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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태종 이방원-결행의 순간이 다가왔다
건물이 낮고 비좁아 개축 공사 중이던 창덕궁 인정전이 준공되었다. 장의동 본궁에서 이어한 세종에게 태종이 환관을 보냈다.
“너의 형 양녕을 불러왔으니 조용히 와서 만나보도록 하라.”
야심한 밤. 세종이 신하들의 이목을 피하여 상왕전을 찾았다. 거기에 양녕이 있었다. 경기도 광주에서 유배생활하고 있는 형이었다. 형제는 오랜만에 만났다. 마산역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조우한 이후 처음이다. 형제의 정으로 뜨겁게 해후했다. 이튿날 대사헌 허지가 삼성과 합사하여 세종 앞에 섰다.
“신 등이 듣자옵건대, 양녕대군 이제가 상왕전에 와 있다고 하오니 양녕이 종사(宗社)에 득죄하였음은 천하가 다 아는 바이온데 상왕께서 전내(殿內)로 불러들이셨음은 신 등이 놀라 와 견딜 수 없사옵니다.”
“부자 형제의 지극한 정으로 어찌 서로 보고 싶지 않겠느냐. 지난달에 상왕께서 불러 보시고자 하셨으나 대간의 청으로 인하여 이루지 못하시고 이제야 부르신 것이니 경들은 번거롭게 청하지 말라.”
“상왕께서 양녕을 부르신 것은 장차 경계하고 가르쳐 보전하려 하시는 것이오나 오래 머물러 있게 되면 비단 대간만이 아니옵고 백성들이 반드시 소동하는 것이오니 속히 돌려보내도록 하시옵소서.”
형제의 정으로 뜨겁게 해후한 세종과 양녕
“내 어제 잠깐 만나보았고 오늘 다시 만나보면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
“전날 서로 보신 것도 불가한 일이온데 하물며 다시 보실 수가 있겠습니까?”
"상왕께옵서 미리 헤아리시고 계시니 이후부터 다시는 이 사실을 아뢰지 말라."
허지가 세종에게 주청했다는 사실을 보고를 받은 태종은 심기가 언짢았다.
“양녕의 죄는 종사에 관계되지 않고 오로지 김한로의 짓이다. 양녕이 작은 집에 있으니 화재가 두려우므로 내가 이를 불쌍하게 여긴다. 양녕의 집에 간사한 무리들이 몰래 접근할까 염려되니 강화에 집 백여 칸을 지어 거처하게 하도록 하라.”
집을 크게 짓고 숙위 군사를 세워 잡인의 접근을 차단하라는 것이다. 놀기 좋아하고 풍류 좋아하는 양녕에게 잡패들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여 문제의 소제를 없애겠다는 복안이다. 신하들의 등쌀에 양녕대군이 대궐에서 사흘을 묵고 유배지 광주로 돌아갔다.
창덕궁 동쪽에 짓고 있던 궁궐이 완공되었다. 신궁을 수강궁이라 명명한 태종은 신궁에 들어앉아 깊은 장고에 들어갔다. 눈앞에는 명나라로 떠나던 심온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그림이었다.
결심의 순간이 다가왔다. 심온의 아우 동지총제(同知摠制) 심정과 강상인이 모종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첩보가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결행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칼을 빼기로 결단한 태종이 편전에 나아가 병조판서 조말생, 병조참의 원숙, 지병조사 장윤화를 불렀다. 병권을 쥐고 있는 태종의 핵심 측근들이다. 이들과 함께 주상전의 소식통 지신사 하연도 불렀다.
“강상인이 생원에서 참판에 이른 것은 특별히 대우한 것이었다. 헌데 딴마음을 품고 군무를 아뢰지 않았다. 또한 선지를 받들어 공문을 보내도록 하였더니 4, 5일 동안이나 늦추어 두고 실행하지 않았으니 나와 주상에게 차별 없이 충성하였다면 어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다시 국문(鞫問)하여 왕법으로 다스려야 하지 않겠는가? 반드시 압슬형을 써서 신문을 하여야만 그제야 그 진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세종실록>
무릎이 으스러지는 압슬형에 장사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압슬형에 주목해야 한다. 압슬형(壓膝刑), 이거 보통 고문이 아니다. 아버지를 역적으로 지목하고 아들을 역적의 하수인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압슬형이다. 다시 말하면 원하는 자백을 받아 죄를 만들어낼 수 있는 형문이다.
사금파리를 깔아놓은 자리에 죄인의 무릎을 꿇게 한 뒤, 그 위에 무거운 돌을 얹어서 자백을 강요하는 압슬형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잔인한 고문이다. 다른 형벌의 경우 혼절하거나 숨이 멈추면 죄인은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지만, 압슬형은 생명과는 관계없이 고통을 가중시키는 고문이다.
“그때의 행수(行首)인 당해 관원도 마땅히 신문해야 하나 박습이 강상인의 말을 믿고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는 죄가 차등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수란 병조판서 박습을 지칭한 것이다. 자신의 과거 동방 박습은 봐주라는 것이다.
“박습이 비록 강상인의 말만 듣고 따랐다고 하지만 판서로서 어찌 알지 못하고 이 일을 하였겠습니까.”
원숙이 병조판서 박습의 처신은 옳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박습의 사람 된 품이 어찌 강상인의 지휘를 따를 사람이겠습니까. 신은 그들의 죄가 경하고 중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말생도 원숙의 의견에 동의했다. 태종은 병환으로 입궐하지 못한 좌의정 박은에게 장윤화를 보내어 의견을 구했다.
“강상인이 범한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온 나라 사람이 논청(論請)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는데 지금 다시 신문하게 하니 신은 실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태종은 의금부진무(義禁府鎭撫) 안희덕을 단천으로 보내어 강상인을 잡아오게 하고, 홍연안을 고부로, 도사(都事) 노진을 사천으로, 진중성을 무장으로 보내어 박습 등 그 밖의 연루자들을 모조리 압송하라 명했다.
각처에 흩어져 있던 죄인들이 한양으로 끌려왔다. 태종은 대사헌 허지, 사간 정초, 형조정랑김지형, 병조참판 이명덕에게 명하여 의금부와 같이 강상인과 박습을 국문하라 명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자백을 받아내라
국청이 개설되고 국문이 시작되었다.
“‘군국(軍國)의 중대한 일은 내가 친히 청단(聽斷)하겠다’라고 상왕 전하께서 전위교서를 선포하셨는데 너희들이 군무(軍務)를 아뢰지 않았으니 반드시 다른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빠짐없이 이실직고하라.”
“어찌 감히 다른 계획이 있겠습니까. 다만 새로 판서에 임명되어 사무를 알지 못할 뿐이었습니다. 강상인은 원래 주상전하의 잠저시절 옛날 신하이며 오랫동안 병조에 있었으므로 강상인의 말을 따랐을 뿐입니다. 이각(李慤)이 저와 강상인에게 ‘군사는 마땅히 상왕전에 아뢰어야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강상인은 빙긋이 웃으면서 대답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박습이 완강히 부인했다. ‘압슬형을 가하라’는 태종의 특명이 있었으나 아직 박습에게 압슬형을 가하지 않았다. 상왕의 동방이며 전 병조판서에 대한 예우가 작용했다. 국문이 진척되지 않자 박습에게 압슬형을 가할 것을 요청했다.
“박습의 죄가 없을 수 없지마는 강상인과는 죄과(罪科)가 다르니 차마 고문할 수는 없다.”
태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박습이 판서가 되었는데 어찌 강상인의 말만 따랐겠습니까? 반드시 이의를 하지 않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을 것이오니 마땅히 국문을 더해야 할 것이옵니다.”
대사헌 허지가 강력한 국문을 주장했다.
“강상인이 이각(李慤)을 대하여 빙긋이 웃는 것은 반드시 다른 뜻이 있을 것이니 상세히 신문할 것이나 세 번이나 형벌로써 신문하면 형장이 90대에 이를 것인데 또 압슬형(壓膝刑)을 더하면 불편한 것 같다. 만약 복죄(伏罪)하지 않는다면 어찌 세 번까지 기다린 뒤에 압슬형을 쓸 것이 있느냐?”
곧바로 압슬형에 들어가라는 명령이다. 국문에도 순서가 있다. 곤장 30대를 쳐 자백하지 않으면 또 곤장을 쳐 90대가 상한선이고 자백하지 않으면 주리를 틀었다. 90대 이상 치면 죄인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복죄하지 않으면 압슬형으로 올라간다. 이러한 순서를 무시하고 생략하라는 것이다.
영의정이 대간이다
원하는 답을 받아내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명에 따라 본격적인 국문이 시작되었다. 병조에 마련된 국문장은 살점이 튀고 피가 튀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고통에 몸부림치는 죄인들의 비명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심정과 무슨 말을 나누었느냐?"
심정(沈泟)은 사은사로 명나라에 간 영의정 심온의 동생이다.
"주상께서 본궁에 계실 때 궁문 밖 장막에서 심정을 만났는데 그가 '내금(內禁) 안에 시위하는 사람의 결원이 많아서 시위가 허술한데 어째서 보충하지 않느냐?' 하기에 내가 '군사가 한 곳에 모인다면 허술하지는 않을 것이다'고 하였더니 심정이 말하기를 '한 곳에 모인다면 어찌 많고 적은 것을 의논할 것이 있느냐' 하였다."
기다리던 답이 나왔다. 강상인의 입에서 심정의 연루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자백을 확보한 의금부에서 심정의 체포를 품신했다.
"비록 2품 이상의 관원이라도 공신(功臣)이 아니면 계문(啓聞)함이 없이 바로 잡아 가두어 국문하라."
동지총제(同知摠制) 심정이 체포되어 강상인과 대질심문이 시작되었다.
"나는 내금위(內禁衛)의 절제사가 된 까닭으로 강상인과 시위의 허술한 것을 의논하였을 뿐, '군사가 두 곳으로 갈라져 있다'고 한 말은 내가 한 것이 아니다."
심정이 극력 부인했다. 대질신문이 맞아떨어지지 않자 강상인에게 압슬형이 가해졌다.
"이종무에게 '군사(軍事)는 마땅히 한 곳으로 돌아가야 된다' 하였더니 이종무가 빙긋이 웃으면서 수긍하였으며 또 우의정 이원을 대궐 문밖 길에서 만나 '군사를 나누어 소속시키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이를 어찌 말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
물귀신 작전에 말려든 태종의 핵심 측근들
강상인이 물귀신 작전을 쓰기 시작했다. 태종의 핵심 측근세력을 끌고 들어간 것이었다. 상왕이 총애하는 우의정 이원과 장천군(長川君) 이종무가 걸려든 것이다. 정승이 연루되어있으니 윤허를 받아야 한다. 의금부에서 계본을 갖추어 보고했다.
"이원이 강상인의 간사한 꾀를 듣고도 즉시 잡아들이지도 않고 고(告) 하지도 않았으니 대신의 의무를 잃었습니다. 모두 잡아서 신문하기를 청합니다."
태종은 곤혹스러웠다. 자신이 신임하는 우의정이 연루되었다니 난감했다.
"그렇다면 말을 타고 국청에 나아가게 하라."
이원은 우의정이다. 오늘날의 부총리 급이다. 삼정승의 하나인 우의정을 어찌 여타의 잡범들처럼 잡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말을 타고 자진 출두할 수 있도록 예우해 주라는 것이다. 뇌물수수 혐의를 받은 청장이 승용차를 타고 검찰에 출두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죄인이 말을 타고 옥에 나아가는 것은 합당하지 못합니다."
조말생과 원숙이 반대했다.
"병조에서 이원에게 사람을 보내 그로 하여금 스스로 국청에 나아가게 하라."
우의정 이원이 갓(笠子)을 쓰고 걸어서 국문청에 출두했다. 이원의 처지에서야 모함을 받아 혐의 없다고 길길이 뛸 수 있다. 말(馬)도 있고 가마도 있다. 위세를 부리기 위하여 타고갈 수도 있다. 걸어가더라도 주위에 졸개를 풀어 대장에게 카메라를 들이미는 사진기자를 폭행하듯이 쳐다보는 백성들의 눈을 때려 분풀이 할 수도 있다.
공직자들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
하지만 혐의를 받고 소환되는 것마저도 선비로서 자신의 부덕으로 받아들였다. 백성들 보기가 민망하여 갓을 쓰고 걸어서 출두한 것이다. 검은색 택시를 타고 천연스럽게 나타난 실장이나 지방까지 불려가 뻔뻔스러움을 보이던 후대의 공직자보다 훨씬 나은 그림이다. 장천군 이종무도 소환되었다. 고문에 시달리던 강상인과 대질신문이 시작되었다.
"강 참판은 사람을 끌고 들어가지 마시오."
이종무가 엄중하게 힐책했다. 자신은 결백하니 물귀신 작전을 거두라는 것이다. 고개를 늘어뜨린 강상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강 참판은 사람을 죄에 빠뜨리지 말라."
이원이 고함을 쳤다. 압슬형으로 몸이 만신창이가 된 강상인이 측은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살아야 한다. 헤어나오지 못하면 강상인과 함께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초를 견디지 못함이었다. 실상은 모두 무함(誣陷)이었다."
강상인이 사실대로 토설했다. 압슬형을 견디지 못하고 '예' '예'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우의정과 이종무를 끌어들인 것은 허위자백이라는 것이다. 이원과 이종무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우의정 이원을 즉시 석방하라 명한 태종은 강상인을 더욱 강하게 신문하라 일렀다. 강상인에게 강도 높은 압슬형이 가해졌다.
"군사는 한 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네가 말했지?"
"예. 선위(禪位)하는 교지(敎旨)의 뜻을 모두 다 알고 있었다. 일찍이 이와 같이 하지 않은 것은 내 마음에 국가의 명령은 마땅히 한 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상왕에게 아뢰지 않은 것이다."
"박습도 옳다고 말했지?"
"예, 내가 박습과 의논하면서 '군사(軍事)는 한 곳에서 나오는 것이 어떠냐?'고 하니 박습도 '옳다'고 하므로 아뢰지 않았다."
죄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다른 말을 하면 모범답안을 들이밀고 압슬형을 가하니 끝내는 "예, 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압슬형은 1차에 2명, 2차에 4명, 그래도 불지 않으면 3차에 6명이 달라붙어 가한다. 더 이상 고통스럽게 하지 말고 빨리 죽이라고 애원하게 만드는 고문이다. 심문자가 죄인의 고통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원하는 답을 받아낼 수 있는 악랄한 고문이다. 그 험한 압슬형을 3번째까지 견뎌낸 강상인도 독한 사람이다.
병조참판 강상인의 입에서 병조판서 박습의 연루사실이 튀어나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박습에게 압슬형이 가해졌다. 뼈가 으스러지는 압슬형을 한차례 견뎌 낸 박습이 두 번째 압슬형에서 무너졌다.
"강상인이 모든 군사는 한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하기에 상왕전에 아뢰지 않았습니다."
순순히 자백하기 시작한 강상인, 밤 사이에 밀사가 다녀갔나?
또 다시 강상인에게 압슬형이 가해졌다.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영의정 심온을 상왕전의 문밖에서 보고 의논하기를 '군사를 나누어 소속시키는데 갑사(甲士)는 수효가 적으니 마땅히 3천 명으로 해야 되겠다'고 한 즉, 심온이 '옳다'고 하였다. 그 후에 또 의논할 일이 있어 심온의 집에 가서, '군사(軍事)는 마땅히 한 곳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하였더니, 심온이 '옳다'고 하였다."
압슬형을 3번째까지 견디던 강상인이 4번째는 견디지 못하고 자백했다. 3번 이상의 압슬형은 법으로 금지했지만 갈 길이 바쁜 심문자들은 이를 지키지 않았다. 강상인은 태종의 수하다. 잠저시절부터 모셨다. 태종의 의도를 간파한 강상인이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충성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의금부 옥에 갇혀 있는 강상인에게 밀사가 다녀갔는지 알 수 없다.
드디어 강상인의 입에서 심온의 연루가 튀어나왔다. 기다리던 답이었다.
"진상이 오늘날에야 나타났구나. 마땅히 대간(大姦)을 제거하여야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심문결과를 의금부로부터 보고를 받은 태종은 흡족했다. 만인지상 영의정이 큰 간신(大姦)으로 지목되었다. 임금의 장인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떠올랐다. 명나라를 방문 중에 있는 사은사가 간신의 수괴로 등장했다. 피바람을 예고하는 검은 구름이 창덕궁과 수강궁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진실은 밝혀지기 위해 존재 한다
"전하께서 군무를 청단하심은 오로지 종묘사직을 위하신 것이온데 불온한 무리들이 군무를 옮기고자 하니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비록 종실과 훈척일지라도 어찌 감히 용서하겠습니까."
조말생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한 처벌을 주장했다.
"참판과 지사(知事)도 의금부에 같이 가서 심정을 국문하라."
표적이 등장했으니 정조준하라는 것이다. 강상인의 자백만 가지고는 뭔가 부족하니 심온의 아우 심정의 자백을 확보하라는 것이다.
"오늘은 금형일이오니 어찌 하오리까?"
이명덕이 난색을 표명했다. 공교롭게도 금형일(禁刑日)이었다. 아무리 큰 중죄인도 이레 중에 하루, 금형일에는 심문하지 말도록 대명률이 규정하고 있었다.
"병이 급하면 날을 가리지 않고 뜸질을 하는 법이다. 이것은 큰 옥사이니 늦출 수 없다."
금형일을 무시하고 강행하라는 지시다. 법과 원칙은 한가할 때나 지키는 것이지 이렇게 바쁠 땐 거치적거리고 사치스럽다는 얘기다. 규정과 절차를 무시하고 결과만 만들어내라는 것이다. 먹이를 발견한 배고픈 호랑이가 쌍심지를 켜고 전력 질주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에 장사 없다. 천하장사도 못 견딘다
영의정 심온의 아우 심정에게 압슬형이 가해졌다. 심정은 이를 악물고 압슬형을 견뎌냈다. 자신과 형 심온 그리고 가문의 존폐가 걸린 문제기에 죽을 힘을 다해 참았다. 하지만 이렇게 견딜 수 있는 고문이라면, 누가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형문이라고 말하겠는가. 심정도 견디지 못하고 2차 압슬형에서는 모범답안을 내놓기 시작했다.
"군사는 마땅히 한 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네 형 심온이 말했지?"
"예. 형 온(溫)을 그 집에서 보았는데 형이 '군사는 마땅히 한 곳에서 나와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형의 말에 너도 옳다고 말했지?"
"예."
굿판이 끝났다. 원하는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명덕의 보고를 받은 태종은 더 이상 심문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푸닥거리만 남았으니 굿판을 치우라는 얘기다. 그날 밤 태종은 좌의정 박은을 불렀다. 삼정승 가운데 영의정 심온은 사건과 연루되어 있고 우의정 이원도 무고가 밝혀졌으나 역시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상의의 대상은 오직 좌의정 박은뿐이었다.
속내를 드러내는 태종, 핵심 측근들에게 하사품을 내리다
"강상인의 죄는 내가 그 정상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외방으로 내쫓기만 하였다. 그 후에 생각해보니 나의 여생은 많지 않고 대간(大姦)은 제거하는 것이 마땅하므로 다시 그 일을 신문(訊問)하여 이와 같은 결과에 이른 것이다. 심온이 군사가 한 곳에 모여야 된다는 말을 듣고 '군사가 반드시 한 곳에 모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하니 경은 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 <세종실록>
진솔한 태종의 속내다. 강상인 건은 사건의 내막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볍게 처리했는데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현 시점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차기를 위하여 큰 산을 헐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호사스럽게 떠난 임금의 장인 심온을 세종의 앞길을 가로막는 큰 산으로 규정했고 대간(大姦)으로 지목한 것이다.
태종은 좌의정 박은, 우의정 이원, 병조판서 조말생, 병조참의 원숙을 불러 술을 내렸다. 뭔가를 암시하고 부탁하는 하사품이다. 이튿날 태종은 판전의감 이욱을 의금부진무(義禁府鎭撫)로 임명하고 의주에 가서 심온이 명나라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잡아 오라고 명했다.
"심온이 만약 사신과 같이 오거든 심온에게 병을 핑계하고 잠간 머물게 하여 비밀히 잡아 오도록 하라. 명나라 조정에서 우리 부자 사이에 변고가 있는 것으로 잘못 알려질까 염려되니 사신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심온 체포조가 의주로 떠났다. 영광의 길 떠났던 영의정에게 체포령이 떨어진 것이다. 체포조가 떠나던 날 의금부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형률에 의거하면 강상인·박습·심정·이관은 모반대역(謀叛大逆)에 해당되므로 수모자(首謀者)와 종범자(從犯者)를 분간하지 않고 모두 능지처사(凌遲處死)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부자 나이 16세 이상이 된 자는 모두 교형에 처하고 15세 이하와 처첩·조손(祖孫)·형제·자매는 공신의 집에 주어서 노비를 삼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의금부의 보고를 받은 태종은 박은·조말생·이명덕·원숙을 불러 긴급 구수회의를 했다.
"강상인과 이관은 죄가 중하니 지금 마땅히 죽일 것이요, 심정과 박습은 강상인에 비하면 죄가 경한 듯하고 괴수(魁首) 심온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남겨 두었다가 대질시키는 것이 어떠한가? 그렇지 않으면 인심(人心)과 천의(天意)에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는가."
"대질시키고자 하신다면 강상인만 남겨두고 세 사람은 처형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심온의 범한 죄는 사실의 증거가 명백하니 어찌 대질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남겨 두는 것이 옳지 못합니다. 그리고 반역을 함께 모의한 자는 수모자와 종범자를 분간하지 않는 법이오니 어찌 차등이 있겠습니까."
박은이 대질은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옥에서 곤란한 일이 많사오니 속히 형(刑)을 집행하기를 청합니다."
이명덕이 의금부의 의견을 내놓았다.
"강상인은 형률대로 거열형에 처하고 박습과 이관·심정은 모두 참형(斬刑)에 처하라."
죄인들을 처형하라는 서릿발 같은 명이 떨어졌다. 심정의 입에서 심온의 이름이 튀어나온 하루만이다. 이례적으로 매우 신속하다. 이렇게 서둘러 처형한 것은 진실이 밝혀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만행의 생명력은 질기다. 훗날 인혁당 사건 연루자들을 대법원 확정 판결 18시간만에 8명을 처형한 박정희 역시 만행이라는 지탄을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대역죄인의 사지를 묶어 달구지에 걸어라
인왕산 범 바위 계곡에서 발원해 도성 밖 서쪽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물줄기가 있다. 덩굴내 라고 부르는 만초천이다. 한양과 경기도를 구분하는 경교 밑을 지나 서소문 밖 후미진 곳을 통과해 남산에서 흘러오는 물줄기와 만난다. 청파역에 다리를 만들어 사람과 말(馬)을 모으고 용산강을 이루며 한강으로 흘러드는 물줄기다.
서전문 앞에서 만초천을 따라 연결된 길과 서소문 언덕길로 연결되는 지점엔 숲이 울창했다. 서교 삼거리에는 나그네가 쌓아놓은 돌탑과 이름 모를 묘지가 듬성듬성 있었다. 도성에서 삼개나루터로 통하는 지름길 이지만 백성들은 별루 이용하지 않았다. 지나가면 으스스한 사형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형에는 교형, 참형, 능지처사가 있었고 능지처사에도 오살(五殺)과 육시(戮屍), 거열(車裂)이 있었다. 그 외에 사사와 부관참시가 있었다. 박습과 이관, 심정을 참형에 처하고 강상인을 거열하라는 명에 따라 서교 삼거리에서 박습과 이관, 심정의 목을 벴다.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에서 절명한 병조판서 박습의 목도 벴다. 시신의 목을 자른 것이다.
대역죄인을 처형한다는 방을 보고 종루 사거리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문무백관이 참관하고 수많은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강상인의 거열형이 시작되었다. 태종 잠저시절 한때는 집사를 자처하던 강상인이 머리는 산발한 채 손과 발을 묶여 달구지에 걸렸다. 압슬형에 무릎이 으깨진 강상인은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흐물거렸다.
살아있는 사람을 찢어 죽이는 거열(車裂)은 참혹한 형벌이다. 손과 발, 사지를 밧줄로 묶어 달구지에 연결한 뒤, 소나 말을 네 방향으로 출발시켜 사람의 몸을 찢어내는 잔혹한 형벌이다. 참관한 관리들과 백성들에게 권력자의 힘을 과시하는 효과를 노린 반인륜적인 처형이다. 압슬형으로 만신창이가 된 강상인이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밧줄에 묶인 채 울부짖었다.
"나는 실상 죄가 없는데 때리는 매(箠楚)와 고문을 견디지 못해 죽는다."
강상인의 거열형이 집행되었다. 한 때는 태종의 총애를 받던 강상인의 몸이 네 갈래로 찢어졌다. 권력무상, 인간관계 무상이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군중들이 얼굴에 손을 가리고 손가락 사이로 쳐다봤다. 무섭고 두려워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가 다시 쳐다봤다.
압슬형에 견딜 사람은 없다. 천하장사도, 항우장사도 안 된다. 이러한 폐단을 조정에서도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압슬형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1665년(현종 6년) 까지 법으로 사용을 제한하다가 1725년(영조 1년) 영구 폐지되었다.
폐출 위기에 몰린 공비
전 병조참판 강상인과 병조판서 박습 그리고 영의정 심온의 동생 심정을 처형한 태종은 더욱 고삐를 죄었다.
“심인봉은 곧 심정의 배다른 형이다. 비록 세력이 없더라도 역신(逆臣)의 형으로서 안연히 입직(入直)하는 것이 의리에 편안하겠느냐.”
“이것은 곧 신 등의 죄입니다.”
병조판서 조말생이 실수를 자인했다.
“내가 병권을 내놓지 않는 것은 왕위(王位)를 마음에 두고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주상에게 무슨 사고가 있을 경우에 후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지친(至親)을 이간시키는 것은 여러 소인배들의 작당에 기인한 것이 많았으니 어찌 크게 징계하여 뒷세상 사람을 경계하지 않으리오.”
좌군총제직에 있던 심인봉을 해임함과 동시에 해진(海珍)으로 귀양 보내는 것을 필두로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펼쳐졌다. 중노릇 하고 있던 심정의 형 도생을 옹진으로, 심징을 동래로, 조카 심석준을 낙안으로 유배 보내고, 심온의 서자 심장수를 사천으로, 성달생을 삼척으로 귀양 보냈다. 또한 강상인의 아우와 아들을 유배 보내고 박습의 아들과 이관의 형, 동생, 조카, 숙부까지 변방으로 귀양 보냈다. 한마디로 연루자 집안을 초토화시킨 것이다.
죄인의 딸을 국모로 모실 수 없습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조선팔도를 뒤흔든 피바람 속에서 제일 크게 흔들린 곳이 왕비가 있는 중궁전이었다. 친정아버지가 영의정이 되어 명나라 사신으로 떠나고 셋째 왕자 용(안평대군)을 낳아 경사가 겹친 것도 잠시, 숙부가 대역죄로 처형되고 아버지가 대간의 괴수로 지목되어 잡혀올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 천당과 지옥을 오가고 천길 벼랑에 서있는 입장이었다.
중궁전의 주인 왕비 심씨가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누웠다. 아버지를 대역죄인의 수괴로 지목한 것에 대한 항의 표시가 아니라 해산후유증과 심신이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초상집 같은 중궁전에 폐비문제가 덮쳐왔다. 죄인의 딸을 국모로 모실 수 없다는 분위기가 조정에 솔솔 피워 올랐다. 설상가상이다.
“심씨(沈氏)가 이미 국모(國母)가 되었으니 그 집안이 어찌 천인(賤人)에 속할 수 있겠느냐? 심온의 아내와 네 명의 어린 딸을 천인에 속하게 할 때는 윤허를 얻어 시행하라.”
심씨가(家)에 대한 선을 제시한 태종이 영돈녕 유정현, 좌의정 박은, 우의정 이원, 병조판서 조말생, 예조판서 허조, 지신사 하연을 불렀다.
“아버지가 죄를 지었어도 딸이 왕후와 왕비가 된 일은 옛날에도 있었다. 형률에도 연좌한다는 명문이 없으므로 내가 이미 공비(恭妃)에게 밥 먹기를 권하였고 또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경등은 이 뜻을 알라.”
“상교가 진실로 마땅합니다.”
군주에게는 후궁이 많을수록 좋다, 빈과 잉첩을 더 들여라
“임금의 계사(繼嗣)는 많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내가 지난해 예관의 청으로 3, 4명의 빈(嬪)과 잉첩(媵妾)을 들였으니 그들의 아버지인 권홍, 김구덕, 노귀산, 김점등이 왕실에 향하는 마음이 다른 신하와 달랐다. 계사를 많이 두고 한편으론 여러 사람의 도움을 얻게 되며 또 옛날의 한 번 혼인에 아홉 여자를 취한다는 뜻에도 맞는다. 지금 주상이 정궁(正宮)에 세 아들이 있지만 많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때 세종은 향(문종), 위(수양대군), 용(안평대군) 세 아들이 있었다.
“예로부터 제왕은 자손이 번성한 것을 귀하게 여겼으니 빈(嬪)과 잉첩(媵妾) 2, 3명을 들이기를 청합니다.”
유정현이 맞장구를 쳤다.
“이 일은 주상이 알 바가 아니니 내가 마땅히 주장할 것이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아들 세종을 새장가 들게 하겠다는 것이다. 친정아버지가 대역죄인에 연루되어 부부금슬이 깨졌을 터, 폐출하지는 않고 중궁전에 두되 새 여자를 들이겠다는 것이다. 태종은 예조에 명하여 가례색(嘉禮色)의 제조와 별좌를 선임하여 보고하도록 했다. 그러나 중전 폐출 논의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궁중이 적막합니다.”
좌의정 박은이 중궁을 폐(廢)할 것을 에둘러 말했다.
“내가 이미 경의 뜻을 알고 있다.”
“중중전을 폐하는 것이 백성의 의리에 합당한 줄 아뢰옵니다.”
의금부제조 변계량이 중궁을 폐하기를 청했다. 죄인의 딸을 국모로 모실 수 없다는 것이다.
“평민의 딸도 시집을 가면 친정 가족에 연좌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심씨는 이미 왕비가 되었으니 어찌 감히 폐출(廢黜)하겠는가. 경들의 말이 옳지 않다.”
폐출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힌 태종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세종을 바라보며 말했다.
“죄인의 딸인 까닭으로 외인(外人)이 반드시 이를 의심하지만 너무 염려하지 말아라. 이것이 어찌 법관(法官)이 청할 바이겠느냐.”
죄인의 딸을 사랑하면서 괴로워하는 세종
심온 사건 이후 세종에게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고 가시방석이었다. 사랑하는 부인이 연루되었지만 어떠한 의견도 낼 수 없는 안타까운 처지였다. 이러한 아들의 복잡한 심리를 꿰뚫어 본 태종이 공비는 절대 폐출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며 세종을 안심시킨 것이다.
“만약 형률(刑律)로써 논하오면 상교가 옳습니다. 그러나 주상의 처지에서 논한다면 심온은 곧 부왕의 원수이니 어찌 그 딸로서 중궁에 자리에 있도록 하겠습니까. 은정을 끊어 후세에 법을 남겨두시기를 청합니다.”
조말생과 원숙이 반대했다.
“경(經)에 ‘형벌은 아들에게도 미치지 않는다’ 하였으니 하물며 딸에게 미치겠느냐? 그전의 민씨의 일도 또한 불충이 되었으나 그 당시에 있어서는 왕비를 폐하고 새로 왕비를 맞아 세우자고 의논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내가 전일에 가례색(嘉禮色)을 세우라고 명한 것은 빈(嬪)과 잉첩(媵妾)을 뽑으려고 한 것뿐이다.”
가례색을 세우라는 것은 빈과 첩을 뽑으려는 것이었을 뿐, 왕비를 뽑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 너무 앞서나가지 말라는 뜻이다. 태종은 전국에 금혼령을 내렸다. 아들 세종이 싫어해도 빈과 잉첩을 간택하여 중궁의 공백을 메꾸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세종은 6명의 부인에 22명의 자녀를 둔 군주가 되었다.
영의정 체포 작전
청북정맥의 가파른 고개 판막치를 피하여 극성령에 올라서니 압록강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양을 떠나 여기까지 달려온 길을 뒤돌아 생각해보니 아찔하기만 하다. 한양에서 의주까지 직선 참로 요소요소에는 금군(禁軍)이 쫙 깔려 있다. 그들을 피하여 오느라 산을 넘고 내를 건너 우회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곽산을 지나 전문령을 넘으면 지름길이지만 삭주로 돌아오느라 하루가 더 걸렸다. 문곡에서 구현령을 넘을 때는 산적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지니고 있던 패물을 털어주며 목숨을 구걸했으니 다행이지 임무를 수행하지도 못하고 죽을 뻔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1070리 한양 길이 아득하기만 했다.
"금군에게 붙잡히면 너도 죽고 우리 집안도 결딴이 나느니라. 고생이 되더라도 역참이나 마을 길을 지나지 말 것이며 만에 하나 붙잡히더라도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이실직고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너는 중궁전 아이가 아니라 판통예문사 안마님댁 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되느니라."
장의동(藏義洞) 대감댁을 떠나올 때 부부인 마님의 글썽이던 눈망울이 눈앞을 가렸다. 부부인(府夫人) 마님이 누구인가? 이 나라의 국모. 왕비의 어머니가 아닌가. 지체가 하늘 끝까지 닿는 부부인 마님께서 몸소 아랫것의 손을 잡아주며 눈물짓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고갯마루에 동지섣달 칼바람이 파고들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니 의주성이 한눈에 보였다. 의주목사 임귀년을 찾아가 부탁하라는 마님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명나라 땅에 들어가 죄인을 잡아오라
강상인과 심정을 처형하고 그 추종세력을 척결한 태종은 대소신료들을 바짝 얼어붙게 했다. 특히 무관(武官)들의 군기를 틀어쥐었다. 수강궁에 물러앉은 자신이 주상의 뒤통수나 쳐다보는 허수아비가 아니라는 것을 무관들에게 각인시켜준 것이다. 한양의 일을 어느 정도 처결한 태종은 심온이 돌아오는 길목 의주 일이 걱정되었다.
“심온이 이미 대역(大逆)이 되었으니 혹시 이를 알고 도망쳐 숨을까 염려된다. 속히 평안도 관찰사에게 일러 미리 체포하는 것에 대비하도록 하라.”
선지를 평양감사에게 보낸 태종은 그래도 미덥지 않았다.
“역관 전의로 하여금 군사 10명을 거느리고 연산참(連山站)으로 가서 심온을 기다리고 있다가 칼을 씌우고 수갑을 채워 잡아오도록 하라.” - <세종실록>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지 말고 명나라에 들어가 잡아오라는 것이다. 위험한 발상이다. 조선 국경에서 7일 거리에 있는 연산참은 명나라 땅이었다. 명나라 조정에서 알게 되면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할 소지가 다분한 문제였다.
압록강 국경에서 요동에 이르는 길에 동팔참(東八站)이 있었다. 명나라와의 첫 접경지역인 주롄청에서부터 시작해 탕참-책문-봉황성-송참-진이보-연산관-첨수참-요동이다. 그 중의 한 지점이 연산참이다. 명나라 땅으로 내륙 깊숙이 들어간 지점이다.
“연산까지 가서는 아니 됩니다.”
박은이 우려를 표명했다.
“의주목사 임귀년은 심온이 천거한 사람이오며 또 심온의 집 종이 일찍이 심온을 맞이하려고 의주로 갔사오니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체포해야 할 것입니다. 또 임귀년의 관직을 해임하여 변고를 일으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총제(摠制) 원민생이 대책을 내놓았다. 의주목사 임귀년은 심온 사람이니 불온한 마음을 먹고 변란을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온이 돌아오기 전 사전 조치하여 근심의 싹을 자르자는 것이다.
“임귀년의 관직을 파면하고 전 부윤(府尹) 우균으로 의주목사를 삼는다.”
즉시 지인(知印) 강권선을 의주로 보냈다. 한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천릿길은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으며 역마(驛馬)의 말발굽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칠흑 같은 밤에 압록강을 건너는 여인
12월 스무하루. 의주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삼각산의 형체도 보이지 않은 칠흑 같은 밤. 금군들이 철통같이 경계를 서고 있는 신갈파진을 피하여 압록강 가에 서 있는 여인이 있었다. 강을 건너려는 여인이다. 여인이지만 남자 옷차림으로 변복을 했다. 강을 건너면 내 나라 땅이 아니라 중국 땅이다. 그래도 강을 건너 중국 땅으로 건너야 하는 여인이었다.
1년 중 2개월 정도 동결되는 압록강은 꽁꽁 얼어 있었다. 신갈파진에서 주렌청(九連城)에 이르는 길은 사람들의 왕래도 잦았다. 눈을 피해 어두운 밤길을 건너야 하는 여인은 어디가 얼어 있고 어느 쪽에 살얼음이 있다는 것을 알 길이 없다. 얼음이 깨지면 구해줄 사람도 없는 죽음의 길이다. 그렇지만 망설일 수 없었다. 죽어도 가야 하는 길이었다.
“이대로 강을 건너시면 의주에서 금군에게 체포되옵니다. 어서 피하시라는 부부인 마님의 전갈이옵니다.”
한 나라의 영상이요 임금의 장인(國舅)으로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오던 심온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왕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 그리고 상왕 태종의 분에 넘치는 환송을 받으며 떠나온 것이 불과 두 달 남짓 전인데 도무지 믿기지 않은 일이었다.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날벼락이었다.
엎드려 읍소하던 여인이 얼굴을 들었다. 가녀린 두 뺨에 한 줄기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낯이 익은 여인이었다. 딸아이가 어렸을 때 데리고 있던 아이를 왕비가 되어 궁으로 들어가면서 데리고 들어갔던 아이였다.
‘그렇다면 이 아이가 전하는 말은 부인의 간청이며 중전의 부탁이 아닌가?’
한양은 위험하오, "어서 몸을 피하시오"
한양의 정세가 뭔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부인과 중전이 아이를 여기까지 보내 귀국을 돌리라는 얘기는 생명이 위태롭다는 얘기가 아닌가? 심온은 잠시 망설였다. 하늘을 쳐다봤다. 몇 점 흰 구름이 남동쪽으로 흐르고 한 떼의 기러기가 무리를 지어 날고 있었다.
"귀국을 거두고 몸을 피한다는 것은 소인배들이나 할 짓이다. 일국의 영상으로 그것도 왕비의 애비로서 당치않은 일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느니라."
심온은 귀국을 서둘렀다. 심온을 비롯한 사은사 일행이 의주를 향하여 출발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인의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지로 뛰어드는 대감마님을 바라보는 여인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사은사 일행이 의주에 닿았다. 명나라로 떠날 때 극진히 환송하던 의주목사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천거하여 의주목사가 된 임귀년이 보이지 않고 낯선 사람들이 보였다. 눈빛이 날카로운 장정들이었다. 임귀년이 파직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하옥되어 있다는 사실을 심온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어명이요. 대역죄인 심온은 오라를 받으시오."
태종의 특명을 받은 의금부 진무 이욱의 목소리였다. 대역죄라니 너무나 뜻밖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죄목이었다. 이렇게 체포된 심온은 수갑을 채우고 칼을 씌워 압송하라는 태종의 특명에 따라 함거에 실려오는 신세가 되었다. 갈 때는 영광의 행차길, 올 때는 죄인의 몸으로 압송되는 달구지 수레 길이었다.
갈 때는 영광의 길, 올 때는 달구지 길
압록강을 건넘과 동시에 의주에서 체포된 심온은 칼을 쓰고 함거에 실려 남행길에 올랐다. 갈 때는 가마 타고 가는 길이었는데 돌아오는 길은 덜컹거리는 소달구지 길이다. 산천은 의구한데 신세는 달라져 있었다. 심온이 체포되어 압송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태종은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했다.
“심온을 만난 종을 단단히 가두어 누설되지 않도록 하고 중요한 길목에 군사를 풀어 잡인의 접근을 차단하라. 심온에게 한양 소식을 알려서는 아니 된다.”
심온은 흔들리는 수레에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청운의 꿈을 안고 벼슬길에 나아가 부귀영화도 누렸다. 국구와 영의정에 오른 40여년 생애에 여한은 없지만 대역죄로 죽는다는 것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수레 속도가 빨라졌다. 달구지가 내리막길에 접어든 모양이다. 자신의 삶을 뒤돌아봤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열한 살 어린 나이에 감시(監試)에 합격하여 승승장구했지만 그래도 오르는 길은 힘들었다. 정상 언저리에서 하륜과 부딪쳤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 정상인가 싶었는데 벌써 내리막길이다. 예상치 못한 내리막길에선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천 길 벼랑 끝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내 비록 죄인의 몸으로 압송되고 있지만 한양에 가면 진실은 명명백백 가려질 터. 강상인과 대질하면 내가 억울하게 뒤집어쓰고 있는 누명은 벗겨지겠지.'
강상인과 자신의 아우 심정이 이미 처형된 것을 알지 못하는 심온은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흔들리는 함거에서 심온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임금의 장인이요,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내가 왜 죽어야 하나?'
이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현실을 간과한 것이 한이로다
아무리 생각해도 죽을 이유가 없었다. 그 순간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 만백성을 내려다보고 오로지 한 사람을 올려다보는 영광스러운 자리 영의정을 일컫는 말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말을 곱씹던 심온은 등줄기를 흐르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현실은 어떠한가? 창덕궁에 주상이 있고 수강궁에 상왕이 있지 않은가? 이인지하(二人之下) 만인지상이 아닌가? 그렇다면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는 말이 나에게 덫이었단 말인가?'
의주에서 체포된 심온이 평양을 통과했다는 평양발 장계가 수강궁에 접수되었다. 때를 같이 해 의주목사의 장계도 도착했다. 귀국하는 심온에게 종을 보내어 한양의 사정을 알리게 한 장본인이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안수산이었다는 것이다. 보고를 받은 태종은 안수산을 의금부에 하옥하고 신문하라 명했다.
“죄인 심온에게 서찰을 보내어 읽어본 후 불살라 버리라고 한 연유가 무엇이냐?”
“소인이 주상전하를 뫼시고 종묘에 제사지내는 예(禮)에 참여하여 상사(賞賜)를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였을 뿐입니다.”
“허튼 소리하지 마라. 서찰 말미에 강상인이 투옥되었다는 말을 쓰고 읽어본 후 불살라버리라고 한 것은 강상인의 대역모의를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
"모의라니요? 천부당만부당 합니다.”
“의주에 보낸 아이는 누구 집 아이냐?”
“장의동 대감댁 아이입니다.”
의금부에서 안수산 신문결과를 계본을 갖추어 태종에게 보고했다.
사돈마님의 연루에 난감해진 태종, ‘모두 석방하라’
“자서(姊壻)에게 서신을 보내는 것은 보통의 인정인데 더 이상 문제 삼을 것이 없다.”
안수산은 심온 처제의 지아비다. 동서지간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의주에 종을 보낸 사람은 안수산이 아니고 심온의 부인입니다. 심온의 아내를 신문(訊問)하기를 청합니다.” - <세종실록>
압록강까지 찾아가 심온을 만난 아이가 안수산집 아이가 아니라 부부인이 보낸 아이라는 것이다. 국모의 어머니를 신문하자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모두 석방하라.”
부부인을 신문한다는 것은 모양새가 썩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림이 좋지 않은 마당에 여자 아이와 안수산을 가두어둔다는 것도 명분이 없었다. 때문에 모두 석방하게 한 것이다.
12월 22일. 심온이 압송돼 한양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태종은 대사헌 허지, 병조참판 이명덕, 좌대언 성엄과 사간 정초에게 의금부에 나아가 심온을 신문하라 명했다. 강상인과 박습, 그리고 심정을 신문할 때처럼 필요한 답을 받아오라는 것이다. 심온에게 신문이 시작됐다. 심온은 왕비의 친정아버지이고 영의정이다. 그렇다고 봐주는 것은 없었다.
“군사는 마땅히 한 곳에서 나와야 된다고 네가 말했지?”
“그런 말 한 적이 없소이다.”
“강상인이 네가 말했다고 토설했는데 무슨 딴소리냐? 사실대로 이실직고 하렸다.”
“강상인을 대변(對辨)시켜 주시오.”
강상인이 처형된 것을 모르고 있는 심온은 강상인과의 대질심문을 요구했다. 강상인과 대질하면 결백에 자신이 있었다. 허나, 강상인은 이미 처형되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살아있어도 대질시켜줄 위인들이 아니다. 대질을 요구한 심온에게 돌아온 것은 심한 매질과 압슬형이었다.
심온에게 압슬형이 가해졌다. 압슬형에 이길 장사 없다. 영의정의 산 같은 위엄은 산산이 부서졌다. 자존심도 철저하게 짓밟혔고 체신도 무너졌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 심온이 순순히 모범 답안을 내놓기 시작했다.
“강상인이 아뢴 바와 모두 같습니다. 신은 무인(武人)인 까닭으로 병권을 홀로 잡아보자는 것뿐이고 함께 모의한 자는 강상인 등 여러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막을 내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신문도 고통도 마감하는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불과 4개월 전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할 때, 아들의 머리에 원유관을 씌워주며 문무백관들에게 천명한 말이 있다.
“주상이 아직 장년이 되기 전에는 군사(軍事)는 내가 친히 청단할 것이고 국가에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정부·육조로 하여금 함께 그 가부를 의논하게 할 것이며 나도 함께 의논하리라. 병조 당상은 나에게 시종하고 대인들은 주상전에 시종하라.”
태종의 전위교서에 어긋나는 자백을 받아냈으니 더 이상 신문할 필요가 없었다. 의금부에서 계본을 갖추어 신문 결과를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태종은 안수산을 예천에 유배 보내고 심온에게 자진하라 명했다. 왕비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참형이나 거열형을 행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예우해 준다는 것이다.
이튿날 진무 이양에게 심온을 수원으로 압송해 자진(自盡)하게 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말이 자진이지 사사(賜死)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하여 44년 심온의 생애가 막을 내렸다. 심온에게 체포령이 떨어진 것이 11월 25일, 목숨을 끊은 것이 12월 25일. 딱 한 달 간 벌어진 일이었다.
250여 년이 흐른 현종 때,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집어던진 이익은 <성호사설> '인사문'에 이렇게 기록했다.
‘민씨와 심씨 두 집안이 태종에게 흉화(凶禍)를 당했으나 대개 먼 장래를 생각함이 매우 깊었던 것이다.’
589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기 앞에 기죽은 임금과 신하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바람의 진원지 수강궁의 풍향계는 정중동(靜中動). 정지한 듯 조용했으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고 주상이 있는 창덕궁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특히 아버지를 잃은 왕비가 들어있는 중궁전은 초상집이었다. 또한 태풍급 돌풍을 맞은 장의동 임금의 처가는 쑥대밭이 되었다.
세종 역시 괴로웠다. 세종은 나라의 임금이다. 권력의 상징 용상에 앉아 있으면서도 왕비의 아버지가 죽어 나가는 것을 빤히 보면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무력감과 자괴감에 빠졌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맞설 수도 없었다. 이 때 세종 나이 스물 하나였다. 아들 셋을 두었으나 아직 어렸다.
호랑이 같은 아버지와 맞짱을 뜨려면 목숨을 내놓고 붙어야 한다. 허나 아버지와 붙어서 이긴 사람이 없다. 필패다.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승패가 눈에 보이는 싸움에 도전하는 것은 무모하다. 심온 처형 이후 세종은 부왕에게 바짝 엎드렸다. 수강궁으로 문안 인사드리러 가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으며 하루에 두 번 문안가는 날도 있었다.
심온을 처결한 태종은 이양달을 보내 장사지낼 땅을 잡아 주도록 하고 내관을 보내 장사를 돌보게 하는 한편 수원부에 명하여 후하게 장사지내주라 일렀다. 이양달은 하륜 이후 궁중 최고의 풍수였다. 살아있는 국구가 눈에 거슬렸지 죽은 사돈은 미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태종은 심온의 잔존세력 제거작업에 나섰다. 의주목사 임귀년을 파직하고 의금부에 투옥한 것을 필두로 상의원별감(尙衣院別監) 임군례, 김을현, 신이, 장합 등을 파면했다. 또한 심온 체포의 기밀을 누설한 조충좌를 눈감아준 심온의 종사관(從事官) 우승범, 하도, 송성립을 의금부에 하옥했다.
태종이 병조판서 조말생을 불렀다.
“수강궁에서 직접 군사의 조회를 받을 것이다.”
서릿발 같은 영이 떨어졌다. 궁에서 군사들의 열병식을 갖는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태종은 자신의 군권을 다시 한 번 만천하에 공표하고 싶었던 것이다. 상왕의 명에 따라 병조, 의금부, 훈련관(訓鍊觀), 군기감(軍器監)의 관원들이 빠짐없이 수강궁에 도열했다.
“황룡기를 높이 올려라.” 병조판서 조말생의 군령에 따라 수많은 황룡기가 하늘높이 올려졌다.
“상왕 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기수들은 하늘높이 기(旗)를 올렸고 기가 없는 관원들은 두 팔을 치켜 올렸다.
상왕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의식이 수강궁을 진동했다. 황룡기는 태종의 명에 따라 주상전의 청룡기와 차별화 된 군기(軍旗)였다. 이후 황색에 가까운 색옷과 백성들의 단령의(團領衣)를 금했다. 황색은 상왕을 상징하는 신령스러운 색이니 범접하지 말라는 뜻이다.
미리 알아서 기는 부서는 병조뿐만이 아니었다. 사헌부에서는 황색 비단으로 말의 안장을 꾸미는 것을 금지하게 하였다. 황색 유탄은 중견관리들에게도 떨어졌다. 예조좌랑(禮曹佐郞) 김영, 병조정랑(兵曹正郞) 김장, 좌랑(佐郞) 정인지가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명나라 사신이 가져온 고명을 맞을 때 황색 의장(儀仗)을 빼놓았기 때문이었다.
첫댓글 병판 조말생 상왕에 충성을 다하는 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