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에 들었던 독일,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최악이었다. 6인실 침대 네 칸을 점령하고 자기들 세상인 듯 온종일 떠들더니 밤에는 술에 취해 들어와선 노래를 부르고 목청껏 떠들어댔다. 한 시간을 망설인 끝에 계속 얘기할 거면 나가서 해달라고 했다. 이 말을 하기까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지만 말하는 동안에도 내 목소리가 당당하고 정중하며 기품있다는 생각이 들어 잘했다고 나를 칭찬해주었다. ㅡ,.ㅡ 하지만 수다가 그치니 그들은 곧 코를 골기 시작했다. 결국 뜬눈으로 뒤채다 날을 샜다.
비아나Viana로 오는 길 초반은 평탄하고 아주 아름다웠다. 선생님 말씀을 기억하며 느리게, 집중하며 걸으려고 노력했다. 처음 두어 시간은 좋았는데 돌이 많은 언덕길이 나오니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설상가상 발목까지 아파왔다. 어떤 아주머니가 지나가면서 "나도 어제 너처럼 걸었단다. 그런데 천천히 천천히 걸으니 오늘은 한결 나아졌어. 그러니 너도 천천히 천천히 걸으렴!"했다. 나는 그 말씀이 꼭 하느님 말씀 같아 고맙게 받아먹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발은 무거워져 자꾸 헛디디고 돌을 찼다. 어제 잠을 못자서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가만 보니 내 안에 아직 '산티아고에 가고 말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노력한다고 해도 그 마음은 버려지지 않았다. 그리곤 속으로 하루 10km는 무슨 일이 있어도 걸어야 한다고 계산하고 있었다. 이 길 위를 걷는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나도 그저 목적지까지 가고싶다는 바램을 품은 것뿐인데 내겐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비아나를 3km 쯤 남겨둔 어느 바위에 앉아 나는 끄억끄억 소리를 내며 울었다. 세상의 다른, 건강한 다리를 가진 모든 이가 부러웠다. 내가 걸은 11km가 '고작'이라고 느껴지면서 서럽고 억울해졌다. 하늘에 대고 아프다고 소리치면서 울다가도 사람들이 지나갈 때면 잽싸게 눈물을 닦아내곤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감히 로그로뇨까지 가겠다고, 산티아고까지 걷겠노라고 다짐하고 다짐한 내가 우스웠다. 너무도 절망스럽게 몸과 마음이 다 아팠다. 이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간 하늘에는 구름만 동동 떠간다.
비아나 마을 간판, 없는 정신에 이 사진을 찍은 게 용타.
비아나Viana에 도착했을 때는 얼굴이 온통 마른 눈물, 콧물로 범벅이었다. 이곳 알베르게는 난간없는 3층 침대로 악명높은 곳이었는데 호스피탈레라가 사색이 다 돼 들어선 나를 보고 1층 침대를 내주었다. 침대에 배낭을 내려놓자마자 나는 거품을 물고 실신했다.
오한이 들어 정신을 차렸다. 배낭에서 빵이랑 치즈를 꺼내 먹고 나니 조금 기운이 났다. 치즈를 만든 사람을 사랑하기로 했다. 그게 코골이건 독일인이건. 그러고보니 아침 빵 한 쪽 먹고 여지껏 버텼구나. 또다시 우간다 어린이 생각이 난다.
3층은 주로 젊은 사람들 차지인데 유스케 말로는 아래층에서 누가 돌아만 누워도 흔들렸다고 한다.
내일 걸으려면 든든히 먹어두어야겠단 생각에 동네 식당 열기를 목빠지게 기다린다. 가끔 먹는 것에 이렇게 집착하고 있는 나를 볼 때마다 교양있는 인간으로서 내 품위는 어디로 갔나, 스스로 한심할 때가 있다. 날마다 밥때만 기다리는 똥강아지 같다.
식당에서 일본인 세 명을 만났다. 아까 길에서 나를 앞질러간 단발머리 소년 유스케도 있었다. 우리는 지구의 같은 면에서 왔다는 공통점 때문에 무척이나 반가웠다. 일본이 이렇게 가까운 나라였다니, 놀라웠다. 한국 영화를 좋아하는 테라가와 상과 스페인어를 곧잘 하는 요시꼬 상, 남산 만한 배낭을 지고 다니는 유스케와 아는 일본어라곤 '아리가또'가 전부인 나는 한 자리에 모여 우리의 공통점과 다른 점을 발견하며 즐거워했다.
걷기 시작하고 매일 더 나아져서 점점 더 많이 잘 걷게될 거라 기대했다. 또 반드시 그래야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분은 내가 확실하다고 믿는 것들을 다 깨고 계시는 중인 것 같다. 오늘은 아주 호되게 깨진 날이었다.
도장Sello이 하나둘씩 늘어가는 내 순례자 여권Credencial.
첫댓글 멋있는 순례자 여권.. 한번 보여주세요...샬롬^^
순진씨, 맞는데... 그 분의 똥강아지, 또 나의 똥강아지가...*^^*
제 맘 속의 순례자 여권도 점차 화려해지고 있답니다~~~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