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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IC를 빠져 나와 읍내로 진입하면서 좌측을 보면 큰 건물들이 서 있을 거야 그 뒤쪽으로 들어가 차를 대 놓고 있어 내 금방 갈게”
친구가 말하는 곳은 남원다리를 채 지나지 않은 곳이니 아마 봉현이지 싶었다. 커다란 건물은 큼직한 글자를 박음질하여 저마다 건물의 용도를 밝히고 있다.
글로벌시대에 맞춤한 사과집하장이 앞머리에 풍기가 아닌 영주라는 지명을 내밀고 있었고, 내 고향 풍기의 명물을 알리기 위한 지역 특산물의 여러 명칭이 나그네 호기심을 부추긴다.
좌측으로 차의 방향을 틀고 들어간다.
도로변 건물 뒤로 들어서니 넓은 공터 같은 길이 나타나고 키 높은 건물들이 도열해있다. OO직물, OO직물 인견도매점, OO직물 공업사 라는 입간판이 입구마다 서 있고 ‘풍기 인견 백화점’ 이라는 대형 광고판이 하늘을 이고 있는데, 군데군데 주차 해 놓은 차량들 사이엔 공장으로 통하는 문들이 꽤나 당당하다.
차에서 내린다.
그 순간, 잊을 수 없는, 지울 수 없는 유년의 기억들이 맹렬하게 튀어 오르고 나는 급하게 뒤를 돌아 다 본다. 누군가 내 머리채를 휘어잡는 거 같아서다.
그냥 스쳐 가면 좋으련만, 낯 선 건물의 풍경 사이로 흐르는, 익숙한 냄새와 친숙한 소리가 기어이 마중을 나왔다. 어느 날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자신이 버리고 떠나간 옛 애인과 갑자기 마주친 여자처럼 그 마중이 당혹스럽다. 오래 전 저 소리와 저 냄새에 휘감겨 살던 숱한 장면들이 쉴 새 없이 오버 랩 되면서 걸어가는 발걸음이 자꾸 휘청거린다.
골목 어귀, 녹슨 철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벼락 같이 내려치던 베틀 소리. 걸음을 멈추고 높은 담장을 올려다본다. 외로운 첨탑에 별 보기 작은 들창처럼 그 곳에도 지붕 가까이에 창문을 달고 있지만 견고한 방음재를 사용한 듯 기계소리가 요란스럽지 않다.
도대체 어떻게 달라졌기에 이토록 높은 담이 필요한 걸까.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듯 현대화되고 거대해진 인견 공장을 올려다보자니 낮은 담, 엉성한 유리창에 몇 겹이나 되는 비닐을 갑옷처럼 둘둘 말고 지탱해 있던 옛 집 공장이 슬프게 떠오른다.
‘저 안이 궁금하다’
끝없이 울렁거리며 치솟아 오르는 그 옛날 어둑한 공장의 영상이 20년 전에 가라 앉아 있다가 예고도 없이 떠올랐거늘 그 때의 모습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왜 그리 궁금할까. 이번엔 창문을 포기하고 긴 창살로 이어진 대문 안을 흘끔거리는데 도대체 사람 그림자를 볼 수가 없다. 이 큰 공장을 운영하려면 베 짜는 여인들이 수십 명은 넘을 텐데, 요즘은 공장 안에다 화장실과 식수대를 설치한 걸까? 여인네들 코빼기도 안보이네 그랬다.
아는 얼굴을 만나면 얼마나 반가울까. 우리 부모님과 형제처럼 지내던 분 들 중에 한 분이라도 문 밖에 서 있는 날 알아보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사항이다. 아버지 살아 계신다면 아흔이 넘는 연세.. 이곳에 그 분들이 계실 확률이 확 좁혀지면서 나는 풀이 죽는다.
다시 창문을 올려다보며 그 안에서 베를 짜는 여인들을 상상하자 슬금슬금 살아나는 얼굴들이 있다.
언젠가 풍기 아리랑을 쓴다면 인견을 빼 놓을 수 없겠지. 그 때가 온다면 그녀들 이야기를 쓰리라. 그러면서 그 자리를 떴다.
베이비 붐 시대의 마지막 주자였던 우리들은 참 많기도 많았다.
그 시절엔 한 학년씩 올라갈 때마다 선생님이 가정환경 조사표를 나눠 주며 기재해 오라고 했는데, 부모님의 직업이 뭔지, 전축이 있는지, 텔레비전이 있는지, 심지어 재봉틀, 다리미까지 있는지 없는지를 물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특이한 문항 하나. 지붕이 기와인지 초가인지를 묻는 거였는데 어린 내 마음에도 별 걸 다 묻는구나 그랬다.
연필에 침을 발라가며 누런 종이로 인쇄 되어있는 조사서를 작성하는 엄마의 얼굴은 참으로 비장해 보였다. 간간히 섞어 나오는 말 중에 ‘아이고, 촌구석에 이런 걸 가진 집이 어딨어?’부터 자신의 집안 재정 상태를 상, 중, 하 하나에다 동그라미를 쳐야 하는 문항에 부딪치면 몇 번이고 이마를 찡그리며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친구들이 고무신을 신고 다닐 때 반짝거리는 빨간 에나멜 구두를 신고 다녔던 나는 우리 집이 부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엄마는 늘 가운데 중에다 동그라미를 그렸다. 보고 있던 내가 마땅찮은 표정을 지으며
조사서를 넘겨받은 내가 상단 좌측을 확인하면 엄마의 국문 실력을 여실히 드러내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부모의 직업란이다. 농업, 상업, 공업인지를 묻는 그 란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입 하나가 범처럼 무서울 때였다.
전국의 농어촌 처녀들이 보따리 싸들고 서울 구로 공단이나 동대문으로 쏟아져 들어가 하루 16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나마 타 지역보다 아리따운 처자들을 도시로 뺏기지 않아도 되는 다행한 일이 유지 된 것은 바로 풍기 직조공장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부터 정감록이 민간 신앙으로 자리 하면서 조선 제 십 승지 중 하나였던 ‘풍기’를 찾아 내려온 이북 사람들이 ‘수직기’ 로 시작한 직물 가내 공업을 발전시키면서, 도시와 수 백리 떨어진 작은 마을에 공장들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소백산이 사과와 인삼을 내 고향에 선물로 주었다면 인견은 사람 손으로 빚어진 선물이었다.
부모님은 뼈가 부서져라 일을 하며 베틀 수를 늘려갔고 그럴 때마다 집에는 베 짜는 처녀들이 하나 둘씩 늘어갔다. 울 엄마 역시 타지에서 이곳으로 와 베를 짜던 처녀였다지. 그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하루에 두 번, 교대 시간과 점심시간 때만 누릴 수 있는 고요함의 절정. 어쩌면 늘 철커덕거렸기에 그 짧은 고요가 더 절실했는지 모른다. 그 때는 걸핏하면 정전이 되곤 했는데 갑자기 찾아 온 보너스 같은 고요가 좋아서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배시시 웃곤 했다. 공장안에선 엄마야!! 비명 소리가 나는데, 갑작스런 정전으로 와장창 실을 끊고 잔인한 후유증을 안겨준 채 튕겨져 나가떨어진 북을 찾으면서 깊은 한숨을 내 뱉는 또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 때는 철들지 못한 아이였다.
드르륵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둑한 공장은 새코롬한 쇠 냄새와 들코롬한 기름 냄새로 뒤섞여 특유의 향기를 내뿜었고 흡사 백열전등을 늘어뜨린 커대한 동굴 같기도 했다. 그 곳은 바깥 세계와 단절 된 또 다른 공간이었고, 햇빛이 창조하지 못하는 또 다른 생물의 탄생지였다. 기름에 길이 든 흙바닥은 검은 모르타르를 발라 놓은 듯 반질반질 거렸고, 마치 소리폭포가 쏟아지고 있는 거대한 세탁통으로 들어간 느낌을 받았다.
숙련된 언니는 혼자서 베틀 7,8대를 혼자 다루었고, 조금 미숙한 언니들은 5대 정도를 맡아서 베를 짰는데 간조 때가 되면 늘 한두 대 더 베틀을 짜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보곤 했다. 베틀기와 직원을 관리하고 있는 기사일이나, 해사기를 조정하고 나름을 하는 일은 남자들 몫이다. 늘 남녀 비율은 3대 8정도였는데, 수시로 얼굴이 바뀌곤 했다.
일 밖에 모르는 아버지는 일 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정신없이 밀린 달랭이를 빼곡하게 바구니에 채워 베틀마다 돌아다니며 북통에다 꽂아주면 언니들은 내 볼을 쓰다듬고 하얀 미소를 띄워주곤 했다. 정말 신기했던 건 폭발할 거 같은 그 소리폭포가 시간이 지나면서 감미로운 자장가처럼 몸에 착 달라붙는 거였다. 그 폭포 속에서 언니들은 귓속말 하듯이 나직나직하게 서로 대화를 했고 나까지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새벽 네다섯 시쯤 되면 여기저기서 꾸벅꾸벅 조는 언니들 모습이 보인다. 실이 다 풀린 북을 제 때 새 달랭이로 갈아 끼우지 않으면 빈 북이 천을 짜는 게 아니라 발을 짜 듯 날실만 흐물흐물 감기기 때문에 기사 아저씨는 졸고 있는 처자들을 깨우러 돌아 다녀야 한다. 그런데 유독 어떤 아가씨는 깨우지 않고 직접 베틀을 세운 뒤 익숙한 솜씨로 북 실을 갈아 끼워주는 모습을 보곤 했는데, 아마도 그 처녀에게 연정을 품지 않았나 싶다.
긴 긴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온다. 기사아저씨는 “어어이!!” 큰 소리를 지르고 팔을 번쩍 든다. 그리고 전기 소켓에 손을 갖다 대는 시늉을 하면 언니들은 베틀을 멈추기 시작한다. 철컥철컥 하는 소리가 찰칵찰칵 하다가 끝엔 딸깍딸깍 소리로 변한다. 모조리 멈추어선 베틀 뒤엔 기계를 움직이게 하는 피대만 윙윙 돌아가는데 고음의 소프라노급베틀 소리보다 훨씬 웅장하고 묵직하다. 드디어 전선이 끊어지면서 피대는 휘힝! 돌아치는 말울음 소리를 지르며 사라지고 그 순간 동굴 안은 적막이 쌓이는 것이다.
그때부터 처녀들은 더 바빠진다. 고장 나지 않고 밤새 기계가 잘 돌아 간 언니들은 피곤한 얼굴위에다 그래도 미소를 입히지만, 북이 튀어 와장창 실이 끊어지거나 말썽을 일으킨 베틀을 세워 놓은 언니들은 교대자 얼굴보기가 괴로운 거다. 필을 재고 후다닥 집에 돌아가 밥 한 술 먹고 다시 공장으로 와 끊어진 실을 이어야 하는데 그게 예삿일이 아니다. 참빗같이 촘촘한 바디 사이로 쇠 비녀를 꽂아 가느다란 실을 얹어 빼준 다음 일일이 참깨만한 종강 구멍으로 연결을 해야 한다. 손과 시간이 많이 필요한 작업인데다 늘 반쯤 구부린 자세로 일을 해야 하기에 고통스럽다.
그런 작업을 거뜬히 해치우면서도 도대체 불평조차 포스라운 소리로 치부했던 그녀들 내부는 무엇으로 채워진 걸까.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강인하게 만들었을까. 어떤 이는 학교 교실에서 시를 읊으며 미래를 꿈꾸고, 어떤 이는 시커먼 기름 꽃을 묻히며 현실을 사는데, 과연 어느 시점에 가서야 서로가 같다고 인정 하게 되는 걸까. 왜 나는 그녀들이 훨씬 위대했노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마치 눈의 요정이 밤새 뿌린 눈을 쓸어 담아 차곡차곡 눈 시루떡을 만든 것처럼 도투마리를 풀 때마다 소복소복 쌓여가는 하얀 천들. 그녀들의 동맥 같은 시퍼런 꿈이 공장 바닥에 인견으로 내려앉을 때마다 내 고향은 조금씩 몸을 일으켰으리.
세상은 늘 그렇듯이 양면의 얼굴을 하고 진행한다.
툇마루 한 쪽 끝에 고개를 숙이고 두 발을 흔들거리며 앉아 있는 여자 아이는 바로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에서 공부했던 친구가 아닌가. 그 순간 도로 방으로 들어가 나가지도 못한 체 어른들 대화가 끝나기만 기다리는 내 심장이 자꾸 벌렁거렸다. 도둑질하다 들킨 아이처럼, 못 볼 걸 본 아이처럼 그 친구의 출현은 충격이었다. 얌전하고 얼굴도 아주 고운 친구였는데 당연히 다른 중학교에 입학했으리라 믿었던 나는, 교복 대신 사복에 긴 머리를 하고 있는 그 아이 모습이 낯설었고, 그 많은 공장 중에 하필 우리 집을 찾아 온 그녀를 어떻게 마주 봐야할 지 걱정스러웠다.
한 동안 피해 다니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막상 얼굴을 부딪치자 담담하게 웃어주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생각보다 오랜 시간 우리 집에서 베를 짰던 그 친구는 키가 큰 해사기 다루는 기사의 각시가 되어 떠나갔다. 그녀 나이 고작 열일곱 살이나 되었을까? 내가 고등학교 교복을 입었을 때 한복을 입고 떠나간 친구. 여릿여릿한 아픔으로 기억되는 그녀는 내 추억의 진열장 안에 늙지도 않고 때 묻지도 않은 어린각시탈로 보관되어 있다. 때때로 그녀가 보고 싶기도 하고...... 차라리 안보고 싶기도 하다.
차이는 게 돌멩이고, 넘치는 게 여자라, 코 밑에 까끄름한 수염이 올라오는 풍기 남자들은 덩달아 바빴다. 교련복 바지에 줄 세우고 교련 모자 빼뚜름하니 머리통에 얹고 예쁜 공장 아가씨가 있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교대하고 나오는 그녀를 자전거 뒤에 태우지 못해 안달을 했다. 꼭 혼자 하지도 못하고 응원군 친구 한명을 달고 다니다가 연애에 성공하면 언제 봤냐는 듯 친구는 내팽개치고 아가씨 출퇴근 기사를 자청하며 씽씽 페달을 밟으며 급하게 읍내를 탈출한다. 어쩌다 기다리는 골목길에서 그녀와 함께 일하는 남자 직원과 부딪치면 못 본체 고개를 돌리고 능청을 떠는데, 대단히 꼬라지가 난 남자 직공은 티꺼운 눈빛으로 그 남학생을 노려보다가 ‘에이 씨’ 하면서 손에 든 연장을 내리치고 집지키는 강아지를 걷어찼다. 퇴근하는 아가씨가 쌩 하니 지나치면 뭐라 말 한마디 못한 체 한숨만 내쉬고.
비록 토막잠을 자고 책보다 인견장부를 목숨처럼 여겼던 그녀들이지만 맹렬한 청춘의 욕구를 잠만 재울 수 없는 법. 틈이 나면 서너 명씩 모여 풍기 극장, 동보 극장으로 영화도 보고, ‘선데이 서울’ 돌려 보며 바깥세상을 키득거리며 짐작도 하고, 연애도 했다. 나는 언니들 손에 이끌려 ‘별들의 고향’을 몇 번이나 보았고, 수많은 연애 영화를 섭렵하면서 친구들보다 훨씬 빠른 연애학 개론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아홉시만 되면 쇠사슬달린 자물통을 대문에 거는 무서운 아버지 땜에 담벼락에 붙어서서 망만 보다가 화장실 가는 언니들 도움으로 담을 타 넘어 간신히 들어오기도 했다. 재미있는 연애 소설책을 구하면 서로 바꿔보기도 하고 밤참으로 먹는 김치 볶음밥을 함께 둘러 앉아 퍼 먹기도 하면서 누가 누구랑 연애를 하고 누구누구는 삼각관계에 속상해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기도 했다.
조금 머리통이 굵어지면서 건방이 들었다.
풍기의 여름을 말하면서 시냇가 자맥질을 빼 놓으면 그것은 가운데 구멍이 그려져 있지 않은 과녁과 같다. 앞뒤로 흐르는 남원다리와 뒷창락은 풍기 사람들의 대중 목욕탕이자,삶의 충전소였고, 낭만의 영화 세트장이었다. 지금도 뒷창락 개울 차가운 여름 밤 목욕을 잊을 수 없다. 도저히 잊을 수 없다. 얼굴은 가무끄름한데 속살은 어찌 그리 백옥 같은지, 달빛에 드러나는 그녀들의 봉긋 솟은 가슴은 누구도 손 댈 수 없는 성스러운 열매 같았고, 젖은 인조 속바지 사이로 드러난 그들의 둔부는 달빛이 키운 초가지붕 위 뽀얀 박과 같았다. 벗은 몸으로 그녀들 등에 바짝 매달려 물살을 가르면, 매끈거리는 살결의 촉감과 부드럽게 애무하는 물결이 부딪치면서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평화를 느끼게 해 주었다. 그것은 생이 가져다 준 아주 멋진 경험이었다.
나는 지금껏 살아도 그녀들처럼 아름다운 몸매를 본 적이 없다. 비키니 입은 날씬한 해변의 아가씨가 매끈거리는 물고기 같다면 개울가 물속에서 달빛을 조명삼아 자맥질하는 그녀들의 나신은 영혼이 깃든 달맞이 꽃이었다. 풍기는 그녀들이 있어서 행복했다. 뒷창락도 행복했다.
십여 년이 지난 어느 여름날, 대부도에 있는 작은 해변 마을을 갔다가 늦은 밤에 혼자 수영을 한 적 있었다. 보름달이 떠 있어 어둡지 않았다. 뻘을 갖고 있는 바닷물이건만 신기하게도 파도가 없이 잔잔했다. 흡사 바닷물을 끌어다 가둬 둔 드넓은 호수 같았다. 조금씩 조금씩 헤엄쳐 들어가며 오래오래 자맥질 했다. 마을과 꽤 멀리 떨어졌다고 느낀 지점에서 나는 입고 있는 수영복을 물속에서 벗어 버렸다. 그것을 팔목에 감고 조용히 부유하며 물살에 몸을 내맡기고 가만히 달을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울 때였다. 저 바깥엔 꽤 많은 사람들이 일행이라는 명분으로 함께했지만 나 홀로 이방인 같이 느껴지고 외톨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기존의 가치관으로 학습된 자아와 그것을 견디지 못해 하는 또 다른 자아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수영복을 팔목에서 풀어 버리고, 그것을 흘러 버리고, 나도 몸을 놓아 버리고 싶은 충동에 눈물이 자꾸 흘러내렸다.
그러는 중에.....
그 때 나는 알았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풍기 인견이 전국 유일한 생산지로 소문이 나고 인정을 받으면서 직조 공장은 점점 늘어났고 규모도 커져갔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니 베 짜는 처녀들이 자연 줄어들었고 공장 집마다 숙련된 여직원을 구하지 못해 안달이 났다. 유능한 기사의 명성은 자신이 확보할 수 있는 여직원 숫자가 몇이냐에 따라 달라졌다. 그녀들은 대우가 나아지고 급여도 올라가면서 웬만큼 가계가 기지개를 펴자 알뜰히 모아 저축도 하고 사업 밑천도 만들면서 지역의 중상층으로 발돋음 했고, 근면과 성실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증명해 보였다. 자본주의라 해서 경영주만 성공한다는 마르크스 이론이 다 맞는 건 아니라는 것도 입증해 보였다.
어디든 선구자가 있어야 한다.
백년의 가난과 무지함을 단 십여 년 만에 뒤집어버린 국가의 저력이 어디서 나왔는지 를 묻는 질문에 ‘한강’ 을 적어선 안 된다. 대통령 이름 하나만 적어서도 안 된다. 똑똑한 경영자 이름을 적으면 어딘가 미흡하다. 하지만 거대한 공룡의 잠을 깨운 재봉틀 소리, 망치 소리, 베 짜는 소리의 주인공들을 말한다면 적어도 반론을 제기할 자는 없을 것이다.
모르겠다.
그들이 제2의 고향으로 먼먼 소백산 귀퉁이로 쏟아져 들어 왔을 때 등짝에 업고 온 자신들의 고향이 얼마나 사무쳤겠는가. 먹고 살기위해 시작한 ‘수직기’ 가 명민한 특산물로 자리 잡고, 베 짜는 처녀들 이라는 아름다운 일화가 탄생되고, 내가 밥을 먹고 살았으며 그녀들이 터를 잡고 살고 있으니 일단은 성공신화라 해도 되지 않을 런지. 특이한 지역민 구성을 배경으로 하고도 수십 년째 평화로운 조화가 이루어지는 내 고향. 일 승지다운 정승감 심성을 가진 풍기 사람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옛길을 보러갔다가 우연히 ‘블리스’ 라는 인견 매장에 갔는데, 그 옆에 있는 인조공장 안을 엿볼 기회가 있었다. 엄청난 숫자의 베틀이 쉴새없이 돌아가는데, 사람이 베를 짜는게 아니라 레이저가 베를 짜고 있었다. 120대를 단 네 사람이 맡아서 돌리는데 그게 컴퓨터 덕분이란다. 우지끈! 하고 내 상상이 부러지면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렇다면? 여름은 인견의 계절이다. 언제 인견 홍보관을 조용히 찾아가보고 싶다.
정말, 애 많이 썼노라고, 당신들의 노고를 우리 모두 잊지 않고 있노라고. 혹시 마음 상하고, 슬펐던 기억이 남아 있다면 잊으라고. 다들 똑 같이 아프고, 힘든 상처 한 두개쯤은 다 갖고 산다고. 나는 당신을 위로하러 온 게 아니라 당신들에게 위로 받고 싶어 여기에 왔노라고,
그리고나서 두 번째 인견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이경진 에세이 모음 . 풍기 아리랑1...금선정,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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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베짜는기술을 새로 배우는 아가씨가 없다네요 그래서 얼마안남은 나이드신 아줌마직수들만 손놓으시면 극심한 구인난이 예상된다는데.....
누군가는 그렇게 말한다해요. 시간이란 과거나 현재나 미래같은 걸 만들지 않는다고..그 역설적인 표현에 의하면 늘 순간만이 있을 뿐이라고..시간은 그런지도 모른다고 일순 동감했지만, 그래, 과거나 미래는 그저 삶의 흔적들 모임이라고 생각했지만...달리 표현할 수 없는 지나감의 그 표식을 뭐라해야할 지..베짜는 아가씨...이제는 그저 아련한 과거 속 아름다운 상징...어쨋든 시간은 가네요. 고맙습니다.
황진이 어린시절을 보는듯 글잘일었읍니다
젊음이 나를 버리고간다면, 그래 가려면 가라! 나는 그저 젊음을 잊지 않고 살련다.. 그런 마음을 갖고 사시는 분. 그래서 젊은 오빠 라 불리어도 당연하신 선배님. 옛길의 동행을 즐겁게 해 주신 오라버니 감사해요.. 그 때도 고마운 선물을 듬뿍 받았는데, 오늘 답글을 다는 절 또 한번 행복하게 만들어 주시네요.. 늘, 그렇게 당당하게, 오래도록 그 모습 뵐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여름 동창모임이 있어 삼가리 냇가서 발담그고 염소보신하고, 시원한공기도 많이마시고 오다보이 인견공장이 봉현에많이들어있더군 풍기의 자랑거리....
베틀공장을 고교시절 처음 보고는 풍기의 인견글을 접하니
고향의 정이 더욱많이느끼게하는구료, 황진이 후배잘봤니더.^ ^
어디를 가도 우리 고향만큼 아름답고 절경의 산수를 두르고 사는 곳이 드물지요? 추억의 기적소리 베고 누워 한여름 낮잠을 즐기는듯 평화로운 내고향. 떠나 살지 않았다면 쌉싸름한 되새김의 묘미도 모르고 살겠지요. 늘 이렇게 찾아 와 다독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달랭이 올리고 해사, 나름,북, 문자판, 잉애,도투마리 등 모두가 그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옛 추억을 떠 올리는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48회 조경덕
이 글을 쓰면서 '회사' 가 맞는지 '해사' 가 맞는지 헷갈렸다가 선배님 댓글을 보자마자 수정했답니다^^ 아직도 '달랭이' 가 맞는지 '달래이'가 맞는 지 여전히 헷갈리고 있지만요.. 글을 조금씩 늘려갈 때마다, 제 아는 단어의 용량이 얼마나 빈약한 지를 깨닫고, 실망하고...제가 65회니까 선배님 48회 숫자를 손가락으로 세다가 피식 웃었네요^^ 그리움의 계단은 모두 같은 층인데 숫자가 뭔 소용이라고*^^* 그래도 너무 반갑고 좋아서리..고맙습니다.
읍내에 살지 않아서 베짜는 모습은 볼수 없었지만, 점심시간에, 혹은 정전시간에 길거리에 나다니는 아가씨들은 많이 봤었죠. 그땐 풍기도 시글벅쩍해서 사람사는것 같았는데, 어쩌다 내려가면 조용해서 그런 모습은 찾아 볼수 없어요. 풍기극장 나무벤치 의자, 그것도 바닥이 평탄해서 뒷좌석은 의자에 서서도 안보이고. 잘보이는 자리는 돈받고 팔기도 하였고. 옛추억 잘 새겨 봅니다.
도시만 바글바글해요. 그 타이트한 공간이 싫어서 다들 주말이면 한적함을 찾아 나서느라 도로도 늘 바글바글하고. 그러면서도 또 되돌아가 아파트 문을 여는 사람들... 고향에 돌아가 살고 싶은데..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 차 한 잔의 기약이 또 해를 넘기려나 봅니다. 풍기는 매달 한 번 꼴로 가면서, 바로 옆 석촌호수는 왜 그리 먼지... 단어에 가을이 묻어 있는 석촌 호수...
내가어렷을때(6~7세정도) 우리집도 직조공장을 했다..전쟁 전에부터 공장을 했으니 내가 알기로는 풍기에서 제일 먼저 인것으로 안다..공장 아가씨들이 귀엽다며 베틀 의자엽에 안처 주곤했던 기억이난다..그때는 기계한대사람 한명이엇고 수직이엇다.약이십대정도 엿든것같다..회사기도 손으로 돌리고 나름틀도 손으로 돌리고 달래이도 마찬가지였다..황진이의 글을 보며 어릴적 우리 공장 모습 그대로인것같아 더 마음이 아리다....그때 그아가씨들은 지금은 모두 할머니가 되어있겠지..아물거리는 추억을 이깨워준 황진이님의글 감사히 잘읽었습니다..골목마다 흡사 비오는 소리같든 베틀소리~~~~
골목마다 흡사 비오는 소리 같던 베틀소리...멋집니다 선배님. 지금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우리 공장. 나보다도 이웃에 살던 분들은 애꿎게 감수해야했던 소음..이웃집 개가 짖어도 싸움이 일어나는 요즘 같으면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이였지요.위층에서 늦은 밤에 세탁기를 돌리면 물소리 떨어지는 소리에도 괴로우니..정말이지 마음 좋은 이웃집 영기네.. 철순이네.. 풍기 아리랑 덕분에 켜켜이 묵혀 둔 옛날이 보석처럼 다가옵니다. 소백역 플랫폼에서 으아아!! 소리 지르며 뛰어갔던 그 시간들..한 손에 카메라를 들고 서 계셨던 선배님.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 보게 했던 그 멋진 은발... 그립습니다.
에세이 한권 될것 같은데 이젠 출판해야죠. 잘읽고 잠시나마 베틀소리 되새겨봅니다.
해야지요. 언젠가는 하게 되겠지요..그 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잘돼 준다면 ..부끄럽지 않게 묶을 수 있을 텐데..욕심은 앞서고 성엔 안차고.. 쓸 수록 자신없는 황진이 글.ㅎㅎ
고향 의 속살을 꺼내보면 인견이 있겠지요. 삶이라는거 매울수록 우러나오는 정서가 제맛일테고... 혹한의 추위에서 곱아지는 손을 불며 밤을 붙들었던 애환 과 시집마져.. 사랑마져 친정집안을 세우기위해 유보했던 청춘도 서려있을것입니다. 진중하고 겸손하게 세상을 가늠하고있는 동생의 마음이 인견처럼 반듯하게 엮어주시니 감사해요. 정말 잘 읽읍니다. 고향을 좀더 진솔하게 묶어주시길 바라며 .... -합장-
나이 들어가면서 알게 되는 부모 마음. 그리고 세상 살아가다 보니 깨닫게 되는 삶의 과정들.. 오래 가지도 못하고 정면으로 부딪칠 걸..오빠를 더 많이 이해했더라면 좋았을텐데..그래도 든든한 버팀목 같은 우리 오빠.. 울 엄마 정말 현명하시지..쪼로록 세 딸 위에 우산같은 오빠를 앞에 두었으니*^^* 사랑해요 오빠.
과연 황진이 입니다!!! "새코롬한 쇠냄새. 들코롬한 기름냄새" 와~~~옛날 그 냄새가...잊었던 그 냄새가 지금 내 코를 자극 합니다! 참으로 감탄 할 표현! "피대"라는 단어도 옛날을 자극하는 단어! 지금은 모두 "벨트"라고 하는것 같던데...아~~~위대한 우리의 누나, 누이들이여~~~"배고프고 잠못자서 노랗게 된 누나의 얼굴.....냉수 한바가지로 허기진 배를 채우던 가엾은 누이..........평생을 직물공장에서 보낸 친구 만동이는 소음으로 인한 난청 환자가 되었고... 그렇게 사는것이 인생이라지요.....추억은 아름답다 하던데 서글프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오르네요.....땀냄새를 느낍니다! 황진이님의 진액을 짠 쓰디쓴 땀냄새를.....
가만히 앉아있어도 바깥의 열기가 느껴지는 한여름 안에서,,저는 똥마루운 강아지처럼 낑낑거립니다. 시간은 정 떨어진 님을 버리고 돌아서는 남정네처럼 뒤 돌아볼 생각도 않고 내빼는데...너무 같잖은 꿈을 꾼게 아닌가 하고..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할 고민으로 낑낑댄다면야 사람을 보면 되는데..애꿎은 방바닥 걸레질만 수차례...작년 8월 15일, 선배님을 만났던 그 때로 , 그 마음으로,..단발머리 소녀와 뒷창락 개울가 그리고 눈물...하나만으로 되돌아가고 싶어서...대구, 덥지요?
바람많고 돌많고 그리고 여자많은 육지에 삼다도라 불리울만큼 그때는 배짜는아가씨로 넘처났고 앞집 뒷집 직조기돌아가는소리와 집집마다 그흔한보자기하나도 인견보였고 여름이면 깔깔이라불리는 홑이불에시원함을 새삼잊을수가없네요 글을읽는동안 그시절 몰래숨어서 냇가에 멱감는 처자들훔처보던 까까머리철부지의 추억까지 일깨워준 님에글에 찬사를보냄니다.
멱감는 처자들 훔쳐봤다면저랑 비슷한 세대겠네요? 닉네임이 현대 미술관에 걸린 신세대 작품명 같아요*^^* 인견 보자기와 깔깔이 홑이불. 땡땡이라 부르기도 했지요. 우리 엄마 재봉틀에 드르륵 박혀 훌쩍 이불되어 내 배위로 던져졌던 인견.. 빨면 백옥 같은 천. 개울가 물살에 승무처럼 춤추던 하얀 이불...님의 댓글을 읽으니 제 글에서 빠트린 게 뭔지를 알았네요.. 고맙습니다..
ㅎㅎㅎ 동창끼리 말투가 횡그렁 하네ㅋㅋ 황진이가 경진이라는 이름을 쓰는걸 상구도 모르는 친구가 있네.ㅋㅋㅋ 재밌다...ㅎㅎㅎ 많이 서로 존대말 끝까지 해바라 어디....ㅋㅋㅋ 황진아 야가 누군동 모르나?...
첨 들어 보는 이름이라.. 동창 누구로? 궁금하다 부꾸야. 낼 전화로 갈키다고 어예?
그간 진이 후배의 글이 언제나 나올려나 궁금했었는데..이리도 곱고 가슴시린 글로 엮으려고 시간이 걸렸군요^^
이 글을 읽으며 가슴한켠 아려오는 이 느낌은 무엇인지? 지금의 삶이 사치스러운것 같아 미안하기까지 하네요..
진이후배.. 조금 더 다듬고 보태면 멋진 단편소설이 나올것 같네요
애쓰신 진이후배~ 화이팅!!!
그냥, 인사치레로 이리 말하신건 아니지요? 하긴,인사치레면 어떤가요..힘이 됩니다. 약도 되구요^^ 한 덩치 하시는 선배님 에어콘 아래서 코박고 계신 건 아니지요? 지금...비가 멋지게 내립니다. 한 컷의 그림을 빗소리가 깔아주네요.. 춘천 고속도로, 터엉 빈 새도로..쏟아지는 빗줄기가 섬뜻섬뜻 간을 오그라지게 했던 ..오그라지는 간에 빗물처럼 스며들던 어떤 가수의 노래... 그 땐 어디라도 가지 않으면 답답했는데..지금은 방콕에서 배만 젓고 있습니다*^^* 열심히 해봐야죠 그쵸? 뭐, 달리 방법이 없으니까요^^
국민학교 졸업하고 달래이 올리로 가는 조그마한 소녀들과 베틀 짜는 다큰 처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졌었지요.....
아침에 퇴근하는 모습은 힘들고 고된 삶 만큼이나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모습으로 퇴근하는
그 여인네들의 희생이 먹고살기 팍팍한 시골의 살림을 그래도 이끌어가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지......
나를 비롯하여 여동생 아니면 누나 한테 신세지지 않은 남자들 있으믄 손들어 보세요..... 몇이나 될라나? 에휴~
그 힘든 시절 고생한 보람도 없이 어느덧 사십줄들이 훨씬 넘어버린 중년의 세월속에서 과연 그시절을 추억이라 할 수있을까?
잊어버리고 싶은 추억은 아닐런지..... //
그렇지? 너무 아팠던 기억은 잘 안 잊혀지드라..희석은 될라나.. 그림자 처럼 인식되지 않다가..어느 날 오롯이 날 따라다니더라만... 보람도 안 있었겠나 다들 그렇지야 않겠지만. 나는 그들 얼굴에서 순응하는 모습을 봤지..옛길 가면서 찍은 사진 중에 너랑 찍은 게 너무 잘 나와서 인화해 놓구는 못봐서 못주네.. 니 옆지기 샘좀 내라고 줄라 했는데.. 내 사진 꾸러미에 들어가버렸네.. 다, 멋진 추억이 되었음 좋겠다. 사진도, 이 글도..가을이나 돼야 얼굴 보겠지? 사랑한다 내친구...건강해래이..
지난 토요일 결혼식이 있어서 풍기에서 인견공장 하는 고향 친구를 만났는데 인력때문에 어려움이 많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격세지감을 봅니다 베틀에 생활과 열정을 쏫으며 열심이던 손들이 눈에 선한데......우리 풍기의 지난 이야기와 곳곳을 한편의 드라마 로 역어내는 솜씨 놀랍습니다 .풍기아리랑으로 정리된 이야기가 고향을 다시보게 하고 기록되어 풍기를 쌀찌우는 밑거름이 되리라 봅니다 ... 힘내시어 성장하실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그래서 고향이 숨은 이야기가 더 많이 세상 밖으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수고 하셨습니다
글을 쓰는건, 결국 지가 좋아서 쓰는거지요. 부질없다 생각하고, 내려놓았다가도 뒤통수를 툭툭 건드리는 얄궂은 방문객. 중독이 되어갑니다..저 좋아서 써놓고 남들도 좋기를 바라는 고약한 심보..금방 상처받고 금세 좋아라 희희낙락. 슬슬 중독자 증상이 나타납니다.그래서 행복하고, 그래서 괴롭습니다..시보네님도 아마 그럴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기대에 늘 못미쳐 죄송하지만, 어쩌겠어요..어차피 끝을 봐야 한다면..끝까지 해봐야겠지요. 늘, 감사하다는 말외엔 건넬 게 없습니다. 항상 건강 챙기시길.....
어릴 때 풍기가 제주도와 비슷한 3多지역이란 말 들었습니다. 바람, 돌, 여성의 생활력. 여성의 생활력은 바로 직조공장에서 일하던 여성들에게서 나온 것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황진이가 옛직물에 대해 우예 그리 잘 아나 했드이만 인견집네 따님이셔서 그랬군요. 만드는 방식이 많이 바뀐 것처럼 풍기인견이란 브랜드도 많이 바뀔 것을 상상하게 됩니다. 제조 방식의 혁신처럼 풍기인견브랜드의 비상을 말입니다.
어떻게 지내시나요? 왜 안오시나 기다렸네요^^ 공장문을 닫고, 아무도 와서 베를 짜주지 않아 도투마리에 감긴 실은 인견이 되지 못하고 먼지만 쌓이고 있을 때..엄마랑 둘이서 베를 짰지요.몸빼를 입고, 달래이를 올려가며 서투른 직공이 되어 차가운 밤을 하얗게 샜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하나씩 빈 도투마리가 된 베틀은 세워두고 또 다른 베틀을 돌렸지요. 우리 집의 마지막 베 짜는 처녀는 23살 황진이였답니다. 깊은 동굴 같은 절망속에서 하얀 웨딩드레스를 꿈꾸며...그래도 늘 웃던 우리 옴마..자꾸자꾸 눈물이 나와서 웃는다던 ...인생이 뭔지..
늦은밤 귀가길, 동네골목 곳곳의 직조공장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은 무서움을 떨쳐버릴 수 있는 파수꾼 역할을 한것 같고 또한, 배틀소리를 자장가 삼아(요즘같으면 소송감?) 잠들었죠...새삼 아련한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가며, 생생히 느껴지는 정감있는 글 때문에 그냥 가슴 뭉클.......역시 황진이님의 순수한 필력에서만 느낄수 있는것 같습니다. 물론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남원다리 노천탕의 추억도 새록새록하구요. 어제가 초복이었는데 영계도 챙기고 백숙도 드셨지요~~~
...얼굴은 가무끄름한데 속살은 어찌 그리 백옥 같은지, 달빛에 드러나는 그녀들의 봉긋 솟은 가슴은 누구도 손 댈수없는 성스러운 열매 같았고 젖은 인조 속바지 사이로 드러나는 그들의 둔부는 달빛이 키운 초가 지붕 위 뽀얀 박과 같았다......사춘기 시절에 연애소설을 남몰래 읽으면서 느꼈던 그 야릇한 감동을 황진이 덕분에 다시 느꼈다네! 한 결 젊어진 기분~~~ 풍운아! 더위에 별고 없으신가???
to:풍운아님. 영계백숙인지, 중계백숙인지 울언니가 사줘서 먹었지요. 연잎에 싸여 나온 노오란 찰밥을 말아서..맛보다 정이 좋아서..언니가 곁에 있는게 좋아서 ..휴가 계획은 세우셨나요? 잘생긴 아드님도 열심히 살고 있지요? 왜 저리 아부지를 안닮고 그리스 신화속 남자를 닮았냐 했더니..^^ 안그래도 그래서 일부러 DNA검사를 안한다고 농담하시던 선배님 표정이 생각나네요. 아들을 향한 깊은 사랑과 끝없는 연민이 미소속에 배여 나오던 멋진 부정... 고맙습니다.
to:나만다리님: 선배님, 제가 미쳤는지 제 안의 누가 미쳤는지..우중에 소백산 등반을 하고 왔답니다. 초암사 내려오는 길, 죽계계곡이 도저히 잊혀지지않아 선배님들께 부탁을 했더니..가는 날이 비오는 날이라고 *^^* 너무너무 좋았는데..좀 무서웠지요. 주위 선배님들께 애정담긴 야단도 실컷 맞았지만..혹시...아바타라는 영화를 보셨는지요.. 영화관에서 봐야 제격이겠지만...안보셨다면..한번 보세요..우리 고향 풍기...아!!정말 매력적인 플레이보이 같아요*^^* 멋지게 써볼게요 선배님..
"우중의 여인"이라는 노래를 좋아 했었는데 황진이님이 우중의 여인이 되셨었군요! 우중의 산행! 좀 힘들겠지만 멋질것 같군요! 특히 소백산은 갑자기 밀려오는 안개로 그 풍경이 금방 금방 바뀌어 연신 감탄사를 내뱉아야 할 것 같네요! 아바타라는 영화의 소문은 듣었지만 보지는 못 했네요... 꼭 보겠습니다! 멋지게 쓰실것을 믿어 의심치 않아요!!!
황진이님은 백숙과 함께 영계도 챙기셨다니... 이제 방콕을 떠나 어디로 행차 하시려는지요??? 글구 나만다리야!! 남은시간 잘 마무리하고 있제, 10월초에 풍기교정에서 만날것을 기대하며~~~
그러세! 그때 보세~~~바람과 구름 아이야!!!
진아 ~ 하도 이판은 풍기장이 오래서서 비켜서 볼라 케뜨만 , 도저히 짠지 입파리에서 군둥네 나서 한다리 걸친다..
그느무 글신이 니를 그냥 두질 않제? 난도 오늘 문득 " 가슴에 대못 하나쯤 박고 사는 사람들, 차마 저물도록 뽑아내지 못하는 것은 , 生의 가장 뜨거웠던 부분을 못 부리에 달궈 놓고 거기에 기대어 살기 때문이다. 라고 쓰며 씁쓸한 눈짓을 한다.
생의 가장 뜨거웠던 부분을 못부리에 달궈 놓고...차마 저물도록 뽑아내지 못하는 것...언니야 말로 글신이 제대로 터를 잡은 거 같네요*^^* 글신만 붙었나 요리신도 같이 엉켜 붙어서리...우리 인생 뭐라도 붙어 있어줘야 견디지요. 고단한 하루든 긴긴 밤이든..다정한 님과 붙어사는게 제일인데^^ 그 다정이 또한 병이라...스쳐만 지나가도 섭섭지 않지요? 스쳐만 지나가도 그집앞엔 언제나 언니가 서 있지요. 글쎄...어느 날 보따리 싸들고 한 열흘 묵을라고 왔소 소리치고 들어가도 한열흘갖고 되겄나 할 거 같은 데....그런일 없기를 바래야지요*^^*
어딘지도 모르게 한 참을 돌고 돌아 왔더니 이런 또 주옥 같은 글이 올라와 있구먼. 경자야 미안하데이. 그래 그때 그 시절 나는 베짜는 아가씨들에게 야간중학교 공부를 가르쳐주기도 했었는데. 그 때 그 사람들과 지난 17일과 18일 양일간 삼가동에서 우린 동창회도 가졌었고 ㅋ 배움에 굶주렸던 사람들에게 새마음중학교란 곳에서... ... 정말로 대단했던 존경스럽기까지 했던 사람들. 글을 읽으면서 그들 생각이 많이도 나더구만. 늘 건강하고 행복하고 발전해 나가길... ...
그랬었군요, 새마음중학교 학생들은 아마 공부하기 싫어 꾀부리고, 학교가기 싫어 농땡이치는 사람은 없었을 거 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정안에서만 그리하신줄 알았는데...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존경하며 사랑합니다. 때때로 연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면...나는 스스로에게 묻곤했지요. 혹시 이순간만 사랑하는건 아닐까 하고... 이해관계가 없는 순수한 사랑은 어쩌면 이런마음일지도...스승님과, 친구와, 선후배님들...깨지지 않고 상처 받지 않는 사랑들.. 댓글 못달수도 있지요. 그래도 절대 섭섭지 않아요 ^^ 그냥, 그대로 전달되는걸요 뭐 *^^* 2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