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점에 자꾸 되돌아가는 것은, 토론에 있어서 금지사항입니다. 나 자신에게 의가 없다는 점은 저와 다--님의 공통적인 출발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해결되어야 할 문제는, 의가 나올 수 없는 나에게서 의가 나온다면 그 의는 주님의 의냐 아니면 주님에 의해서 변화된 나에게서 나오는 의냐 이것이 구분되어야 합니다. 의가 나올 수 없는 나에게서 의가 나온다면.....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다시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그런 나에게서 나오는 의가 <주님의 의>이냐 아니면 <변화된 나에게서 나오는 의>이냐 하는 것입니다.
다--님은 <주님의 의>를 강조하시다가 바로 이 <변화된 나에게서 나오는 의>를 자꾸만 부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고 다시 돌아가곤 합니다. 심지어는 변화된 나를 <의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죄인>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해 왔습니다(감사하게도 이 점은 고치시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이제 출발점으로 돌아가지 말고 토론해 봅시다. <주님의 의>와 <변화된 나에게서 나오는 의>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믿음없던 내가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이던 내가 의인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누구의 믿음때문입니까? 이런 질문을 할 때, 이근호마을에서는 예수의 믿음이라고 하더군요. 참으로 황당한 말입니다. 내가 믿는 믿음으로가 아니라, 예수가 믿는 믿음으로 내가 의로워진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저는 이근호신학이 '자아'의 개념과 그 기능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자아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와 그 기능의 법칙은 나에게 나온 것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그렇게 기능하고 작용하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아가 죄때문에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역기능적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사람들이 <죄인>입니다. 그런 죄인의 자아는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 죄인이던 자가 이제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 의인이 의인된 것은, 믿을 수 없던 자가 믿을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도록 작용하던 자아가 믿을 수 있도록 작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아의 구원입니다. 내가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믿는 것입니다. 주님이 믿는 것이라면 주님이 의롭게 되어야지 어떻게 그 믿음으로 내가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믿음의 주체는 바로 내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로 하여금 믿게 한 그 나 자신 말입니다. 이것을 부인 하게 되면 신비주의가 됩니다. 이근호신학의 위험함이 여기에도 있습니다. 영지주의...로 오해되고, 불교식 인식론이 깔려있는 인상을 주는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 자아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의 지적을 선한 행실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 문제에 적용시켜 보게 되면, 님의 말이 반밖에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믿음을 갖게 하여 변화된 그 나 자신이 행하게 되는 행실이기에 그 행실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 행실의 원인은 주님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면, 주님의 영광까지도 심지어는 나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혼동과 오류에 빠지기 쉬우니, 조심하시기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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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믿음이 있노라!!>..하면 뭔가 교만한것 같아서,.자꾸만 <죄인>이라고 합니다..
물론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정작 믿음을 나타내 보일 필요가 있을때에는 ,과감하게 <의인>이라는 인식이 우리안에 있어야 합니다.
첫댓글한 가지만 첨가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공로로 의롭게 되지, 주님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체가 주님이다, 그래서 주님의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고 믿음의 주체가 주님이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점이 이점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의 믿음으로 내가 의롭게 됩니다. 나의 믿음의 그 내용이 주님의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로를 내가 믿고, 나의 그 믿음으로 내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
이곳의 어떤 분들은 상당히 피동적인 의인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듭난 자아이면서도 억지로 끌려가는 죄인의 심정으로 나를 죽이는 일을 해야만 주님이 드러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지극히 소극적이고 편협한 면에 국한된 의인관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아는 양심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의식하고,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주님과 함께 동역하는 것을 즐거워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기쁨으로 동참하고, 선을 행하는 것을 즐거워 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토마스 왓슨은 하나님의 자녀됨의 표지를 몇 가지로 설명하는데, 첫째, 그 표지는 순종이라는 것입니다(사8:20, 롬16:26)). 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버지 안에 거하는 것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롬8:14)는 것입니다. 넷째, 다른 형제들에게 온전한 사랑을 갖는다(벧전2:17)고 합니다. 이같은 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자녀는 구원의 사건 안에서 피동적 존재라기보다는 기쁨으로 자발적인 선행을 하는 존재입니다.
구원을 받은 믿음의 사람들이 다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그 말이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아니 율법 때문에 구원에 이를수 없어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그 댓가를 치루었거늘, 다시 율법의 멍에를 메라하니,.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였지요!!그런데 곰곰히 생각하니,.구원을 받은 사람은,.그 은혜에 감동하여..순종하는것이,.바로 율법을 지키는것이라는 깨닫게 됩니다..율법이 할례나..안식일.제사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것 전제 되는것이지요!!~십계명에 녹아져 있는,.하나님사람과 이웃사랑..이것을 지키는것이지요!!~그렇다고 다 지킵니까?.힘 닿는데까지 지키는 것이지요!~이것을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분들이 많다고 봅니다..
첫댓글 한 가지만 첨가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공로로 의롭게 되지, 주님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체가 주님이다, 그래서 주님의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고 믿음의 주체가 주님이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점이 이점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주체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의 믿음으로 내가 의롭게 됩니다. 나의 믿음의 그 내용이 주님의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로를 내가 믿고, 나의 그 믿음으로 내가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
믿음안에서 행해지는 <애씀>과 <노력>조차도 주님의 은혜로 돌리시면,.우리는 그야말로 꼭두각시 이며,.허수아비 입니다..모든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지만,.그 은혜를 간직하고 표현하는 것은 <우리들의 자신이며 의지>입니다..
이곳의 어떤 분들은 상당히 피동적인 의인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듭난 자아이면서도 억지로 끌려가는 죄인의 심정으로 나를 죽이는 일을 해야만 주님이 드러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지극히 소극적이고 편협한 면에 국한된 의인관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아는 양심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의식하고,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주님과 함께 동역하는 것을 즐거워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기쁨으로 동참하고, 선을 행하는 것을 즐거워 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
토마스 왓슨은 하나님의 자녀됨의 표지를 몇 가지로 설명하는데,
첫째, 그 표지는 순종이라는 것입니다(사8:20, 롬16:26)). 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아버지 안에 거하는 것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롬8:14)는 것입니다.
넷째, 다른 형제들에게 온전한 사랑을 갖는다(벧전2:17)고 합니다.
이같은 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자녀는 구원의 사건 안에서 피동적 존재라기보다는 기쁨으로 자발적인 선행을 하는 존재입니다.
거듭난 존재이면서도 아직도 나를 죽여야만 주님이 산다는 강박증으로 스스로 성령의 동인을 제한하는 이들은 그들이 벌레 취급하는 율법의 올무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을 스스로 증거합니다.
구원을 받은 믿음의 사람들이 다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그 말이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아니 율법 때문에 구원에 이를수 없어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그 댓가를 치루었거늘,
다시 율법의 멍에를 메라하니,.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하였지요!!그런데 곰곰히 생각하니,.구원을 받은 사람은,.그 은혜에 감동하여..순종하는것이,.바로 율법을 지키는것이라는 깨닫게 됩니다..율법이 할례나..안식일.제사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것 전제 되는것이지요!!~십계명에 녹아져 있는,.하나님사람과 이웃사랑..이것을 지키는것이지요!!~그렇다고 다 지킵니까?.힘 닿는데까지 지키는 것이지요!~이것을 이해하기 힘들어 하는 분들이 많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