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마르 2,13-17
그때에 13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14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5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16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말과 글도 삶의 한 표현 방법이기 때문에 새로운 삶이 전제됨이 없이는 새로운 말과 글이 나올 수 없다. 비슷비슷한 되풀이는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신선감이 없는 말과 글은 그의 삶에 중심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 글은 법정 스님의 글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사실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습관적으로 하는 말과 글을 제 자신이 가장 많이 쓰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말을 하고 너무나 많은 글을 썼지만, 이것들 중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 남을 말과 글은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러면서 예수님이야말로 정말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직접 글로 남긴 것은 하나도 없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의 마음을 파고드니까요.
이렇게 살아 있는 말씀을 하실 수 있음은 단순히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타이틀 때문이 아닐 것입니다. 당신께서 직접 보여주셨던 사랑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지금까지도 새로운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당시의 소외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세리와 죄인들과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잡수십니다. 죄인과 함께 있는 것 자체로 부정하게 된다고 생각했던 당시의 풍속을 보았을 때, 예수님의 이 행동은 정말로 파격적인 것이었지요. 솔직히 예수님께서 뭐가 부족하겠습니까? 오히려 당신에게 커다란 스캔들을 가져올 수도 있는 행동이지만, 그들과 대화를 나누시고 음식을 함께 하십니다.
바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사랑에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도 똑같은 사랑으로 다가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멋진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주시지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큰 사랑으로 인해서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 되어 우리들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내 자신의 구태의연한 삶을 반대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타협의 말들도 벗어버려야 합니다. 대신 내 자신을 또다시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통해 새롭게 활동하시는 예수님의 자리를 만들어 드리는 것이며, 나의 말과 글에도 커다란 힘이 담기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과거의 원한과 시름만 갖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훨씬 행복해질 수 있다.(벤자민 프랭클린)
내 탓과 네 탓(작자 미상)
가톨릭의 고백송에는 '네 탓'이 없습니다
오직 '내 탓'뿐입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불가에서도 모든 것이 제 마음 탓이라 가르칩니다
'내 탓' 과 '네 탓'은
글자로는 불과 한 획의 차이밖에 없지만
그 품은 뜻은
별자리들 사이만큼이나 서로 멉니다
내 것과 네 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내 탓과 네 탓도 구별하지 못합니다
'네 탓'은 물론이고 '내 탓'도 모두 '네 탓'이 됩니다
내 책임은 항상 그럴 듯한 핑계 속에 숨어 버리고
언제나 남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길게 남습니다
사람이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이
"내가 잘못 했습니다" 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신뢰와 존경을 받을만한 인격자입니다
여는 야의 탓을, 야는 여의 탓을,
정치인은 언론 탓, 언론은 정치 탓,
사장은 사원 탓, 근로자는 사용자 탓,
어른들은 젊은이 탓, 젊은 세대는 늙은 세대 탓,
잘못 되면 조상 탓이라더니
너도나도 과거를 부라리며
과거 탓, 현재 탓을 하느라
나라의 역사를 온통 우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내 탓과 네 탓
글자 한 획이 무책임과 책임을,
거짓과 진실을,
비양심과 양심으로 나타나니
글자 한 획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격이 다르고 삶이 다른 것입니다
내 탓은 내 탓이요, 네 탓은 네 탓입니다
네 탓 속에서도 내 탓을 발견할 줄 아는 인격,
아름다운 마음, 올곧은 양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넘치는 '네 탓' 속에 '내 탓'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첫댓글 사랑은 연필로 쓰는게 아니라, 몸으로 쓰는 것~ㅎ; 살아생전, 문자 하나 남기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지난 이천년 동안 글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우리들 마음을 움직이고, 가슴을 울리시는 이유는 바로~사랑을 "몸으로 쓰셨기" 때문이지요~ㅎ! 신부님도 사랑 많이하시고 좋은 글도 많이 쓰시길~♡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잘 읽고 마음속에 간직합니다. 고맙습니다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타협의 말들도 벗어버려야 합니다. 대신 내 자신을 또다시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를 통해 새롭게 활동하시는 예수님의 자리를 만들어 드리는 것이며, 나의 말과 글에도 커다란 힘이 담기게 됩니다. 아멘. 신부님덕분에 기쁘고 행복합니다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
네탓이 아닌 내탓으로 돌릴수 있는 올곧은 양심으로 가득찬 국민들이라면 어려움속에서도 행복할텐데요~~
감사합니다~~
가슴에 새깁니다... 부디 내탓속에서 행복이 넘치는 생활 되소서.
오늘도 감사함으로~*^&^*
항상 중요한 말은 되풀이되고요. 전해지는 메세지는 한가지예요. 신부님께선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해서 늘 말씀해 주시잖아요. 그리고 그러한 삶을 보여주시고요. 언젠가 어떤 강의를 듣는데, 계속해서 한 단어만 들리는 거예요. 강의하시는 분도, 듣는 사람들도 나중엔 서로 웃을 수 밖에 없었지요. 그 말이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말이었으니까요^^ 너무 중요하다보니 강조에 강조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건 바로 '믿음'이라는 단어였어요. 신부님 글속에서 남는것은 예수님이 전해주신 '사랑'이예요~ 나중에 다른것은 생각나지 않더라도 '서로 사랑'하라 라는 말씀만은 기억하고 있을거예요. 항상 감사드립니다!
~빠`신부니~임~~!!~~빠`신부님의글은 범정스님말씀보다~더`쌩~쌩히 살아서 우리의가슴에 마음에 살아숨쉬고있답니다~~~물론 아버지말슴도에수님ㅁ말씀도 우리가슴에 세겨져있구요`~~저희들이 얼마나~빠`신부님을 사랑한다고요`~ㅎ.신부님 화이팅!!~~~
삶이 전제로 되지않았던 말.되풀이 되는 비슷한 말. 신선감이 없었던 말로 살아 왔음을 깨닫습니다.시간의 흐름속에 영원히 남을 말과 글을 쓸수 있도록 다짐을 해보며??? 신부님 ! 감사합니다.
내탓은내탓.네탓도 내탓이라 생각하는것은 오히려 지혜로움인걸,