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학량 (張 學良) (장작림의 아들)
(乾) 1901年 4月 17日
丙丁戊己庚辛壬 運 庚壬癸辛
戌亥子丑寅卯辰 九 子子巳丑
財殺이 월지에 암장 되고 陽刃은 日時에 있고 天干은 金水인 庚辛壬癸로 연달아 있어서 문무(文武)를 겸비한 통솔자이다. 신왕한데 殺은 얕은데다 庚金이 殺을 설기하고 身을 생하니 壬申 癸酉 년에 국가가 망할 때 집안도 망했다. 寅 運 甲戌 년에 해외에서 돌아와 兵符의 중권을 쥐었는데 丙子 년에 劫刃이 세 개나 겹치므로 서안사변(西安事變)에 패(敗)하여 한번가면 못 오는 데로 갔다. 張 씨 父子의 사주를 보면 모두 다 지나친 면이 있고 아들의 기개(氣槪)가 아버지에게 훨씬 뒤떨어진다. -- <세운해법, 위천리 해설>
張學良
1901年6月3日 子時
양 력: 1901년 6월 3일 00:01 장학량
음/평: 1901년 4월 17일 00:01 남자
시 일 월 년
庚 壬 癸 辛
子 子 巳 丑
甲 乙 丙 丁 戊 己 庚 辛 壬 대운: 역행
申 酉 戌 亥 子 丑 寅 卯 辰
89 79 69 59 49 39 29 19 9.3
대운 시작: 9세 3월 31일
張學良 (중국의 군인) ⇒ 장쉐량
(병)Zhang Xueliang (웨)Chang Hsüehliang.
1901년 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하이청 현[海城縣]~2001. 10. 14 미국 하와이.
중국의 군벌.
샤오솨이[小帥]라고도 한다. 시안[西安] 사건(1936)을 일으켜 장제스[蔣介石]에게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전시(戰時) 동맹을 체결하도록 요구했다. 장쉐량은 만주지방과 북중국 일부를 지배한 군벌 장쭤린[張作霖]의 맏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군사적 경험을 쌓았으며, 19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군대에 들어갔다. 빠른게 승진을 거듭하여 1922년에 아버지 휘하 부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1928년 일본 장교들에 의해 아버지가 살해당하자 만주지역을 통치했다.
만주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일본인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난징[南京]에 새로 결성된 민족주의 정부와 손을 잡았다. 이때 일본이 그의 군대를 만주에서 몰아내고 이 지역을 점령하자, 그는 군대를 중국 북서부에 있는 산시 성[陝西省]으로 철수시켰다.
1935~36년 장제스는 산시 성 옌안[延安] 근처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군사적 소탕작전을 위해 장쉐량의 부대를 이용했다. 그러나 점차 애국적 입장을 취하게 된 장쉐량은 자신과 민족주의자들의 부대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같은 동포인 중국인들이 아니라 일본인 침략자들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1936년 장제스가 공산주의자들을 소탕하기 위해 일으킨 민족주의 전쟁에 대해 개인적으로 책임을 지기 위해 산시 성 시안에 있던 장쉐량의 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장쉐량은 그를 체포했다. 장쉐량은 그가 일본인들에 맞서 공산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데 동의하자 비로소 풀어주었다.
어리석게도 장제스와 함께 난징으로 되돌아간 장쉐량은 곧 가택연금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1949년 장제스 정부가 타이완[臺灣]으로 달아날 때 장쉐량 역시 타이완으로 옮겨져 연금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타이완의 국민당 정부는 장제스가 사망한 지 2년 후인 1977년에야 그를 연금상태에서 풀어줬다. 1993년 국민당 정부로부터 거주이전의 자유를 허락받자, 그는 미국 하와이에 정착했다. 2001. 10. 14일 미국 하와이에서 사망함.
'趙四小姐'
영원한 '청년원수' 장학량(張學良:장쉐량)의 부인이 지난 2000년 6월 22일 하와이에서 숨졌습니다. 조일적(趙一荻:자오이디), 향년 88세. 이름자 중 荻자는 '물억새'라는 뜻이랍니다. 조씨 집안의 네째 딸이어서 '자오쓰샤오제(趙四小姐)'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답니다.
신화통신이 발행하는 주간신문 '환구시보(環球時報)'가 29일 그녀의 일생을 소개했습니다. 그녀와 장학량 간의 뜨거운 사랑이야기가 핵심입니다. 환구시보는 "중국현대사에서 상당히 신비로운 여성인 조일적은 징학량과의 전설적 사랑이야기로 인구에 회자됐다"고 적었습니다.
조일적은 원적(原籍)이 절강(浙江:저장)성으로 명망있는 관리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조경화(趙慶華:자오칭화)는 북양군벌 통치시기에 철도국장을 거쳐 중앙정부 교통차관, 동삼성(東三省) 외교고문 등을 지냈습니다.
천성적으로 미모와 총명을 겸비한(환구시보 표현입니다) 조일적은 열너댓살 때 이미"북양화보(北洋畵報)"의 표지 모델이 되기도 했답니다. 천진(天津:톈진)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무도회에서 당시 '4대 공자(公子)'의 한사람이자 청년원수로 불리던 장학량과 조우,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두 사람 모두 한눈에 서로 반했다고 합니다.
□ 사랑의 도피
당시 장학량은 이미 부인이 있었기 때문에 조일적의 아버지는 이들의 사랑을 용납치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장학량과 같이 있는 것을 알고 분기탱천해 딸을 집안에 가두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조일적은 여섯째 오빠 조연생(趙燕生:자오옌성)의 도움을 얻어 가족 몰래 장학량이 있는 동북으로 달아납니다.
집안에 난리가 났겠지요. 아버지 조경화는 성질이 대단했던지 신문에 '부녀관계를 끊고 다시는 관직에 나가지 않겠다'는 광고까지 냈답니다. 조일적이 장학량 곁으로 오자 장학량의 본부인 우봉지(于鳳至:위펑즈)은 장씨 집안의 명예를 더럽힐까봐 조일적에게 비서자리만 주고 정식 부인의 지위는 허용하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조일적은 이를 감수하고 기꺼이 비서신분으로 장학량을 모셨습니다.
우봉지도 마음이 넓은 여자였던지 조일적의 진심에 감동돼 작은 집을 하나 지어주고 살게 했답니다. 이후 두사람은 서로 형님아우하며 화목하게 지냈고, 조일적은 1929년 장학량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장학량의 유일한 아들 장려림(張閭琳:랑뤼린, 여자이름 같네요)입니다.
□ 굳게 잡은 두 손
1928년 봉계(奉係) 군벌을 이끌던 아버지 장작림(張作霖:장쭤린)이 일본군에게 폭사당한데 이어 1931년 '9·18 사변'(일본 관동군의 만주 침략)이 일어나자 장학량은 봉천(奉天:펑톈)군을 이끌고 만리장성을 넘어 무력하게 후퇴했습니다.
비록 장개석(蔣介石:장제스)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에겐 "저항하지 못하는 장군"이라는 굴욕적인 오명이 붙여졌습니다. 장학량은 1936년 '서안(西安:시안)사변'을 일으킨 뒤 장개석에게 연금됐습니다. 이런 어려웠던 시절, '비서 조일적'은 늘 장학량의 곁을 떠나지 않았답니다.
공산군에게 밀려 후퇴하는 장개석에 이끌려 대만으로 건너갔던 장학량 부부는 64년에야 64세와 51세의 나이로 정식 혼례를 올렸습니다. 본부인 우봉지가 자진해서 장학량과 이혼했기 때문이랍니다. 왜 이혼을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대북(臺北:타이베이)에서도 계속 반연금상태에 있었던 장학량 부부는 지난 90년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됐습니다. 이후 하와이로 이주했습니다. 조일적은 지난 22일 오전 11시 11분 장학량과 손을 잡은 채 숨을 거두었습니다. 장학량은 휠체어 신세를 지는 100세 노인이지만 줄곧 부인 침상을 지켰으며 부인이 숨을 거두고 나서도 근 한 시간 동안 그녀의 손을 놓지 못했답니다.
기사 곳곳에 장학량 부부를 과도하게 추켜세우는 듯한 냄새가 나지만, 두 사람의 뜨거웠던 사랑을 폄하할 필요는 없겠지요. /呂始東드림 sdyeo@chosun.com
"다시 성문을 지날 때는 모든 게 예전 같지 않네. 같이 왔는데 왜 같이 돌아가지 못하는가. 반토막이 죽어버린 오동나무에 찬서리가 내리니, 머리 흰 원앙도 짝 잃고 홀로 나네. 풀 위의 이슬도 말라버리고, 옛집이나 당신 새 무덤이 모두 그리운 곳이 돼버렸소. 빈 침대에 누워 남쪽 창 비 듣는 소리를 듣노니, 누가 다시 등잔 심지를 돋워가며 옷을 기워주리오.(송대 시인 하주(賀鑄)의 '자고천')"
여기서 몇 년 전 중국어를 공부하면서 감명깊게 읽은 동북군벌(東北軍閥)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의 인터뷰 기사를 번역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군벌 장작림이 1928년에 일본 관동군에 의해 폭사당했는데 그의 아들 장학량이 국민당 정부의 동북군부사령관으로 있으면서 공산당과의 동족상잔에 회의를 느끼는 것을 장개석이 눈치채고 공산당토벌 독려차 서안에 내려왔다가 장학량에 의해 감금당하여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선언한 것이 1936년 12월 12일 일어난 서안사변(西安事)이다.
그때 장학량은 곧 장개석을 풀어주고 동시에 친히 국민당 정부가 있는 남경까지 배웅함으로써 장개석의 지도자로서의 위신을 지켜주기로 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공산당 주은래(周恩來)가 장학량의 남경행을 만류하기 위해 비행장에 급히 왔으나 장학량은 이미 떠나고 없었고, 그때 주은래는 하늘을 향해 “장 부사령관이여!” 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장학량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은 후 특사를 받았으나 국민당을 따라 중국 각지로 끌려 다니다가 1949년에는 대만으로 압송하여 장개석과 그 아들 장경국이 사망 후 90년대 초반에야 석방되어 1936년부터 무려 50년이 넘게 연금 당했다.
1994년에 장학량의 나이 94세에 처음으로 서안사변을 언급하면서 기자가 “어쨌든 장군께서 장개석을 남경까지 배웅하지 말았어야 했던 것 아니냐”고 하니 “난 군인이요, 내 스스로 한 일은 내 스스로 책임져, 날 죽인다 해도 난 책임지지, 내가 남경에 가면 총살시켰을지도 모르지만 나라는 사람은 그래, 당시 군사법정 재판장이 말하길 과연 장학림의 아들답다고 말했거든” 이라고 답변을 했다. 우리의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라는 속담이 중국어로는 ‘有其父 必有其子(유기부 필유기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