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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회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풍찬노숙(風餐露宿)을 각오하고 다시 나서겠습니다.” ∥‘10만 희망릴레이’ 기자회견문(2.15일) |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경험한 지난 3개월이었다. 결과적으로 5월말까지 10만명을 조직하겠다는 목표에는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다. 그러나 비록 목표에 미치지 못했다고 해서, 곧 그 의미까지 반감될 수 있는 것일까?
역사로부터 얻는 교훈이지만, 어쩌면 지난 3개월은 ‘번민’에 앞서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하는지, 운동의 ‘난관’ 앞에서 ‘무엇’으로 길을 뚫어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실증적으로 경험했다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주어진 ‘어려움’에 좌절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우리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부족하나마 다시 ‘반전’의 가능성을 열어 냈다. 그랬다. 이미 지난해 13만5천여명에 이른 서명운동을 통해 경험했듯이, 시민들은 ‘백 마디 말’ 보다는, 묵묵히 ‘실천’하는 자에게만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줬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만난 ‘감동’은 책상머리에 앉아 번민이나 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그 어떠한 설명으로도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국민적 기대...조여드는 초조함
▲해방 이후 처음으로 제1의 전범기업을 상대로 한 직접협상, 그것도 ▲이미 10여년에 걸친 재판마저 최종 마무리된 사건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미쓰비시를 ‘협상’ 테이블에 불러 낸 그 자체만으로도 역사적 의미는 남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이런 기대와는 달리, 막상 처한 상황은 전혀 딴판이었다.
‘협상’ 발표(2010.7.14) 후 4개월 후인 2010년 11월에서 막이 열리기 시작한 본 협상은 우려했던 바와 같이 평행선을 계속한 채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었고, 협상을 반전시킬 카드 역시 딱히 마땅한 것이 없었다. 기대가 앞선 때문인지 시간이 지체될수록 지레 초조감만 더 해가고 있었다. 혹자는 ‘지지부진한 협상을 유지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이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난 이후의 대안을 담보하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역시 선택의 여지도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재정적 어려움도 또 하나의 고민이었다. 본 협상 뿐 아니라, 매번 협상에 앞서 갖는 중간 실무회의까지, 일본을 오가는 항공료와 체재비 부담은 가뜩이나 궁핍한 시민모임 재정을 더욱 압박하고 있었다. 임시방편으로 끌어 쓴 차입금을 포함해 적자만 800여만원에 이르렀으나, 문제는 협상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어려움은 정작 다른데 있었다. 그것은 관심에서 점차 배제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협상 개시의 전제조건으로 ▲반(反) 미쓰비시 운동을 중단하고, ▲협상과 관련한 일체의 내용을 언론에 비공개하기로 함에 따라, 본의 아니게 시민들과 교감할 수 있는 통로와 수단을 잃게 된 상황이었다. 그것이 어떠한 후과를 초래하는 것이었는지는 협상이 공전을 거듭하면서야 비로써 실감할 수 있었다.
실로 ‘협상전’으로 국면이 전환된 이후 어쩌면 시민모임 출범 이후 가장 지루하고도 외로운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지난 1월 10만 희망릴레이를 선언하고 나서기까지 최소 6개월 동안, 그저 막연히 ‘협상’을 지켜보는 것 이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그만큼 동력은 이탈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카페 게시판은 1주일, 1달이 넘도록 새로운 소식 하나 찾기 어려웠고, 그럴수록 많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점 잊혀 갔다.
●‘제2의 배수진’...10만 희망릴레이
‘협상이 기대처럼 될 수 있을 것이냐?’.
협상 시작과 동시에 던진 스스로의 문제제기였다. 협상에 최선을 다 하되, 협상과는 별도로 또 다른 ‘무엇인가’를 준비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고민을 품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208회에 걸친 1인 시위에 의해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마저 최종 철수(2010.10.16)한 상태에서, 현해탄을 건너 일본정부와 미쓰비시를 상대로 압박할 수 있는 딱히 마땅한 수단이 없다는 것이었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10만 희망릴레이’ 카드를 꺼내 든 것은 지난 2월이었다. 재정난, 침체된 분위기, 답보상태인 협상…. 말 그대로 더 이상 우회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었다.
‘국민 10만명’을 목표로 ‘협상기금 1,000원’을 조직하자는 것은 정치적 상징성만이 결코 아니었다. 혹여 협상이 결렬 수순으로 갈 경우까지를 예비하자는 포석이었다. 냉혹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적 준비 없이 당위만으로 ‘투쟁’을 언급한다면, 우선 그 진정성부터 의심해봐야 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 ‘10만 희망릴레이’는 협상을 압박하는 것과 동시에, 파국을 맞게 될 경우까지를 상정한 일종의 ‘양날의 칼’인 셈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큰 의미는, 이 과정을 통해 다시 흩어진 시민적 동력을 확보해가는 것이기도 했다.
‘10만 희망릴레이’는 지금까지의 어떤 활동 방식과도 확연히 비교되는 것이었다. 단순한 서명운동조차 대중의 냉담한 반응을 얻기 쉬운 현실에서,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 국민 10만명을 대상으로 각 1,000원씩의 투쟁기금을 조성하는 예는 대중운동사에 있어서도 좀처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0만명이라는 규모도 그렇지만, 특히 주체 역량을 들여다 볼 때 결코 빈 말이 아니었다. 비록 성과가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시민모임’이 전국적 범위에 걸친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조직적 역량 면에서도 결코 검증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알다시피 살림이라고는 사무실 한 칸 없이 남의 사무실 책상에 컴퓨터 하나 올려놓고 있는 것이 전부였고, 상근자 1명의 활동비마저 매번 버거워하는 현실이지 않았던가.
비단 어려움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가장 큰 것은 어쩌면 ‘인식’의 문제였다.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대일 역사청산 문제는 많은 국민들에게 결국 ‘과거’로 이미지화될 뿐이라는 것이었다. 크고 작은 정치적 의제들이 분출하는 이명박 정부에서 ‘과거(?)’ 문제를 ‘현실’의 이슈로 끌어들이는 과제는 여전히 넘어야 할 또 하나의 벽이었다.
●동일본 대지진...악재 속에서 핀 꽃
희망릴레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지난 3월부터였다. 주말을 이용해 무등산 문빈정사 거리 캠페인에 나서면서부터다. 이때를 기점으로 삼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미 경험한 바와 같이 시민들 속으로 직접 뛰어드느냐, 뛰어들지 않느냐에 따라 그 명암은 확연하기 때문이다.
애초 지난해 서명운동과 같은 호응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서명도 감지덕지해야 할 마당에, 10만 희망릴레이는 염치없게 또 돈까지 주문하는 것 아닌가! 물론 상황이 그럴수록 외부 시민·사회의 조직적 힘을 활용할 수 있는 연대방안은 중요한 고민 중의 고민일 수밖에 없었고, 언론을 통한 상층 여론 형성 역시 반드시 뚫어야 할 공정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연대’라는 것이 내가 팔을 내 밀기만 한다고 해서 되는 무슨 요물주인가? 마찬가지로 언론을 통한 여론 형성 역시, 그럴듯하게 써 낸 기자회견문을 손에 쥔 채 언론사 문턱을 구걸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었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연대’의 힘도, ‘여론전’의 힘도 결국 주체,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손발에 때가 묻을 것을 각오하지 않은 채 손 쉽게 구원군만 찾으려는 자세나, 진자리는 피하고 마른자리만 찾겠다는 것은 투기꾼의 심보와 하등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결국 거리 캠페인으로서 취할 수 있는 한계가 분명한 줄 알면서도, 역설적으로 이런 어려움을 감내하고 시민들을 직접 만나는 것 보다 더 강력한 호소는 없었다.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시작부터가 악재였다.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3.10일)가 바로 그것이었다. 말 그대로 일본 사상 초유의 대재난이었고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악화일로였다.
만감이 교차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시민모임이 결코 과거에 갇혀 침묵할 수는 없었다. “하늘아래 다 같은 생명”이라는 짧은 논평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이 않은 반응들이 쏟아졌다. 많은 국민들에게 역사의 간극마저 뛰어넘은 진정한 인간애로 받아들여지면서 깊은 울림을 남기게 됐고, 본의 아니게 ‘시민모임’의 담대한 역사인식을 전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또 다른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재앙 중에서도 대재앙이었다. 일본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되기 시작했고, 이명박 정부 역시 전례 없이 관, 언론, 재계를 총동원한 가운데, 하나의 이데올로기처럼 ‘일본 지진 성금 모금운동’에 줄을 세우는 분위기로 몰아갔다. 이 마당에 ‘시민모임’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실제 거리 시민들로부터도 ‘잠시 자제하는 게 좋겠다’는 분위기였다.
한 동안 가라앉지 않던 일본 성금 모금 분위기는, 문부과학성이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을 강화하는 내용의 중학교과서 검정을 끝내 통과시키는 것을 계기로, 이후 썰물 빠지듯 가라앉기 시작했다. 지난 3.30일이었다.
●네티즌의 힘...아고라 ‘희망모금’
‘10만 희망릴레이’의 가장 빛나는 봉우리 중의 하나는 ‘아고라 희망모금’(4.16일 마감)이었다. ‘아고라 희망모금’은 광주를 뛰어넘어 ‘10만 희망릴레이’를 전국적 이슈로 끌어 올리는 결정적 계기였다. 성금모금에 대한 정부차원의 과도한 강압 분위기에 대한 반대급부도 없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민족적 존엄을 되찾고자 하는 국민들의 열망이 분출된 결과라 봐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보이지 않은 수많은 이들의 남모르는 수고와 땀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름 모르는 어떤 네티즌은 모금이 마감일까지 매일 기부금을 보내는 것으로 자신의 열망을 담았는가 하면, 또 어떤 네티즌들은 밤잠을 설쳐가면서까지 카페로, 문자로, 페이스 북으로, 트위터로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 네티즌들의 마음을 두드렸다.
그 결과 네티즌들은 네티즌들대로 응원 댓글, 위젯달기, 카페담기, 마지막엔 지식 마일리지를 기부하기까지 자신이 쓸 수 있는 방법이란 방법은 모두 동원해 목표액에 도전했다. 한때 실시간 ‘10만 희망릴레이’, ‘근로정신대’를 검색할 경우, 불과 4~5분 간격으로 쌍방으로 글이 유포되는 믿기지 않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노력들의 결과 아고라 희망모금에서 허용하고 있는 응원 댓글 한도(10,000명)는 마감일 하루 전에 조기에 마감되는 상황이 벌어지는가 하면, 중반까지도 겨우 목표액의 30~40%에 머물던 모금액은, 막판 세대와 직업과 지역을 뛰어넘어 온라인을 뜨겁게 달군 네티즌들의 열기로 목표액의 82%까지 끌어 올리고 말았다. 실로 희망모금이 최종 마감된 4월16일까지 우리는 매일 매 순간이 감동의 연속이었다. 물론, 그 역사의 주인공들은 다름 아닌 그 감동의 드라마를 함께 쓴 16,935명에 이른 전국의 네티즌들이었다.
한편, 아고라를 통해 무릎을 맞댄 수많은 ‘네티즌’들과 온라인 ‘카페’들은 앞으로의 싸움에 있어서도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온라인을 통한 여론 확산의 폭발력을 감안할 때 이들은 누구보다 든든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이미 희망모금을 통해 한 차례 실천적 경험을 공유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희망모금에 함께 한 네티즌들과의 지속적 교감은 백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할 것이다.
●운동본부의 출범...의미와 과제
10만 희망릴레이를 통해 얻은 성과 중의 하나는, 비록 광주에 한정된 것이지만 지역사회에 대한 외연이 보다 확대됐다는 것이다. 이는 앞으로의 투쟁에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라는 점에서 결코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우선 광주광역시가 2,808명에 이르는 산한 전 공무원이 희망릴레이에 참여한 것은 상징하는 바가 적지 않다. 매정한 얘기 같지만 미쓰비시자동차 광주전시장에서의 1인 시위가 해를 넘겨 208회에 걸쳐 진행되도록, 단 한번 광주시로부터 따뜻한 시선 한번 받아 본일 없다. 아우성을 쳐도, 눈보라에 파묻혀도 눈 하나 끔쩍하지 않고 콧방귀 한번 뀌지 않던 박광태 시장 시절의 광주시청의 태도를 생각하면 실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이 변화의 주요 지점에 광주시의회 김선호 교육의원(3.8일 5분 발언)의 역할이 있었음은 두말 할 나위 없겠다.
특히 정당 및 광주지역 주요 시민사회단체가 망라해 ‘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한 10만 희망릴레이 운동본부’(공동대표 장연주)가 결성(4.15일)된 것은 근로정신대 투쟁에 또 다른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미 끝난 일이라 여겼던 역사적 사건을 ‘시민모임’이 투쟁을 통해 중요한 돌파구를 마련한데 이어, 광주지역 시민사회가 다시 10만 희망릴레이를 통해 투쟁에 가세하게 된 것은 감히 근로정신대 투쟁에 또 하나의 분기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치의회 차원에서의 결의안 채택도 시민사회가 망라된 운동본부 발족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첫 포문을 연 것은 광주광역시 남구의회 배진하 의원(민주노동당)이었다. 남구의회가 10만 희망릴레이에 지역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남구청이 역할을 다할 것을 주문하는 내용이었다. 결의안은 남구의회를 시발로 북구의회, 광산구의회로까지 연쇄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단순한 선언만은 아니었다. 각별히 남구, 북구, 서구, 광산구에서는 10만 희망릴레이 무료광고를 구청 소식지에 게재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근로정신대 문제가 주요한 지역의 의제중의 하나로 부상하는 과정이었다 할 수 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아쉬운 점이 적지 않다. 야 4당을 포함해 광주지역을 대표하고 있는 시민사회단체가 거의 망라돼 있다시피 하지만, 몇 단체의 헌신적 노력을 제외하고는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을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굳이 구실을 찾자면 각 단체들의 현실적 여건, 무엇보다 지역 연대운동에 있어 오랜 관성에 하나의 원인이 있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는 시민모임이 지역에서 아직 그만큼의 진정성과 흡인력을 주고 있지 못한데서 비롯된 결과라는 점에서 원인은 다시 시민모임 안에 있다 할 것이다. 동시에 이는 부단한 과정을 통해 스스로 극복해 가야할 과제이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여타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운동본부’의 의미는 결코 반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재차 확인하지만 오늘의 결과여부를 차치하고 ‘운동본부’의 틀이 아니었다면, 시민모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0만 희망릴레이’는 결코 오늘 현재를 감당해 올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시민모임의 역량을 자인하고, 겸허히 지역사회에 도움을 구한 자세는, 그 결과를 떠나 백번 옳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준비 없는 조직화의 한계
부분적 성과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쉬움 또한 없지 않다. 무엇보다 ‘조직화’에 대한 노력이 일천했다는 것이다. 잘라 말해 ‘10만 희망릴레이’는 시민모임의 반경을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는 유력한 소재였다. 앞서 ‘과거’니, 시민모임 ‘역량’이니 하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근로정신대’ 문제는 진보와 보수, 직업과 종교, 세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국민 누구한테라도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안이었다.
당위만이 아니었다. 실제로 지난해 13만5천여명이 참여한 서명투쟁을 통해 제1의 전범기업을 끝내 ‘협상’장으로 끌어 낸 실천적 경험을 공유한 상황에, 더 이상 두려워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려움이 없지 않다. 하지만 냉정한 얘기이지만 한국사회에서 이 만큼의 수고 없이, 우리가 바꿔 낼 수 있는 것은 결코 없다고 하면 과장일까?)
이런 점에서 막상 가까운 자신의 지인(동호회, 가족, 각종 소모임)들부터 최소한의 조직화 시도를 해 봤는가는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돌아볼 일이다.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일부 학교들을 제외하면, 중고등학교, 노동계, 종교계 쪽의 참여 역시 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혹여 조직화에 대한 계획 자체가 아예 없거나, 막연했던 것이 아닌지 냉정하게 평가해봐야 할 대목이다.
한편, 시기적으로도 10만 희망릴레이는 한 고비에 들어섰다. 다음 달엔 모든 학교들이 방학에 들어가, 학교단위의 조직적 참여는 거의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계절적으로도 이미 혹서기를 맞아 탄력적인 운영이 필요한 상황이다. 분명한 것은 만약 7~8월 휴지기에 접어들 경우, 10만 희망릴레이 분위기는 봄 눈 녹듯이 조용히 식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방법상 문제로, 아이디어의 결핍도 상황을 어렵게 했다. 무엇보다 번거로움이 문제였다. 1000원이라는 부담보다는, 현장 직접모금-전달처(계좌)-전달 방법의 불편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거듭됐지만, 딱히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나마 희망릴레이 홍보영상(4분30초 분량)이 톡톡히 홍보효과를 발휘한 것은 다행이었다. 그 외엔 홍보수단이라고는 기껏 리플릿과 희망릴레이 기념 티셔츠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거의 ‘막무가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들 역시 논의와 실무력이 담보될 수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월 1회 정도의 운영위회의로서는 풍부한 창의력을 도출해 내기 어려웠으며, 무엇보다 현장과 유리돼 있었던 논의에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 아울러 어렵게나마 상근자 1명이 충원됐지만, 이런 일천한 구조에서는 흔한 웹 메일 소식 한번 보내지 못할 만큼 실천에 뚜렷한 한계가 있었다.
●“운동 있는 곳에 길이 열립니다.”
애초 3개월을 목표한 것은 크게 빗나갔다.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6월 10일 현재 이제 4만여명을 넘어섰다. 그동안 거리 캠페인만 50여회, 배포한 전단지만 무려 11만장이 넘었다. 10만명이라는 목표에는 비할 바 없이 못 미치지만, 결코 적은 숫자라고도 할 수 없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단군 이래 역사청산을 주제로 1,000원씩 ‘4만명’을 조직해 본 일 역시 없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고귀한 발견은, 숨어있는 ‘시민의 힘’을 재삼 확인했다는 것이다.
“아, 내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아서…. 오늘 무등산 좀 갔다 왔는디, 내가 나이도 좀 있고 오늘 따라 좀 힘들어 얼른 집에 와 쉬어야 쓰것더라고. 근디 내려올 때 보니까 문빈정사 앞에서 어떤 젊은이들이 뭔가를 나눠 준디, 아, 아까는 콧방귀도 안 뀌고 그냥 왔단 말이오.
집에 와서 이제사 찬찬히 그것을 읽어 본께, 오늘 내가 큰 실수를 했더라고. 아, 돈 천원 넣고 왔으면 됐을 것인디, 뭔지 보도 않고 내려와부렀단 말이오. 젊은이들이 참 애써쌌든디, 노인네 그냥 지나가는 것 보고 얼마나 실망했을까….
내가 수요일 농협으로 3천원은 넣을 것인디, 그 젊은이들한테 실망하지 말고, 애쓰더라고 격 려의 말이나 꼭 해주씨요” (광주시 북구 매곡동 김판남 할아버지. 86세) |
등교생들을 상대로 자발적으로 모금에 나선 하남중학교 인권동아리 학생들, 끓는 기백 하나로 시민들을 상대로 선전전에 나선 충주여고 학생들, 행여 목표액에 못 미칠까 노심초사 아고라 모금창을 떠날 줄 몰랐던 어느 이름 모르는 네티즌, 전교생이라야 겨우 120여명 남짓한 강원도 봉평고등학교 학생들이 솜사탕을 팔아 보내 온 각별한 성금….
“운동이 있는 곳에 길은 열립니다”
교사의 양심 하나로, 기약도 없는 25년의 세월을 붙잡고 온 ‘나고야 소송 지원회’ 다카하시 회장. 백발의 노투사가 던진 이 단순명료한 진리를 새삼 확인하는 3개월이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첫댓글 앞으로의 활동을 위해 지나 온 길을 되돌아 보는 과정은 의미 있을 것 같습니다. 풍부한 논의를 기대하며 개인적 차원의 생각을 우선 드리는 것이니만큼 부족한 부분에 많은 뼈와 살들이 덧붙여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