당간은 모두 철제 원통을 연결하여 만들었습니다. 용두사 것은 64㎝ 높이의 원통 20개가 남아있는데, 당간에 새겨진 ‘용두사철당기(龍頭寺鐵幢記)’에 따르면 당초엔 30개였다고 하지요. 원통 높이만 19.2m에 이르니 기단에 용머리 같은 장식이 더해지면 20m를 넘었을 것입니다.
법당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에서도 만들어졌지만, 중국에서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것은 둔황 막고굴(莫高窟) 제331굴의 것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당간만 23기에 이르고 고려·조선시대 것을 모두 합치면 수백기가 당간지주로 흔적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절에 불상과 석탑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절의 입구에는 법당이 당연히 서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있었다는 뜻이겠지요.
이렇듯 한국이 ‘법당의 나라’가 된 것을 두고 한국고대사를 전공한 신종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전통적인 천신(天神) 숭배와 연관지어 해석합니다. 요즘도 강원도를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는 당간을 짐대라고도 부르는데, 짐대란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며 마을 입구에 세우는 솟대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신 교수는 통일신라시대에 현재와 같은 법당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솟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의 목재 당간이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전통적인 천신은 불교가 수용되고 나서도 존엄을 잃지 않았는데, 솟대가 마을 어귀에서 내부를 성역화하듯 당간에도 절이 차지하고 있는 사역(寺域)을 성역화하는 역할을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서울신문]
금동 당간 용두 보물1410호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76 국립경주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 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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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幢竿) 또는 보당(寶幢)이란 절의 입구나 법당 앞에 세워 번(幡)이라는 장엄적인 깃발을 달았던 장대이다. 오늘날 쇠나 돌로 된 당간(幢竿)이 남아 있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대부분은 당간(幢竿)을 받치는 당간지주(幢竿支柱)만이 남아 있는 것이 보통이다.
금동용형당간두(金銅龍形幢竿頭)는 1977년 경북 풍기 성내동에서 발견된 것으로 용의 입을 가로지른 철봉에는 실패모양의 도르래가 끼워져 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두 눈을 크게 부릅뜬 채 윗입술이 S자형을 이루며 위로 길게 뻗친 입을 벌려 여의주를 물었으며 아래 위의 송곳니가 모두 위쪽을 향해 날카롭게 휘어져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목을 앞으로 쑥 내밀어서 휘어진 역동적인 몸통에는 두 가닥의 선으로 비늘을 촘촘히 음각하였는데, 각 비늘마다 안쪽에 꽃무늬와도 같은 문양을 새겨 넣었다.
한편 목과 만나는 입 안쪽으로 도르래가 장착된 구조로 되어 있어, 턱 밑을 뚫고 어금니 부분의 못(리벳)으로 고정시켜 놓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고안한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도르래 부분의 부식이 심하여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이다. 통일신라 간두로는 매우 희귀한 예로 통일신라의 조각사, 공예사 및 건축사적으로도 중요하며 또한 도르래의 사용에서 과학사적으로도 참고가 되는 중요한 유물이다.
첫댓글 초등시절,용머리 출토되었다는 소문이 자자했었는데.....
1977년 풍기읍사무소 총무계에 근무할 적에 발견되었는데 신고절차와 최초발견자에 대한 유권해석으로 곤욕을 치루었습니다. 국보급이라는 보도로 최초발견자에 대한 이의가 재기되었지요. 감정가액이 엄청날 것이라는 보도였고 토지소유는 국유지였으므로 50%를 최초발견자가 받도록 되어있습니다. 나중에 600만원 감정으로 300만원을 최초발견자 가지고 달아났습니다. 새마을 사업 공동사업장에서 빚어진 매우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돈 때문에...
이후 이 지역(성내2리 마을회관주변)을 문화재보존지역을 묶어놓고 작업 했었지만, 더 소식은 없습니다.
중앙박물관, 경주 박물관에 전시된 것을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